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사흘 뒤, 정선 세라 병원의 낡은 아스팔트 주차장 위로 장대비가 쏟아졌다. 회색빛 먹구름이 태백산맥의 능선을 무겁게 짓누르는 오후였다.

본사 기획조정실이 발송한 '정선 세라 병원 경영 정상화 및 특수 수술팀(SST) 파견' 공문이 원장실 팩스로 들어온 지 정확히 두 시간 만에, 서울 번호판을 단 대형 밴 세 대가 빗줄기를 뚫고 미끄러지듯 들어섰다.

차 문이 열리자, 가장 먼저 내린 것은 격식 있게 재단된 다크 네이비 슈트 차림의 백한기 부사장이었다. 그의 뒤로 본사 정예 수술팀의 하얀 의사 가운들이 늘어섰다. 그들의 가슴팍에는 백강 메디컬 그룹의 황금색 로고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시골 구석구석까지 돈 냄새를 풍기더니, 병원 꼴은 여전히 구멍가게 수준이군."

백한기가 에나멜 구두에 튄 진흙을 불쾌한 듯 털어내며 중얼거렸다. 그의 음성은 빗소리 사이로 날카롭게 갈라졌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은 본관 로비 유리문 안쪽에 서 있는 하백현이었다. 백현은 낡은 가운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은 채, 미동도 없이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른손 약지와 새끼손가락 끝에 남아 있는 둔탁한 이물감 가느다란 마비의 감각이 척골 신경을 타고 시리게 올라왔지만, 표정에는 아무런 흔들림도 없었다.

"하백현."

백한기가 로비로 들어서며 가죽 장갑을 벗어 던졌다. 뒤따라온 수행원들이 급히 그의 젖은 코트를 받아냈다.

"오랜만이네. 유배지 생활이 꽤 아늑했나 봐? 외부 자본까지 끌어들여서 집안싸움을 키울 생각을 다 하고."

"용건만 해."

백현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여긴 잡상인이 드나들 만큼 한가한 응급실이 아니라서."

"잡상인?"

백한기의 미간이 좁아졌다. 하지만 이내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뒤를 향해 손짓했다.

"내가 아주 귀한 선물을 들고 왔거든. 네 그 잘난 칼잡이 솜씨를 다시 한번 증명해 보일 기회지."

그의 신호에 따라 밴의 뒷문이 열렸고, 본사 구급대원들이 전동 스트레처 카트를 신속하게 밀고 들어왔다. 카트 위에는 인공호흡기를 달고 있는 아주 작은 체구의 아이가 누워 있었다. 창백하다 못해 푸르스름한 안색의 사내아이였다.

"신성그룹의 유일한 직계 소아 후계자, 구태민 군이다."

백한기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중증 소아 뇌졸중. 대뇌 기저부의 다발성 동맥류 파열 직전이지. 본사에서도 손을 쓸 수 없어 포기하려던 찰나에, 내가 추천했어. 정선에 죽어가는 사람도 살려내는 신의 손이 있다고 말이야."

SST 팀장이자 백한기의 최측근인 강민우 교수가 앞으로 걸어 나오며 두꺼운 차트 뭉치를 백현의 가슴팍에 툭 던지듯 내밀었다.

"이미 양측 중대뇌동맥에 모야모야병 양상의 혈관 협착이 동반되어 있고, 후교통동맥 부위의 뇌류는 직경이 8밀리미터에 달합니다. 손만 대면 터지는 시한폭탄이죠. 본사 컨퍼런스에서도 수술 성공률은 5% 미만으로 책정되었습니다."

강민우의 입꼬리가 비열하게 올라갔다.

"하백현 선생. 백강의 전설적인 서전이시니 이 정도 난치 증례는 가볍게 처리해 주시겠죠? 만약 거부하신다면... 신성그룹의 투자는커녕, 이 환자를 방치해 사망에 이르게 한 책임을 지고 의사 면허가 날아갈 테지만 말입니다."

노골적인 덫이었다.

성공률 5% 미만의 소아 환자. 수술하다 죽으면 의료 사고의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고 채유진과의 투자 계약은 파기된다. 거부하면 환자 거부로 인한 면허 취소 처분이 기다리고 있다. 백한기가 짜놓은 정교하고 잔인한 외통수였다.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던 서은우 과장이 미간을 찌푸리며 한 걸음 나섰다.

"이봐요, 백 부사장. 아무리 정쟁이 급해도 겨우 일곱 살짜리 애 목숨을 인질로 잡고 장난을 쳐? 이건 의사로서 할 짓이 아닙니다!"

"서 과장님은 빠지시죠."

백한기가 싸늘하게 말을 잘랐다.

"이건 백강 메디컬 그룹의 공식 임상 이송 지침에 따른 겁니다. 정선 세라 병원의 진료 능력을 검증하기 위한 정당한 절차란 말입니다."

그들의 대화가 허공에서 치열하게 부딪치는 사이, 백현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직 스트레처 카트 위의 아이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머릿속에서 건조한 기계음이 울렸다.

[AR 생명 계달 시스템을 기동합니다.]

시야가 푸른빛으로 반전되며, 아이의 신체 위로 정밀한 증강현실 격자무늬가 펼쳐졌다.

[환자: 구태민 (남, 7세)] [주요 병증: 다발성 대뇌동맥류 파열 임박, 모야모야병, 뇌저부 미세 혈관 기형] [현재 생존 확률: 4.2%] [사망 잔여 시간: 02:40:12]

붉은색 숫자로 표시된 카운트다운이 초 단위로 줄어들고 있었다. 두 시간 사십 분. 그것이 아이에게 남은 삶의 전부였다.

백현의 눈동자가 아이의 두개골 내부를 투과하는 AR 혈관 지도를 훑어내렸다.

두개강 내의 미세한 혈관들이 3차원 입체 홀로그램처럼 뇌 속에서 엉켜 있었다. 특히 좌측 중대뇌동맥 분지점 뒤쪽, 뇌하수체 인근의 혈관 벽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 터지기 직전인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런데 그 순간, 백현의 시선이 뇌저부 뒤편의 아주 미세한 변이 지점에서 멈췄다.

'이건...'

과거 강태훈의 관상동맥 수술 당시 발견했던 것과 매우 유사한 패턴이었다. CT나 MRI 같은 현대 의학 장비로는 절대 잡아낼 수 없는, 림프구 변이성 미세 혈관 문합부. 뇌척수액의 흐름과 뇌압의 미세한 변화에 따라 혈류가 급격히 요동치는 극희귀 기형 부위였다.

백한기와 SST 의료진은 이 미세 변이 부위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저 대뇌동맥류의 크기만 보고 약물로 뇌압을 조절하며 이송해 왔다고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왜, 겁이 나나?"

백한기가 침묵하는 백현을 보며 비아냥거렸다.

"항상 오만방자하게 굴더니, 막상 진짜 죽을 환자를 눈앞에 두니까 손가락이 떨리는 모양이지? 하긴, 오른손 신경이 망가졌다는 소문이 돌던데... 사실인가 보군."

강민우 교수가 차트를 흔들며 거들었다.

"환아는 현재 만니톨 투여로 뇌압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내일 오전까지는 바이탈이 흔들릴 이유가 없죠. 하 선생이 밤새도록 수술 계획을 세울 시간은 충분할 겁니다. 물론, 열어봤자 살릴 길은 없겠지만요."

SST 소속 의사들이 킥킥거리며 웃음을 흘렸다. 그들에게 이 어린 환자는 하백현을 파멸시키기 위한 완벽하고 안전한 미끼에 불과했다.

백현이 짚고 있던 차트에서 손을 떼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입가에 얇고 차가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안정적이라."

백현의 목소리가 로비의 대리석 벽에 부딪쳐 낮게 울렸다.

"본사 정예 스태프라는 작자들의 수준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군."

"뭐라구?"

강민우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이 아이가 내일까지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뇌압 조절용 약물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믿는 모양이지."

"당연한 소릴! 한 시간 전 이송 직전의 뇌압 수치는 12mmHg로 지극히 정상 범위 내에 있었다!"

강민우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백현은 그런 강민우를 벌레 보듯 바라보며 천천히 환아의 카트 옆으로 걸어갔다. 그의 오른손 손가락이 아이의 목덜미 부근, 경동맥 분지점을 가볍게 짚었다. 손가락 끝의 마비감 속에서도, 혈관을 타고 흐르는 불규칙한 박동의 진동이 선명하게 감각을 자극했다.

동시에 백현의 시야에 붉은색 경고등이 점멸했다.

[위험: 뇌저부 림프-정맥 문합부의 삼출압 임박.] [뇌압 실시간 수치: 28mmHg (급상승 중)] [환아의 심박수: 142bpm]

"만니톨을 과다 투여해서 일시적으로 수치만 낮춰 놓았겠지."

백현이 건조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너희가 놓친 게 있어. 이 아이는 단순한 모야모야병이 아니다. 기저부 뒤편의 림프관 변이로 인해 뇌척수액의 배출 경로가 완전히 막혀 있어. 약물로 혈압을 누를수록, 오히려 뇌저부의 삼출압은 기하급수적으로 치솟는단 소리다."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야! 그런 변이 구조는 임상 보고에도 없는..."

"지금 당장 아이의 안구를 확인해 봐."

백현이 강민우의 말을 가차 없이 잘랐다. 그의 음성에는 상대를 압도하는 기묘한 지배력이 실려 있었다.

"좌측 안구의 미세한 수평 안구진탕이 3초 간격으로 발생하고 있을 거다. 그리고 경동맥의 전도음은 이미 이중 박동으로 쪼개졌지. 뇌압이 정상이라고? 지금 아이의 뇌실 내부 압력은 이미 임계점을 넘어섰어."

강민우가 주춤하며 환자의 얼굴 앞으로 다가갔다. 그가 급히 펜라이트를 꺼내 아이의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빛을 비추는 순간, 강민우의 손이 굳어졌다.

아이의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3초 간격으로 좌우로 파르르 떨리는 불규칙한 진동. 백현이 말한 그대로였다. 청진기를 대보지도 않은 채, 오직 손끝의 촉각과 육안만으로 뇌압의 폭발 전조를 완벽하게 맞춘 것이다.

"이, 이건... 단순한 이송 스트레스로 인한..."

강민우가 식은땀을 흘리며 말을 더듬었다.

"모르면 입을 다물어."

백현이 차갑게 일갈했다.

"정치 질에 미쳐서 환자의 바이탈 사인조차 제대로 읽지 못하는 쓰레기들이 의사 가운을 입고 거드름을 피우는군. 이 아이가 내일까지 버틴다고? 장담하지. 앞으로 2시간 40분 뒤면 뇌저부의 변이 혈관이 먼저 터지면서 뇌간이 가라앉을 거다. 수술대 위에 눕혀보지도 못하고 영안실로 직행한다는 소리지."

백한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들어갔다. 그는 강민우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강 교수!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분명 안정적인 상태로 정선까지 이송할 수 있다고 보고하지 않았나!"

"그, 그게... 본사 출발 전까지는 분명히 수치가 안정적이었습니다! 만니톨 용량도 정확하게 계산해서..."

"계산이 틀렸으니까 이 모양이지."

백현이 차트를 백한기의 가슴팍에 도로 던져버렸다.

"너희가 데려온 이 쓰레기 같은 수술팀으로는 이 환자를 살릴 수 없어. 살리기는커녕, 마취 유도 단계에서 어레스트를 유발해 즉사시키겠지."

압도적인 정적 속에서 오직 환자의 인공호흡기 소리만이 기계적으로 울렸다. 백한기는 입술을 깨물었다. 하백현을 짓밟기 위해 준비한 완벽한 덫이었는데, 오히려 자신들이 환자를 죽이려 한 무능한 살인마로 몰리기 직전이었다. 신성그룹의 후계자가 자신의 수술팀 과실로 사망한다면, 백강 메디컬 그룹 역시 그 후폭풍을 감당할 수 없었다.

"하백현..."

백한기가 이를 갈며 백현의 멱살을 잡을 듯이 다가섰다.

"네가 그렇게 잘났다면, 지금 당장 네가 집도해. 네가 살려내란 말이다!"

"내가 왜?"

백현이 백한기의 손을 냉혹하게 쳐내며 대꾸했다.

"난 자선사업가가 아니야. 이 수술을 집도하는 순간 내 손가락의 마비는 더 심해질 테고, 내가 감수해야 할 리스크는 상상을 초월하지. 그런 수술을 아무런 대가도 없이 해줄 거라고 생각했나?"

백현의 눈동자에 차가운 자본의 탐욕이 서렸다.

"살려주는 대가로, 신성그룹이 보유한 백강 메디컬 지분 5%의 의결권을 나에게 위임하는 계약서를 가져와라. 그리고 네가 들고 있는 세라 병원 청산 안건을 공식적으로 무효화해."

"미친 소리 하지 마! 그 지분이 어떤 지분인데 그걸 너한테 넘겨!"

"그럼 그냥 여기서 아이가 죽어가는 걸 구경해."

백현이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사망까지 남은 시간, 이제 2시간 35분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지분 요구량은 더 늘어날 테니, 천천히 고민해 보라고."

"이, 이 개자식이...!"

백한기가 이성을 잃고 주먹을 쥐는 순간이었다.

삐이이이이이이!

갑자기 카트 옆에 부착된 모니터에서 날카로운 경고음이 터져 나왔다.

"어, 어레스트인가?!"

강민우가 비명을 지르며 모니터로 달려갔다. 심박수가 순식간에 160을 돌파하며 파형이 미친 듯이 요동치고 있었다.

동시에 카트 위에 누워 있던 일곱 살 아이의 몸이 활처럼 팽팽하게 굳어졌다. 아이의 작은 입술 사이로 거품이 섞인 핏물이 울컥 울컥 쏟아져 나왔다.

"태민아!"

서은우 과장이 급히 아이의 기도를 확보하기 위해 달려들었지만, 상황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급격하게 악화되고 있었다.

아이의 목덜미 부위가, 마치 독이 퍼지듯 급격하게 보라색으로 괴사하며 피하 출혈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피부가 터져 나갈 듯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안구 고정! 동공이... 동공이 열리고 있습니다!"

간호사의 다급한 외침이 로비를 찢었다.

아이의 눈꺼풀 밑으로 드러난 동공이 빛에 전혀 반응하지 않은 채, 최대로 확장되어 있었다. 뇌저부의 변이 혈관이 급격한 기압과 뇌압 상승을 견디지 못하고 마침내 파열되어 뇌간을 압박하기 시작한 것이다. 뇌 침수(Brain Herniation)의 전형적인 데스 사인(Death Sign)이었다.

[위험! 환자의 생존 확률이 0.1%로 하락합니다.] [사망 임박: 잔여 시간 15분.]

시야를 가득 채운 붉은색 경고등이 백현의 눈앞에서 미친 듯이 점멸했다. 로비는 순식간에 아비규환의 지옥으로 변했다. 백한기는 넋이 나간 채 뒤로 물러섰고, 본사의 정예라던 SST 의사들은 아무런 손도 쓰지 못하고 얼어붙어 있었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로비 한복판에서, 백현이 천천히 가운 단추를 풀었다. 그의 오른손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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