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급망 전면 정지라."
멀어지는 백한기의 구둣발 소리를 배경 삼아, 하백현은 짧게 읊조렸다. 그의 음성에는 당혹감도, 분노도 섞여 있지 않았다. 마치 내일의 일기예보를 들은 것처럼 건조하고 무덤덤한 어조였다.
"백현아, 지금 이럴 때가 아니야!"
서은우 과장이 백현의 소맷자락을 움켜쥐었다. 노의사의 거친 손끝이 사시나무 떨듯 흔들리고 있었다. 품에 안은 은색 가방—백강 병원 시절 빼앗긴 심장 원천 기기 특허 서류가 든 가방이 가죽 마찰음을 이기지 못하고 삐걱거렸다.
"소모품 공급 중단은 단순한 협박이 아니야. 멸균 포장재, 고주파 팁, 전극 패치, 봉합사…… 이 모든 게 일주일만 끊겨도 세라 병원은 시체 보관소나 다름없어져. 당장 내일 예약된 만성 신부전 환자 카테터 삽입술은 어쩌고, 들어오는 응급 환자는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래?"
백현은 서은우의 손을 가볍게 떼어냈다. 그리고 자신의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약지와 새끼손가락 끝에 척골 신경을 마비시키는 둔탁한 이물감이 시리게 감돌았다. 지난 수술의 대가로 지불한 인과율의 흉터였다. 손끝의 감각은 무뎌졌으나, 머릿속의 계산기는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롭고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다.
"과장님."
"어, 어?"
"백강 메디컬의 물류망이 대한민국 의료 유통의 유일한 동맥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건 아니지만, 국내 대형 도매상들은 전부 백강의 눈치를 본단 말이야. 그들이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우리는 고사당해!"
"그럼 국내를 벗어나면 되겠군요."
백현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비웃음에 가까운 미소였다.
그는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익숙한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채 세 번을 울리기도 전에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스피커폰 너머로 차갑고 지적인 여성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큐어 캐피탈의 대표, 채유진이었다.
- 백한기 부사장이 움직였더군요. 세라 병원의 물류 코드를 차단했다는 정보를 방금 입수했습니다.
"예상보다 반나절은 늦었네요. 백강의 의사결정 구조가 생각보다 낡은 모양입니다."
백현의 대답에 수술실 복도의 간호사들이 마른침을 삼켰다. 병원의 존폐가 걸린 상황에서 이토록 여유를 부릴 수 있는 인간은 단 한 명도 없었다.
- 대책은 서 있는 거겠죠? 하 선생. 전 수익률이 보장되지 않는 싸움에는 단 일 달러도 태우지 않습니다.
"이미 판은 깔아두지 않았습니까. 채 대표님이 이끄는 큐어 캐피탈의 해외 헬스케어 포트폴리오 중에서, 싱가포르와 독일 지사에 묶여 있는 의료 원부자재 창고가 있을 텐데요."
- ……미국 FDA와 유럽 CE 인증은 받았지만, 국내 백강 카르텔의 로비 때문에 식약처 수입 허가가 지연되던 품목들이군요.
"정확합니다. 백강이 국내 유통망을 쥐고 흔든다면, 우리는 국경을 넘는 직항 트랙을 뚫습니다. 큐어 캐피탈이 보유한 전세기 편으로 인천공항을 거쳐 정선으로 바로 쏘는 우회 수입 경로. 관세 및 통관 절차는 채 대표님의 로펌을 통해 '긴급 희귀 의약품 및 구호 목적 의료 기기 특례' 조항을 적용해 돌파하십시오."
통화 너머로 짧은 침묵이 흘렀다. 이내 채유진의 나직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 행정 소송과 보건소 독촉장이 날아올 겁니다. 백강이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을 테니까요.
"법적 공방이 끝나기 전에 백강 메디컬의 숨통을 끊어 놓으면 그만입니다. 준비해 주시죠."
- 좋습니다. 세 시간 뒤 인천공항에 첫 수송 편이 착륙합니다.
전화가 끊겼다. 백현은 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서은우를 바라보았다. 노의사의 눈동자에는 경악과 실낱같은 희망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백현아, 하지만 그 제품들은 국내 미인증 상태에 가까워. 백강 측에서 불법 의료 기기 사용으로 고발이라도 한다면……."
"환자가 죽어 나가는데 인증 마크 따위를 따지는 게 위선입니다. 그리고."
백현은 서은우가 꽉 쥐고 있는 은색 가방을 가리켰다.
"과장님이 쥐고 계신 그 특허 서류. 백강이 훔쳐 간 심장 원천 기술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 밝힐 시간도 멀지 않았습니다. 몸을 사릴 거라면 그 가방을 들고 오지도 않으셨을 텐데요."
서은우의 호흡이 가빠졌다. 그는 가방 손잡이를 더 세게 움켜쥐며 입술을 깨물었다. 평생을 피해 다니며 타협해 왔던 거대 악과의 전면전. 하지만 눈앞의 젊은 천재 서전은 이미 판을 뒤흔들 준비를 끝마치고 있었다.
***
다음 날 아침, 정선 세라 병원의 원장실 앞은 아수라장이었다.
"본사에서 공문이 내려왔습니다! 이대로 미인증 대체 소모품을 사용하면 전 직원의 면허 정지는 물론이고, 형사 고발까지 불행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간호부장님! 당장 오늘 오후 수술에 쓸 봉합사 재고가 스무 개도 안 남았습니다. 새로 들어온 수입 상자들은 식약처 허가 스티커도 안 붙어 있어요!"
수석 간호사와 행정 과장들이 서은우 원장을 둘러싸고 비명을 지르듯 항의했다. 백강 메디컬 본사가 가해 온 전방위적인 압박은 병원 스태프들의 목줄을 죄어오기 충분했다. 징계, 해고, 민형사상 손해배상 소송. 평범한 월급쟁이 의료인들에게 그것은 사회적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전부 조용히 하세요!"
수술복 차림의 하백현이 원장실 문을 열고 걸어 나왔다. 그의 차가운 눈빛이 복도를 휩쓸자, 웅성거리던 소음이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본사의 협박이 무서운 사람은 지금 당장 사직서를 쓰고 나가십시오. 말리지 않겠습니다."
백현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하지만 이곳에 남는다면, 여러분은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거대한 의료 카르텔이 무너지는 광경을 가장 앞자리에서 목격하게 될 겁니다. 백강 메디컬이 여러분의 면허를 뺏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천만에요. 주주총회가 끝나면 그들의 면허가 먼저 날아갈 테니까."
"하, 하 선생. 하지만 법적인 책임은……."
젊은 전공의 한 명이 기가 죽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 책임은 내가 집도의로서 전부 집니다. 여러분은 오직 내 수술실의 톱니바퀴로서 완벽하게 움직이기만 하면 됩니다. 내 칼끝 아래에서 죽은 환자는 없습니다. 앞으로도 없을 겁니다."
압도적인 카리스마였다. 환자를 향한 인류애 따위는 털끝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냉혹한 선언이었지만, 그 안에는 거부할 수 없는 절대적인 신뢰가 깃들어 있었다.
서은우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나도 하 선생의 의견에 동의하네. 백강의 협박에 굴해 환자를 방치하는 것이야말로 의사 면허를 스스로 반납하는 짓이지. 난 원장으로서 모든 행정적 처벌을 감수하겠네. 남을 사람들은 수술 준비를 서두르게."
원장과 실세인 하백현이 정면 돌파를 선언하자, 요동치던 스태프들의 눈빛이 단단하게 굳어지기 시작했다. 거대한 거신(巨神)의 발걸음에 맞춰 그들 역시 무릎을 모으고 조직의 충성을 일체화하는 순간이었다.
***
오후 2시, 정선 세라 병원 제1수술실.
수술대 위에는 백한기가 보낸 함정이자, 신성그룹 윤 회장의 아들인 구태민이 누워 있었다. 대뇌 기저부 다발성 동맥류 파열로 인한 심정지 직전의 상태.
백현이 메스를 잡았다. 그의 시야에 붉은빛의 'AR 생명 계달' 시스템이 활성화되며 반투명한 홀로그램 스크린이 영사되었다.
[환자명: 구태민 (남, 8세)] [현재 생존 확률: 1.2%] [경고: 대뇌 기저부 변이 혈관으로부터의 2차 대포 출혈 위험 감지] [잔여 수명 시간: 12분 40초]
"고주파 응고기."
백현이 손을 뻗었다. 수석 간호사가 건네준 기기는 백강 메디컬의 정품이 아닌, 독일에서 공수해 온 대체 소모품이었다.
"하 선생, 그 응고기 팁은 국내 임상 데이터가 부족해. 미세 혈관 응고 시 조직 손상률이 어떨지 장담할 수 없네."
어시스트로 나선 서은우가 우려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백현의 시야에는 이미 그 기기의 모든 물리적 성능이 나노 단위로 분해되어 실시간 마이크로 성능 표로 떠오르고 있었다.
[대체 고주파 응고기 팁 (독일 B사 제품)] - 열 확산 반경: 0.2mm (백강 정품 대비 30% 미세함) - 단백질 변성 최적화 주파수: 450kHz (적합도 98.4%) - 미세 혈관 폐색 성공률: 99.1%
"백강의 정품보다 이 기기의 열 확산 반경이 0.2밀리미터 더 미세합니다. 뇌기저부 수술에는 오히려 이게 최적입니다."
백현의 손끝이 움직였다.
지이잉— 하는 미세한 고주파 음과 함께 응고기 팁이 뇌 깊숙한 곳의 동맥류 인근에 닿았다. 단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정확한 소작이었다. 탄내와 함께 출혈 지점이 순식간에 차단되었다.
서은우의 눈이 크게 떠졌다.
"이, 이 정밀도는…… 본사 제품보다 응고 속도가 훨씬 빠르잖아?"
"백강이 특허를 사장시키고 구형 모델을 비싸게 팔아먹는 동안, 세계 표준은 이만큼 진화했습니다."
백현은 냉정하게 메스를 놀렸다.
그때였다. 시야의 홀로그램 장막이 붉은 경고등을 격렬하게 뿜어내기 시작했다.
[!!위험!! 관상동맥 좌전하행지 후방 이소성 림프관-정맥 문합부 변이 출혈 발생!] [생존 확률 급락: 1.2% -> 0.1%] [서브 루트 림프구 변이성 미세 혈관 파열 개시!]
"어레스트! 혈압 떨어집니다! 60에 40!"
마취과 의사의 비명이 수술실을 찢었다. 모니터의 바이탈 신호가 격렬한 경보음을 내며 곤두박질쳤다.
"대뇌 기저부 수술 중에 왜 갑자기 심장 쪽 바이탈이 흔들리는 거지? 이건 불가능해!"
서은우가 경악하며 소리쳤다. 일반적인 의학 지식으로는 뇌수술 중에 관상동맥 배후의 미세 혈관 변이로 인한 급성 출혈을 잡아낼 방법이 없었다. 현대 의학의 CT나 MRI로도 감지되지 않는, 극희귀 림프구 변이성 출혈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백현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2화에서 강태훈을 집도할 당시, 이 극희귀 림프구 변이 출혈점의 데이터를 완벽하게 분석하고 눈여겨보아 머릿속에 각인해 둔 상태였다. (복선 회수)
"변이성 림프-정맥 문합부 파열입니다. 이미 예상했던 범위 내입니다."
백현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신경 마비의 이물감이 손끝을 타고 올라왔으나, 그는 주저하지 않고 시스템에 저장된 포인트를 연소시켰다.
[생명 포인트 50P 소모: 오른손 미세 운동 신경 10분간 강제 복구]
찌르르한 전류가 손끝을 관통하며 마비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백현은 수입된 특수 미세 지혈사를 집어 들었다. 백강의 정품 대신 채유진이 공수해 준 특수 고분자 지혈사였다. 시스템의 가이드라인이 환자의 가슴팍을 투과하여 가장 최적의 자입 경로를 백현의 눈앞에 선명한 궤적으로 그려냈다.
"지혈 클립, 그리고 흡수성 지혈사 준비."
그의 손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일반적인 서전이라면 시야조차 확보하지 못했을 관상동맥 뒤편의 은밀한 공간으로 어시스트 기구들이 빨려 들어갔다.
사각, 사각.
미세 지혈사가 변이 출혈점을 완벽하게 포착하여 옭아맸다. 시스템의 실시간 마이크로 성능 표에 지혈사의 인체 반응성과 장력 적합도가 100%로 기록되며 청색 불빛이 켜졌다.
[변이 출혈점 완벽 지혈 성공] [환자 생존 확률 상승: 0.1% -> 95.8%] [바이탈 안정화 진행 중]
"……혈압 돌아옵니다! 120에 80, 정상 범주 진입했습니다!"
마취과 의사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모니터를 번갈아 보며 외쳤다.
서은우는 넋이 나간 얼굴로 백현을 바라보았다. 현대 의학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던 극희귀 변이 병증을, 기계의 도움도 없이 오직 손끝의 감각과 대체 소모품의 시너지만으로 완벽하게 제압해 버린 것이다.
"수술 종료합니다. 봉합해 주세요."
백현은 메스를 내려놓고 수술실을 걸어 나왔다. 그의 등 뒤로 시스템의 알림음이 기분 좋게 울렸다.
[수술 성공률 95% 이상 달성] [생명 포인트 150P 획득] [누적 포인트: 200P]
***
사흘 뒤.
백강 메디컬 그룹 본사 부사장실은 그야말로 초상집 분위기였다.
"이게……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백한기가 책상 위의 서류들을 전방위로 쓸어버리며 광포하게 날뛰었다. 바닥에 흩어진 서류들에는 세라 병원의 최근 실적과 언론 보도 자료들이 선명하게 인쇄되어 있었다.
단숨에 말라 죽을 줄 알았던 세라 병원은 멀쩡히 살아남아 있었다.
오히려 큐어 캐피탈의 독자적인 해외 자본망과 항공 유통 트랙을 통해 들여온 최고급 대체 소모품들을 활용해, 전임 수술 성공률 최고치를 경신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신성그룹 윤 회장의 아들인 구태민의 수술 성공 사례가 언론을 타며, 보건복지부는 정선 세라 병원을 '강원 남부 초응급 의료 특구'로 공식 지정하는 절차를 밟기 시작했다. 백강의 공급망 봉쇄가 도리어 세라 병원을 독자적인 의료 메카로 격상시키는 기폭제가 된 꼴이었다.
"부사장님, 큐어 캐피탈 측에서 백강 메디컬의 지분을 추가로 매입했다는 소식입니다. 현재 우호 지분을 포함해 소수주주 제안권을 행사할 수 있는 지분율이 15%를 넘어섰습니다……."
비서의 보고에 백한기는 이가 갈릴 정도로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의 얄팍한 보복이 하백현이라는 괴물에게 날개를 달아주고, 백강의 코를 보란 듯이 뭉개버리는 결과로 귀결되었다.
그때, 부사장실의 육중한 문이 열렸다.
휠체어에 앉은 백강현 이사장이 비서들의 호위를 받으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얼굴은 병색이 짙었으나, 눈빛만큼은 뱀처럼 서늘하고 독기로 가득 차 있었다.
"아, 아버지……."
백한기가 사르르 무릎을 꿇었다.
백강현은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아들을 내려다본 뒤, 품 안에서 붉은색 직인이 찍힌 서류 한 장을 꺼내 책상 위에 툭 던졌다.
"네놈의 얄팍한 수작 때문에 가문의 지분이 쪼개지고 있구나."
"죄송합니다, 아버지. 하지만 하백현 그 자식이 해외 유통망을 뚫을 줄은……."
"입 닥쳐라."
백강현의 목소리에는 감정이 배제되어 있었다. 그는 차가운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하백현이 아무리 날고 기어봐야, 의사 면허가 없는 껍데기라면 수술실에 들어설 수도 없겠지."
백한기가 고개를 들어 서류를 바라보았다. 서류의 상단에는 보건복지부의 로고와 함께 굵은 글씨가 박혀 있었다.
[의사면허 영구 박탈 처분 사전 통지서]
"아버님, 이것은……?"
"식약처 미인증 의료 기기 불법 사용 및 무허가 임상 시험 혐의. 내가 직접 복지부 장관 라인을 움직였다. 임시 주주총회가 열리는 당일 오전, 하백현의 의사 면허는 영구 박탈된다."
백강현의 입꼬리가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면허가 없는 서전이 주주총회에서 어떤 목소리를 낼 수 있겠느냐. 그날, 하백현의 목을 완전히 부러뜨려 주마."
같은 시각, 정선 세라 병원의 집무실에서 태블릿을 바라보던 하백현의 눈이 가라앉았다. 그의 화면에도 방금 발송된 보건복지부의 면허 박탈 처분 가결 통보서가 와 있었다.
가결 일시는 정확히 백강 메디컬 그룹 임시 주주총회 당일 오전 9시.
자신의 목숨줄이나 다름없는 의사 면허를 통째로 날려버리겠다는 백강현 이사장의 마지막 외통수였다. 백현의 손끝이 다시 한번 차갑게 굳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