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하늘을 찢으며 날아간 붉은 마력의 궤적은 밤하늘에 길고 붉은 흉터를 남겼다. 북부의 차가운 대지 위로 피어난 황금빛 기적, 그리고 그 기적을 이뤄낸 에밀리아의 장부 마력이 고스란히 담긴 정보였다. 그것은 가혹한 동토를 가로질러 제국의 가장 화려하고 추악한 심장부, 에밀리아를 벼랑 끝으로 밀어 넣었던 전 약혼자 줄리안 카펠과 황태자의 귀로 고속 직행하고 있었다.

에밀리아의 입술 사이로 하얀 입김이 가늘게 새어 나왔다. 이 밤의 끝에서 시작될 새로운 폭풍을 예감하듯, 그녀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에밀리아.”

귓가를 스치는 것은 낮고 쓸쓸한, 그러나 온몸을 감싸 안을 만큼 뜨거운 목소리였다. 레이너가 그녀의 차가운 손을 기어이 쥐어 왔다. 화상으로 일그러져 거칠고 투박한 그의 손가락 사이로 타는 듯한 체온가 스며들었다. 가문의 잔인한 배신 이후, 그 누구의 손길도 온전히 믿지 못했던 에밀리아였지만 이 흉터투성이 사내의 열기만큼은 거부할 수 없었다. 오히려 물에 빠진 자처럼 그 온기를 향해 필사적으로 매달리게 되는 스스로가 낯설 만큼.

“……그들이 알게 되겠지요. 우리가 이곳에서 무엇을 일구어 냈는지.”

“알게 두십시오.”

레이너의 검은 눈동자가 밤하늘의 붉은 잔상을 삼킬 듯 깊게 가라앉았다.

“그것이 무엇이든, 내 영지를 넘어서 그대에게 닿지 못할 겁니다. 내가 있는 한…… 절대로.”

서정적이면서도 단호한 그의 맹세가 밤바람에 흩날렸다. 하지만 여운을 음미할 시간은 허락되지 않았다.

쿠구구구구—!

갑작스러운 지동이 발밑을 흔들었다. 동굴 벽면의 고드름들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단순한 지진이 아니었다. 대지를 타고 흐르는 살의, 그리고 뼛속까지 시리게 만드는 맹렬한 마력의 파동.

“공작 전하! 부인!”

동굴 입구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기사 이반 카터가 다급히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의 사나운 얼굴이 핏기 없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전쟁의 참화를 겪으며 마음의 병을 앓았던 그였기에, 이 비정상적인 마력의 압박은 남들보다 배는 더 끔찍하게 다가왔을 터였다.

“남쪽 협곡입니다! 거대 서리늑대 우두머리와 그 도당들이…… 장벽을 돌파했습니다! 영지 외곽의 정착촌을 향해 직진하고 있습니다!”

서리늑대. 영구동토의 가혹한 추위를 먹고 자라는 거대 마수였다. 그중에서도 우두머리급은 한 마리의 크기가 마차만 하며, 숨결 하나로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얼려 죽이는 움직이는 재앙이었다.

“정착촌에는 아직 대피하지 못한 영민들이 있습니다…… 어찌해야 합니까, 전하!”

이반의 목소리가 잘게 흔들렸다.

에밀리아는 품속에서 묵직한 마도 외장, [상흔의 영지 장부]를 꺼내 들었다. 장부를 펼치자, 얼어붙은 종이 위로 붉은색 경고등과 함께 글자들이 빠르게 명멸했다.

[재난 감지: 남쪽 협곡 돌파.] [침공 개체: 거대 서리늑대 우두머리 ‘펜릴의 후예’ 1부대 및 하위 도당.] [영지민 공포도: 85% (급상승 중)] [예상 피해 규모: 영민 사망자 수십 명 및 정착촌 가옥 완전 파괴.]

가슴이 차갑게 식어 내렸다. 에밀리아는 고개를 들어 레이너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이미 전장을 향해 가고 있었다.

“이반, 즉시 정예 기사단을 소집해 정착촌 외곽에 방어선을 구축해라. 단 한 마리도 민가로 진입하게 두어서는 안 된다.”

“존명!”

이반이 바람처럼 사라진 뒤, 레이너는 거친 가죽 장갑을 조여 매며 대검을 고쳐 잡았다. 에밀리아는 그의 옷자락을 가만히 움켜잡았다.

“저도 가겠어요, 레이너.”

“위험합니다, 에밀리아. 그곳은 살을 깎는 한기가 몰아치는 곳입니다.”

“장부가 말해주고 있어요. 이 마수들을 막지 못하면 우리가 이 땅에 내린 뿌리가 통째로 뽑힐 거라고요. 그리고…….”

에밀리아는 그의 일그러진 뺨에 조심스럽게 손을 얹었다. 그의 거친 흉터의 질감이 손가락 끝을 타고 아릿하게 전해졌다.

“당신이 다치는 것을 원치 않아요. 제가 곁에서 장부로 도울게요.”

레이너는 잠시 말을 잃은 듯 그녀를 응시했다. 그의 눈동자에 일렁이는 감정은 무척이나 서정적이고도 깊어서, 마치 겨울밤의 은하수를 담아둔 것만 같았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내 등 뒤를 맡기지요.”

* * *

남쪽 협곡 외곽은 이미 아수라장이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집채만 한 서리늑대 무리가 푸른 빛의 안개를 뿜어내며 날뛰고 있었다. 그들의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대지가 하얗게 얼어붙었고, 공기는 숨을 쉴 때마다 폐가 찢어질 듯한 통증을 유발했다.

“으아악! 괴물이다! 괴물이 나타났다!”

“살려줘! 집이 얼어붙고 있어!”

영민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고 있었다. 기사들이 방패를 맞대고 진형을 짰지만, 서리늑대 우두머리의 포효 한 번에 방패가 통째로 얼어붙어 깨져 나갔다. 압도적인 무력의 격차 앞에서 인간의 의지는 허망하게 부서지기 일쑤였다.

바로 그 순간, 정착촌을 덮치려던 우두머리 늑대의 앞길을 가로막는 거대한 그림자가 있었다.

검은 망토를 휘날리며 폭풍 속으로 걸어 들어온 사내, 레이너 윈터가드였다.

“공작 전하……?”

영민들이 절망 섞인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에 비친 레이너는 마수만큼이나 두려운 존재였다. 전신의 반 이상이 끔찍한 화상 흉터로 뒤덮인, 제국에서 조차 ‘괴물’이라 부르며 배척했던 철혈의 공작. 사람들은 그가 자신들을 구하러 왔다는 사실보다, 그의 괴기스러운 외양에 먼저 숨을 죽였다.

레이너는 그 시선들을 고스란히 느끼면서도 개의치 않았다. 그는 묵묵히 제 검을 뽑아 들었다.

스으으으……!

레이너가 거친 가죽 갑주를 일부 풀어헤쳤다. 그의 목덜미에서부터 가슴팍, 그리고 오른팔을 따라 길게 이어진 흉터들이 고스란히 밤공기 중에 노출되었다. 그 끔찍한 화상의 흔적들이, 돌연 푸른빛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한 화상이 아니었다. 과거 전쟁터에서 마수의 저주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새겨진, 동토의 마력을 지탱하는 신체적 매개체이자 마법 회로였다.

그의 흉터가 빛을 발할 때마다 주변의 온도가 급격히 내려갔다. 하지만 그것은 영민들을 해치는 한기가 아니었다. 오히려 서리늑대들의 마력을 억누르는 지고한 지배자의 기운이었다.

“크르르르……!”

우두머리 서리늑대가 본능적인 위협을 느끼고 레이너를 향해 달려들었다.

레이너는 피하지 않았다. 그는 흉터를 통해 대지의 동토 마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그의 대검에 서릿발 같은 검기가 어리더니, 공간을 가르며 가공할 위력으로 뿜어졌다.

쾅—!

대검과 늑대의 앞발이 충돌하며 엄청난 충격파가 일었다. 레이너는 밀리지 않고 오히려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의 전신에 새겨진 푸른 흉터들이 터질 듯이 요동치고 있었다. 그것은 엄청난 고통을 동반하는 일이었지만, 레이너의 표정은 한없이 고요했다. 마치 이 정도의 고통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에밀리아는 심장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저 남자는 저 흉터들을 지고 얼마나 외로운 싸움을 이어왔던 걸까.

그녀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에밀리아는 품에서 [상흔의 영지 장부]를 거칠게 펼쳐 들었다.

“나의 영지, 나의 백성들을 위협하는 상흔을 계량한다.”

서정적이고 투명한 그녀의 목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졌다. 장부의 페이지가 무서운 속도로 넘어가며, 서리늑대들의 마력 흐름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대상: 거대 서리늑대 무리.] [보유 한기 수치: 9,800.] [강제 변환을 시작합니다. 대상의 한기를 영지 자원으로 치환합니다.]

에밀리아가 장부 위로 손을 얹고 마력을 주입하자, 서리늑대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푸른 안개들이 강제로 뜯겨 나가듯 에밀리아가 들고 있는 장부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앙!”

우두머리 늑대가 비명을 질렀다. 자신들의 힘의 근원인 한기가 허공으로 증발하듯 사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치명적인 대가가 에밀리아의 온몸을 덮쳐왔다.

“아……!”

뼛속까지 얼어붙는 한기. 수천 마리의 얼음 가시가 혈관을 타고 흐르는 듯한 영적 통증이 에밀리아의 전신을 난도질했다. 그녀의 입술이 순식간에 보라색으로 변했고, 다리가 풀려 바닥으로 쓰러질 뻔했다. 이 장부의 힘은 타인의 상처와 마수를 치유하고 자원화하는 대신, 그 통증을 온전히 사용자가 감내해야만 하는 가혹한 댓가를 요구했다.

그녀의 시야가 하얗게 흐려지는 순간.

투박하고 거대한 손이 에밀리아의 허리를 강하게 감싸 안았다. 레이너였다. 그는 어느새 마수들의 포위망을 뚫고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 있었다.

“에밀리아!”

그가 그녀를 제 품으로 강하게 끌어당겼다. 레이너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타는 듯한 체온이 에밀리아의 차가운 몸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의 심장 박동이 그녀의 가슴팍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따뜻하다. 뼛속까지 얼어붙게 만들던 영적 통증이, 그의 무식할 정도로 뜨거운 체온과 밀착하는 순간 거짓말처럼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에밀리아는 본능적으로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레이너…… 한기를…… 막았어요. 이제 가요.”

“알겠습니다. 끝내지오.”

레이너는 에밀리아를 한 팔로 단단히 안은 채, 다른 한 손으로 대검을 고쳐 잡았다. 에밀리아는 장부를 향해 마지막 명령을 내렸다.

[흡수한 한기 9,800을 영지 중앙 난방 저장고로 송출합니다.] [송출 완료. 영지 내 온방용 유적 마력 코어의 효율이 200% 상승합니다.] [서리늑대 무리의 약화율: 80%.]

힘을 잃고 쇠약해진 서리늑대들은 더 이상 적수가 되지 못했다.

레이너의 대검이 밤하늘을 갈랐다. 푸른 흉터의 마력과 그의 가공할 검술이 결합되어, 단 한 번의 휘두름으로 우두머리 서리늑대의 목을 깔끔하게 베어 넘겼다.

스사사사사……!

우두머리가 쓰러지자 남은 도당들은 비명을 지르며 흩어져 달아났다. 전투가 시작된 지 채 10분도 되지 않은 순간이었다.

* * *

정착촌 외곽에 고요가 찾아왔다.

흩날리는 눈발 사이로, 괴물이라 불리던 공작과 낙인찍힌 공작부인의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레이너의 몸에 새겨진 흉터들은 여전히 은은한 푸른빛을 내뿜고 있었고, 그의 검 끝에서는 늑대의 검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평소라면 괴물이라며 침을 뱉고 도망쳤을 영민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의 눈빛은 이전과 달랐다.

“공작 전하가…… 우리를 구하셨어.”

어디선가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어서 한 노인이 무릎을 꿇으며 눈물을 흘렸다.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어…… 저 끔찍한 마수들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셨어!”

“전하! 공작부인 마마!”

사람들의 탄성과 감사의 연호가 가혹한 북부의 바람을 뚫고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들의 목소리에는 더 이상 공포나 혐오가 담겨 있지 않았다. 오직 진심 어린 경외와 감사만이 가득했다.

‘괴물’이라는 낙인이, 이 영지를 지키는 지고한 ‘가디언’이라는 지고한 수식어로 세탁되는 순간이었다.

레이너는 멍하니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늘 사람들에게 혐오만을 받았던 그의 흉터가, 이 땅의 사람들을 구원하는 열쇠가 되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 옅은 파동이 일었다. 그것은 평생을 외로움 속에서 살아온 이가 처음으로 느껴보는, 자긍심이라는 이름의 구원이었다.

에밀리아는 그의 품에서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보았지요, 레이너? 당신은 괴물이 아니에요. 이 땅의 수호자예요.”

레이너는 대답 대신 그녀를 더 깊이 안아주었다. 그의 품은 그 어떤 화롯가보다도 따뜻해서, 에밀리아는 이 순간만큼은 제국의 잔혹한 음모도, 가문의 배신도 모두 잊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구원의 기쁨도 잠시, 평화는 늘 가장 취약한 곳에서부터 금이 가기 시작하는 법이었다.

* * *

깊은 밤, 영지 내 북부 우체국의 고적한 뒷마당.

차가운 달빛만이 비치는 어둠 속에서, 한 인영이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낮에 동굴에서 흘려졌던 것과 동일한 문양이 새겨진, 북부 우체국의 특수 암호 봉인 도장이 들려 있었다.

스으으으……!

도장이 마법 종이 위로 찍히자, 붉은색 마력 신호가 작게 명멸했다. 인영은 후드를 깊게 눌러쓴 채, 제국 중앙을 향해 극비 통신 지령을 전송하기 시작했다.

[보고: 공작부인의 마도 장부 능력 확인됨. 서리늑대의 한기를 흡수해 영지 자원으로 변환함. 공작의 무력 역시 건재함. 빠른 시일 내에 감찰단을 파견해 장부를 회수해야 함.]

지령의 끝에 찍힌 붉은 인장은, 줄리안 카펠이 사적으로 조작해 보낸 불법 가밀 서신의 문양과 소름 끼치도록 일치하고 있었다.

전령 마법이 하늘로 날아가는 것을 바라보며, 후드 아래의 인물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에밀리아…… 네가 아무리 북부에서 발버둥 쳐봐야, 결국 가문의 손바닥 안이다.”

바람을 타고 흐르는 음산한 목소리가, 다가올 더 큰 폭풍을 예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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