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페르티 가문의 엘리샤 영애는 황실과 아카데미의 엄격한 규율을 무시하고, 연회장에서 무단으로 황실 마도 결계를 우회 및 해킹하여 마력을 조작하였으며, 사교계의 질서를 심각하게 어지럽혔다! 이에 엘리샤 폰 네페르티 영애의 반역성 행동을 즉시 ‘추방 평가 위원회’ 공식 안건으로 회부하며, 즉각적인 신문을 명령하는바이다!”
붉은 망토를 휘날리며 선언한 특별 전령의 목소리가 샹들리에 불빛 아래로 무겁게 내리앉았다. 사방을 가득 채운 귀족 자제들이 한순간 숨을 죽였다.
그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로 쏠렸다. 방금 전까지 마리안의 추악한 음모를 낱낱이 파헤치고 사교계의 영웅이라도 된 양 떠받들어지던 기류가 순식간에 반역자 신문이라는 극단적인 방향으로 급선회한 탓이었다.
하지만 내 심장은 공포가 아닌, 터져 나오려는 환희로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추방 평가 위원회!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내 머릿속 은퇴 계획의 최종 장이 마침내 그 화려한 막을 올린 것이다.
옆에 서 있던 황태자 카일의 전신에서 무시무시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의 손가락이 허리춤에 찬 검자루를 지그시 움켜쥐었다. 가죽 장갑이 마찰하며 끄드득하는 위협적인 소리를 냈다.
“총장의 전령 따위가 감히 내 눈앞에서 누구를 연행하겠다고 짖어대는 것이냐. 그 가당치 않은 양피지를 당장 찢어발기기 전에 그 더러운 입을 다무는 것이 좋을 것이다.”
“황태자 전하의 말씀이 구구절절 옳으십니다.”
성자 레이나르 역시 평소의 온화한 미소를 완전히 지워버린 채, 차가운 눈빛으로 전령들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손끝에서 일렁이는 신성력은 치유의 온기가 아니라, 당장이라도 상대의 영혼을 정화해 버릴 듯한 서늘한 백색 광염이었다.
“감히 신의 눈길이 머무는 이곳에서, 가장 고결하고 진실한 영애를 죄인 취급하다니요. 아카데미가 드디어 미쳐 돌아가는 모양입니다. 제가 직접 총장실로 가 그 썩은 머리를 깨끗하게 비워드려야 할 것 같군요.”
두 남주가 뿜어내는 살벌한 기세에 금빛 갑옷을 입은 전령들이 사시나무 떨듯 떨기 시작했다. 그들의 이마에서 식은땀방울이 툭툭 떨어져 대리석 바닥을 적셨다.
‘아니, 이 미친 광공들아! 제발 숟가락 좀 얹지 마!’
나의 완벽한 조기 은퇴와 가문 연금 수령 계획에 이 두 녀석은 그야말로 최대의 걸림돌이었다. 그들이 여기서 칼바람을 일으켜 상황을 무마하면, 내 아름다운 카라칼 영지행 편도 티켓은 공중분해 되고 만다.
나는 심호흡을 크게 한 뒤, 품 안에서 두 가지 물건을 꺼내 전령들의 코앞으로 들이밀었다.
손때가 묻어 거무죽죽하게 녹이 슨 무쇠 열쇠와, 날카롭고 푸르스름한 기운을 뿜어내는 마검의 파편이었다.
“그 가식적인 아카데미 총장 대가리에게 전하세요. 결계를 해킹했냐고 물으신다면, 아주 기쁜 마음으로 ‘그렇다’라고 답해 주겠다고요.”
대연회장에 모인 모두의 시선이 내 손바닥 위의 투박한 무쇠 열쇠로 향했다.
“이게 뭔지 아십니까? 네페르티 가문의 낡은 금고 열쇠랍시고 집사 벤이 건네줬던 물건인데, 알고 보니 황실의 온갖 마도 장치를 강제로 우회해 정지시키는 만능 마스터키더군요. 심문실에서 당신들이 마리안의 뇌물을 처먹고 나를 불법 감금했을 때, 이 열쇠 덕분에 결계를 무력화하고 내부 상황을 광장에 아주 시원하게 생중계할 수 있었습니다.”
“에, 엘리샤 영애! 그것은 엄연한 황실 보안법 위반……!”
전령이 당황해 말을 더듬자, 나는 코방귀를 뀌며 마검의 파편을 흔들어 보였다.
“그리고 질서를 어지럽혔다고요? 황태자 전하께서 연무장에서 훈련 중에 친히 부러뜨리셨던 이 마검 파편을 내가 왜 굳이 주워서 보관하고 있었겠습니까? 마리안이 연회장에 소환한 마물 유도 도구의 마력 문양이, 이 부러진 마검의 파편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과학적인 증거를 대기 위해서였습니다! 썩은 고름을 터트려 청소한 것이 사교계의 질서를 어지럽힌 죄라면, 기꺼이 그 죄를 달게 받겠습니다.”
내 머릿속에서 강제적인 진실을 출력하는 ‘정직의 장부’가 기분 좋은 진동을 울렸다.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오직 내 이기적이고 속물적인 본심과 팩트만을 담은 독설이 거침없이 쏟아져 나왔다.
“이 좁아터지고 가식적인 아카데미에서 하루라도 더 숨을 쉬는 것 자체가 제 고결한 폐포에 대한 모독입니다. 허구한 날 음모나 꾸미고, 뇌물이나 받아 처먹고, 위선 가득한 미소나 지어대는 이따위 소굴에 내가 왜 내 아까운 청춘과 네페르티 가문의 학비를 낭비해야 합니까? 당장 그 잘난 추방 평가 위원회를 열어서 나를 저 멀리 국경 밖 카라칼 영지로 쫓아내 주십시오! 제발 부탁이니 당장 추방해 달란 말입니다!”
대연회장이 찬물을 끼얹은 듯 괴괴한 침묵에 휩싸였다.
보통 추방이라는 단어는 대귀족 가문의 자제들에게 사회적 사망 선고나 다름없었다. 가문의 수치로 낙인찍혀 척박한 변방으로 유배당하는 형벌을, 이토록 당당하고 간절하게 요구하는 영애는 역사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 눈앞의 두 남주는 내 말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해석하기 시작했다.
카일의 붉은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자책과 깊은 절망, 그리고 한층 더 깊어진 집착의 광기였다.
“엘리샤…… 그대는 이 제국의 썩은 면면들에 완전히 환멸을 느낀 것이로군. 내 가문과 내 지위, 내가 가진 이 모든 권력이 그대에게는 그저 가식적이고 더러운 족쇄로 보였던 것이다.”
그가 한 걸음 다가와 내 소맷자락을 조심스럽게 움켜쥐었다. 제국 최강의 검사이자 차기 황제인 남자가, 마치 버려질까 두려워하는 유기견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가지 마라, 엘리샤. 그대가 혐오하는 이 썩은 사교계를 내가 전부 갈아엎겠다. 황실의 법도가 그대를 옭아맨다면, 내가 그 법을 새로 쓰겠다. 그러니 내 곁을 떠나 그 외롭고 척박한 카라칼로 가겠다는 말은 하지 마라.”
옆에 있던 레이나르의 반응은 한술 더 떴다. 그의 눈가에 눈물이 맺힐 듯 촉촉한 광채가 돌았다.
“아아…… 진실을 수호하기 위해 스스로 광야로 떠나는 성녀의 걸음걸이로군요. 속세의 위선과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정결한 영혼을 지키기 위해 고독한 구도의 길을 택하시다니. 엘리샤 영애, 당신의 그 깊고 숭고한 뜻을 미처 헤아리지 못해 이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습니다.”
그 역시 내 다른 쪽 소맷자락을 낚아채듯 쥐고는 애절하게 매달렸다.
“혼자 가게 두지 않겠습니다. 당신이 변방의 얼어붙은 땅으로 가시겠다면, 저 역시 성국의 직위를 내려놓고 당신의 발치를 지키는 종이 되어 동행하겠습니다. 그곳에 당신만을 위한 성전을 세우고, 당신의 정직한 목소리를 매일 아침 예배로 받들겠습니다.”
‘아니, 제발 좀 꺼지라고요, 이 미친놈들아!’
나는 한껏 구겨진 얼굴로 내 옷자락을 쥔 그들의 손가락을 하나씩 강제로 떼어냈다. 비단 소매가 구겨지는 모습을 보며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이거 놓으세요. 이 드레스가 얼마짜리인 줄 아십니까? 당신들의 그 뜨끈하고 축축한 손바닥 땀 때문에 원단에 얼룩이라도 지면 감가상각비 청구할 테니까 당장 꺼져요. 그리고 무슨 성녀고 구도의 길입니까? 나는 그냥 침대에 누워서 하루 종일 귤이나 까먹고, 가문에서 나오는 꼬박꼬박 채워지는 연금으로 평생 숨만 쉬며 살고 싶어서 가는 겁니다! 당신들이 쫓아오면 내 완벽한 백수 플랜에 심각한 차질이 생기니까, 제발 내 반경 10킬로미터 이내로 접근하지 마세요!”
내 냉담하고 이기적인 가성비 폭언에 귀족 자제들이 웅성거렸다.
“세상에…… 엘리샤 영애는 자신의 숭고한 희생을 저토록 세속적인 욕망으로 포장해 우리를 안심시키려 하시는구나.”
“자신의 고귀한 행보가 황태자 전하와 성자 전하께 짐이 될까 봐 일부러 악역을 자처하시는 거야! 저토록 눈부시게 정직한 영혼이라니!”
“과연 네페르티 가문의 진정한 보석이십니다!”
‘아니야, 이 멍청이들아! 진짜로 그냥 놀고먹고 싶어서 그런 거라고!’
내 속 타는 심정과 상관없이, 내 머릿속에서 경쾌한 알림음이 연달아 울려 퍼졌다.
[띠링! ‘정직의 장부’가 위선으로 가득 찬 아카데미의 껍질을 한 겹 더 벗겨냈습니다.] [학내 비리 폭로 및 진실 출력 성공!] [성취 포인트 500점을 획득하였습니다.] [추방 지수가 20% 상승합니다!] [현재 추방 지수: 80%] [보유 자산 방어 성공 및 위선 폭로 보상으로 금화 1,000닢이 비밀 금고로 즉시 이체되었습니다.]
‘오오, 80%! 드디어 80% 돌파다!’
내 비밀 금고의 묵직해지는 무게감이 느껴지자, 조금 전까지 나를 괴롭히던 짜증이 봄눈 녹듯 사라졌다. 역시 돈과 은퇴 계획의 진전만큼 확실한 치료제는 없었다.
나는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여전히 바들바들 떨고 있는 전령을 내려다보았다. 내 기세에 완전히 압도당한 전령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만 벙긋거리고 있었다.
“자, 들었으면 어서 가서 보고하세요. 내일이라도 당장 그 잘난 위원회를 열라고 말입니다. 나는 준비가 끝났으니까.”
나는 우아하게 턱을 치켜세우며, 대연회장의 귀족 무리를 헤치고 도도하게 걸어 나갔다. 등 뒤에서 카일과 레이나르가 내 이름을 애타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 * *
사흘 뒤, 내 개인 대기실.
똑똑.
단정하고 규칙적인 노크 소리와 함께 수석 집사 벤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은쟁반 위에 올려진 두꺼운 양피지 서류 봉투가 들려 있었다.
“아가씨, 요청하신 아카데미 공식 서한과 함께 흥미로운 정보들을 수집해 왔습니다.”
벤은 언제나처럼 소리 없는 미소를 지으며 서류를 내 탁상 위에 정돈해 놓았다. 나는 소파에 깊숙이 묻혀 누운 채로 그를 향해 손짓했다.
“수고했어, 벤. 그래, 드디어 그 귀찮은 노인네들이 날짜를 잡았나 보네?”
“예, 아가씨. ‘추방 평가 위원회’의 공식 심사 일정이 정확히 사흘 뒤 오전으로 확정되었습니다.”
벤의 목소리는 지극히 차분했으나, 그 눈빛에는 기묘한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더불어, 아가씨의 카라칼 영지 입성을 위한 자산 포트폴리오 다각화 작업 역시 아주 순조롭습니다. 변방의 초서 기록에 따르면, 카라칼 영지의 낡은 지적도 속에 숨겨진 마석 광맥의 가치는 제국 중앙에서 평가하는 것보다 최소 백 배 이상 달할 것으로 추정됩니다. 아가씨께서 안전하게 추방당하시는 순간, 저희는 역대 가장 부유한 은둔자가 될 것입니다.”
“완벽해. 아주 가슴이 웅장해지는 라인업이네.”
나는 만족감에 겨워 침을 꿀꺽 삼켰다. 드디어 내 백수 라이프가 눈앞에 다가왔다.
하지만 벤이 건넨 두 번째 종이를 확인한 순간, 내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것은 이번 추방 심사 위원회를 주관할 심사 위원들의 명단 초안이었다.
“……벤, 이게 뭐야?”
“이번 심사 위원회의 위원단 구성 초안입니다. 아가씨의 행보가 워낙 제국 전역을 뒤흔든 탓에, 심사위원들의 면면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내가 받아 든 명단의 가장 첫머리에는 굵은 금박 글씨로 익숙한 이름들이 적혀 있었다.
[1. 심사위원장: 황태자 카일 폰 로젠베르크] [2. 부심사위원장: 성자 레이나르 엘 필레아스] [3. 특별 참관인: 네페르티 가문 가주 및 사교계 고위 귀족 연합 대표단]
“…….”
나는 멍하니 명단 초안을 바라보았다.
추방을 결정하는 심사위원회의 대가리들이, 나를 절대로 보내지 않겠다고 울고불고 매달리던 그 집착광공 두 놈이라니. 이 무슨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고, 도둑놈에게 금고 열쇠를 쥐여주는 격이란 말인가.
“아가씨, 아무래도 두 분께서 아가씨를 제국 중앙에 어떻게든 묶어두기 위해, 심사위원단 자체를 장악하신 모양입니다. 이번 심사회는 아주 흥미진진한 전개가 되겠군요.”
벤이 안경을 지켜올리며 잔잔하게 웃었다.
그의 웃음 너머로, 사흘 뒤 내 은퇴 계획을 가로막을 거대한 폭풍우의 서막이 선명하게 그려지고 있었다. 내 이마에 핏대가 가늘게 솟구쳤다.
‘이 미친 집착 덩어리들이 끝까지 내 은퇴를 방해해?’
나는 명단 초안을 손아귀에 꽉 쥐며, 입술 끝을 비틀어 올렸다.
좋다. 어디 누가 이기나 끝까지 가보자고. 내 정직한 가성비 독설의 매운맛을 아직 덜 본 모양인데, 심사회 날 아주 뼈와 살을 분리해 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