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장 그 더러운 손 치우지 않으면, 네놈이 속한 성국의 대성전을 통째로 철거해 버리겠다.”
낮게 가라앉은 황태자 카일의 목소리가 박살 난 참나무 문틈 사이로 뿜어져 나왔다. 검푸른 황실 기사단 제복을 걸친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푸른 투기가 영빈실 내부의 공기를 얼려 버릴 듯 사납게 몰아쳤다. 붉게 타오르는 눈동자는 오직 한 곳, 내 드레스 자락을 조심스럽게 움켜쥐고 있는 이복 남동생이자 학탑의 천재, 성자 레이나르의 손가락 끝을 향해 있었다.
벤이 방금 전 유유히 빠져나간 문 자리에 드리운 검은 그림자. 그 정체는 레이나르였다. 그는 카일의 살벌한 협박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백자처럼 매끄러운 얼굴에 가식적인 미소를 지우고, 소유욕이 가득 찬 끈적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성전을 철거하신다니, 황태자 전하의 통제증이 갈수록 심해지시는군요. 하지만 어쩌지요? 이 손은 제 유일한 구원자이신 누님께서 허락하신 온기입니다만.”
“허락한 적 없어, 이 미친 사이비 교주 지망생 녀석아.”
나는 이마를 짚으며 가차 없이 레이나르의 손등을 찰싹 때렸다. 쫙 소리가 나게 얻어맞은 레이나르가 붉어진 손등을 보며 묘한 황홀경에 젖은 숨을 내쉬었다. 그 기괴한 반응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지만, 머릿속에서 경보음처럼 울리는 ‘정직의 장부’를 방어하기 위해서라도 내 입은 멈출 수 없었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내숭을 떨거나 착한 척 타협을 시도했다간 뇌를 찌르는 편두통과 함께 내 소중한 은퇴 자금인 금화가 실시간으로 소멸할 테니까.
“매도? 구원? 어디서 삼류 연극 대사 같은 소릴 지껄이고 있어. 너 같은 위선자 녀석에게 낭비할 입술 근육의 칼로리가 아깝다. 네가 성자랍시고 흘리는 그 얄팍한 눈물 한 방울이 이 벨벳 카펫에 떨어지면, 특수 얼룩 제거 세척 비용만 금화 세 닢이야. 당장 내 드레스에서 손 떼지 않으면 네 얼굴에 마물 사냥용 세척제 스프레이를 뿌려버릴 테니까 꺼져.”
레이나르는 내 매정한 독설에 상처받기는커녕, 오히려 뺨을 붉히며 더 깊은 황홀경에 빠진 듯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아아…… 역시 누님뿐입니다. 모두가 내 성스러운 가면 뒤의 권력만을 탐할 때, 누님만이 내 위선적인 몸짓이 초래할 실질적인 비용과 추악한 안면 근육의 경련을 똑바로 지적해 주시는군요. 이 얼마나 실용적이고 완벽한 매도인지!”
“저 미친놈이 진짜…….”
나는 헛구역질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의자를 뒤로 뺐다. 이 피폐 소설 속 남주들은 하나같이 어딘가 나사가 서너 개쯤 빠져 있는 게 분명했다. 황태자 녀석은 독설을 퍼부었더니 자아성찰을 하겠다며 질척거리고, 이 성자 녀석은 대놓고 매도를 갈구하는 마조히스트로 개조되어 버렸다.
그때, 참나무 문짝의 잔해를 밟으며 카일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의 손은 이미 검자루에 가 있었다.
“레이나르. 내 인내심을 더 시험하지 마라. 엘리샤는 내 약혼녀다.”
“황태자 전하, 남의 사유재산인 문짝을 박살 내놓고 왜 소리를 지르고 난리십니까?”
나는 검을 뽑으려는 카일의 앞을 가로막으며 쏘아붙였다.
“황실 특제 마도 방벽 도금 처리된 참나무 문 복구 비용 금화 150닢. 지금 당장 제 개인 계좌로 이체해 주시지 않으면, 황실 재무부에 무단 가택 침입 및 기물 파손으로 정식 청구서를 때릴 겁니다. 전하의 그 잘난 권력으로 뭉개려 하신다면 사교계 신문에 ‘가난한 황태자, 약혼녀 집 문짝 부수고 먹튀’라고 대서특필할 테니 그리 아세요.”
카일의 움직임이 딱 굳었다. 붉은 눈동자가 잘게 흔들리더니, 이내 가슴을 움켜쥐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엘리샤…… 너의 그 칼날 같은 정직함이 내 경솔함을 꿰뚫는구나. 그래, 내가 또 어리석게도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했어. 네 말이 맞다. 문짝 값은 열 배로, 아니 백 배로 보상하지. 네가 원한다면 내 개인 궁의 정원 소유권까지 넘기겠다.”
“정원 필요 없으니까 금화로 삼배속 송금이나 하세요. 부동산은 세금만 많이 나와서 귀찮으니까.”
나는 혀를 차며 레이나르를 향해 손가락질했다.
“그리고 너. 성국에서 보낸 기부금 횡령해서 사치 부릴 생각 말고, 네 그 썩어빠진 위선적인 미소로 신도들 등쳐먹을 시간에 가서 기도나 더 해. 내 눈앞에서 알짱거리면서 은퇴 계획 방해하면 진짜로 네 사생아 문서를 온 아카데미 대자보에 붙여버릴 테니까.”
레이나르는 내 가혹한 으름장에 오히려 감격한 듯 두 손을 모았다.
“누님의 말씀은 언제나 제 더러운 영혼을 정화하는 채찍질 같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성국의 장부를 다시 점검하고, 누님의 거룩한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겠습니다.”
그는 마치 구원자의 계시를 받은 광신도처럼 고개를 깊이 숙이더니, 황홀한 표정으로 방을 빠져나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나는 이마를 짚었다. 이복 남동생이라는 놈이 완전히 내 전용 대형견으로 조련되어 버린 것 같았다. 하지만 내 목표는 오직 하나, 품위 없다는 평판을 자자하게 풍기며 이 지긋지긋한 아카데미에서 쫓겨나 극서부 카라칼 영지에서 평생 무위도식하는 것이다.
이 미친놈들이 나를 놓아주지 않으려 발악할수록, 내 은퇴 계획의 난이도만 수직 상승할 뿐이었다.
***
사흘 뒤.
드디어 아카데미의 가장 큰 사교 행사인 대연회 날이 밝았다.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은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벤이 특별히 공수해 온 에메랄드빛 드레스는 내 붉은 머리칼과 대비되어 기묘할 정도로 고혹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겉모습과 달리, 내 머릿속은 지극히 세속적이고 계산적인 생각들로 가득 차 있었다.
“아가씨, 준비는 마치셨습니까?”
수석 집사 벤이 조용히 다가와 내밀어 준 작은 상자 안에는, 낡고 녹슨 무쇠 열쇠 하나가 들어 있었다. 가문의 숨겨진 낡은 금고 열쇠라던 이것의 진짜 정체는 황실 마도 장치를 강제로 정지시키고 우회하는 만능 마스터키다. 지난번 심문실에서 마리안의 누명 공작을 폭로하고 생중계를 띄울 때 아주 유용하게 써먹었던 그 물건이었다.
나는 열쇠를 드레스 안쪽 깊숙한 비밀 주머니에 밀어 넣으며 물었다.
“벤, 카일이 연무장에서 부러뜨렸던 그 마검 파편은 어떻게 처리했지?”
“물론 아가씨의 지시대로 안전하게 보관 중입니다. 조사해 보니 바이올렛 백작가 특유의 마력 각인이 새겨져 있더군요. 마리안 영애가 마물 유도 도구로 사용했던 흔적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벤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역시 유능한 내 집사다. 이 파편은 오늘 연회장에서 마리안이 나를 향해 펼칠 마지막 발악을 박살 낼 가장 확실한 카드였다.
“좋아. 오늘로 내 추방 지수를 확실히 채우고, 카라칼 영지로 가는 편도 티켓을 끊어야겠어.”
“아가씨의 안락한 백수 라이프를 위해 최선을 다해 보필하겠습니다.”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연회장으로 향했다.
아카데미 대연회장의 문이 열리자, 사방에서 화려한 마법 불빛과 향수 냄새가 쏟아져 들어왔다. 그리고 그보다 더 생생하게 피부를 찌르는 것은, 나를 향한 사교계 인사들의 차가운 눈초리와 수군거림이었다.
“어머, 저기 좀 봐. 결계 훼손죄로 심문까지 받았던 네페르티 영애잖아?”
“뻔뻔하기도 하지. 황태자 전하의 약혼녀라는 자리를 믿고 저렇게 당당하게 얼굴을 들고 다니다니.”
마리안의 패거리로 보이는 영애 무리가 부채로 입을 가린 채 키득거렸다. 그 중심에는 가련한 표정으로 사람들의 위로를 받고 있는 마리안 드 바이올렛이 서 있었다. 그녀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눈자위를 붉히며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연기를 시작했다.
“엘리샤 영애…… 결국 오셨군요. 저는 영애를 원망하지 않아요. 비록 제 가문이 억울하게 모함을 받았지만…….”
‘연기가 삼류라 오열 신도 연출이 안 되네.’
내가 속으로 혀를 차며 한 걸음 내딛으려던 찰나였다.
연회장 입구의 안내인이 목청을 높여 외쳤다.
“제국 황태자, 카일 폰 로젠베르크 전하 입장하십니다!”
순간 연회장 안의 모든 소음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사람들의 시선이 입구로 향했다. 그곳에는 눈이 부시도록 화려한 황실 정복을 입은 카일이 서 있었다. 훤칠한 키와 조각 같은 외모, 그리고 범접할 수 없는 황태자의 위압감이 좌중을 압도했다.
그는 주위의 시선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곧바로 내게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리고는 수많은 귀족이 지켜보는 한가운데에서, 우아하게 한쪽 무릎을 굽히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의 영광, 엘리샤. 오늘 밤 내게 그대를 호위할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 주겠나?”
연회장이 발칵 뒤집혔다. 귀족들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고, 마리안의 얼굴은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황태자가 공식적인 연회에서 이토록 극진하게 고개를 숙이며 에스코트를 청하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나는 내밀어진 그의 손을 내려다보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전하, 지금 온 아카데미 귀족들 앞에서 대형견 코스프레 하시는 겁니까? 전하의 그 듬직한 덩치로 이 난리를 피우시면 사교계 소문이 어떻게 날지 계산은 해 보셨고요? 이 에스코트 비용으로 저번 참나무 문짝 값에 금화 100닢 더 얹어서 청구할 겁니다.”
카일은 내 매서운 지적에 오히려 눈을 반짝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얼마든지. 네가 내 가치를 그렇게 매겨준다면, 황실 창고를 통째로 털어서라도 네 지갑을 채워주지. 그러니 부디 내 쓸모를 증명할 기회를 다오.”
정말이지 구제 불능의 집착광이었다. 하지만 그의 듬직한 호위를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나는 그의 손을 잡았고, 카일은 세상을 다 얻은 듯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에스코트했다.
우리가 걸어갈 때마다 모여 있던 귀족들이 모세의 기적처럼 갈라졌다. 마리안과 그녀의 패거리들은 감히 입을 뻥긋하지도 못한 채, 분노와 질투로 부들부들 떨며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 압도적인 침묵 속에서, 나는 사이다를 들이켠 듯한 쾌감을 느끼며 연회장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
연회가 무르익어 갈 즈음, 나는 잠시 카일의 시선을 피해 연회장 구석의 테라스 근처로 걸어갔다.
화려한 음악 소리와 웃음소리가 가득한 실내와 달리, 밤공기는 차가웠다. 그때, 내 주머니 속에 넣어둔 ‘녹슨 무쇠 열쇠’가 기묘한 진동을 일으키며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어라? 이 반응은…….’
동시에 내 머릿속의 ‘정직의 장부’가 경고음을 울렸다.
[ 시스템 경고: 주변 10미터 이내에 비정상적인 마도 흔적 감지. 속성: 금기 마법(마물 유인). ]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테라스 외벽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그림자가 깔린 벽면을 따라, 보라색의 미세한 마력 흔적이 기어오르듯 번져나가고 있었다. 그것은 지난번 훈련장에서 마물을 불러들였던 마리안의 수법과 정확히 일치하는 흔적이었다.
‘이 미친 여주인공이 결국 대연회장까지 날려버릴 작정인가?’
그녀는 사교계에서 완전히 매장당할 위기에 처하자, 아예 판을 깨버릴 생각인 게 분명했다. 연회장에 마물을 불러들여 대혼란을 일으키고, 그 죄를 다시 나에게 덮어씌우려는 저열하고도 확실한 음모.
나는 주머니 속의 무쇠 열쇠를 꽉 쥐었다. 황실 마도 장치를 우회하는 이 만능 키라면, 저 마물 유인 결계를 역으로 제어해 마리안의 머리 위로 떨어뜨리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슬슬 피날레를 장식할 때가 되었군.”
나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연회장 안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바로 그 순간, 연회장의 조명이 일제히 어두워지며 중앙 단상 위로 밝은 빛이 내리쬐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된 그곳으로, 하얀 드레스를 입은 마리안 드 바이올렛이 천천히 걸어 나갔다. 그녀의 표정은 비장하다 못해 광기에 젖어 있었다.
마리안은 슬픈 눈망울로 좌중을 둘러보더니, 이내 품 안에서 붉게 이글거리는 수상쩍은 수정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연회장이 떠나갈 듯한 목소리로 중대 선언을 시작했다.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서, 제국을 위협하는 진짜 악녀의 정체와…… 그녀가 감추고 있는 추악한 진실을 모두에게 밝히겠습니다!”
그녀의 시선이 정확히 나를 향해 꽂혔다. 연회장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고, 모든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로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