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하 선생…… 하백현 선생. 내 아들을 살려주셨소. 이 은혜는…… 내 평생을 바쳐서라도 갚겠소."

윤 회장의 거친 손길이 백현의 의사 가운 어깨깃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대기업을 이끄는 거물 회장의 손끝이 사시나무 떨듯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수술실 특유의 소독약 냄새와 피비린내가 뒤섞인 공기 속에서, 윤 회장의 뜨거운 눈물이 백현의 가운 소매 위로 툭툭 떨어졌다.

귓가에 꽂힌 무선 이어폰 너머에서는 채유진의 다급한 경고가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 백현 씨, 지금 당장 정선을 떠나야겠어요. 백강현 이사장이 움직였습니다. 그 노인네가 방금 의사협회와 복지부를 움직여 세라 병원에 대한 강제 압수수색 및 면허 정지 행정처분을 발령했어요. 수술실로 공권력이 들이닥칠 겁니다.

백현은 눈을 가늘게 뜨고 허공을 응시했다. 수화기 너머의 다급한 소음과 달리, 그의 눈앞에는 오직 차가운 숫자의 세계만이 펼쳐져 있었다.

[환자: 구태민] [생존 확률: 98.4%] [잔여 수명: 79년 11개월]

완벽한 성공이었다.

백현은 슬며시 손을 뻗어 이어폰의 전원을 껐다. 채유진의 다급한 목소리가 허공으로 흩어졌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멀리서 몰려오는 폭풍이 아니었다. 바로 눈앞에 굴러떨어진 가장 확실하고 거대한 먹잇감이었다.

"원하는 건 뭐든 말하시오."

윤 회장이 붉어진 눈으로 백현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자식을 살린 아비의 처절함과 동시에, 대한민국 재계를 흔드는 거물 특유의 압도적인 결단력이 실려 있었다.

"백억? 이백억? 아니, 이 정선 세라 병원 전체를 허물고 국내 최고 수준의 종합병원을 새로 지어줄 수도 있소. 내 아들의 목숨값에 비하면 그깟 돈은 아무것도 아니니까."

그 호기로운 제안을 들으며, 백현은 수술실 문가에 유령처럼 서 있는 백한기를 슬쩍 쳐다보았다.

백한기는 산소호흡기를 들이마시는 환자처럼 입을 벌린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가 하백현을 매장하기 위해 짜놓았던 덫은 흔적도 없이 부서졌다. 오히려 그 덫을 딛고 올라선 백현이 신성그룹이라는 거대한 뒷배를 등에 업는 광경을, 그는 핏발 선 눈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백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은 채, 오만한 표정으로 침묵을 지켰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초조해지는 것은 윤 회장이었다. 자본의 논리로 해결할 수 없는 천재의 침묵은, 세상의 모든 것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믿어온 대기업 회장에게 기묘한 압박감으로 다가왔다.

사실 이번 수술은 백현에게도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는 도박이었다.

수술 도중, 아이의 대뇌 기저부에서 예기치 못한 대포출혈이 발생해 바이탈이 급강하하던 순간이 있었다. 어시스트를 서던 서은우 과장조차 메스를 떨어뜨릴 만큼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시야를 가득 채운 붉은 피막 너머로, 현대 의학의 진단 장비로는 결코 잡아낼 수 없는 미세한 혈관 벽의 균열이 보였다.

그 순간 백현의 머릿속을 스친 것은 지난 2화에서 강태훈을 집도할 때 발견했던 극희귀 변이였다.

'관상동맥 좌전하행지 후방의 이소성 림프관-정맥 문합부.'

심장 뒤편에 숨어 있던 그 기형적인 미세 출혈점의 데이터가 뇌기저부의 변이 혈관 구조와 완벽히 겹쳐 보였다. 백현은 망설임 없이 시스템의 정밀 가이드를 활성화했다. 마비되어 가는 오른손 끝의 감각을 억누르며, 그는 핀포인트로 그 극미세 문합부를 찾아내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묶어냈다.

그것이 이 기적 같은 생존율 변동을 만들어낸 열쇠였다.

"윤 회장님."

마침내 백현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수술실 벽면에 부딪혀 서늘하게 울렸다.

"저는 자선사업가가 아닙니다. 병원 신축 기금이나 재단 기부금 같은 허울 좋은 명목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을 원하오? 말만 하시오. 내 선에서 해결하지 못할 일은 없소."

윤 회장이 다급하게 다가섰다.

백현은 천천히 주머니에서 서류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사전에 채유진을 통해 정밀하게 준비해 둔 지분 양도 합의서였다. 인쇄된 종이 위로 백강 메디컬 그룹의 로고와 함께 낯익은 문구들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신성그룹이 보유하고 있는 백강 메디컬 지주회사 지분 4.5% 전량."

백현의 입에서 나온 단어에 수술실 앞 복도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뭐라고?"

윤 회장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백강 메디컬 지주회사 지분 4.5%. 그것은 단순한 주식 조각이 아니었다. 백강현 이사장의 독점적 지배구조를 견제하고, 가문 내부의 후계 구도를 결정짓는 캐스팅보트 역할을 하는 핵심 자산이었다. 신성그룹이 백강 메디컬과의 전략적 제휴를 위해 수년간 보유해 온, 그야말로 권력의 상징과도 같은 지분이었다.

"미쳤어! 하백현, 네가 드디어 미쳤구나!"

벽에 기대어 있던 백한기가 비명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그의 얼굴은 분노와 공포로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 지분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나 짖어대는 거야? 일개 유배지 의사 놈이 감히 경영권을 넘봐? 회장님, 저놈의 말을 들으시면 안 됩니다! 저건 명백한 공갈협박입니다!"

백현은 백한기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직 윤 회장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선택하십시오, 회장님. 백강 메디컬의 주식 한 줌입니까, 아니면 신성그룹의 유일한 후계자인 저 아이의 목숨입니까?"

"이, 이 불한당 같은 놈이……!"

백한기가 백현의 멱살을 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윤 회장의 비서들이 재빠르게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거친 손길에 밀려난 백한기는 바닥을 뒹굴었다.

윤 회장은 바닥에 누워 겨우 숨을 쉬고 있는 아들을 내려다보았다. 아이의 맑은 동공이 자신을 향해 있는 것을 보며, 회장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돈은 다시 벌면 그만이고, 지분은 다른 방식으로 채워 넣으면 된다. 하지만 저 아이의 생명은 대체 불가능한 유일한 것이었다.

"……비서실장."

윤 회장이 갈라진 목소리로 불렀다.

"예, 회장님."

"법무팀 연결해서 즉시 지분 양도 절차 진행해. 하백현 선생이 제시한 조건 그대로, 단 한 자의 오차도 없이 서명한다."

"회장님! 그 지분을 넘기면 우리 가문의 지배력이……!"

백한기가 울부짖었지만, 윤 회장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내리눌렀다.

"닥치게, 백 부사장. 내 아들의 목숨을 담보로 정쟁을 벌이려 한 자네들의 죄는 추후 신성그룹의 이름을 걸고 반드시 물을 것이야. 지금은 입을 다물고 꺼지는 게 자네 신상에 좋을 걸세."

비서실장이 태블릿 PC를 꺼내 신속하게 전자 서명 문서를 갱신했다. 윤 회장은 주저 없이 자신의 인증 마크와 서명을 화면 위에 새겨 넣었다.

그 순간, 백현의 시야 전체가 격렬한 푸른빛으로 뒤덮였다.

[연쇄 미션: 신성그룹의 대동맥을 쥐다 - 완료] [계약 조건 충족: 백강 메디컬 지주회사 지분 4.5% 확보 완료] [현재 확보 누적 지분: 6.0%] [시스템 보상이 지급됩니다.]

[보상: 생명 포인트 1,000,000P 지급]

머릿속을 울리는 기계음과 함께, 백현의 신체 내부에서 거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지난 수술들의 과부하로 인해 차갑게 마비되어 가던 오른손 끝에서부터 뜨거운 열기가 솟구쳤다. 둔탁하게 감각이 죽어 있던 오른손 약지와 새끼손가락의 미세 신경망이, 마치 봄눈 녹듯 부드럽게 풀려나갔다.

[보상 효과: 오른손 척골 신경 전도도 복구율 100% 도달] [신경 마비 및 운동 기능 저하 현상이 완전 소멸합니다.]

백현은 주머니 속에서 오른손가락을 천천히 쥐었다 폈다. 늘 시리게 맴돌던 이물감이 완벽하게 사라져 있었다. 손가락 끝의 세포 하나하나가 살아 움직이는 듯한 정밀한 감각이 되살아났다. 무패의 칼손이 지닌 기량이 원래의 완벽한 상태로 복원된 것이다.

"서명은 끝났소. 이제 내 아들의 사후 케어에 온 힘을 다해주시오."

윤 회장이 태블릿을 거두며 무겁게 말했다.

"약속은 지킵니다. 아이는 완전히 회복될 겁니다."

백현이 차갑게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의 시선은 이제 완전히 무너져 내린 백한기에게 향했다.

"백 부사장. 지분 6%면 주주총회에서 소수주주 제안권을 행사하기에 충분한 수치지. 자네 아버지가 세라 병원을 청산하겠다고 보낸 공문은, 이제 이 지분으로 가볍게 찢어발겨 주지."

백한기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의 눈동자는 깊은 절망과 패배감으로 얼룩진 채 바닥을 기어 다니고 있었다. 자신이 파놓은 함정이 도리어 하백현의 신경을 완전 복구시키고, 백강 메디컬의 목줄을 쥘 무기를 쥐여준 꼴이 되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승리의 여운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복도 끝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얗게 질린 얼굴의 서은우 과장이 숨을 헐떡이며 수술실 앞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의 품에는 평소 목숨처럼 소중히 아끼던, 빼앗긴 심장 원천 기기 특허 서류가 든 낡은 은색 가방이 꽉 쥐여 있었다.

"백, 백현아! 큰일 났다!"

서은우가 백현의 어깨를 붙잡고 비명을 지르듯 말했다.

"무슨 일입니까, 과장님?"

"본사 물류사업부에서 방금 세라 병원 전체에 공문을 보냈어! 백한기 부사장의 직권 명령이라면서……!"

서은우의 시선이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백한기에게 닿았다. 백한기는 그제야 광기 어린 웃음을 터뜨리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입술 사이로 핏빛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하백현…… 네가 아무리 날고 기어봐야 내 손바닥 안이야."

백한기가 비틀거리며 백현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의 눈빛은 이미 이성을 잃은 맹수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너희들이 쓰는 수술용 멸균 포장재, 고주파 응고기 팁, 마취 가스, 심지어 특수 봉합사 하나까지 전부 백강 메디컬 물류망을 통해 공급된다는 걸 잊었어? 내가 방금 정선 세라 병원으로 향하는 모든 의료 기기와 의약 소재 유통 라인을 전면 정지시켰다."

백현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했다.

"지금 병원에 남은 소모품 재고로는 길어야 하루다. 당장 내일부터 정선 세라 병원에서는 단 한 건의 수술도, 단 한 명의 응급 환자 처치도 불가능해질 거야. 어디 그 대단한 손가락으로 맨손 수술이라도 해보시지 그래?"

백한기가 광소하며 수술실 복도를 빠져나갔다.

복도에 남겨진 서은우는 가방을 쥔 손을 부르르 떨며 백현을 바라보았다. 병원의 심장부를 멈춰 세우겠다는 소모품 공급 중단 선언. 그것은 의사로서의 목숨줄을 끊어놓겠다는 백강 메디컬의 가장 잔인하고도 즉각적인 보복이었다.

적대적 집도의 대가로 얻은 승리의 순간, 병원의 숨통을 죄어오는 차가운 올가미가 다시 소리 없이 조여들고 있었다.

다음 화 계속 보기 →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