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서, 제국을 위협하는 진짜 악녀의 정체와…… 그녀가 감추고 있는 추악한 진실을 모두에게 밝히겠습니다!”
마리안 드 바이올렛의 앙칼진 목소리가 대연회장의 높은 천장을 때리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하얀 드레스를 입고 단상 위에 선 그녀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가련하게 떨고 있었지만, 치켜든 눈동자만큼은 흉포한 독기를 품고 있었다. 슬픈 눈망울 아래로 비치는 비장한 광기. 그녀의 손에 들린 붉은 수정이 기괴한 붉은 광채를 뿜어내며 연회장의 화려한 샹들리에 불빛을 집어삼켰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파도치듯 나를 향해 쏟아졌다.
수백 개의 눈동자가 뿜어내는 수군거림과 의혹의 시선 속에서, 나는 조용히 내 드레스 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얇은 실크 천 너머로 묵직하고 차가운 감촉이 손가락 끝에 닿았다.
수석 집사 벤이 가문의 낡은 금고 열쇠라며 쥐여주었던 녹슨 무쇠 열쇠였다.
‘무쇠 열쇠가 아니라 황실 마도 결제 우회 마스터키였을 줄이야.’
그냥 잡동사니인 줄 알고 쓰레기통에 처박지 않은 과거의 나 자신에게 격렬한 찬사를 보내고 싶었다. 주머니 속의 열쇠는 마리안이 붉은 수정을 들어 올린 순간부터 미친 듯이 진동하며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 시스템 알림: 주변 10미터 이내에 비정상적인 마도 흔적 감지. 속성: 금기 마법(마물 유인). ] [ '정직의 장부'가 작동합니다. 감지된 마식(魔式)을 분석하여 우회 경로를 확보합니다. ]
머릿속에서 울리는 기계음과 함께, 내 시야에 반투명한 푸른색 마력 선들이 얽히고설키며 그려지기 시작했다. 마리안의 수정에서 뻗어 나온 붉은 독기가 연회장 외벽을 타고 흐르며 마물을 불러들이기 위한 의식을 조용히 치르고 있었다.
저 미친 여주인공은 사교계에서 매장당할 위기에 처하자 아예 판을 깨버릴 생각인 게 분명했다. 연회장에 마물을 소환해 대혼란을 일으키고, 그 혐의를 나에게 뒤집어씌워 사회적, 아니 물리적 파멸을 선물하겠다는 아주 삼류 악당다운 발상이었다.
“엘리샤 폰 네페르티 영애!”
마리안이 단상에서 나를 가리키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지난번 검술 연무장에서 일어났던 끔찍한 마물 습격 사건을 기억하실 겁니다! 당시 경비대의 조사로는 야생 마물의 단순 난입으로 결론지어졌지만, 그것은 모두 거짓입니다! 진짜 배후는 바로 저기 서 있는 엘리샤 영애입니다!”
“허억……!”
“네페르티 영애가 마물을?”
연회장이 순식간에 벌집을 쑤신 것처럼 발칵 뒤집혔다. 귀족들은 나와 마리안을 번갈아 바라보며 저마다 부채로 입을 가리고 속닥거렸다.
내 옆에 서 있던 황태자 카일의 전신에서 서슬 퍼런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의 아름다운 얼굴이 차갑게 굳어지며 금방이라도 마리안의 목을 베어 넘길 듯 검자루를 꽉 쥐었다.
“마리안 드 바이올렛. 황실을 모독한 죄가 얼마나 무거운지 모르는 모양이군. 감히 내 귀빈에게 무근본의 모함을 씌우다니.”
카일의 낮고 으르렁거리는 목소리에 단상 위의 마리안이 움찔했다. 하지만 그녀는 뒤를 받쳐주는 누군가가 있는지 이를 악물고 버텼다.
“전하! 속으시는 겁니다! 저 여자는 위선자입니다! 제 손에 들린 이 ‘진실의 마수정’은 마물의 마력 파동을 기억하고 찾아내는 마도구입니다. 연무장 사건 당시 현장에서 수거된 마물의 혈흔과 결계 훼손 흔적이, 지금 엘리샤 영애의 마력 파동과 일치한다고 가리키고 있습니다!”
마리안이 수정을 내밀자, 수정에서 뿜어져 나온 붉은 빛줄기가 허공을 가르고 날아와 내 발밑을 비추었다. 붉은 낙인이 찍힌 듯한 연출에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더욱 커졌다.
“정말인가 보군.”
“황태자 전하마저 속이다니, 역시 네페르티 가문의 악녀답군.”
레이나르 역시 가식적인 미소를 완전히 지워버린 채, 차가운 눈빛으로 마리안을 응시했다. 그의 손끝에서 신성 마력의 은빛 실핏줄이 번뜩였다.
“성스러운 아카데미의 대연회장에서 이토록 난잡한 거짓 소동을 벌이다니. 바이올렛 영애, 그대의 그 눈물이 신의 이름을 더럽히고 있음을 모릅니까?”
남주들이 내 앞을 가로막으며 보호하려 들자,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아니, 제발 가만히 좀 있어 봐. 니들이 나서면 내 추방 계획이 꼬인다고.’
내가 직접 나서서 저 삼류 연출을 박살 내고, 겸사겸사 학우 난동죄나 소란죄를 뒤집어쓰고 안전하게 카라칼 영지로 쫓겨나야 한단 말이다. 나는 카일의 소맷자락을 툭툭 쳤다.
“전하, 비켜 서 주시겠습니까? 그 잘생긴 피지컬로 시야를 가리시니 저 단상 위의 삼류 신파극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엘리샤…… 그대는 이 상황에서도 나를 걱정하여…….”
카일의 눈동자가 다시 소유욕과 감동으로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대체 어떤 필터를 거치면 내 귀찮음 섞인 독설이 걱정으로 치환되는지 의학적으로 규명해 보고 싶었으나, 지금은 시간이 없었다.
바로 그때, 연회장의 육중한 문이 거칠게 열리며 익숙한 실루엣이 걸어 들어왔다.
단정한 연미복을 입고, 머리칼 하나 흐트러짐 없이 우아하게 걸어 들어오는 중년의 사내. 네페르티 가문의 수석 집사, 벤이었다. 그의 손에는 융단으로 정성스럽게 감싼 길쭉한 목제 상자가 들려 있었다.
“무엄하다! 감히 황실 연회에 집사 따위가 허락도 없이 난입하다니!”
마리안 측의 귀족이 소리쳤으나, 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내게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아가씨, 분부하신 물건을 가져왔습니다. 사유 재산 처분 대장에 기록하기 전, 마지막으로 확인이 필요할 듯하여 결례를 무릅쓰고 대령했습니다.”
“고마워, 벤. 타이밍이 아주 예술이네.”
나는 벤이 내민 목제 상자의 뚜껑을 천천히 열었다. 상자 안에는 시커멓게 그을리고 부러진, 기괴한 마력이 흘러나오는 검붉은 마검의 파편이 고이 누워 있었다.
원작에서 카일이 연무장에서 날뛰는 마물을 베어 넘길 때 부러뜨렸던, 그리고 내가 바닥에서 세탁비와 고철 값이라도 건지겠다고 주워서 벤에게 처분하라고 던져주었던 바로 그 마검의 잔해였다.
“저건……?”
카일이 자신의 부러진 마검을 알아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주머니 속의 녹슨 무쇠 열쇠를 꽉 쥐었다. 열쇠를 매개로 내 마력을 주입하자, 연회장 구석구석에 설치된 황실 마도 장치들이 일제히 영문도 모른 채 작동하기 시작했다. 무쇠 열쇠의 우회 기능이 연회장 중앙에 떠 있는 대형 마도 스크린을 강제로 제어한 것이다.
위잉—!
스크린 위에 마검 파편에 새겨진 미세한 마도 각식과, 마리안이 들고 있는 붉은 수정의 각식이 거대하게 확대되어 투사되었다. 두 이미지 위에 붉은색과 푸른색의 선이 겹쳐지더니, 이내 완벽하게 일치한다는 마도적 ‘동일성 판정’ 메시지가 허공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어머나, 이게 무슨 일일까요?”
나는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단상 위의 마리안을 응시했다.
“마리안 영애가 들고 있는 저 ‘진실의 수정’과, 전하께서 연무장에서 부러뜨린 마검에 새겨진 마물 유도 각인이 완벽하게 일치하네요? 심지어 저 각인의 서명은…… 제국의 소유권 대장에 따르면 오직 ‘바이올렛 백작가’의 독점 마석 광산에서 출토되는 원석에만 새길 수 있는 고유 사설 인장인데 말이죠.”
연회장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마리안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가셨다. 그녀의 하얗게 질린 입술이 보기 흉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이, 이건…… 이건 말도 안 돼요! 누군가 제 수정을 바꿔치기한 거예요!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모른다고요?”
나는 천천히 단상을 향해 걸어갔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드레스 자락이 사각거리는 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 시스템 알림: 적대자의 위선적 변명이 감지되었습니다. ] [ '정직의 장부' 패널티 규칙 활성화. 가식적인 타협이나 부드러운 해명을 시도할 시, 두통과 함께 보유 자산(금화 100닢)이 즉시 차감됩니다. ] [ 오직 100%의 '뼈 때리는 진실'만을 전해야 자산을 방어할 수 있습니다. ]
내 아까운 금화 100닢이 날아가는 꼴을 보느니, 저 가식 덩어리의 대가리를 말로 쪼개놓는 편이 백번 이득이었다. 내 속물적인 뇌세포들이 가성비를 계산하며 격렬하게 활성화되었다.
“마리안 영애.”
나는 단상 바로 밑에 멈춰 서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내 눈빛에는 한 치의 가식도, 자비도 없었다. 오직 지독한 귀찮음과 팩트 폭행의 의지만이 가득했다.
“거짓말을 할 거면 최소한 시장 바닥 삼류 사기꾼보다 성의는 보여야지, 이게 무슨 개뼉다귀 같은 수작이야? 네 머리로 짠 계획치고는 너무 조잡해서 내 탈모 걱정이 더 앞설 지경이거든?”
“뭐, 뭐라고요……?”
“눈물 흘릴 시간에 연기 학원이나 더 다니지 그랬어. 닭똥 같은 눈물만 흘리면 멍청한 사내놈들이 다 네 편을 들어줄 줄 알았니? 연기가 너무 삼류라 얼굴 근육이 다 굳어 있는 게 여기까지 보여. 네가 지난달에 약혼자 있는 레온 남백작이랑 밤새 밀회하면서 흘렸던 땀방울이 이것보다 훨씬 더 진정성 있겠다.”
“흐윽! 엘리샤 영애, 아무리 저를 모함하고 싶으셔도 그런 추잡한 유언비어를……!”
“유언비어? 네 몸에서 풍기는 그 독특한 ‘촉매 가루’ 냄새는 어쩔 건데? 마물을 유인하느라 온몸에 쳐바른 그 가루, 레온 남백작의 서재 카펫에도 아주 골고루 뿌려져 있었다고 하더라. 네가 쓰러지는 내숭을 떨 때마다 사교계 바닥에 날리는 그 가루 때문에 내 드레스 세탁비가 더 나오게 생겼어. 가성비 안 맞게 왜 남의 행사에 와서 흙탕물을 뿌리고 지랄이야?”
내 거침없는 폭언에 연회장에 있던 부인들과 영애들이 경악하며 마리안을 바라보았다.
“레온 남백작과 밀회라니……!”
“어머, 지난번 그 촉매 가루 소문이 진짜였나 봐!”
마리안은 완전히 이성을 잃고 바들바들 떨었다.
“이, 이 악독한 년이……! 네가 감히 나를……!”
“악독한 건 뇌를 장식품으로 들고 다니면서 황실 마도 결제가 작동하는 아카데미에서 이런 허접한 자작극을 벌인 네 지능이지. 너 하나 때문에 황태자 전하의 아까운 검이 부러졌고, 아카데미의 안전지수가 하락해서 내 은퇴 포트폴리오가 흔들렸어. 이 손해를 바이올렛 백작가에서 어떻게 배상할 건데? 파산 신청서에 내가 직접 서명해 줄까?”
나는 차갑게 비웃으며 주머니 속 무쇠 열쇠를 한 번 더 비틀었다.
스마트폰 화면을 넘기듯, 대형 스크린에 마리안 드 바이올렛의 가문이 최근 불법 마석 거래를 통해 금기 마물을 수입한 회계 장부의 일부와 마도 거래 내역이 우회된 채널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벤이 미리 입수해 둔, 바이올렛 가문의 치명적인 약점들이었다.
“자, 이제 누가 진짜 제국을 위협하는 악녀인지 사교계 전체가 알게 되었네.”
마리안은 더는 버티지 못하고 다리에 힘이 풀린 듯 단상 위에서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가 쥐고 있던 붉은 수정이 바닥으로 떨어져 쨍그랑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이 났다.
그녀의 눈동자는 공포와 절망으로 가득 차 있었고, 사교계에서 쌓아 올린 가련하고 순결한 이미지는 완전히 진흙탕 속에 처박혀 기어 다니는 꼴이 되었다.
[ 시스템 알림: 위선 폭로 성공! ] [ 성취 포인트 300점을 획득하였습니다. ] [ 추방 지수가 15% 상승하여 총 60%가 되었습니다. ]
‘좋아, 아주 순조롭군.’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마리안을 밟아버린 사이다의 쾌감도 쾌감이지만, 내 머릿속의 추방 지수가 60%까지 치솟았다는 사실이 나를 가장 기쁘게 했다. 이제 조금만 더 소란을 피우면 그토록 염원하던 국경 밖 카라칼 영지로 쫓겨나 평생 무위도식할 수 있다.
내 곁으로 다가온 카일이 내 손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그의 눈동자는 깊은 집착과 열기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엘리샤…… 그대의 그 날카롭고 정직한 혀가 오늘도 제국의 썩은 고름을 도려냈군. 위선 없는 그대의 목소리만이 내 귀를 정화해 준다. 그대를 절대 내 곁에서 놓아주지 않겠다.”
옆에 있던 레이나르 역시 성스러운 위선의 미소를 완전히 지워버린 채, 광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내 뺨에 손을 뻗으려 했다.
“오, 귀여운 나의 구원자이시여. 가식을 다 벗겨내고 추악한 진실을 직시하는 그대의 아름다운 눈동자를 저 혼자만 독점하고 싶군요.”
‘아니, 제발 꺼져 달라고요, 이 미친 광공들아.’
그들의 집착 섞인 눈빛에 소름이 돋아 손사래를 치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쾅—!
연회장의 거대한 문이 다시 한번 요란한 소리를 내며 양옆으로 활짝 열렸다. 이번에 들어온 것은 집사 벤이 아니었다.
금빛 갑옷을 입고, 아카데미 총장의 문양이 새겨진 붉은 망토를 휘날리는 특별 전령들이 무장한 기사들과 함께 들이닥쳤다. 그들의 등장은 연회장의 웅성거림을 단숨에 잠재웠다.
전령들의 우두머리가 단상 앞의 나를 똑바로 응시하며, 품 안에서 붉은 봉인이 찍힌 엄숙한 양피지 문서를 펼쳐 들었다.
“아카데미 총장 각하의 직속 명령을 전달한다!”
그의 쟁쟁한 목소리가 대연회장을 무겁게 짓눌렀다.
“네페르티 가문의 엘리샤 영애는 황실과 아카데미의 엄격한 규율을 무시하고, 연회장에서 무단으로 황실 마도 결계를 우회 및 해킹하여 마력을 조작하였으며, 사교계의 질서를 심각하게 어지럽혔다! 이에 엘리샤 폰 네페르티 영애의 반역성 행동을 즉시 ‘추방 평가 위원회’ 공식 안건으로 회부하며, 즉각적인 신문을 명령하는바이다!”
전령의 단호한 선언에 연회장의 공기가 다시 한번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카일과 레이나르의 눈빛이 순식간에 무섭게 가라앉으며 기사들을 향해 살기를 뿜어냈고, 나는 황당함과 동시에 묘한 희열에 휩싸였다.
‘추방 평가 위원회라고?’
드디어, 내 백수 은퇴 계획의 종착지가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