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마력이 하늘을 찌를 듯이 치솟는 광경은 마치 대지가 피를 토해내는 것처럼 기괴했다. 울부짖는 바람 소리 사이로 벼락처럼 내리꽂히는 절규. 귀를 찢는 비명은 한때 제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으나 결국 버림받았던 자들의 원혼이 부르는 죽음의 찬가였다.
“레이너……!”
에밀리아의 갈라진 목소리가 허공에 흩어졌다.
공작의 거대한 신형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과거의 끔찍한 불길과 전장의 한복판에 홀로 던져졌던 기억이 그의 영혼을 난도질하는 중이리라. 그의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채 붉게 물든 하늘만을 응시하고 있었고, 단단하게 굳은 턱관절은 부서질 듯 맞물려 있었다.
에밀리아는 주저하지 않고 그의 손을 움켜쥐었다.
차갑게 식어가는 그녀의 손끝과 달리, 레이너의 손바닥은 타오르는 화로처럼 뜨거웠다. 그 이질적인 온기가 에밀리아의 살죽을 타고 스며들자, 심장 언저리를 짓누르던 한기가 조금은 가시는 듯했다.
“저를 봐요, 레이너. 여기는 전장이 아니에요. 당신의 성, 당신의 영지예요.”
애절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가 그의 귀가에 닿았다. 레이너의 고개가 삐걱거리며 돌아갔다. 초점이 흐려졌던 회색 눈동자에 에밀리아의 단단한 얼굴이 담기는 순간, 그의 거친 숨소리가 조금씩 잦아들었다.
“……에밀리아.”
“가야 해요. 저곳에 우리 영민들이, 그리고 당신이 끝내 구하지 못했던 자들이 울부짖고 있어요.”
레이너는 대답 대신 그녀의 손을 더욱 강하게 꽉 맞잡았다. 그의 손바닥에 새겨진 거친 흉터의 질감이 에밀리아의 손바닥바닥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 가혹한 촉감은 오히려 그가 살아있음을, 그리고 지금 그녀의 곁에 있음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이정표였다.
두 사람은 바람을 뚫고 붉은 마력의 진원지인 깊은 동굴로 향했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산길을 따라 달리는 동안, 공기는 점점 더 무겁고 끈적하게 변해갔다. 피 비린내와 무언가 타들어 가는 지독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동굴 입구에 다다랐을 때, 에밀리아의 발끝에 무언가 걸렸다.
“이건…….”
얼어붙은 채 눈 속에 파묻혀 있는 시신 한 구였다. 군복도 입지 않은, 평범한 민간인의 복장. 하지만 그의 굳어버린 품 안에서 삐져나온 서신 한 장이 에밀리아의 시선을 붙잡았다.
에밀리아는 얼어붙은 서신을 집어 들었다. 서신 뒷면에 찍힌 붉은 인장. 그것은 북부 우체국에서 극비리에 사용되는 특수 암호 봉인 도장의 흔적이었다.
‘어머니…… 결국 당신의 부하가 이곳까지 손을 뻗쳤군요.’
가문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자식마저 제물로 바치는 냉혈한, 헬레나 에버스. 그녀의 첩자가 이 깊은 영지 구석까지 들어와 무언가 음모를 꾸몄음이 틀림없었다. 아마도 이 동굴 속의 원혼들을 자극해 영지를 파멸로 몰고 가려 했으리라.
에밀리아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며 서신을 품에 넣었다. 분노로 인해 손끝이 부르르 떨렸지만, 지금은 눈앞의 비극을 막는 것이 먼저였다.
동굴 내부로 발을 들이밀자마자, 뼛속까지 시려오는 한기가 온몸을 엄습했다.
어둠 속에서 수십 개의 붉은 안광이 번뜩였다. 그들은 한때 윈터가드의 정예병이었으나, 전쟁의 참화 속에서 낙오되어 마수화가 진행 중인 전사들이었다. 상처 입은 육신 위로 검붉은 비늘과 기괴한 종양들이 돋아나 있었고, 부러진 대검과 녹슨 도끼를 쥔 손에는 오직 살기만이 가득했다.
“으아아아아! 불길이…… 우리를 태운다! 배신자들을 죽여라!”
“아무도 믿지 마라! 황실도, 공작도 우리를 버렸다!”
그들의 목소리는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여러 목소리가 기괴하게 겹쳐진, 원혼의 울부짖음 그 자체였다. 그들은 완벽한 쐐기형 방어선을 구축한 채, 침입자를 찢어발기기 위해 무기를 치켜들었다.
“에밀리아, 내 뒤로.”
레이너가 앞을 가로막으며 검을 뽑아 들었다.
그의 넓은 등판이 요동치고 있었다. 동굴 벽에 반사되는 붉은 마력의 불빛이 그의 얼굴과 목덜미에 새겨진 화상 흉터를 더욱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과거의 트라우마가 그의 눈앞을 가리고 있을 텐데도, 레이너는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방해하는 자는…… 모두 벤다.”
미쳐버린 참전병 중 가장 거구인 사내가 포효하며 거대한 도끼를 내리찍었다.
콰아아앙!
돌가루가 사방으로 튀며 대지가 흔들렸다. 레이너는 검을 비껴 세워 도끼날을 흘려보냈지만, 연이어 들이닥치는 세 명의 참전병들의 검격까지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그들의 검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마수의 힘이 실려 있었다.
서걱!
날카로운 쇠붙이가 살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레이너의 어깨에서 붉은 피가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그는 신음조차 내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단단하게 대지를 딛고 서서,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모든 공격을 온몸으로 받아냈다.
그의 육신이 방패가 되어 에밀리아에게 단 한 줌의 살기조차 닿지 않도록 막아서고 있었다. 피가 흘러내리는 와중에도 그의 시선은 오직 에밀리아만을 향해 있었다.
“괜찮다……. 이 정도로 나는 깨지지 않아.”
그의 야수 같은 목소리에는 에밀리아를 지키겠다는 맹목적인 집념만이 서려 있었다.
에밀리아는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그의 상처투성이 육신이 자신을 위해 더럽혀지고 찢기는 모습을 더는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더 이상 피를 흘리게 두지 않겠어.’
에밀리아는 품속에서 [상흔의 영지 장부]를 꺼내 들었다.
스스로 펼쳐진 장부의 페이지들이 광풍에 휘날리듯 잔혹하게 펄럭였다. 에밀리아는 자신의 마력을 쥐어짜 내어 장부의 심층부를 강제로 개방했다. 단순한 기록이 아닌, 장부의 힘을 극한으로 끌어올리는 대전압 각성이었다.
[시스템 가동: 상흔의 깊이 치환 정화 개시] [경고: 대규모 정화 시 사용자의 영혼에 극심한 한기 부작용이 발생합니다.]
“감당하겠어. 그러니까…… 모두 구해내라!”
에밀리아가 소리치자, 장부에서 뿜어져 나온 눈부신 황금빛 마력이 동굴 전체를 가득 메웠다.
쿠구구구구!
그것은 따뜻하면서도 범접할 수 없는 신성한 온기였다. 동굴을 지배하던 붉은 마도가 황금빛 잔물결에 닿는 순간, 비명을 지르며 정화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에밀리아의 전신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아윽……!”
수십 명의 낙오병들이 겪었던 전장의 공포, 불길에 타들어 가던 고통, 그리고 얼어붙은 대지에 내버려 졌던 절망의 한기가 에밀리아의 영혼으로 고스란히 역류했다. 이가 덜덜 떨리고, 눈앞이 하얗게 멀어갔다. 뼛속까지 얼어붙어 심장이 멈출 것만 같은 가혹한 고통이었다.
“에밀리아!”
레이너가 검을 거두고 그녀를 거칠게 끌어안았다.
그의 타오르는 듯한 체온이 에밀리아의 등에 밀착되었다. 화상 흉터로 가득한 그의 단단한 가슴이 에밀리아의 떨리는 몸을 감싸 안았을 때, 비로소 얼어붙던 혈액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레이너는 그녀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듯 이마를 맞대며, 자신의 온기를 전부 내어주려는 듯 거칠게 숨을 불어넣었다.
“나를 가져가라, 에밀리아. 내 안의 불꽃을 전부 너에게 줄 테니…… 제발 무너지지 마라.”
그의 절박한 속삭임이 에밀리아의 귓가를 두드렸다.
그의 온기를 원동력 가동 삼아, 황금빛 정화의 물결은 더욱 거세게 숲과 동굴을 쓸어내렸다. 참전병들의 몸을 덮고 있던 기괴한 비늘이 떨어져 나갔고, 붉게 충혈되었던 눈동자가 본래의 맑은 빛을 되찾았다.
철그렁. 철그렁.
무기들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고요해진 동굴 안에 울려 퍼졌다.
광기에 휩싸여 날뛰던 전사들이 하나둘씩 제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들의 얼굴에 흐르는 것은 피가 아니라 뜨거운 눈물이었다.
“우리가…… 무슨 짓을…….”
“공작님…… 공작부인 전하…….”
가진 것 하나 없이 버림받아 괴물이 되어가던 자들이 마침내 인간의 이성을 되찾았다. 그들은 자신들을 괴롭히던 평생의 악몽이 걷힌 것을 느끼며 머리를 조아렸다.
가장 거구였던 사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이 목숨을 거두어 주소서. 저희는 제국에게 버림받고 영지를 위협하는 괴물이 되려 했습니다. 그런 저희를…… 구원해 주시다니요.”
에밀리아는 레이너의 품에 기댄 채, 창백한 입술을 열었다.
“당신들은 괴물이 아닙니다. 제국의 영웅이었고, 이제는 윈터가드의 가장 단단한 방패가 될 이들입니다. 일어나십시오.”
그녀의 온화하면서도 위엄 있는 목소리에 전사들은 몸을 떨었다. 마침내 그들의 가슴속에 웅크리고 있던 낙인의 상처가 완전한 충성심으로 승화되는 순간이었다. 치료된 상흔은 이제 윈터가드를 지킬 최강의 수호 보병단이라는 고부가가치 자원으로 완벽하게 치환되었다.
그들은 흐느끼며 맹세했다.
“이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공작 부부와 윈터가드를 위해 검을 바치겠습니다!”
그 누구도 길들일 수 없을 것 같던 흉포한 광인들이 가장 든든한 아군으로 거듭난 통쾌한 순간이었다. 에밀리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그러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전이었다.
스스슥.
그림자조차 비치지 않는 동굴의 짙은 어둠 속에서, 소리 없는 살기가 에밀리아의 등 뒤로 쇄도했다.
레이너가 부상으로 인해 잠시 균형을 잃고 전사들을 살피던 찰나의 빈틈이었다.
비정상적으로 고요하게 움직이는 검은 형체들. 그들의 무기 끝에는 푸르스름한 맹독이 칠해져 있었다. 헬레나 에버스가 보낸 최측근 비밀 암살단이 마침내 기회를 포착하고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것이었다.
“가문의 수치여, 여기서 잠들거라.”
바람을 가르는 서늘한 쇠붙이 소리가 에밀리아의 뒤통수를 서늘하게 적셨다.
찰나의 순간, 에밀리아의 시야가 느리게 늘어났다.
귓가를 스치는 서늘한 바람 소리, 허공을 가르는 푸르스름한 독인의 궤적, 그리고 자신을 감싸 안은 레이너의 어깨에서 흘러내리는 붉은 피의 온도까지. 모든 감각이 기괴할 정도로 선명하게 각인되었다. 피하려 했으나 장부의 대가로 얼어붙은 사지는 무겁게 가라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그녀의 목덜미를 송곳처럼 찌르려던 바로 그때.
퍼억—!
둔탁한 마찰음과 함께 짓이겨지는 소리가 동굴 벽을 울렸다. 비단결 같은 어둠을 찢고 끼어든 것은, 방금 전까지 광기에 울부짖던 거구의 전사였다.
그는 자신의 두꺼운 팔뚝으로 독이 칠해진 검날을 가로막았다. 치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살점이 타들어 가는 지독한 냄새가 번졌지만, 사내는 신음조차 흘리지 않았다. 오히려 억센 손귀로 암살자의 손목을 움켜쥐며 턱을 사납게 사려 물었다.
“우리의…… 빛을 범하려 하지 마라!”
그것은 짐승의 포효와도 같았다.
동시에 레이너의 신형이 움직였다. 어깨의 부상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이 동굴의 대기를 짓눌렀다. 칠흑 같은 그림자가 암살자의 시야를 덮쳤다.
콰드득!
“꺼져라.”
레이너의 거친 손길이 암살자의 목줄기를 움켜쥐고 그대로 바닥에 처박았다. 돌바닥이 움푹 패며 흩날리는 먼지 사이로, 붉은 피가 분수처럼 뿜어졌다. 그의 회색 눈동자는 이성을 잃은 야수의 것처럼 번뜩이고 있었다. 오직 에밀리아를 위협하는 모든 존재를 짓이겨 버리겠다는 맹목적인 적의만이 그 눈빛에 가득했다.
남은 두 명의 암살자들이 뒤늦게 도망치려 발을 굴렀으나, 이미 제정신을 찾은 참전병들이 그들의 앞길을 빽빽하게 가로막은 뒤였다. 평생을 전장에서 구른 베테랑들의 포위망은 물 한 방울 빠져나갈 틈 없이 조여들었다.
“공작부인 전하를 지켜라!”
부러진 검과 도끼가 암살자들의 목덜미와 사지를 사정없이 찍어 눌렀다. 뼈가 부러지는 비명과 함께 암살단은 순식간에 차가운 돌바닥 위로 무릎이 꺾였다.
동굴 안에는 오직 거친 숨소리와 피 비린내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에밀리아는 레이너의 단단한 품에 기댄 채,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심장이 터질 듯이 쿵쾅거리는 진동이 그녀의 등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화상 흉터로 뒤덮인 그의 커다란 손이 에밀리아의 뺨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마치 깨지기 쉬운 유리 인형을 다루는 듯한, 애달프고도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에밀리아. 다친 곳은 없는가.”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제국을 공포에 떨게 했던 철혈의 공작이, 고작 그녀의 안위를 위해 이토록 나약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에밀리아는 그의 손등바닥에 자신의 뺨을 가만히 비볐다. 그의 거친 상처의 질감이 닿을 때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형용할 수 없는 안도감이 뼛속의 한기를 서서히 녹여내렸다.
“괜찮아요, 레이너. 당신이…… 제 곁에 있으니까요.”
그녀는 겨우 힘을 내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차갑게 식어가는 암살자의 시신 앞으로 다가갔다. 사내의 품속을 뒤적이던 에밀리아의 손끝에 단단하고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걸렸다.
꺼내 든 것은 작은 흑철 통이었다. 통의 뚜껑 부분에는 기묘한 문양이 음각되어 있었다.
‘이것은…….’
에밀리아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눈더미 속 시신에서 발견했던 그 봉인 도장의 문양과 정확히 일치했다. 북부 우체국의 특수 암호 인장. 헬레나 에버스가 심어둔 내부 첩자가 아니고서는 결코 가질 수 없는 물건이었다.
서둘러 통을 열고 그 안에 든 가죽지를 펼쳤다. 거칠게 쓰인 글귀들이 에밀리아의 푸른 눈동자에 차갑게 박혀들었다.
[사냥개들을 풀었다. 공작 부부의 발을 동굴에 묶어두는 즉시, 성 내부의 동방 코어를 완전히 파괴하라. 북부의 심장을 멈추는 날, 가문의 영광이 네게 돌아갈 것이다.]
“……!”
에밀리아의 얼굴에서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 모든 것은 미끼였다. 자신과 레이너를 성 밖으로 유인해 내고, 그사이 성안에 남겨진 난방 마력 코어를 파괴하여 윈터가드 성 전체를 얼어붙은 무덤으로 만들려는 헬레나의 잔혹한 계략.
그 순간, 멀리 성이 있는 방향에서 하늘을 흔드는 거대한 진동이 동굴 벽을 타고 전해졌다.
쿵————!
나지막하지만 대지를 뒤흔드는 불길한 울림. 에밀리아의 품속에 있던 [상흔의 영지 장부]가 다시금 붉은 빛을 뿜어내며 기괴하게 울부짖기 시작했다. 성안에 두고 온 가신들과 영민들의 비명이, 보이지 않는 마력의 실을 타고 그녀의 귓가에 환청처럼 때려 박혔다.
“코어가…… 습격당했어.”
에밀리아가 입술을 깨물며 레이너를 바라보았다. 레이너의 얼굴 역시 차갑게 가라앉았다. 성안에는 아직 그들의 온기를 기다리는 수많은 영민들과 가신들이 남아 있었다.
어둠이 다시 한번 그들의 안식처를 집어삼키기 위해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