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켜."
백현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소란스러운 병원 복도의 모든 소음을 단숨에 베어 물었다.
그의 시야는 이미 붉은색 경고로 피칠갑이 되어 있었다. 눈앞에 떠오른 시스템 메시지가 망막을 사정없이 때렸다.
[위험! 환자의 생존 확률이 0.1%로 하락합니다.] [사망 임박: 잔여 시간 14분 52초.]
아이의 목덜미는 이미 검붉은 보라색으로 부풀어 올라 있었다. 피부 아래에서 터진 혈액이 갈 곳을 찾지 못하고 연약한 피하 조직을 짓이기고 있는 증거였다. 빛을 잃고 풀려 버린 아이의 동공은 죽음의 그림자가 뇌간을 완전히 장악했음을 알리고 있었다.
"뭐, 뭐 하는 거야! 비키지 못해?"
SST(심장수술팀)의 경호원 둘이 백현의 앞을 가로막았다. 백한기의 명령 없이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겠다는 완강한 태도였다.
백현은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아이가 누운 스트레처 카트의 바퀴 잠금장치를 구두 끝으로 거칠게 걷어찼다.
철컥!
"이 새끼가 진짜!"
경호원의 두꺼운 손이 백현의 깃덜미를 향해 뻗어 왔다. 백현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은 채, 카트의 쇠 프레임을 강하게 밀어붙였다. 육중한 금속 덩어리가 관성을 타고 앞으로 돌진하며 경호원의 정강이를 들이받았다.
"아악!"
단발마의 비명과 함께 경호원이 바닥으로 굴렀다. 남은 한 명이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가려 하자, 백현이 그의 멱살을 틀어쥐고 그대로 벽면의 비상구 문으로 밀쳐 버렸다. 둔탁한 타격음이 복도에 울려 퍼졌다.
"하백현!"
백한기가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그의 얼굴은 허옇게 질려 있었다. 자신이 손을 쓸 수 없는 환자를 백현이 가로채려는 순간의 굴욕감, 그리고 만에 하나 아이가 죽었을 때 독박을 쓰게 될지 모른다는 공포가 뒤섞인 표정이었다.
백현은 백한기의 어깨를 들이받으며 지나쳤다.
"네가 포기한 환자다, 백한기."
"뭐? 내가 언제 포기했다고 그래! 이건 이송 중에 일어난 예기치 못한……!"
"닥치고 거기서 구경이나 해. 네 밑천이 어디까지인지 똑똑히 보여줄 테니까."
쾅!
수술실의 육중한 납문이 닫혔다. 안쪽에서 잠금장치가 걸리는 쇳소리가 복도까지 무겁게 울렸다. 외부와의 완벽한 차단. 이제 이 방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오직 백현의 칼끝에 달렸다.
***
"서 과장님, 어시스트 서세요."
백현이 초록색 수술복으로 갈아입으며 낮게 지시했다.
서은우 과장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의 손끝이 보이지 않게 떨리고 있었다. 정선 세라 병원의 낡은 수술실은 본사의 첨단 하이브리드 수술실과 비교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런 인프라를 따질 시간이 없었다.
"백 선생, 정말 이 상태로 열겠다는 건가? 마취 유도도 제대로 안 된 데다, 환자 혈압이……."
"15분입니다."
백현이 서은우의 말을 잘랐다.
"15분 뒤면 뇌간이 완전히 눌려 숨이 멎습니다. 마취는 프로포폴과 베쿠로늄으로 최소한만 치고 바로 들어갑니다. 감압술이 우선입니다."
[시스템 가동: AR 생명 계달(Ledger) 활성화.]
백현의 시야에 변화가 일어났다. 어두운 수술실의 조명 너머로, 아이의 머릿속이 3차원 홀로그램처럼 투과되어 보이기 시작했다.
뇌저부. 특히 소뇌 연수각(Cerebellopontine angle) 부근에 거대한 붉은색 구체가 요동치고 있었다. 이미 터져 버린 뇌동맥류에서 흘러나온 피가 뇌척수액과 섞여 뇌압을 한계치까지 끌어올리고 있었다.
'시간이 없다.'
오른손 약지와 새끼가 시리도록 차가웠다. 지난 수술의 대가로 잃어버린 척골 신경의 감각 저하가 이 결정적인 순간에 이물감으로 다가왔다. 손가락 끝이 둔탁한 모래를 만지는 것처럼 서걱거렸다.
백현은 이빨을 악물고 메스를 쥐었다.
"메스."
스크럽 간호사가 떨리는 손으로 칼을 건넸다.
서은우가 흡인기(Suction)를 잡고 백현의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대기했다. 참관실의 유리창 너머로는 백한기와 본사 의사들이 불통이 터진 얼굴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에는 '어디 한번 해봐라, 어차피 죽을 환자다'라는 악의적인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서각.
아이의 후두부 두피가 단번에 갈라졌다. 붉은 선을 따라 선혈이 배어 나오기 시작하자, 서은우의 흡인기가 바쁘게 움직였다.
"바이폴라(지혈기)."
백현의 손놀림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두피를 박리하고 skull(두개골)을 노출시키는 과정이 불과 2분 만에 끝났다.
"크레니오토미(개두술) 시작합니다. 드릴."
기계음이 수술실을 채웠다. 앵글을 조절하며 두개골에 미세한 구멍을 뚫고, 뼈를 들어내자 마침내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경막(Dura)이 모습을 드러냈다. 뇌압이 얼마나 높은지, 경막이 마치 터지기 직전의 풍선처럼 터질 듯이 요동치고 있었다.
"경막 절개합니다. 서 과장님, 긴장하세요. 여는 순간 피가 뿜어져 나올 겁니다."
"어, 어."
서은우가 흡인관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백현이 경막에 미세한 칼집을 냈다.
푸슉!
검붉은 핏물이 수술포 위로 분수처럼 뿜어졌다. 순식간에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석션! 더 깊이 집어넣으세요!"
"안 보여! 피가 너무 많아! 시야 확보가 안 된다, 백 선생!"
서은우의 목소리에 패닉이 섞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일반적인 뇌출혈의 수준이 아니었다. 백한기가 본사에서 가져온 차트에는 단순한 소뇌 동맥류 파열이라고 적혀 있었지만, 백현의 AR 시야에 비친 진실은 달랐다.
[경고: 미세 변이 혈관 감지.] [관상동맥 후방에서 발견되었던 '이소성 림프관-정맥 문합부' 기형이 소뇌 연수각 부위에도 동일하게 존재.] [급격한 뇌압 상승으로 인해 변이 림프관이 동시다발적으로 파열 중.]
"이건…… 단순 동맥류가 아니야."
백현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과거 강태훈의 수술을 집도할 때 발견했던 극희귀 림프구 변이 출혈점. 현대 의학의 CT나 MRI로는 절대로 잡아낼 수 없는, 오직 백현의 시스템만이 투과해 낼 수 있는 신의 영역이었다.
그 기형적인 문합부가 아이의 소뇌 뒷덜미 깊숙한 곳에서 사방으로 피를 뿜어내고 있었다. 일반적인 지혈법으로는 절대로 잡을 수 없는, 건드릴수록 더 터지는 최악의 덫이었다.
울컥! 울컥!
"백 선생! 혈압이 떨어져! 60 밑으로 내려간다! 이대로는 어레스트가 다시 와!"
마취과 의사의 다급한 비명이 터졌다.
서은우의 손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붉은 피가 수술포를 넘어 서은우의 가운과 얼굴까지 적셨다. 그 압도적인 피바다 앞에서, 수십 년 경력의 베테랑 외과의인 서은우조차 공포에 질려 메스를 쥔 손을 멈춰 세웠다.
"못 해…… 이건 못 잡아. 출혈점이 어디인지 보이지도 않아. 백 선생, 이건 열자마자 테이블 데스야!"
서은우가 비틀거리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서려 했다. 그의 손에서 메탈 핀셋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쨍그랑하는 금속음을 냈다. 참관실의 백한기는 그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그럼 그렇지. 하백현, 네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저건 못 살려.'
사망 잔여 시간 4분.
환자의 생존 확률은 이제 0.05%까지 추락했다. 시스템의 경고창이 붉은색을 넘어 검붉은 빛으로 백현의 시야를 가로막았다.
오른손의 마비 증상이 더 심해졌다. 약지와 새끼손가락이 완전히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손끝에서부터 시작된 시린 한기가 팔꿈치를 타고 올라와 심장을 조여 왔다.
'여기서 멈출 순 없다.'
백현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시스템."
그가 마음속으로 명령했다.
"잔여 생명 포인트 전량 소진. 오른손 신경 마비 일시적 강제 복구."
[알림: 생명 포인트 100P를 소모합니다.] [오른손 척골 신경의 전도도가 10분간 100%로 임시 복구됩니다.] [대리 페널티: 수술 종료 후 잔여 수명이 3일 단축됩니다.]
수명이 깎여 나가는 묵직한 통증이 가슴을 후벼 팠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굳어 있던 오른손 손가락 끝에 뜨거운 피가 도는 감각이 되살아났다. 마비가 풀리고, 신경 세포 하나하나가 극도로 예민하게 깨어났다.
"서 과장님, 비켜서지 마십시오."
백현의 목소리에는 서리가 내려앉아 있었다.
"석션 팁 잡으세요. 제가 길을 열 테니, 지시하는 곳만 정확히 빠십시오."
"하, 하지만……."
"살릴 수 있습니다. 제가 살립니다."
그 절대적인 확신에 찬 어조에 서은우는 자신도 모르게 다시 흡인기를 쥐었다.
백현의 오른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의사의 손놀림이라기보다는, 정교하게 프로그래밍된 수술용 로봇의 궤적에 가까웠다.
"마이크로 시저(미세 가위)."
백현은 피바다 속으로 주저 없이 기구를 밀어 넣었다.
일반적인 의사라면 보이지 않아 무작정 블라인드로 클램프를 집었을 터였다. 하지만 백현의 눈에는 붉은 피 안개 너머로 형광색으로 빛나는 미세한 림프관-정맥 문합부의 역류 지점이 선명하게 보였다.
'관상동맥 뒤편에서 봤던 그 변이와 완전히 일치한다.'
구조를 알고 있다면, 지해(止解)의 길도 안다.
백현은 전통적인 동맥 클립 대신, 미세한 우회로를 만들어 압력을 분산시키는 방식을 택했다. 소뇌 연수 박리를 진행하며, 출혈을 일으키는 변이 혈관의 상류와 하류를 동시에 묶어버리는 우회 클램핑(Bypass Clamping) 기법이었다.
착!
첫 번째 클립이 정확히 파고들었다.
"두 번째 클립."
착!
놀랍게도, 두 번째 클립이 물리는 순간 뿜어져 나오던 검붉은 피가 거짓말처럼 잦아들었다. 시야를 가득 채웠던 선혈의 폭풍이 멈추고, 맑은 뇌척수액 속에서 박리된 소뇌 조직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
서은우가 넋을 잃고 흡인관을 멈췄다.
출혈이 잡혔다. 단순한 지혈이 아니었다. 뇌압을 상승시키던 주범인 변이 혈관들이 완벽하게 차단되어, 터질 듯 부풀어 올랐던 뇌 조직이 서서히 제자리로 가라앉고 있었다.
[환자의 생존 확률이 상승합니다: 15%…… 45%…… 80%] [사망 위기 해제. 바이탈이 안정세로 돌아섭니다.]
"혈압 올라갑니다! 110에 70, 맥박 85회 안정적입니다!"
마취과 의사의 외침은 마치 승전보와 같았다.
참관실 유리창에 바짝 붙어 있던 백한기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그의 손이 유리창을 짚은 채 부르르 떨렸다.
"말도 안 돼…… 저걸 어떻게 잡은 거야? 저 부위는 건드리는 순간 소뇌가 으스러져야 정상인데……."
백한기의 곁에 서 있던 SST 소속 의사들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들이 세계 최고라고 자부하던 의료 기술의 한계를, 이 버려진 시골 병원의 수술실에서 한 명의 서전이 완전히 깨부수고 있었다.
"백 부사장님, 저건…… 세계 학회에서도 보고된 적이 없는 변이 혈관 처치법입니다. 하백현 선생이…… 독자적으로 혈관 주행을 완전히 파악하고 집도한 겁니다."
"시끄러워! 조용히 해!"
백한기가 소리쳤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이미 깊은 패배감과 공포가 서려 있었다.
백현은 참관실을 슬쩍 올려다보았다. 그의 차가운 눈빛이 백한기의 시선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백현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
'네가 가진 모든 카드는 이제 내 손안에 있다.'
***
수술이 끝났다.
정밀한 봉합까지 마치고 수술실 문이 열리자, 대기실에 있던 신성그룹 윤 회장과 비서진들이 들이닥쳤다. 윤 회장의 얼굴은 눈물과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내, 내 아들은…… 태민이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백현은 수술 장갑을 벗어 던지며 무덤덤하게 답했다.
"뇌압은 완전히 하강했고, 출혈점은 완벽히 지혈되었습니다. 조금 뒤 마취가 깨면 직접 확인하시죠."
그 순간, 회복실로 이동하기 위해 카트에 누워 있던 일곱 살 구태민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으음……."
작은 신음 소리와 함께, 아이가 천천히 눈을 떴다. 풀려 있던 동공은 이미 정상 크기로 돌아와 맑은 빛을 띠고 있었다. 아이는 곁에 서 있는 윤 회장을 바라보더니, 아주 작고 가녀린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윤 회장의 옷자락을 꼭 쥐었다.
"아, 아빠……."
"태민아!"
윤 회장의 다리가 그대로 풀렸다. 그는 차가운 병원 바닥에 주저앉아, 아이의 손을 잡고 꺼느껴 울기 시작했다. 대기업의 회장이라는 권위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오직 아들을 살려낸 아버지의 처절한 눈물이었다.
윤 회장은 눈물 어린 눈으로 백현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백현의 어깨를 두 손으로 꽉 틀어쥐었다.
"하 선생…… 하백현 선생. 내 아들을 살려주셨소. 이 은혜는…… 내 평생을 바쳐서라도 갚겠소."
백현은 윤 회장의 젖은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 계산기는 이미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신성그룹이 보유한 백강 메디컬 지분 5%.'
그리고 며칠 전 확보한 1.5%의 지분과 세라 병원의 채권들. 이제 백강 메디컬의 후계 구도를 뒤흔들 강력한 무기가 그의 손에 쥐어졌다.
뒤늦게 수술실 밖으로 나온 백한기는 그 모습을 보며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벽에 기대어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과호흡으로 인해 그의 입술이 파랗게 질려 갔다. 자신이 파놓은 함정이, 오히려 하백현을 백강 메디컬의 거대한 포식자로 키워내는 먹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백현이 백한기를 지나치며 낮게 속삭였다.
"이제 청산 공문은 찢어버려야겠지, 백 부사장?"
백한기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눈동자는 깊은 절망과 공포로 얼룩진 채, 바닥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하지만 백현이 승리의 조각을 맞추며 돌아서는 순간, 그의 주머니 속에서 진동이 울렸다.
[발신인: 채유진]
액정에 뜬 이름을 확인한 백현이 전화를 받자, 수화기 너머로 채유진의 다급하면서도 서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백현 씨, 지금 당장 정선을 떠나야겠어요. 백강현 이사장이 움직였습니다. 그 노인네가 방금 의사협회와 복지부를 움직여 세라 병원에 대한 강제 압수수색 및 면허 정지 행정처분을 발령했어요. 수술실로 공권력이 들이닥칠 겁니다.
백현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제국의 황제, 백강현이 마침내 이빨을 드러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