사흘 뒤로 다가온 ‘추방 평가 위원회’의 공식 심사 일정.
탁상 위에 놓인 두꺼운 양장 가죽철을 내려다보는 내 미간이 좁다랗게 좁혀졌다. 벤이 건넨 최종 심사위원단 명단 초안의 가장 윗줄에는, 제국에서 가장 성가신 집착광공 두 놈의 이름이 떡하니 황금색 활자로 박혀 있었다. 황태자 카일 폰 로젠베르크, 그리고 성자 레이나르 엘 필레아스. 나를 제국 중앙에 묶어두다 못해 박제라도 하려는 미친놈들이 심사위원장과 부심사위원장을 나란히 처먹고 앉아 있었다.
“아가씨, 표정이 썩 좋지 않으십니다.”
벤이 은식기 받침대에 홍차 잔을 내려놓으며 나긋하게 속삭였다.
“좋을 리가 있겠어? 고양이한테 생선 가게 열쇠를 쥐여주는 것도 모자라, 아예 생선 대가리까지 발라달라고 상을 차려준 꼴이잖아. 이 미친 인간들이 기어코 내 무위도식 라이프를 가로막으려고 작정을 했네.”
나는 찻잔을 신경질적으로 들어 올렸다. 뜨거운 찻물이 출렁이며 자스민 향을 풍겼지만, 내 속에서 끓어오르는 탐욕과 분노의 열기에는 비할 바가 못 되었다.
내 목표는 오직 하나였다. 이 숨 막히는 아카데미와 제국 사교계에서 합법적이고 품위 있게 버림받는 것. 그리하여 제국 극서부의 황량한 변방, 카라칼 영지로 영구 유배를 당해 가문에서 꼬박꼬박 송금해 주는 연금이나 축내며 평생 숨만 쉬고 노는 ‘갓수’가 되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그 찬란한 은퇴 계획의 문턱에서, 나를 평생 감금하고 소유하겠다며 눈을 뒤집은 남주인공들이 심판관의 가면을 쓰고 길목을 가로막은 것이다.
“하지만 아가씨, 저희가 준비한 패 역시 만만치 않습니다.”
벤이 품 안에서 낡은 서류 뭉치와 함께 묵직한 물건 두 개를 꺼내 탁자 위에 나란히 올려놓았다.
하나는 세월의 때가 꼬질꼬질하게 묻은 녹슨 무쇠 열쇠였고, 다른 하나는 검은색 벨벳 천에 소중하게 싸인 날카로운 금속 파편이었다. 연무장에서 카일이 훈련 중에 부러뜨렸던 마검의 파편이었다.
“이거군.”
나는 턱을 괴고 녹슨 무쇠 열쇠를 손가락 끝으로 톡톡 건드렸다.
“네페르티 가문의 낡은 금고 열쇠인 줄로만 알았던 이 고철이, 사실은 황실의 비전 마도 장치와 결계를 통째로 해킹해 무력화할 수 있는 만능 우회 마스터키였다니. 참 우리 가문도 뒤로 구린 구석이 많아서 마음에 들어.”
“선대 가주님께서 탈세와 비상금 은닉을 위해 심혈을 기울여 제작하신 유산이지요. 지난번 심문실에서 발레르의 뇌물 수수 현장을 아카데미 전체에 생중계할 때 아주 훌륭하게 제 몫을 해내지 않았습니까.”
벤이 안경테를 치켜올리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이 마검 파편 역시 준비가 끝났습니다. 마리안 드 바이올렛이 아가씨께 마물 소환 및 결계 훼손 누명을 씌우려 했을 때 사용한 마물 유도 도구. 그 도구에 새겨진 특수 마법 문양과, 황태자 전하가 부러뜨린 이 마검에 깃든 마력 파동의 시그니처가 정확히 일치한다는 감정서를 확보했습니다.”
“완벽해. 마리안 그 삼류 여배우 가식쟁이가 내 머리 위에 올라타려 했던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해줘야지. 이 파편을 심사회에서 들이밀면, 내가 결계를 부순 게 아니라 마리안이 제 가문 광산의 마석을 이용해 사기를 쳤다는 게 만천하에 드러날 테니까.”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으로 감점 요인과 면죄부를 동시에 쥐었다. 내가 아카데미에 난동을 피운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공작에 대한 정당방위였음을 증명함과 동시에 ‘하지만 학내 질서를 어지럽히고 사교계의 품위를 손상시킨 죄’를 능동적으로 뒤집어쓰고 카라칼로 꺼져주는 그림이 완성되는 것이다.
그때, 머릿속에서 익숙한 이명이 징 하고 울렸다.
[시스템 알림: ‘정직의 장부’가 작동 대기 중입니다.] [경고: 목표 달성을 위해 대외적 위선이나 타협적 거짓말을 시도할 시, 뇌 수축성 편두통 유발 및 보유 자산(현 금화 4,200닢)에서 즉시 차감 패널티가 부과됩니다.]
‘알았어, 안 속여. 안 속인다고.’
나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이를 갈았다. 이 빌어먹을 장부 놈은 내가 0.1초라도 얌전하게 내숭을 떨려 하면 여지없이 해골을 쪼개놓으려 안달이었다. 오히려 잘됐다. 심사회에서 내숭 떨 것 없이, 내 이기적이고 속물적인 본심을 날것 그대로 뱉어주면 그만이니까.
나는 깃펜을 집어 들고 벤이 가져온 양식서 위에 서명하기 시작했다. 아카데미 최고 이사회에 공식 제출할 ‘카라칼 변경 영지 소유권 이관 소송 및 자산 조기 상속 신청서’였다. 내 손으로 직접 작성하는 합법적인 탈출 장치였다.
“제국 법전에 따르면, 아카데미에서 ‘품위 유지 의무 불이행’으로 영구 제명 처분을 받은 귀족 자제는 가문의 중앙 자산을 승계할 권리를 박탈당하는 대신, 변방의 미개발 영지 한 곳을 대물변제 형식으로 영구히 분할 받아 퇴출당한다고 되어 있지.”
“정확한 법리 해석이십니다, 아가씨.”
“중앙의 화려한 저택과 사치품은 필요 없어. 세금만 더럽게 많이 나오니까. 대신 카라칼 영지의 지적도를 봐.”
나는 벤이 도서관 구석에서 몰래 수집해 온 낡은 지적도를 펼쳤다. 거칠고 쓸쓸한 국경 지대의 초서 기록이 빼곡했다.
“황실 세무관들은 이곳이 몬스터나 출몰하는 불모지인 줄 알고 헐값에 넘기겠지. 하지만 아카데미 지하 서고의 비망록에 따르면, 이 영지의 지하 깊숙한 곳에는 제국 전체를 세 번은 사고도 남을 고순도 마석 광맥이 잠들어 있어. 난 거기서 나오는 마석을 캐내어 조세 피난처를 만들고 평생 돈방석 위에서 뒹굴 거야.”
나는 생각만 해도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마석 광산의 주인이 되어, 황금으로 만든 침대에 누워 하인들이 먹여주는 포도를 받아먹는 상상.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삶의 가치였다.
사각사각, 깃펜이 양질의 종이 위를 거침없이 미끄러졌다. 소송장 작성을 마친 나는 벤에게 서류를 건넸다.
“지금 즉시 이사회 행정처에 기습 제출해. 심사위원장 놈들이 손을 쓰기 전에 행정적으로 먼저 쐐기를 박아버려야 하니까.”
“예, 아가씨. 신속하게 처리하겠습니다.”
벤이 우아하게 허리를 숙이고 서류를 받아 챙겼다.
일을 끝마친 나는 침대 위로 풀썩 쓰러졌다. 그리고 탁자 위에 놓인 제국 최고급 쇼콜라 상자를 열어 가장 크고 진한 놈을 골라 입안에 쏙 집어넣었다. 쌉싸름하면서도 지독하게 달콤한 카카오의 풍미가 혀끝에서 부드럽게 녹아내렸다.
아, 이 가성비 최고의 사치. 남들은 사교계의 평판을 지키느라 밥도 제대로 못 먹고 가식적인 웃음을 지을 때, 나는 침대 뒹굴거리며 초콜릿이나 까먹고 있다. 이것이 바로 승리자의 삶이 아니고 무엇이랴.
“음, 역시 돈이 최고야. 카라칼로 가면 매일 아침을 이 쇼콜라로 시작해야지.”
행복감에 젖어 다리를 까닥거리고 있을 때였다. 기숙사 창밖에서 웅성거리는 나지막한 사내들의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흘러들어왔다.
사시사철 정숙해야 할 아카데미의 한밤중 기숙사 정원치고는 지나치게 소란스러웠다.
나는 귀찮음을 무릅쓰고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커튼을 살짝 들쳐 아래를 내려다본 순간, 내 눈동자가 경련하듯 떨렸다.
저 아래, 달빛이 푸르게 내리쬐는 정원 분수대 옆에 웬 익숙한 덩치 두 개가 서성거리고 있었다.
한 놈은 제국의 차기 지배자라는 황태자 카일이었고, 다른 한 놈은 신의 대리인이라는 성자 레이나르였다. 그 잘나고 고결하신 인간들이 야밤에 남의 기숙사 창밑에서 뭘 하고 있나 유심히 지켜보았더니, 기가 차다 못해 코가 막힐 지경이었다.
그들은 제국 정예 기사단의 단장급 인물들을 불러 모아놓고 은밀하게 황금 주머니를 건네고 있었다.
“……카라칼로 가는 경로는 세 군데다.”
카일이 특유의 오만하고도 통제욕에 찌든 목소리로 기사단장에게 명령조로 읊조리고 있었다.
“엘리샤가 어떤 경로를 택하든, 너희 기사단이 호위라는 명목 하에 그녀의 마차를 포위해라. 그리고 국경을 넘기 전에 마차 바퀴를 부러뜨리든, 몬스터가 나타났다고 난리를 치든 해서 황실 별궁으로 방향을 틀어. 그녀가 내 시야에서 벗어나는 일은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오호, 전하. 그런 거친 방법은 엘리샤 영애의 기분을 상하게 할 뿐입니다.”
옆에서 레이나르가 특유의 가식적이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끼어들었다. 하지만 그 눈빛만큼은 밤안개처럼 축축하고 집착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제가 미리 성기사단을 카라칼 국경 길목에 배치해 두었지요. 이단이 출몰했다는 성령의 계시를 핑계로 영지 전체를 성역으로 선포하고 전면 봉쇄할 예정입니다. 엘리샤는 결국 제 품 안에서 정화의 기도를 올리며 머무를 수밖에 없을 겁니다.”
이 미친 광공 놈들이 한밤중에 내 기숙사 밑에서 대놓고 납치 및 감금 모의를 하고 자빠진 것이다. 그것도 기사단 매수라는 권력 남용을 실시간으로 자행하면서.
나는 참지 못하고 창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쾅!
요란한 소리와 함께 창문이 열리자, 아래 서 있던 사내들의 시선이 일제히 위를 향했다. 달빛을 받아 은빛으로 빛나는 내 머리칼을 본 그들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환하게 밝아졌다. 마치 주인을 발견한 대형견들처럼 꼬리를 흔들 것 같은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엘리샤!”
카일이 반갑게 내 이름을 불렀고, 레이나르는 가슴에 손을 얹으며 구원의 여신을 바라보듯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창틀을 짚고 아래를 향해 목청을 높였다. 필터링 따위는 개나 줘버린 내 정직한 아가리가 0.1초 만에 불을 뿜었다.
“야! 이 미친 인간들아! 밤낮 가리지 않고 남의 집 창밑에서 스토커 짓거리 하는 것도 모자라, 이젠 대낮처럼 밝은 달밤에 기사단 매수 현장을 생중계하냐? 황태자라는 놈은 세금으로 굴러가는 황실 기사단을 제 개인 사조직처럼 부려 먹고 있고, 성자라는 놈은 신성모독 급 구라를 쳐가며 성기사단을 사설 경호업체로 쓰고 자빠졌네! 둘 다 대가리에 개념 대신 우동사리를 채워 넣었어?”
갑작스러운 팩트 폭행에 기사단장들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황태자와 성자의 비리를 면전에서, 그것도 저토록 상스럽고 정직한 언어로 까발리는 광경은 제국 역사상 전무후무했으리라.
하지만 카일과 레이나르의 반응은 일반적인 인간들과 궤를 달리했다.
카일은 뺨을 붉히며 기묘한 희열에 젖은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엘리샤…… 역시 너는 내 위선과 권력 남용을 가차 없이 지적해 주는 유일한 존재다. 네가 나를 꾸짖을 때마다 내 안의 더러운 통제욕이 정화되는 기분이 드는구나.”
“사고나 치지 말고 당장 꺼져, 이 예쁜 쓰레기 피지컬아! 분리수거장에 처넣어도 수거 거부당할 인간아!”
내가 빽 소리를 지르자, 카일은 오히려 가슴을 부여잡으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미친놈이 확실했다.
레이나르 역시 지지 않고 양손을 모으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아아, 엘리샤 영애. ‘신성모독 급 구라’라니요. 당신의 그 날카로운 통찰력은 언제 들어도 제 가식의 껍질을 산산조각 내는군요. 저 지저분한 성직자들의 정치판을 이토록 명쾌하게 꿰뚫어 보시다니, 역시 당신만이 제 영혼의 진정한 구원자이십니다.”
“구원자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종교 장사꾼처럼 썩은 미소 짓지 말고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져! 네 그 가식적인 얼굴을 볼 때마다 내 고귀한 쇼콜라가 체할 것 같으니까! 그리고 너희들, 내 카라칼 영지 근처에 얼씬거리기만 해봐. 기사단 매수한 장부 싹 다 털어서 황실 감사원에 찔러버릴 테니까!”
나는 숨을 헐떡이며 창문을 거칠게 닫아버렸다.
커튼을 치고 침대에 다시 눕자, 뒷목이 뻐근하게 당겨왔다. 저 미친놈들의 집착 필터는 대체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 걸까. 험담을 쏟아내고 면전에 대고 쓰레기라 욕을 해도, 그것을 ‘자아성찰의 기회’이자 ‘참된 구원의 회초리’로 받아들이며 호감도를 폭발시키고 있었다.
“정말 가성비 안 나오는 인간들이야.”
나는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썼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내게는 벤이 준비한 완벽한 자산 소송장과 마검 파편, 그리고 황실 결계를 무력화할 무쇠 열쇠가 있으니까.
그리고 또 하나, 내게는 결정적인 정보가 있었다.
낮에 벤을 통해 입수한 제국 황실 내부의 극비 문서에 따르면, 황실 정부 역시 카라칼 변경 지대의 심상치 않은 마력 반응을 감지하고 그곳의 마석 광맥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다는 실태였다. 황실은 이번 추방 심사회를 기회 삼아, 내 가문인 네페르티 가문의 영지 소유권을 완전히 박탈하고 카라칼을 황실 직할령으로 귀속시키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감히 내 노후 자금을 탐내?’
이불 속에서 내 눈이 번뜩였다.
황실의 탐욕스러운 세무관들과 감사관들이 내 마석 광산을 통째로 삼키려 든다면, 나는 그들의 탐욕을 역으로 이용해 줄 생각이었다. 그들이 카라칼을 황폐하고 가치 없는 불모지로 믿게끔 사기 지도를 들이밀고, 동시에 그들의 위선적인 행정 절차를 내 정직한 독설로 찢어발겨 아주 헐값에 영구 소유권을 뜯어내리라.
“어디 내 은퇴를 방해해 봐라. 황실이든, 황태자든, 성자든 간에 내 앞길을 막는 것들은 전부 뼈와 살을 분리해 줄 테니까.”
나는 마지막 쇼콜라 한 알을 입에 넣고 오독오독 씹었다. 단맛이 뇌를 자극하며 차분한 투지를 불태웠다.
시간은 흘러, 마침내 운명의 사흘 뒤 아침이 밝았다.
제국 왕립 루나 아카데미의 중심에 위치한 최고 회의장.
평소에는 거물급 대귀족들의 회담이나 황실의 중대사만을 다루는 그 장엄한 장소의 거대한 철문이, 웅장한 마찰음을 내며 양옆으로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끼이이이익—!
회의장 내부의 높은 천장으로부터 쏟아지는 차가운 마법 조명 아래, 제국 황실 감사관 수십 명과 법관들이 붉은 법복을 입고 엄숙한 표정으로 심판대에 늘어서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일제히 문가에 선 나를 향해 쏟아졌다. 숨이 막힐 듯한 압박감과 위용이 회의장 전체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그 삼엄한 심판대의 정중앙, 가장 높은 의자에 앉아 있는 황태자 카일과 성자 레이나르의 눈빛이 기묘한 안광을 뿜어내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드레스 자락을 가볍게 쥐어 잡으며 입술 끝을 쓸어 올렸다.
자, 드디어 무대의 막이 올랐다. 내 완벽한 영광의 추방을 위한, 가차 없는 폭로전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