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얼어붙은 침엽수림의 어둠 속에서 불길한 기운이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사나운 북풍이 요새의 외벽을 때릴 때마다 가신 바론 루드비히가 도주했던 자리에 남겨진 마력의 잔재가 스산하게 요동쳤다. 사흘이라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가 남긴 악의의 궤적은 공기 중에 흩어지지 않은 채 끈적한 자색의 실타래처럼 엉켜 있었다.
에밀리아는 성벽 끝에 서서 시린 바람을 정면으로 맞았다. 가냘픈 어깨 위로 얹힌 모피 망토가 거칠게 펄럭였지만, 그녀의 시선은 오직 허공의 한 점에 고정되어 있었다. 품속에 깊이 감춰둔 [상흔의 영지 장부]가 가슴뼈를 찌르듯 차가운 고동을 흘려보냈기 때문이다.
스스스스.
낡은 가죽 표지 사이에서 환청 같은 종이 소리가 들려왔다. 에밀리아가 장부를 꺼내 손끝을 얹자, 하얀 성에가 서린 페이지 위로 검붉은 잉크가 번져 나가며 숨겨진 수식들이 떠올랐다. 가신 바론이 도망치며 흘린 암흑 마법의 주파수였다.
“아직... 멀리 가지 못했어.”
에밀리아의 입술 사이로 새하얀 입김이 흩어졌다. 그녀의 눈동자가 장부의 표면을 훑는 동안, 뼛속을 파고드는 지독한 한기가 발끝에서부터 타고 올라왔다. 타인의 음모와 고통을 관측하는 대가였다. 심장이 얼음송곳으로 찔리는 듯한 통증에 에밀리아의 눈썹이 잘게 떨렸다.
그때, 뒤에서 다가온 커다랗고 단단한 손이 에밀리아의 차가운 손을 감싸 쥐었다.
타는 듯한 열기. 전신에 가혹한 화상 흉터를 품은 사내, 레이너의 온기였다. 그의 손바닥에 새겨진 거친 흉터의 질감이 에밀리아의 여린 살결에 맞닿는 순간, 그녀의 몸을 잠식하던 영적 한기가 거짓말처럼 사그라들었다.
“무리하지 마라, 에밀리아.”
레이너의 목소리는 낮고 묵직했다. 쇠사슬이 쓸리는 듯한 거친 음색이었지만, 그 안에는 물결치는 걱정이 담겨 있었다. 에밀리아는 그의 품으로 조금 더 깊이 몸을 기댔다. 그의 뜨거운 가슴팍에서 전해지는 고동이 그녀의 얼어붙은 감각을 서서히 깨웠다.
“바론이 도주하며 남긴 암흑 마법의 흔적을 장부로 스캔했어요. 이 기운의 파동은 영지 북서쪽, 우체국이 있는 마을 가도를 향해 뻗어 가고 있어요. 그곳에 어머니가 심어둔 또 다른 첩자가 있어요.”
에밀리아는 고통을 억누르며 장부의 페이지를 가리켰다. 장부 위에는 가신의 반역 모의로 인해 윈터가드 영지가 입은 보이지 않는 균열과, 그로 인해 증폭된 영민들의 불안감이 실시간으로 수치화되어 있었다.
[영지 오염도: 14%] [잠재적 변절 위험 감지: 우체국 가도]
레이너는 그녀의 어깨를 감싼 손에 힘을 주었다. 그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붉게 타올랐다.
“쥐새끼들이 이 땅에 둥지를 틀게 두지 않겠다. 그대가 밝혀낸 길이라면, 내가 그 끝을 잘라내지.”
그의 얼굴 절반을 뒤덮은 화상 흉터가 달빛을 받아 일그러진 음영을 만들어냈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괴물이라 부르며 고개를 돌렸지만, 에밀리아에게는 그 어떤 존재보다 든든한 방벽이었다.
두 사람은 즉시 말을 몰아 성문 밖, 시린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들판으로 향했다.
사위는 죽은 듯 고요했다. 오직 말발굽이 얼어붙은 흙바닥을 짓밟는 무거운 소리만이 간헐적으로 울릴 뿐이었다. 침엽수림의 가느다란 가지들이 바람에 부딪히며 뼈마디가 꺾이는 듯한 소리를 냈다.
그때였다. 에밀리아의 눈앞에 펼쳐진 장부의 레이더망에 붉은색 경고등이 격렬하게 깜빡였다.
위이이잉.
귀를 찢는 듯한 이명이 에밀리아의 머릿속을 강타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짙은 안개 속에서 검은 실루엣 하나가 소리 없이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일반적인 조류가 아니었다. 깃털 사이로 가느다란 마력의 실이 뿜어져 나오는, 제국 중앙의 비밀 전언 통신용 흑까마귀였다.
“저거예요! 정보를 전송하려 하고 있어요!”
에밀리아의 외침과 동시에 레이너가 말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의 거대한 체구가 균형을 잡는가 싶더니, 어깨 뒤에 매고 있던 검은 목궁을 순식간에 낚아챘다.
시위가 당겨지는 소리는 팽팽하다 못해 비명처럼 들렸다. 레이너의 굳게 다문 입술 사이로 거친 숨결이 뿜어져 나왔다. 전신 화상의 고통으로 인해 어깨 관절이 비틀릴 법도 하건만, 그의 조준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슈우우웅—!
어둠을 가르는 파공음과 함께 화살이 안개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찰나의 침묵 뒤, 숲속 저편에서 대기를 찢는 날카로운 비명이 들렸다. 툭, 하는 무거운 낙하음과 함께 검은 깃털 몇 개가 허공을 맴돌며 떨어졌다.
레이너는 말에서 내려 숲의 수풀 속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주저함 없는 발걸음 끝에, 화살에 가슴이 꿰뚫린 채 파르르 떨고 있는 흑까마귀가 있었다. 새의 발목에는 은색의 작은 가죽 통이 단단히 묶여 있었다.
에밀리아가 다가가 가죽 통을 풀고, 그 안에서 아주 얇은 양피지 서신을 꺼냈다. 서신을 밀봉한 붉은 왁스 인장을 보는 순간, 에밀리아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 문양은... 북부 우체국의 특수 암호 봉인 도장이에요.”
에밀리아의 손가락이 붉은 인장 위를 부드럽게 쓸었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지방 우체국의 직인이었지만, 장부의 마도 분석을 거치자 인장 내부에 숨겨진 가문의 가시 넝쿨 문양이 붉게 도드라졌다. 어머니, 헬레나 에버스가 고용한 첩자가 사용하는 특수 암호 도장이 분명했다.
“어머니는 이미 오래전부터 북부 우체국의 통신망을 사유화하고 있었던 거예요. 당장이라도 우리에 대한 조작된 정보를 황실에 보내 파멸시키려 했겠지요.”
에밀리아의 목소리에는 분노보다 깊은 환멸이 묻어났다. 늘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사지로 몰아넣었던 친모의 얼굴이 뇌리를 스쳤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당하고만 있는 무력한 영애가 아니었다.
“우리가 한발 앞섰군요, 에밀리아.”
레이너가 서신을 받아 쥐며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그의 강인한 손끝에서 양피지가 바스러지는 소리를 냈다.
“이것으로 저들의 목덜미를 쥘 첫 번째 고리를 쥔 셈이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장부의 과도한 마력 분석을 시도한 대가가 에밀리아의 육체를 덮쳤다.
“으윽...!”
에밀리아는 밀려드는 극심한 영적 통증에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전신에 얼음물이 흐르는 듯한 오한이 일었고, 손가락 끝이 보라색으로 변해가며 감각을 잃어갔다. 장부에 기록된 타인의 상처와 악의를 들여다본 대가는 언제나 가혹할 정도로 차가웠다.
레이너는 신속하게 그녀를 안아 올렸다. 그의 가슴팍은 타는 듯이 뜨거웠고, 그 열기만이 에밀리아가 숨을 쉴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성으로 돌아간다.”
그의 짧은 명령과 함께, 말발굽 소리가 다시 한번 얼어붙은 대지를 두드렸다.
***
성안의 공작 집무실은 벽난로에서 타오르는 장작 소리로 가득했다. 붉은 불꽃이 벽면의 거친 질감을 주황빛으로 물들였지만, 에밀리아의 몸은 여전히 잘게 떨리고 있었다.
침상에 걸터앉은 에밀리아는 이불을 덮고 있었지만, 영혼의 밑바닥에서부터 솟구치는 한기는 쉽게 가시지 않았다.
그때, 레이너가 셔츠의 단추를 풀며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추운 날씨 속에서 무리하게 활을 쏘고 말을 달린 탓인지, 그의 몸 역시 굳어 있었다. 넓은 어깨와 등줄기를 따라 얽히고설킨 붉고 검은 화상 흉터들이 차가운 공기 속에서 잔뜩 수축해 푸르스름한 빛을 띠고 있었다.
그의 피부는 가뭄에 갈라진 논바닥처럼 거칠었고, 통증으로 인해 그의 미간에는 깊은 골이 패어 있었다.
에밀리아는 떨리는 손을 뻗어 탁자 위에 놓인 작은 유리병을 집어 들었다. 북부의 특산물인 온열 약초를 정제해 만든, 온기가 가득한 약유(藥油)였다.
“이리 오세요, 레이너.”
에밀리아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고요한 방 안을 채웠다. 레이너는 잠시 머뭇거렸으나, 이내 그녀의 발치 아래 바닥에 천천히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의 거대한 체구가 그녀의 앞에 고개를 숙이는 모습은, 오직 그녀에게만 허락된 길들여진 야수의 모습과 같았다.
에밀리아는 약유를 손바닥에 덜어 비볐다. 마찰로 인해 약유의 달콤하면서도 매콤한 향이 방 안에 퍼져나갔다. 그녀는 따뜻해진 손가락을 레이너의 어깨 위에 조심스럽게 얹었다.
“아...!”
레이너의 입술 사이로 나직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의 단단하게 뭉친 화상 상흔 위로 에밀리아의 차가운 손끝이 닿자, 약유의 온기가 피부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기 시작했다. 에밀리아는 그의 날개뼈 주변, 가장 심하게 일그러진 흉터를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원을 그리며 문질렀다.
그녀의 손길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굳어 있던 흉터의 질감이 조금씩 유연해졌다. 레이너는 굳게 닫았던 눈을 천천히 뜨며, 자신의 상처를 혐오하지 않고 온전히 어루만지는 그녀의 눈빛을 응시했다.
“그대의 손이... 닿는 곳마다 불길이 꺼지는 것 같군.”
레이너의 목소리가 젖어 들었다.
“저 역시... 당신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 덕분에 살 것 같아요. 제 안의 얼음이... 녹아내리고 있어요.”
에밀리아는 대답하며 그의 목덜미와 턱 선을 따라 이어진 상흔까지 정성스럽게 약유를 발라주었다. 두 사람의 호흡이 붉은 벽난로의 불빛 아래에서 하나로 엉켰다.
일반적인 부부라면 서로의 가장 추악하고 아픈 곳을 숨기려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첫날밤부터 서로의 바닥을 보았다. 에밀리아는 레이너의 일그러진 외면을 구원했고, 레이너는 에밀리아의 얼어붙은 내면을 지탱했다. 서로의 결핍이 맞물려 완벽한 톱니바퀴를 이루는 순간이었다.
레이너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에밀리아의 뺨을 감싸 쥐었다. 거친 흉터가 가득한 그의 손바닥이 그녀의 부드러운 살결에 닿았을 때, 에밀리아는 눈을 감으며 그 온기를 물리치지 않고 받아들였다.
“그 누구도 우리의 안식을 방해할 수 없다. 제국의 황실이든, 에버스 가문이든... 내 손으로 전부 찢어발겨 주지.”
그의 맹세에는 광기와도 같은 집착이 서려 있었지만, 에밀리아에게는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속삭임이었다. 그녀는 레이너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대며 나직이 속삭였다.
“우리가 먼저 움직여야 해요. 첩자의 꼬리를 잡았으니, 이제 목줄을 조일 차례예요.”
***
다음 날 새벽, 윈터가드 성의 기사 대기실.
이반 카터는 무거운 철제 갑옷을 정돈하며 에밀리아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과거 전쟁의 트라우마로 매일 밤 공황에 시달리던 그였으나, 에밀리아가 장부의 치유력으로 그의 내면의 어둠을 씻어내 준 이후, 그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맑고 단단해져 있었다.
“여주인님, 부르셨습니까.”
이반의 목소리에는 깊은 경외심이 담겨 있었다.
에밀리아는 탁자 위에 북부 우체국이 위치한 마을의 지도를 펼쳤다. 그녀의 손가락이 우체국 뒤편으로 이어진 좁고 어두운 침엽수림 통로를 가리켰다.
“이곳이에요. 우체국을 통해 정보를 외부로 유출하려는 자들은 반드시 이 외곽 통로를 이용해 도주로를 확보할 것입니다. 이반, 기사단을 이끌고 이 통로를 은밀히 우회 배치하세요.”
이반은 지도를 유심히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첩자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소규모 정예로 움직이겠습니다. 하지만 만약 저들이 저항한다면 어떻게 할까요?”
에밀리아의 눈동자에 서늘한 광채가 서렸다.
“살려둘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그들의 배후가 에버스 가문과 연결되어 있다는 증거를 반드시 확보하세요. 내부 변절자의 목줄을 완전히 조여, 다시는 중앙의 쥐새끼들이 우리 영지를 넘보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여주인님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단 한 마리의 쥐새끼도 이 숲을 살아서 빠져나가지 못할 것입니다. 윈터가드의 방패로서, 영지를 위협하는 모든 악을 베어 넘기겠습니다.”
이반은 검자루를 꽉 쥐며 단호하게 맹세했다. 그의 가슴속에는 자신을 구원해 준 에밀리아를 향한 절대적인 충성심이 끓어 넘치고 있었다.
이반이 기사단을 이끌고 소리 없이 성문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며, 에밀리아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계획은 완벽했다. 한발 앞선 관측과 철저한 배치로 밀사들의 꼼수는 원천 차단될 것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에밀리아의 품속에서 [상흔의 영지 장부]가 미친 듯이 떨리기 시작했다.
파르르르르!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강력한 진동이었다. 장부의 가죽 표지가 스스로 열리더니, 페이지들이 폭풍에 휩쓸린 듯 거칠게 펄럭였다.
“...어?”
에밀리아의 입술에서 가느다란 신음이 새어 나왔다.
장부의 새하얀 종이 위로 갑자기 붉은 핏방울 같은 마력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 마력은 이내 글자가 되어 페이지를 가득 메웠다. 그것은 영지의 동태를 나타내는 수치가 아니라, 끔찍한 비명과 고통의 기록이었다.
[경고: 영지 경계 구역 내 이계 마력 반응 급증] [상흔의 깊이: 측정 불가] [대상: 전쟁 낙오병의 원혼 및 오염된 마력 코어]
이와 동시에, 성벽 너머 멀리 떨어진 마을 인근의 깊은 동굴 방향에서 스산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 바람 끝에는 지독한 피 비린내와 함께, 인간의 것이라 믿기 힘든 고통스러운 절규가 섞여 있었다.
“아아아아악—! 살려줘... 불길이... 몸이 타들어 간다...!”
환청이 아니었다. 대기를 타고 울려 퍼지는 그 절규는, 과거 전쟁터에서 버림받고 죽어갔던 낙오병들의 원혼이 섞인 이계 마력의 폭주 징후였다. 동굴 깊은 곳에서 정체불명의 붉은 마도가 하늘을 향해 거대한 기둥처럼 솟구쳐 오르는 것이 에밀리아의 시야에 똑똑히 들어왔다.
“레이너...!”
에밀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레이너의 이름을 부르며 뒤를 돌아보았다.
레이너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 있었다. 그의 눈동자가 과거의 참혹한 전장의 기억을 떠올린 듯 격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북부를 통째로 집어삼킬 듯한 새로운 어둠이, 그들의 안식처를 향해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