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원장실 문을 열어젖히자마자 비릿한 시가 연기와 함께 가죽 냄새가 훅 끼쳐 왔다.

정선 세라 병원 원장실은 이미 서울 본사에서 내려온 불청객들로 가득 차 있었다. 가죽 소파 상석에 거만하게 다리를 꼬고 앉은 사내, 백강 메디컬 그룹 기획조정실 감사팀장 임창재가 백현을 흘겨보았다. 그의 뒤로는 검은 양복을 입은 감사팀원 셋이 위압적인 자세로 버티고 서 있었다.

“하백현 선생. 제 발로 찾아와 주니 수고를 덜었군.”

임창재가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시가를 재떨이에 짓뭉개며 비웃음을 흘렸다.

백현은 대답 대신 손에 쥔 공문을 내려다보았다. 붉은 직인이 선명한 [정선 세라 병원 강제 청산 및 폐업 예고 통지서]라는 글자가 시야를 차갑게 긁었다.

“이게 무슨 뜻이지?”

백현의 목소리에는 높낮이가 없었다.

“글을 읽을 줄 알면 이해했을 텐데? 적자 누적, 시설 미달, 그리고 결정적으로 본사의 경영 효율화 방침에 따른 적법한 청산 절차다. 오늘부로 이 병원의 모든 의료 행위는 중단된다. 환자들은 인근의 삼척이나 강릉으로 전원 조치할 예정이니, 하 선생도 짐 싸서 서울로 올라오시지. 아, 물론 백강 병원 자리는 없을 테니 알아서 개업 자리를 알아보든가.”

임창재가 턱을 치켜세우며 서류 봉투 하나를 탁자 위로 던졌다.

“퇴거 명령서다. 서명해.”

원장실 구석에서 사색이 된 채 손을 떨고 있던 원장과 행정직원들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백강이라는 거대 제국의 직계 부사장이 내린 명령이었다. 시골 구석의 적자 병원 따위는 손가락 하나로 지워버릴 수 있는 권력이 그들의 등 뒤에 있었다.

백현은 천천히 걸어가 탁자 위에 놓인 퇴거 명령서를 집어 들었다.

임창재의 입꼬리가 승리감으로 비틀려 올라갔다.

부스럭.

종이가 찢어지는 마찰음이 고요한 원장실의 공기를 갈랐다.

백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퇴거 명령서를 반으로 찢었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겹쳐 사등분으로 찢어발겼다. 하얀 종이 조각들이 임창재의 값비싼 구두 위로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

“뭐 하는 짓거리야!”

임창재가 소파에서 용수철처럼 몸을 일으켰다. 그의 뒤에 서 있던 감사팀원들의 어깨가 굳어지며 백현을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

“청산?”

백현이 찢어진 종이 조각을 밟으며 임창재의 코앞까지 다가갔다. 오른손 약지와 새끼손가락 끝에서 느껴지는 영구 신경 마비의 둔탁한 이물감이 뇌리를 찌릿하게 자극했다. 이 고통의 대가로 얻어낸 것을 놈들은 단 한 장의 종이 쪼가리로 뭉개려 하고 있었다.

“백한기 부사장이 머리가 나쁜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로 법적 지식이 무지할 줄은 몰랐군.”

“이 새끼가 진짜 미쳤나! 본사 기조실 명령이 장난으로 보여?”

“장난은 당신들이 치고 있지.”

백현이 안주머니에서 빳빳하게 접힌 서류 한 장을 꺼내 탁자 위에 거칠게 내던졌다.

탁.

“이게 뭔지 똑바로 읽어봐.”

임창재가 찌푸린 얼굴로 서류를 낚아챘다. 서류 상단에 인쇄된 파란색 법인 인장과 서명란을 확인한 그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채권 양도 및 담보권 설정 계약서] - 채권자: 하백현 - 채무자: 정선 세라 병원 (법인 대표 백강현) - 채권 총액: 금 삼십억 원 정 (₩3,000,000,000) - 특약 사항: 채권자는 채무자의 자산 처분 및 청산 절차에 대해 절대적 거부권을 행사하며, 채무 불이행 시 즉각적인 병원 부지 및 건물에 대한 유치권과 가압류를 집행함.

“이, 이게 왜 네 놈 손에…….”

임창재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정선 카지노의 지하 자금을 주무르는 큰손 강태훈. 그가 세라 병원의 목줄을 쥐고 있던 30억 원 상당의 사채 채권이었다. 백강 메디컬 그룹이 이 병원을 강제 폐업하고 부지를 매각하려 해도, 이 채권이 걸려 있는 한 자산 한 평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었다.

만약 일방적으로 청산을 강행한다면, 백현은 즉각 세라 병원 전체에 가압류를 걸어 법정 관리 상태로 넘겨버릴 수 있었다. 백강 메디컬 그룹의 대외적 이미지와 주가에 치명적인 오점을 남기게 되는 시나리오였다.

“강태훈 사장이 채권을 넘겼을 리가 없어! 이건 위조다!”

임창재가 악을 쓰며 소리쳤다.

“전화해 봐.”

백현이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임창재를 응시했다.

“그 잘난 스마트폰으로 강 사장 비서실이든, 당신네 법무팀이든 당장 연결해서 물어보라고. 강태훈 사장이 직접 공증까지 마친 서류니까.”

임창재의 이마에서 식은땀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그는 서둘러 전화를 꺼내 번호를 눌렀다. 수화기 너머로 법무팀장의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스피커폰을 켜지 않았음에도, 원장실의 정적 속에서 그 당혹스러운 음성이 선명하게 들렸다.

- ……사실입니다, 임 팀장님. 방금 법원으로부터 정선 세라 병원에 대한 채권자 변경 및 가압류 예고 통지서가 접수되었습니다. 채권자는…… 하백현 외과의가 맞습니다. 현재로서는 본사가 일방적으로 청산 절차를 진행할 경우, 채권자의 유치권 행사로 인해 부지 매각 계약 전체가 소송에 휘말리게 됩니다. 진행을 멈추셔야 합니다.

전화가 끊겼다.

임창재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30억 원이라는 자금은 백강 그룹 전체로 보면 큰돈이 아닐지 몰라도, 이곳 정선 세라 병원의 목줄을 쥐기에는 차고 넘치는 액수였다. 한낱 유배당한 의사 놈이 어떻게 그 독사 같은 강태훈의 손에서 이 채권을 빼앗아 왔단 말인가.

“법적 소유권을 침해하는 불법 퇴거 명령은 형사 고소 대상이야.”

백현이 임창재의 멱살을 잡듯 눈빛으로 내리눌렀다.

“그리고 내 허락 없이 이 병원의 장비 하나, 솜뭉치 하나라도 밖으로 반출하는 순간, 백강 메디컬 기조실 전체를 특수절도 및 업무방해죄로 기소하겠다. 백한기에게 가서 똑바로 전해.”

“너…… 감히 부사장님을 상대로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이기는 게 아냐.”

백현이 임창재의 볼을 가볍게 톡톡 쳤다. 온기가 전혀 없는, 마치 시체의 손가락 같은 서늘함에 임창재가 어깨를 움츠렸다.

“도륙하는 거지. 당장 꺼져.”

임창재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찢어진 서류 조각들을 밟으며, 감사팀원들을 이끌고 도망치듯 원장실을 빠져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거칠게 울렸다.

원장실 구석, 소파 뒤에 서 있던 외과 과장 서은우는 그 모든 과정을 숨죽인 채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백현이 보여준 집요함과 냉혹함은 그가 알던 평범한 의사의 범주를 한참 벗어나 있었다.

서은우는 자신의 발밑에 놓인 오래되고 낡은 가죽 가방을 내려다보았다. 가방의 모서리는 닳아 헤졌고 손잡이는 가죽이 벗겨져 있었지만, 그는 버릇처럼 그 가방을 소리 없이 쓰다듬었다.

그 가방 안에는 서은우가 백강 병원 시절 청춘을 바쳐 개발했으나, 결국 백강현 이사장과 그 수하들에게 비열하게 빼앗겼던 '인공심장 판막 및 원천 기술 특허 서류'가 들어 있었다. 세상은 그것을 잊었지만, 서은우는 차마 버리지 못하고 유배지까지 들고 내려왔던 것이다.

‘저 괴물 같은 녀석이라면…….’

서은우의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체념으로 가득했던 그의 늙은 눈동자에 아주 미세한 불꽃이 일었다. 백현의 과격하고 거침없는 행보가 어쩌면 자신에게도 잃어버린 과거를 되찾을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는 기묘한 예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백현의 냉혹함이 자신마저 집어삼킬지 모른다는 공포 역시 공존했다. 서은우는 가방끈을 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때, 백현의 시야가 푸른빛으로 물들었다.

[AR 생명 계달 시스템, 정선 세라 병원 물리적 지리 정보 동기화 완료.] [새로운 공간 정보가 갱신됩니다.]

백현의 눈앞에 병원의 3D 입체 도면이 홀로그램처럼 투명하게 떠올랐다. 단순히 지상 3층 규모의 노후 건물만이 아니었다. 도면은 빛의 파형을 그리며 본관 지하 2층,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뻗어 내려갔다.

‘이건……?’

붉은색 반짝이는 좌표가 지하 깊숙한 암반층을 가리키고 있었다.

[미등록 비밀 구역 탐지.] [과거 백강 메디컬 그룹이 정선 폐광 지형을 활용해 구축하려던 ‘불법 신약 임상 실험실(프로젝트명: 타나토스)’ 설계 좌표와 일치합니다.] [해당 구역의 소유권은 현재 정선 세라 병원 법인에 귀속되어 있습니다.]

백현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백한기가 왜 이 낙후된 시골 병원을 그토록 서둘러 폐업시키고 부지를 완전히 매각하려 했는지, 그 진짜 이유가 시야에 선명하게 드러난 것이다. 단순한 경영 효율화가 아니었다. 자신들의 추악한 불법 임상 실험의 흔적을 영원히 흙 속에 묻어버리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 비밀 통로의 열쇠는 병원 채권을 장악한 백현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훌륭한 사냥감이 무덤 속에 숨겨져 있었군.”

백현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우르릉!

갑자기 원장실 유리창이 굉음과 함께 크게 흔들렸다.

바람 소리가 아니었다. 고막을 찢을 듯한 기계음이 하늘 위에서 쏟아져 내렸다. 폭우가 쏟아지는 밤하늘을 가르며 거대한 회전 날개 소리가 병원 전체를 흔들기 시작했다.

타타타타타타타!

“무슨 일이야? 헬기 소리 같은데?”

서은우가 창가로 달려가 밖을 내다보았다.

칠흑 같은 어둠 속, 앞마당 헬기장 위로 붉고 푸른 경고등을 깜빡이는 검은색 대형 응급 헬기 한 대가 강하하고 있었다. 폭풍우 속에서 기체가 심하게 요동치며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치익, 직.

원장실 탁자 위에 놓여 있던 구형 무전기에서 거친 잡음과 함께 째지는 듯한 여자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 세라 병원 응급실! 응급실 들립니까! 여기는 아시아나 헬리코 알킬 04호!

백현이 무전기를 낚아채 버튼을 눌렀다.

“말해라. 외과 하백현이다.”

- 하, 하 선생님! 큐어 캐피탈의 채유진 대표입니다! 지금 헬기에 긴급 환자가 탑승해 있습니다! 정계 최고위층 인사입니다! 비행 중 급성 대동맥 박리가 발생해 상행 대동맥이 파열 직전입니다! 서울로 회항할 시간이 없습니다. 비상 착륙하겠습니다! 준비해 주세요!

전파 방해로 인해 채유진의 목소리가 뚝뚝 끊겼다.

대동맥 박리. 그것도 상행 대동맥 파열.

생존율이 분 단위로 폭락하는 최악의 초응급 질환이었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산간 지방의 악천후 속에서 헬기가 무리하게 하강하는 이유가 있었다.

쿠우웅!

엄청난 충격음과 함께 헬기가 세라 병원 앞마당 아스팔트 바닥에 동체 착륙하듯 거칠게 내려앉았다. 기체 하부에서 불꽃이 튀었고, 로터 블레이드가 회전을 멈추며 사방으로 빗물을 튕겨냈다.

백현은 무전기를 던져두고 하얀 가운을 휘날리며 원장실 문을 박차고 나갔다.

“서 과장님, 응급실 하이브리드 룸 개방하고 마취 준비하세요.”

“하 선생! 이 날씨에 대동맥 박리 수술을 여기서 하겠다고? 인공심폐기도 노후화됐고, 혈액 재고도 부족해!”

서은우가 경악하며 소리쳤지만, 백현은 이미 복도를 질주하고 있었다.

그의 시야에 붉은색 시스템 경고등이 미친 듯이 명멸하기 시작했다.

[돌발 퀘스트: 정계 거물의 생명을 수확하라.] [환자의 사망 확률: 98.7%] [집도 성공 시 획득 포인트: 500P] [실패 시 대가: 오른손 척골 신경 전도도 20% 영구 상실 (오른손 기능 완전 마비)]

백현은 달리는 도중 자신의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성공하면 백강 메디컬을 무너뜨릴 거대한 권력의 날개를 얻게 될 것이고, 실패하면 의사로서의 생명이 끝장난다.

“98.7%라.”

백현의 입가에 광기 어린 미소가 걸렸다.

“억지로 살려내서, 몸값을 비싸게 받아내 주지.”

응급실 자동문이 열리며, 폭풍우가 몰아치는 앞마당의 차가운 빗줄기가 백현의 얼굴을 때렸다. 헬기의 문이 열리고, 피투성이가 된 들것이 빗속으로 밀려 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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