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복지부의 로고가 선명히 박힌 영구 박탈 처분 통지서. 종이 한 장의 무게는 깃털처럼 가벼웠으나 그 안에 담긴 파괴력은 하백현의 목줄을 죄기에 충분했다. 백강현 이사장이 던진 마지막 외통수, 임시 주주총회 당일 오전 9시 가결. 백현은 태블릿 화면에 떠오른 붉은 낙인을 가만히 응시했다.
오른손 약지와 새끼손가락 끝을 타고 흐르는 둔탁한 이물감이 시리게 피어올랐다. 신경 전도도가 떨어진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으나, 그의 눈빛만큼은 수술실의 무영등 아래보다 더 냉철하게 빛나고 있었다.
“의사 면허라…….”
백현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비틀어졌다.
그에게 면허란 히포크라테스의 숭고한 약속 따위가 아니었다. 환자의 목숨을 합법적으로 해체하고 조립하여 생명 포인트를 뜯어내고, 백강 메디컬의 지분을 찬탈하기 위한 가장 강력한 도구이자 비즈니스 자격증일 뿐이었다. 백강현은 그 도구를 빼앗아 자신의 손발을 묶으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냥감을 궁지에 몰았다고 생각한 순간이 바로 사냥꾼이 가장 방심하는 법이었다.
사흘 뒤 오전 8시 10분, 서울 강남의 백강 메디컬 그룹 본사.
장엄하게 솟아오른 유리 빌딩의 회전문이 느리게 회전했다. 웅성거리는 로비의 소음 사이로 하백현의 구두 굽 소리가 낮게 깔렸다. 그의 뒤편으로 큐어 캐피탈의 대표 채유진이 칼날 같은 에지 라인의 검은 정장을 입고 동행했다. 그녀의 뒤로는 대형 로펌 ‘태산’의 에이스 변호사 세 명이 서류 가방을 쥔 채 묵묵히 보폭을 맞췄다.
“이사회 시작 전까지 남은 시간은 오십 분입니다, 하 선생님.”
채유진이 다이아몬드가 박힌 손목시계를 힐끗 보며 낮게 속삭였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불안감도 없었다. 오히려 거대한 사냥을 앞둔 맹수의 흥취가 묻어났다.
“징계위원회 놈들이 서둘러 도장을 찍으려 들 겁니다. 백강현의 충직한 사냥개들이니까요. 주총 시작 전에 당신을 법적으로 매장해야 저들이 안심하고 의결권을 행사할 테니까.”
“사냥개의 목줄을 쥐는 법은 간단합니다, 채 대표.”
백현이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답했다.
“더 강한 주인을 보여주거나, 이빨을 모조리 뽑아버리거나. 어느 쪽이든 피 냄새는 나겠군요.”
그의 오른손 약지가 주머니 속에서 가볍게 움찔거렸다. 척골 신경 전도도의 저하로 인한 이물감은 여전했다. 그러나 백강 메디컬의 지분 1.5%와 세라 병원의 채권 30억 원, 그리고 큐어 캐피탈이 우회 매집한 15%의 지분이라는 거대한 자본의 무기가 그의 등 뒤에 버티고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18층 심의실 층에 도달하자, 철문이 무겁게 열렸다.
징계위원회 심의실 앞 복도에는 이미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백강 메디컬의 보안요원들이 삼엄하게 경계를 서고 있었으나, 백현의 서늘한 기세와 태산 변호인단의 압도적인 위용에 질려 감히 앞을 막아서지 못했다.
육중한 오크나무 문이 열리자 탁한 공기가 뿜어져 나왔다.
긴 테이블 상석에는 백강현의 최측근이자 백강 의과대학 학장을 겸임하고 있는 징계위원장 강민구가 앉아 있었다. 양옆으로 배치된 다섯 명의 위원들은 백현이 들어서자마자 노골적인 멸시와 비웃음을 흘렸다.
“제시간에 맞춰 오셨군, 하백현 씨. 아니, 이제 ‘의사’ 타이틀을 내려놓아야 하니 하백현 씨라고 불러야겠군.”
강민구가 만년필을 손가락 사이로 굴리며 비아냥거렸다. 그의 눈빛에는 승자의 오만이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백현은 대꾸조차 하지 않고 상석 맞은편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그의 옆자리로 채유진과 변호인단이 질서정연하게 착석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심의실 구석의 음영 속으로 카메라를 든 언론사 기자 두 명이 조용히 침투해 자리를 잡았다.
강민구의 안색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비공개 징계 절차에 외부인을 대동하다니! 당장 저 카메라 치우지 못해!”
강민구가 책상을 쾅 내려치며 호통을 쳤다. 붉게 충혈된 그의 눈에 분노가 사납게 일렁였다.
그때 채유진이 가볍게 생글거리며 가죽 서류철을 그의 앞에 툭 던지듯 올려놓았다. 서류철이 미끄러지며 강민구의 만년필을 툭 쳤다.
“비공개라뇨, 강 위원장님. 백강 메디컬의 우호 지분 15%를 보유한 대주주 큐어 캐피탈이 참관하는 자리입니다. 주주 가치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핵심 의료 인력의 징계 과정을 감시하는 것은 투자자의 정당한 권리죠.”
“주주 권리라니! 이건 원내 보건법 위반에 따른 행정 처분 심의요! 자본 논리로 덮을 수 있는 사안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건 어떻습니까?”
채유진이 턱을 살짝 치켜세웠다. 그녀의 비서가 태블릿 PC를 징계위원들 앞으로 돌려 화면을 띄웠다.
화면에는 복잡한 숫자들과 은행 로고가 박힌 내역서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위원장님을 포함해 여기 계신 심의위원 다섯 분이 최근 3년간 백강 건설의 하도급 업체들로부터 받은 ‘특별 자문료’ 내역입니다. 스위스 유니온 은행의 차명 계좌를 경유해 해외 유령 법인으로 흘러 들어간 자금 흐름을 저희 쪽 포렌식 팀이 아주 예쁘게 도식화해 두었죠.”
“이, 이게……!”
강민구의 양 볼이 경련하듯 파르르 떨렸다. 옆에 앉아 있던 다른 위원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키기 바빴다. 그들의 이마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채유진이 은밀히 역추적해 수집한 배후 은행의 불법 비자금 장부. 그것은 단순한 압박을 넘어 그들의 사회적 생명을 끊어놓을 수 있는 단두대의 칼날이었다.
“공개 재판으로 갈까요, 아니면 여기서 조용히 법리적 소명만 듣고 끝낼까요? 선택은 위원장님이 하시는 겁니다.”
채유진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심의실 안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강민구는 셔츠 깃을 거칠게 잡아당기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는 어떻게든 주도권을 잃지 않으려 백현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하백현. 당신이 아무리 대단한 자본을 뒤에 업고 발버둥 쳐봐야 오늘로 당신의 의학적 생명은 끝이야. 식약처 미인증 기기 무단 사용과 무허가 임상 시험. 이건 복지부 장관이 직접 서명한 사안이다. 메스를 잡는 손기술이 아무리 신묘한들, 면허가 없는 손은 그저 불법 의료 행위를 저지르는 범죄자의 흉기에 불과해!”
메스를 비하하는 강민구의 목소리가 심의실의 높은 천장을 때리며 울려 퍼졌다.
그 순간, 백현의 시야가 급격히 반전되었다.
웅성거리는 주위의 소음이 아득한 수중의 소리처럼 아련해지고, 그의 망막 위로 투명하고 정교한 가상현실의 주홍빛 레이어가 덧씌워졌다.
[AR 생명 계달(Ledger) 시스템 가동] [대상: 강민구 (남, 61세)] [사망 확률: 94.7%] [주요 병증: Willis 동맥륜 내 전교통동맥(Anterior Communicating Artery)의 4.2mm 미세 낭상 동맥류(Saccular Aneurysm) 임박 파열] [위기 시간 카운트다운: 00:08:42]
백현의 눈동자가 강민구의 미간과 관자놀이 부근을 관통하듯 응시했다.
그의 투시 시야 속에서 강민구의 두개골 내부가 3D 그래픽처럼 투명하게 영사되었다. 대뇌 기저부의 혈관들이 붉은 그물망처럼 얽혀 있었고, 그중 전교통동맥의 분기점에 꽈리 모양으로 부풀어 오른 4.2mm 크기의 동맥류가 포착되었다.
동맥류의 외벽은 아주 얇은 비닐막처럼 위태롭게 부풀어 있었고, 심장이 뛸 때마다 뿜어져 나오는 고압의 혈류가 그곳을 사정없이 때리고 있었다.
그 위로 주홍빛 숫자가 가차 없이 줄어들고 있었다.
00:08:41…… 00:08:40……
백현의 입꼬리가 차갑게 호선을 그렸다.
그는 테이블 위에 무심히 올려두었던 가죽 가방을 툭툭 쳤다. 서은우 과장이 정선 세라 병원에서부터 자신의 목숨처럼 소중히 간직해 오던, 백강 메디컬에 빼앗긴 심장 원천 기기 특허 서류 가방이었다. 오늘 이 이사회가 끝나면 백강의 특허 침해 소송을 역으로 도륙할 폭탄이 그 안에 잠들어 있었다.
백현은 왼손으로 턱을 괴며 몸을 앞으로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의 차가운 시선이 강민구의 얼굴 전체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강 위원장님.”
“뭐, 뭘 봐! 징계 절차에 불만이 있으면 공식적으로……”
“오늘 아침, 정확히는 오전 6시 경부터 왼쪽 후두부에서 시작된 극심한 박동성 두통이 관자놀이까지 뻗어나가지 않으셨습니까?”
강민구의 턱이 일순간 굳어졌다. 그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건가.”
“단순한 편두통이라 생각하고 아스피린을 복용하셨겠지. 하지만 아스피린은 혈소판 응집을 억제해 출혈을 가속할 뿐입니다. 경미한 구토 증세가 동반되었을 테고, 이 방에 들어설 때 평형감각을 상실해 왼쪽으로 몸이 살짝 쏠렸을 겁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안구 뒷부분이 무거운 돌로 누르는 것처럼 뻐근할 텐데요.”
백현의 목소리는 수술실의 모니터에서 흘러나오는 바이탈 신호음처럼 건조하고 규칙적이었다. 어떠한 감정도 섞이지 않은, 오직 차가운 사실의 나열.
“그건 피로 누적이나 혈압 상승 때문이 아닙니다. 두개골 내부, 전교통동맥에 매달린 시한폭탄이 부풀어 올라 주위의 시신경과 뇌신경을 압박하고 있는 뇌저부 동맥류의 ‘경고성 누출(Sentinel Bleed)’ 신호지.”
심의실 내부의 공기가 순식간에 진공 상태처럼 무거워졌다.
양옆에 앉은 위원들은 백현과 강민구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강민구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턱끝을 타고 서류 위로 뚝 떨어졌다. 실제로 그가 오늘 아침부터 겪었던,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극비의 신체 증상들을 하백현이 낱낱이 짚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이 건방진 자식이 어디서 해괴한 진단으로 협박질이야! 내가 의학부 학장이야! 내 몸 상태는 내가 잘 알아!”
강민구가 소리를 질렀으나, 뒤집힌 목소리 끝의 미세한 떨림은 감출 수 없었다. 그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며 만년필을 놓쳤다.
“협박이 아니라 자비입니다.”
백현이 차갑게 미소 지었다.
“당신의 뇌동맥류 외벽 두께는 현재 0.05mm 이하로 얇아졌습니다. 뇌척수액의 압력과 혈압의 균형이 깨지는 순간, 지주막하 공간은 순식간에 암적색 선혈로 가득 차게 될 겁니다. 생존율은 5% 미만. 골든타임은 단 10분. 그리고 그 즉사급 수술을 집도해 당신을 살려낼 수 있는 서전은, 이 방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를 뒤져도 단 한 명뿐입니다.”
백현이 자신의 오른손을 들어 올려 손가락을 가볍게 움직여 보였다. 비록 신경 손상으로 약지와 새끼손가락의 감각이 둔탁했으나, 그 손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권위는 심의장 내의 모든 의사를 압살하기에 충분했다.
“면허가 없는 껍데기 서전이라 하셨습니까?”
백현의 눈빛이 뱀처럼 서늘하게 휘어졌다.
“당신의 목숨줄을 쥐고 있는 신(神) 앞에서, 면허의 유무 따위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강 위원장님.”
강민구의 안색이 순식간에 흙빛을 넘어 푸르게 질려갔다.
심의장 내의 위원들은 하백현이라는 존재가 풍기는 기이한 신격성에 질려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백현을 매장하려던 위원장의 목숨줄이 도리어 백현의 손끝에 매달려 있는 형국이었다.
카운트다운이 무자비하게 줄어들고 있었다.
00:01:15…… 00:01:14……
강민구는 거친 호흡을 내뱉으며 파랗게 질린 입술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하백현의 기세에 완전히 짓눌려 가슴이 턱 막히는 압박감을 느꼈다.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백강현 이사장의 지시를 완수하지 못하면 자신의 파멸 역시 확정된 미래였다.
그는 자신의 공포를 떨쳐내기 위해, 그리고 하백현의 오만한 주둥이를 닥치게 만들기 위해 붉은 직인이 찍힌 의사면허 영구 박탈 처분서를 거칠게 앞으로 당겼다.
“닥쳐라! 네놈의 해괴한 주술 같은 사기극에 놀아나지 않는다! 백강 메디컬은 법과 규율 위에 서 있다! 오늘부로 네 면허는 소멸이다!”
강민구는 소리를 지르며 만년필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서명란 위에 펜촉이 닿으려는 찰나였다.
카운트다운이 마침내 종착지에 도달했다.
00:00:00.
툭.
강민구의 손에서 만년필이 힘없이 미끄러져 테이블 위를 굴렀다.
“어……?”
강민구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 같은 단말마가 흘러나왔다.
그의 눈동자가 급격히 확장되며 초점을 잃고 위로 뒤집히기 시작했다. 그의 양손이 허공을 더듬다 자신의 머리를 찢어발길 듯 움켜쥐었다. 대뇌 기저부의 전교통동맥 꽈리가 마침내 수축기 혈압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파열된 것이다.
“아, 악! 으으윽!”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한 채, 강민구의 목구멍에서 붉은 선혈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피비린내 나는 액체가 그가 서명하려던 면허 박탈 처분서 위를 붉게 적시며 사방으로 튀었다. 그의 몸이 고압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격렬하게 경련하더니, 이내 앞으로 쓰러지며 테이블 위로 고꾸라졌다.
쿵!
무거운 타격음과 함께 강민구의 이마가 책상에 부딪혔고, 그의 코와 입에서 뿜어져 나온 암적색 혈액이 테이블을 타고 바닥으로 뚝뚝 흘러내렸다.
[경고: 대상의 지주막하 출혈(SAH) 파열 발생.] [생존 확률: 2.1%로 급감.] [실시간 뇌내 혈종 생성 중. 즉각적인 감압 및 동맥류 결찰술 필요.]
심의실 안은 일순간 아수라장의 지옥도로 변했다.
“위, 위원장님!” “어머나! 피, 피가……!” “당장 응급팀 불러! CPR 준비해!”
위원들이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나 우왕좌왕했고, 구석에 있던 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시가 광적으로 터지기 시작했다. 붉은 피로 물든 아수라장의 중심에서, 하백현만이 오직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피로 물든 면허 박탈 처분서와 그 위로 쓰러져 헐떡이는 강민구를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그의 오른손 손가락이 피 냄새를 맡은 것처럼 미세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