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원하는 자본의 규모가 대체 얼마입니까? 백강 메디컬 그룹을 완전히 뼈째로 씹어 삼키려면, 얼마나 더 필요합니까?"
폭풍우가 정선 세라 병원의 낡은 유리창을 사정없이 두들겼다.
수술실 밖 복도는 차가운 형광등 불빛과 피비린내, 그리고 에어컨의 기계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채유진은 방금 전 유리창 너머로 목격한 비현실적인 광경을 여전히 소화하지 못한 듯했다. 인공호흡기가 멈추고 심정지 라인이 평탄하게 누웠던 조 의원이, 이 젊은 외과의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기묘한 박동과 함께 다시 살아났다. 그것은 단순한 의학이 아니었다. 죽음의 문턱을 강제로 비틀어 열어젖히는 절대적인 지배력이었다.
백현은 수술 가운 소매에 튄 붉은 혈흔을 건조한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땀으로 젖은 앞머리가 이마에 張り付いて(달라붙어) 있었지만, 그의 눈동자만큼은 얼어붙은 호수처럼 고요했다.
"돈이라니요, 채 대표님."
백현의 목소리가 젖은 복도 바닥을 낮게 굴러갔다.
"내가 고작 큐어 캐피탈의 잔고나 뜯어내려고 조 의원의 심장을 다시 뛰게 만든 줄 아십니까?"
채유진의 어깨가 미세하게 굳었다. 수조 원의 자산을 굴리는 글로벌 사모펀드의 한국 지사장으로서, 그녀는 언제나 판의 지배자였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턱밑을 겨누고 있는 이 남자는 자본의 논리 그 위에 군림하는 생사의 집행자였다.
"그럼... 원하는 게 뭡니까? 세라 병원의 폐업 철회는 이미 확정된 사실이고, 조 의원의 생명 값으로 당신이 요구할 수 있는 금액은 상상을 초월할 텐데요."
"백강 메디컬을 공중분해하는 겁니다."
백현이 채유진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한 걸음 다가섰다. 그의 숨결에 섞인 비린 소독약 냄새가 채유진의 코끝을 스쳤다.
"단순히 병원 하나를 빼앗는 수준이 아닙니다. 백강현 이사장이 평생을 바쳐 구축해 놓은 의료 독점 카르텔, 그 뿌리부터 잔가지까지 전부 잘라내어 시장에 매물로 던질 겁니다. 그리고 그 쪼개진 지분을 우리가 나눠 먹는 거지요."
채유진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건... 단순한 적대적 M&A 수준이 아니에요. 백강 메디컬은 정재계와 얽힌 거대한 괴물입니다. 법적 방어막만 해도 수십 겹이에요."
"방어막은 안쪽에서 무너질 때 가장 취약한 법입니다."
백현이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화면을 켰다. 화면에는 이미 강태훈에게서 뜯어낸 백강 메디컬 지분 1.5%와 세라 병원 채권 30억 원의 양도 명세서가 선명하게 떠올라 있었다.
"이미 씨앗은 뿌려졌습니다. 강태훈의 지분을 시작으로, 세라 병원의 채권을 무기로 본사의 숨통을 조일 겁니다. 채 대표님은 그저 당신들이 가장 잘하는 짓을 하시면 됩니다. 큐어 캐피탈의 이름으로 우회 사모펀드를 설립하고, 내가 가리키는 백강의 약점마다 자본의 폭탄을 투하하는 것."
"우리에겐 명분이 필요해요. 투자자들을 설득할 확실한 가치 말입니다."
"조 의원이 살아난 것보다 더 확실한 가치가 어디 있습니까?"
백현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대한민국 정계의 거물이 우리 손에 살았습니다. 그분이 퇴원하는 순간, 세라 병원은 단순한 시골 유배지가 아니라 '신의 손'이 존재하는 성지가 될 겁니다. VVIP들이 제 발로 돈다발을 싸 들고 이곳으로 올 거란 뜻이죠. 그들이 흘리는 정보와 자금, 그리고 내가 집도할 수술의 성공률. 이보다 더 확실한 포트폴리오가 있습니까?"
채유진은 침을 삼켰다. 그녀의 머릿속 슈퍼컴퓨터가 가파르게 작동하기 시작했다. 위험성은 극에 달했지만, 성공했을 때의 기대 수익률은 숫자로 산출할 수 없을 만큼 거대했다. 백강 메디컬이라는 거인을 도살하여 얻을 고기와 뼈. 그것은 큐어 캐피탈을 국내 최고의 메디컬 펀드로 격상시키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좋아요."
채유진이 마침내 떨리는 손을 뻗어 백현의 손을 맞잡았다.
"동맹을 수락하죠. 우선 세라 병원에 200억 규모의 긴급 우회 투자를 집행하겠습니다. 본사의 청산 절차를 법적으로 완전히 무력화할 수 있는 자금입니다. 그 대신, 당신의 그 '의학적 신격'을 내게 증명해 보여야 할 겁니다. 단 한 번의 실패도 허용되지 않아요."
"실패?"
백현이 그녀의 손을 거칠게 맞잡았다 놓았다.
"내 사전에는 존재하지 않는 단어입니다."
***
채유진이 복도를 떠나고, 은밀한 거래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수술실 옆 스크럽 룸.
백현은 세면대 앞에 서서 센서식 수전을 작동시켰다. 쏟아지는 차가운 물줄기 아래로 두 손을 밀어 넣었다. 거친 수술용 비누를 문지르며 거품을 내는 그의 눈이 날카롭게 좁혀졌다.
"으윽..."
낮은 신음이 백현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오른손 약지와 새끼손가락은 이미 인과율 왜곡의 대가로 척골 신경 전도도가 5% 하락해 남의 살처럼 둔탁한 감각만을 전해오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차가운 물이 닿는 순간, 오른손 검지 끝이 서서히 하얗게 질려가기 시작했다.
피가 통하지 않는 것처럼 백지장처럼 굳어버린 피부. 백현은 손가락목을 꺾어보려 했지만, 검지 끝마디가 제멋대로 미세하게 덜덜 떨렸다.
"이 자식들이..."
백현은 이로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비린 핏맛이 혀끝을 자극했다.
사망 확률 0%에 가까운 조 의원의 수술을 억지로 성공시킨 대가였다. 시스템은 백현이 인과를 뒤틀 때마다 그의 육체에서 가장 정밀해야 할 부위를 차압해 가고 있었다. 외과의에게 검지 손가락의 감각 상실과 떨림은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메스를 쥐고 미세 혈관을 박리할 때, 0.1밀리미터의 오차를 잡아내는 것이 바로 검지 끝의 감각이기 때문이다.
백현은 하얗게 변한 검지를 왼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아직은 멈출 수 없다.'
강태훈의 관상동맥 뒤편에 숨겨져 있던 극희귀 림프구 변이 출혈점의 데이터가 머릿속을 스쳤다. 백한기가 보낸 자들이 심어놓은 덫, 그리고 앞으로 마주해야 할 수많은 죽음의 고비들. 이 검지의 마비는 그가 나아가야 할 길에 박힌 가시이자, 동시에 시간을 지체하지 말라는 경고였다. 육체가 완전히 망가지기 전에 백강 메디컬의 목을 쳐야 한다.
스릉.
그의 눈앞에 반투명한 푸른빛의 홀로그램 창이 영사되었다.
[알림: 인과율 왜곡 집도로 인한 시스템 피드백 발생.] [오른손 검지 미세 신경 전도도 3% 일시 저하 (누적 마비율 증가).] [경고: 신경 마비가 20%를 초과할 경우, 영구적인 운동 장애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차가운 시스템의 경고문 아래로, 이어서 새로운 메시지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띠링!
[돌발 퀘스트 '조 의원의 심장을 돌려라'의 파급 효과가 반영됩니다.] [정계 거물의 생존 및 거대 투자사의 자금 유입으로 인해 집도자의 사회적 영향력이 급격히 상승했습니다.] [메디컬 평판 등급이 조정됩니다: E 랭크 -> D 랭크]
[평판 등급 달성 보상:] - 보유 생명 포인트: 600P (이전 잔여 100P + 조 의원 수술 보상 500P) - 신규 보조 유도 스킬 활성화: '미세 지혈 가이드 (Vascular Micro-Tracking)'
백현의 눈이 반짝였다.
새로 활성화된 스킬의 상세 설명이 뇌리로 직접 흘러들어왔다. 육안이나 일반 의료 장비로는 식별할 수 없는 미세 혈관의 압력 변화를 감지하여, 출혈이 발생하기 3초 전에 예상 파열 지점을 AR 가이드라인으로 표시해 주는 기능이었다.
"미세 지혈 가이드라..."
백현은 떨리는 검지 끝줄기를 바라보며 차갑게 웃었다.
손가락의 물리적인 감각이 무뎌진다면, 시스템의 보조 기능을 극대화하여 뇌로 직접 감각을 대체하면 그만이었다. 기계가 제공하는 정밀한 수치와 궤적이 그의 죽어가는 신경을 보완할 도구가 될 터였다.
그는 주머니에서 꺼내둔 30억 채권 서류를 서랍에 처박아 넣었다. 이제 이 종이 쪼가리는 단순한 빚 문서가 아니었다. 백강 메디컬의 심장을 찌를 가장 날카로운 비수였다.
***
사흘 뒤.
대한민국의 메디컬 업계는 정선발 지진으로 인해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었다.
정선 세라 병원 1층 로비는 이른 아침부터 몰려든 기자들과 방송 카메라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낡은 대리석 바닥 위로 번쩍이는 플래시 세례가 쉴 새 없이 터져 나왔다.
[속보: 글로벌 사모펀드 '큐어 캐피탈', 정선 세라 병원에 200억 원 규모의 독점 지분 투자 전격 발표!] [폐업 위기의 시골 병원, 하루아침에 중증 외상 및 심혈관 특화 메디컬 센터로 재탄생하나?] [조 의원의 극적 회생 배후에는 '정선의 괴물 외과의'가 있었다... 학계 충격.]
로비 한편에 설치된 대형 모니터에서는 뉴스 앵커의 목소리가 쉴 새 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백강 메디컬 그룹 본사는 당초 정선 세라 병원을 만성 적자 및 시설 낙후를 이유로 강제 청산할 예정이었으나, 이번 큐어 캐피탈의 대규모 투자 유치로 인해 청산 결정을 전면 철회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였습니다. 특히 이번 투자는 본사 이사회를 우회하여 병원 자체 채권 인수 방식으로 진행되어..."
"이게...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원장실에서 뉴스를 지켜보던 서은우 과장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의 곁에는 언제나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차트를 넘기고 있는 백현이 서 있었다.
"하백현, 너 진짜 미친놈이구나? 큐어 캐피탈의 채유진 대표를 어떻게 구워삶았길래 200억을 끌어와? 게다가 본사 놈들 코를 이렇게 납작하게 만들어 놓다니!"
서은우의 물음에 백현은 대답 대신 차트의 환자 생체 신호만을 체크했다.
"서 과장님."
"어, 왜? 나 지금 심장 터질 것 같으니까 살살 말해라."
"시끄러우니까 조용히 좀 하십시오. 그리고 슬슬 손가락 푸는 게 좋을 겁니다."
"손가락을 왜 풀어?"
"서울에서 똥줄이 탄 개들이 짖으러 올 시간이니까요."
백현의 말은 정확했다.
같은 시각. 서울 강남구에 위치한 백강 메디컬 그룹 본사, 부사장실.
콰아아앙!
최고급 이탈리아제 대리석 데스크 위로 크리스탈 재떨이가 날아가 벽면에 산산조각이 났다.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지만, 비서실장과 기획조정실장들은 고개를 숙인 채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하백현... 하백현 이 개자식이!!!"
백한기 부사장의 얼굴은 핏발이 서다 못해 검붉게 죽어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태블릿 PC 화면에는 정선 세라 병원의 투자 유치 뉴스와 함께, 백강 메디컬의 주가가 요동치고 있다는 실시간 시황판이 떠 있었다.
"강태훈 그 병신 같은 늙은이는 연락도 안 되고, 세라 병원 청산 공문은 쓰레기통에 처박혀? 큐어 캐피탈이 우회 채권을 인수해서 이사회를 엿 먹여?!"
백한기는 숨을 몰아쉬며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헤쳤다.
자신이 완벽하게 매장했다고 믿었던 하백현이었다. 손가락 손상으로 의사 생명이 끝났어야 할 놈이, 시골 구석에서 기어 나와 자신의 후계 구도를 뒤흔들고 있었다. 이대로 둔다면 아버지 백강현 이사장의 눈 밖에 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부사장님, 큐어 캐피탈의 법무팀이 이미 세라 병원의 채권 효력 정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제출했습니다. 본사에서 강제로 병원 자산을 동결하거나 폐업을 집행할 경우, 계약 위반으로 수백억 원의 위약금을 물어야 합니다."
기획조정실장이 땀을 닦으며 보고했다.
"그럼 그냥 보고만 있으라는 소리야?!"
백한기가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아닙니다. 방법이 있습니다. 세라 병원의 허울뿐인 투자를 무력화하려면, 그 병원의 핵심 동력인 '의료적 신뢰도'를 박살 내야 합니다. 하백현이 집도하는 수술에서 단 한 건의 치명적인 의료 사고라도 발생한다면, 큐어 캐피탈의 투자 계약은 자동 파기 조건에 걸려 있습니다."
백한기의 눈동자에 잔혹한 살기가 서렸다.
"의료 사고라..."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통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서울의 도심 풍경을 바라보며, 그는 주머니에서 특별 보안 전화를 꺼내 들었다.
"본사 직속 특수 수술팀(Special Surgery Team)을 즉각 소집해."
"예? 본사 정예 스태프들을 정선으로 보낸단 말씀이십니까?"
"보내는 게 아니야. 정선 세라 병원을 아예 우리가 접수한다."
백한기가 잔인하게 미소 지었다.
"소아 뇌졸중 및 극희귀 난치성 환자 케이스를 세라 병원으로 강제 이송해라. 그리고 내 직속 수술팀을 정선으로 긴급 소환 발령한다. 하백현, 그 새끼가 보는 앞에서... 그 잘난 칼솜이 어떻게 무너지는지 똑똑히 보여줄 테니까."
정선으로 향하는 거대한 음모의 서막이 오르고 있었다. 백한기가 이끄는 본사의 정예 칼잡이들이 백현의 숨통을 끊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