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동굴의 천장에서 떨어진 얼음 부스러기가 뺨을 스치고 지나갈 때, 에밀리아는 등 뒤에서 밀려오는 서늘한 공기의 흐름을 감지했다.

빛이 닿지 않는 어둠의 틈새, 바위 그늘 속에서 돋아난 것은 단순한 그림자가 아니었다. 칠흑 같은 가죽 옷을 입고 얼굴을 가린 사내들이 소리도 없이 검을 뽑아 들고 있었다. 쇠붙이가 부딪쳐 내는 예리한 파열음이 동굴 벽을 타고 나지막하게 웅웅거렸다.

그들의 검날 끝이 겨냥하는 곳은 명확했다. 부상당한 영지 전사들을 수습하느라 무방비하게 엎드려 있던 에밀리아의 목덜미였다.

“에밀리아!”

레이너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동굴을 찢었다.

그의 외침과 동시에, 에밀리아의 시야가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레이너의 거대한 신형이 허공을 가르며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의 전신을 뒤덮은 화상 흉터가 붉은 마력의 잔상 속에서 일그러진 뱀처럼 꿈틀거렸다.

검날이 허공을 가르며 레이너의 가슴팍을 향해 쏘아져 들어왔다. 은빛 궤적이 그의 살을 가르기 직전, 거칠고 투박한 손이 날붙이를 그대로 맞잡았다.

깡————!

금속이 부러지는 파음이 어두운 공간을 두드렸다. 레이너는 날카로운 검날을 맨손으로 움켜쥔 채,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암살자의 손목을 낚아챘다. 그의 손바닥에서 흘러내린 붉은 피가 차가운 검을 타고 뚝뚝 떨어졌지만, 그의 눈빛에는 고통조차 서려 있지 않았다. 오직 사냥감을 반드시 찢어발기겠다는 맹수의 살의만이 넘실거릴 뿐이었다.

“감히, 뉘 손을 대려 하는가.”

그것은 목구멍 깊은 곳에서 긁혀 나오는 짐승의 으르렁거림이었다.

레이너는 움켜쥔 검을 그대로 비틀어 부러뜨렸다. 쇠붙이가 힘없이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그는 앞으로 한 걸음 내딛으며 암살자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콰직.

숨 돌릴 틈도 없는 폭발적인 완력이었다. 둔탁하게 뼈가 어긋나는 소리가 동굴 안에 차갑게 울려 퍼졌다. 목뼈가 허망하게 꺾인 암살자의 신형이 끈 떨어진 인형처럼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피가 섞인 흙먼지가 에밀리아의 구두 끝자락을 적셨다.

뒤이어 쇄도하던 다른 두 명의 암살자가 멈칫하며 뒤로 물러서려 했다. 그러나 레이너의 발걸음은 그들의 망설임보다 빨랐다. 흉터로 얼룩진 그의 거대한 신형이 어둠 속에서 번개처럼 쏘아져 나갔다. 허공을 가르는 그의 주먹이 암살자의 가슴뼈를 그대로 함몰시켰고, 튕겨 나간 신체는 동굴 벽에 부딪쳐 꺾였다.

“컥……!”

마지막 남은 암살자가 단검을 꼬나쥐고 에밀리아의 목숨이라도 길동무로 삼으려는 듯 달려들었다. 레이너는 망설임 없이 자신의 어깨로 그 검날을 받아냈다. 가죽옷을 뚫고 들어온 칼날이 그의 어깨뼈에 부딪쳐 멈추는 순간, 레이너는 고통을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

그는 남은 한 손으로 암살자의 얼굴을 통째로 움켜쥐고 바닥에 내리박았다.

쿵————!

지포가 흔들리는 듯한 진동과 함께 암살자의 머리가 돌바닥 깊숙이 처박혔다. 단 몇 초라 부를 만한 짧은 찰나였다. 제국 사교계가 ‘괴물’이라 부르며 두려워했던 철혈의 무력이, 동굴 안을 붉은 선혈과 침묵으로 채워 버렸다.

레이너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어깨에 꽂힌 단검에서 검붉은 피가 흘러내려 흉터투성이의 가슴을 적셨다. 그의 눈동자가 붉게 충혈된 채 초점을 잃고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전쟁터의 참혹한 기억이, 피비린내를 맡은 그의 정신을 잠식하려 드는 징후였다.

에밀리아는 망설임 없이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피와 화상 자국으로 얼룩진 그의 거친 뺨을 두 손으로 감싸 안았다.

“레이너, 저를 보세요. 저 여기 있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밤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가냘팠지만, 단단했다.

레이너의 시선이 천천히 흔들리다 에밀리아의 푸른 눈동자에 고정되었다. 그의 긴장된 근육이 서서히 풀리며, 짐승 같던 기운이 가라앉았다. 그가 피 묻은 손으로 그녀의 손등바닥을 조심스럽게 맞잡았다. 거친 흉터의 질감이 그녀의 살결에 닿았다.

“……에밀리아.”

“괜찮아요. 끝났어요.”

그때, 바닥에 머리가 처박힌 채 겨우 숨만 붙어 있던 마지막 암살자가 피를 토하며 기괴하게 웃기 시작했다.

“쿨럭……! 멍청한…… 북부의 촌구석 괴물 놈들…….”

사내의 손가락이 바닥을 긁으며 붉은 가죽 주머니를 옭아쥐고 있었다. 그의 입술 사이로 검푸른 액체가 흘러나왔다. 자결용 독약이 아니었다. 주머니 속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사악하고 기이한 보라색 연기였다.

“너희는…… 여기서 모두 썩어 문드러질 것이다…… 대지를 비트는…… 만마의 부패독이다…… 헬레나 님께서…… 너희의 터전을 잿더미로 만들라 하셨지……!”

사내가 주머니를 터뜨리자, 끈적하고 기분 나쁜 향취를 풍기는 보라색 액체가 동굴 바닥의 흙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치이이익!

액체가 닿는 곳마다 흙이 검게 타들어가며 썩은 냄새를 풍겼다. 동굴 내부의 공기가 순식간에 탁해졌고, 동굴 벽을 타고 흐르던 맑은 지하수가 썩은 유황빛으로 변해갔다. 이 독기가 대지 밑바닥의 마력 맥을 타고 성안의 난방 코어와 영지 전체로 흘러 들어간다면, 북부의 척박한 땅은 영원히 생명이 자라지 못하는 죽음의 땅으로 전락할 것이 뻔했다.

에밀리아의 푸른 눈동자가 차갑게 굳어졌다.

헬레나 에버스. 자신의 친모이자 가문의 권력을 위해서라면 딸마저 미끼로 던지는 비정한 여자. 그녀는 에밀리아가 북부에서 살아남는 것조차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내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가고도 모자라, 내가 겨우 찾아낸 이 안식처마저 부수겠다고?’

에밀리아의 가슴 깊은 곳에서 차가운 불꽃이 일었다. 그녀는 품속에서 묵직하고 낡은 가죽 책을 꺼내 들었다. [상흔의 영지 장부]가 그녀의 손끝에서 푸른빛을 발하며 파르르 떨렸다.

스스스스……!

장부의 책장이 거칠게 넘어가더니, 새로운 문장들이 핏빛 글씨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대지의 상흔: 만마의 부패독 침투] [오염도: 87% (급속 확산 중)] [구원 자원 변환 경로를 탐색합니다…….] [경고: 대지의 독기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영혼의 혹한을 대가로 치러야 합니다. 감당하시겠습니까?]

에밀리아는 주먹을 꽉 쥐었다.

“감당하겠어.”

그녀가 나직하게 읊조리는 순간, 장부에서 뻗어 나온 푸른 마력의 사슬이 검게 썩어 들어가는 흙바닥을 옭아맸다.

“아윽……!”

동시에 에밀리아의 입술에서 짧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뼛속 깊은 곳에서부터 모든 피가 얼어붙는 듯한 살인적인 한기가 그녀의 전신을 덮쳤다. 대지가 앓고 있는 부패의 고통, 영토의 생명들이 느낄 절멸의 감각이 그녀의 신경망을 타고 뇌리로 직행했다. 손끝이 하얗게 질리고, 숨결이 하얀 성에로 변해 허공에 흩어졌다. 지독한 한기가 심장을 옥죄어 왔다.

그녀의 몸이 힘없이 흔들리며 바닥으로 쓰러지려 할 때, 뜨거운 열기가 그녀의 등 뒤를 단단히 받쳐 안았다.

“에밀리아!”

레이너가 그녀를 뒤에서 안아 품에 밀착시켰다. 그의 넓은 가슴에서 뿜어져 나오는 타는 듯한 열기가 그녀의 차가운 등에 닿았다. 화상 흉터로 가득한 그의 살결은 제국의 그 어떤 화로보다 뜨거웠다. 그의 뜨거운 심장 박동이 그녀의 얼어붙은 척추를 타고 올라와 한기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나를 잡아라. 내 온기를 가져가.”

레이너의 떨리는 목소리가 그녀의 귀를 간질였다.

그의 온기가 주입되자, 에밀리아의 흐려지던 눈동자에 다시 푸른 빛이 돌아왔다. 그녀는 장부를 쥔 손에 힘을 주며, 땅속으로 침투하던 사악한 독기를 장부의 구원력으로 강제로 비틀어 쥐었다.

‘이 독은 대지를 죽이는 파괴의 힘이지만…… 역으로 흐르게 만든다면 생명을 싹틔우는 고농도의 마력 원천이 된다.’

장부의 수식들이 미친 듯이 회전했다. 독기의 성질이 반전되고, 파괴의 파동이 순수한 생명력의 파동으로 가공되기 시작했다.

[상흔 치유 완료.] [부패독 정화율 100%] [고농도 영양 마력원으로 변환 및 방류를 시작합니다.]

에밀리아가 장부를 흙바닥에 강하게 내리찍었다.

우웅————!

맑고 청아한 마력의 파동이 동굴 바닥에서부터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검게 그을렸던 흙이 순식간에 차가운 백색에서 은은한 황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유황 냄새는 사라지고, 새벽녘 이슬을 머금은 신선한 풀잎 향기와 은은하게 달콤한 흙내음이 동굴 안을 가득 채웠다.

그 향기는 동굴 내부에서 멈추지 않았다. 정화된 마력의 흐름은 지하 맥을 타고 동굴 밖, 얼어붙은 황무지로 거침없이 흘러 나갔다.

“이, 이것은……?”

동굴 입구 근처, 괴수의 침공과 추위를 피해 바위틈에 숨어 떨고 있던 영민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눈앞에서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영구동토의 가혹한 바람 속에서 그 어떤 생명도 싹트지 못하던 얼어붙은 대지였다. 그러나 지금, 눈 더미가 녹아내리며 그 사이로 푸른 싹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스스스스……!

싹들은 은빛 서리를 머금은 채 순식간에 자라나더니, 이내 눈부신 황금빛 이삭을 터뜨렸다. 혹한 속에서도 결코 시들지 않는 북부의 전설적인 작물, ‘얼음 속 황금 보리’였다. 그뿐만 아니었다. 제국 중앙의 온실에서나 겨우 재배할 수 있다던 고농도 약초들이 얼어붙은 바위 틈새마다 흐드러지게 피어나기 시작했다.

“보, 보리다! 황금 보리가 피어났어!”

한 노인이 떨리는 손으로 황금빛 이삭을 어루만졌다. 굶주림으로 피골이 상접했던 영민들의 얼굴에 경악과 경외심이 교차했다.

“이 가혹한 동토에 생명이…….”

그들은 동굴 입구에서 걸어 나오는 에밀리아와 레이너를 바라보았다.

레이너의 품에 안겨 가픈 숨을 몰아쉬면서도, 에밀리아의 푸른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의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은은한 마력의 잔영이 황금빛 대지와 공명하고 있었다.

“여신님이야…….”

누군가 나지막하게 읊조리며 무릎을 꿇었다.

“대지가 우리를 저버리지 않으셨어! 공작부인 전하께서 대지의 숨결을 데려오셨다!”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수호 여신님이시다!”

영민들이 하나둘씩 차가운 눈바닥에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그들의 눈에서 흘러내린 뜨거운 눈물이 황금빛으로 물든 대지를 적셨다. 가혹한 북부의 겨울 속에서 영원히 굶주려 죽을 것이라 생각했던 이들에게, 눈앞의 작물들은 단순한 식량이 아니라 ‘삶’ 그 자체였다.

그들의 마음속에 깊게 박혀 있던 절망과 영주 가문에 대한 두려움의 상흔이, 따뜻한 안도감과 충성심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에밀리아의 품 안에서 장부가 다시 한번 강하게 진동했다.

[영민들의 구원 수치 대폭 상승.] [신뢰도 치솟음: 북부 영민들의 영혼 안정화.] [영토 치안 등급이 상승합니다: F → S (완벽한 안식)] [가신단 및 영민 충성도: 맥시멈(Maximum)] [특수 효과 ‘대지의 축복’ 발현: 영지 내 작물 수확량 300% 증가, 혹한 저항력 부여.]

장부의 페이지가 황금빛으로 물들며 새로운 치안 등급이 각인되었다. '완벽한 안식'. 제국의 그 어떤 부유한 영지도 도달하지 못했던, 오직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구원해 낸 자들만이 도달할 수 있는 기적의 영역이었다.

에밀리아는 레이너의 품에 기대어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차가운 손을 꽉 쥔 레이너의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너무도 따뜻해서, 그녀의 심장 가장 깊은 곳에 쳐져 있던 방어벽이 조금씩 녹아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가문의 배신으로 인해 그 누구의 호의도 믿지 못했던 그녀였지만, 이 남자의 온기만큼은 차마 밀어낼 수 없었다.

“레이너…… 보이나요? 우리가 해냈어요.”

레이너는 그녀의 머리칼에 가만히 입을 맞추었다. 그의 낮고 서정적인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울렸다.

“그대의 기적이다, 에밀리아. 나는 오직…… 그대의 검이자 방패가 되었을 뿐이다.”

그의 흉터투성이 얼굴에 처음으로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것은 가혹한 겨울 끝에 찾아온 봄볕처럼 아련하고도 아름다운 미소였다.

하지만 평화는 그리 길지 않은 법이었다.

동굴 구석, 숨이 끊어진 암살자의 품에서 떨어진 북부 우체국의 특수 암호 봉인 도장. 그 금속 도장의 표면에 새겨진 마법 문양이 붉게 점멸하기 시작했다.

스으으으……!

도장에서 가느다란 마력의 실이 뿜어져 나오더니, 동굴 벽을 뚫고 하늘 높이 쏘아져 올라갔다. 그것은 첩자가 죽기 직전 발동시킨 ‘최후의 전령 마법’이었다.

황금빛으로 물든 북부의 대지, 혹한 속에서 피어난 기적의 황금 보리와 약초들. 그리고 공작부인이 부린 기적적인 마도 장부의 파동.

이 모든 경이롭고도 위험한 정보가 담긴 마법 신호가, 보이지 않는 통신망을 타고 제국의 심장부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 신호의 종착지는 명확했다.

제국 사교계의 정점, 그리고 에밀리아를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던 그녀의 전 약혼자이자 황태자의 충복, 줄리안 카펠의 집무실이었다.

북부의 깊은 밤하늘을 가르는 붉은 마력의 궤적을 바라보며, 에밀리아는 다시금 입술을 깨물었다.

새로운 폭풍이, 그들의 안식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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