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된 부단장이 무릎을 꿇은 순간, 윈터가드 성을 오랫동안 지켜온 호위 기사 이반이 이 광경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의 갈색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시선 끝에 닿은 부단장 브론은 마치 신의 계시라도 받은 사제처럼, 땅바닥에 이마를 짓찧으며 흐느끼고 있었다. 사교계의 가시 왕관을 쓰고 쫓겨난 낙인녀가, 이 황폐한 북부의 철옹성에서 감히 기적을 행하고 있었다.
그것은 이반에게 구원이 아닌, 영악한 마녀의 주술처럼 보였다.
“……요물 같은 년.”
이반의 입술 사이로 검푸른 서리 같은 폭언이 새어 나왔다. 그의 거친 손이 허리춤에 매달린 커다란 대검의 자루를 움켜쥐었다.
스릉—!
얼어붙은 집무실의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쇳소리가 사납게 울렸다. 묵직한 강철의 궤적이 에밀리아의 목덜미를 향해 무섭게 쇄도했다. 살을 에는 듯한 검풍이 그녀의 뺨을 스쳤고, 흩날리는 보랏빛 머리카락 몇 가닥이 허공에서 맥없이 잘려 나갔다.
“이반! 당장 검을 거두지 못할까!”
레이너의 벼락같은 고함이 사방을 뒤흔들었다. 그의 전신에서 피어오른 붉은 마력이 이반을 집어삼킬 듯 팽창했다. 하지만 그것보다 빠른 것은 에밀리아의 움직임이었다.
그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매서운 칼날이 목뼈를 부수기 직전의 찰나, 에밀리아는 상체를 반 보 뒤로 가볍게 비틀었다. 대검의 옆면을 스치듯 비켜선 그녀의 발걸음은 춤을 추듯 우아했고, 기이할 정도로 고요했다.
“공작 부인의 목숨을 탐하는 것이, 윈터가드 기사의 충의입니까?”
그녀의 목소리는 맑고 시렸다. 에밀리아는 품속에 감춰진 [상흔의 영지 장부]를 가만히 움켜쥐었다. 가죽 표지를 통해 전해지는 기괴한 냉기가 그녀의 손끝을 타고 올라왔지만, 동시에 장부는 눈앞에 선 사내의 찢겨진 영혼을 투명하게 비추고 있었다.
[대상: 이반 카터] [상태: 전쟁 트라우마 (심각한 공환 발작 및 망령의 이명)] [상처 수치: 89%] [장부 분석: 전쟁 당시 지키지 못한 동료들의 비명소리가 영혼의 뼈대에 박혀 있음. 불신과 분노는 자책감을 감추기 위한 방어기제.]
에밀리아의 보랏빛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이반의 사나운 검날을 똑바로 바라보며, 오히려 그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갔다. 검끝이 그녀의 쇄골 바로 위, 얇은 살갗에 닿아 붉은 핏방울을 한 방울 자아냈다.
“비겁하게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이…… 아직도 당신의 밤을 지옥으로 만들고 있군요.”
“입 다물어……! 네가 뭘 안다고 그 더러운 입을 놀려!”
이반의 목소리가 사정없이 갈라졌다. 검을 쥔 그의 손이 눈에 띄게 떨리고 있었다. 사나운 맹수 같던 기사의 눈에 고인 것은, 걷잡을 수 없는 공포와 해묵은 슬픔이었다.
“매일 밤, 눈밭에 버려두고 온 동료들의 이름을 부르며 깨어나겠지요. 그들의 얼어붙은 손가락이 당신의 발목을 붙잡고 진흙탕으로 끌어내리는 환각 속에서…… 당신은 단 한 순간도 숨을 편히 쉬지 못했을 터입니다.”
“그만…… 그만해……!”
이반의 대검이 크게 흔들렸다. 에밀리아는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시린 칼날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흰 손가락 사이로 붉은 선혈이 배어 나와 차가운 강철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픔보다 더 강렬한 장부의 기운이 그녀의 전신을 관통했다.
“이반 경. 레이너를 지키기 위해 검을 들었다면, 당신 자신부터 구원해야 합니다. 윈터가드의 방패가 깨어져 있다면, 이 성은 영원히 겨울을 벗어나지 못할 테니까요.”
그녀의 나직한 음성이 이반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망령들의 비명소리를 단숨에 찢어발겼다.
에밀리아의 손바닥에서 흘러나온 은빛 마력이 이반의 검을 타고 그의 온몸으로 흘러들었다. 그것은 살을 에는 북부의 바람이 아니라, 이른 봄날 눈을 녹이는 아지랑이 같은 온기였다.
“아…… 아아…….”
이반의 입에서 짓눌린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의 가슴을 한계까지 압박하던 보이지 않는 사슬이 스르륵 풀려나갔다. 이십 년 세월 동안 귀가 먹먹하도록 울려 대던 전장의 비명소리가 거짓말처럼 잦아들었다. 고요함. 평생을 갈구했으나 단 한 번도 허락되지 않았던 깊은 안식이 그의 영혼을 따뜻하게 감싸 안았다.
철렁—!
무거운 대검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이반은 힘없이 무릎을 꿇었다. 그의 사나운 얼굴이 온통 눈물로 얼룩졌다. 거친 기사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에밀리아를 올려다보았다. 눈앞의 여인은 제국이 손가락질하던 낙인녀가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가장 어둡고 추악한 지옥에서 손을 내밀어 준 구원자였다.
“내가…… 내가 지은 죄가…… 사라진 것입니까……?”
“죄가 아닙니다, 이반 경. 당신은 그저 살아남아, 이 성을 지키는 의무를 다했을 뿐입니다.”
에밀리아의 부드러운 선언에 이반은 바닥에 엎드려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꼈다. 윈터가드 최고의 기사이자, 그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던 고집쟁이가 마침내 온전한 충성을 바치는 순간이었다.
“이 목숨…… 이제 공작부인 전하의 것입니다. 전하를 해치려는 자가 있다면, 내 영혼을 갈아 넣어서라도 그 목을 벨 것입니다…….”
[기적의 구원 완료.] [기사 이반 카터의 충성도 극대화: 윈터가드의 방패 활성화.] [영지 재정비 수치 대폭 상승.]
장부의 알림이 머릿속에 떠오름과 동시에, 에밀리아의 시야가 크게 흔들렸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지독한 한기가 발끝에서부터 심장을 향해 무섭게 치솟았다. 타인의 거대한 상처를 정화한 대가였다.
그녀의 몸이 힘없이 쓰러지려는 찰나, 묵직하고 뜨거운 품이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낚아챘다.
“에밀리아!”
레이너의 목소리에 담긴 절박함이 그녀의 귓가를 울렸다. 그의 타는 듯한 체온이 닿자마자, 심장을 얼려 버릴 것 같던 빙한이 조금씩 누그러들었다. 하지만 이번 한기는 평소보다 훨씬 깊고 지독했다. 영적 통증이 온몸의 신경을 난도질하는 감각에 에밀리아는 신음을 참으며 그의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괜찮아요, 레이너. 조금…… 조금 피곤할 뿐이에요.”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라. 몸이 불덩이 같지 않나.”
레이너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를 안아 들었다. 그의 뜨거운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에밀리아는 가늘게 숨을 내쉬며 의식을 유지하려 애썼다.
***
사흘 뒤.
이반의 정화 이후, 요새의 분위기는 눈에 띄게 달라졌다. 부단장 브론과 호위 기사 이반이 동시에 에밀리아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하자, 기사단 내부의 불신은 순식간에 종식되었다. 영민들 역시 공작 부인이 베푼 기적과 자비에 대해 조심스럽게 입을 모으기 시작했다.
에밀리아는 아직 가시지 않은 미열을 품은 채, 영지 정비를 위해 성문 앞의 우체국 현장으로 향했다.
영구동토의 가혹한 바람이 불어오는 길목, 낡은 목조 건물로 지어진 우체국은 영민들이 외부와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그녀는 걸음을 옮기며 몰래 품속의 장부를 펼쳤다.
[경고: 성벽 지하 고대 난방 마법석 코어 균열 상태.] [마력 불안정 수치: 85%]
‘코어의 균열이 더 심해지고 있어…….’
에밀리아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머지않아 북부에 불어닥칠 대혹한을 이겨내려면 이 고대 코어를 반드시 복구해야 했다. 장부에 기록된 이상 수치를 응시하며 해결 방안을 고민하던 그때, 우체국 구석에서 이상한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바스락—
낡은 편지함 뒤편, 짙은 회색 망토를 둘러쓴 사내가 에밀리아의 동태를 살피다 황급히 몸을 돌렸다. 기민하게 움직이는 꼴이 평범한 영민의 몸놀림이 아니었다.
“거기 멈추십시오.”
에밀리아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사내의 어깨가 움찔했다. 사내는 대답 대신 품에서 연막탄 같은 마도구를 바닥에 던지며 순식간에 창문 너머로 몸을 날렸다.
펑—!
매캐한 회색 연기가 우체국 내부를 가득 메웠다. 기사들이 기침을 하며 무기를 뽑아 들었을 때, 사내는 이미 차가운 침묵의 숲속으로 사라진 뒤였다.
“추격할까요, 전하?”
대기하던 기사가 묻자, 에밀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시선은 사내가 빠져나간 창틀 아래, 바닥에 떨어져 있는 작은 물건에 닿아 있었다.
붉은 밀랍을 녹여 봉인할 때 쓰는 무겁고 정교한 동제 도장이었다. 에밀리아가 그 도장을 집어 들어 바닥면을 확인했다. 기하학적인 문양과 함께, 에버스 후작가의 상징인 가시덩굴이 정교하게 음각되어 있었다.
‘어머니…… 결국 이곳까지 사냥개를 보내셨군요.’
그것은 헬레나 에버스가 고용한 첩자들이 사용하는 특수 암호 봉인 도장이었다. 에밀리아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걸렸다. 그녀는 도장을 손에 쥐고 장부를 활성화했다.
[아이템 식별 완료: 에버스 가문의 특수 암호 봉인 도장.] [장부에 기장합니다. 배신자의 흔적이 추적 경로에 등록되었습니다.]
“스스로 꼬리를 밟아 주시니 감사할 따름이네요.”
에밀리아는 도장을 품에 넣었다. 하지만 승리의 미소도 잠시, 사흘 전 이반을 정화하며 억눌러 두었던 장부의 부작용이 다시금 무서운 기세로 몸속에서 날뛰기 시작했다.
“윽…….”
시야가 급격히 어두워졌다. 허파 깊은 곳까지 얼음 송곳이 박히는 듯한 통증에 에밀리아는 가슴을 움켜쥐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입술이 퍼렇게 질리고, 숨결이 하얗게 얼어붙었다.
“전하! 공작 부인 전하!”
기사들의 경악 어린 외침이 멀어지며, 에밀리아는 깊은 어둠 속으로 추락했다.
***
눈을 떴을 때, 에밀리아가 마주한 것은 낯선 천장이 아니었다.
타오르는 벽난로의 붉은 불빛이 방 안을 아늑하게 밝히고 있었고, 사방에서 짙은 침엽수 향과 매캐하면서도 묵직한 가죽 냄새가 풍겨왔다. 레이너의 침실이었다.
“……깨어났나.”
낮고 갈라진 목소리가 머리맡에서 들려왔다.
에밀리아는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자신을 단단히 죈 거대한 온기 때문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레이너가 그녀를 품에 안은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의 넓은 가슴과 단단한 팔이 에밀리아의 가냘픈 몸을 완전히 덮고 있었다.
그의 상체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였다. 전장의 화마가 남긴 일그러진 화상 흉터들이 거친 질감으로 에밀리아의 뺨과 어깨에 닿았다.
일반적인 영애들이라면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을 흉측한 상처였지만, 에밀리아에게는 그 무엇보다 구원 같은 온기였다. 그의 살을 맞댈 때마다 뼛속을 갉아먹던 빙한이 거짓말처럼 녹아내렸기 때문이다.
“레이너…….”
“가만히 있어라. 아직 네 손끝이 차갑다.”
레이너는 그녀의 가녀린 손을 잡아 자신의 심장 부근에 가져다 대었다. 쿵, 쿵, 하고 울리는 정직하고 뜨거운 고동이 손가락 끝을 통해 전해졌다. 그의 붉은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 상처 입은 야수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내게 숨기는 것이 무엇이냐, 에밀리아.”
그의 목소리에 짙은 물기가 배어 있었다. 단순한 추궁이 아니었다. 그녀가 홀로 감당하고 있는 고통에 대한 애달픔과 외로움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질문이었다.
“그 장부를 쓸 때마다, 너는 죽어가는 것처럼 차가워져. 마치 온 세계의 겨울을 혼자 짊어진 것처럼…….”
에밀리아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레이너의 거친 흉터 위를 그녀의 하얀 손가락이 천천히 쓸어내렸다. 일그러지고 굳은 살갗의 감각이 다정하게 와닿았다.
“이것은 제가 치러야 할 대가예요, 레이너. 버려진 영혼들을 구하고, 우리가 안식할 수 있는 울타리를 만들기 위한…….”
“그 대가를 왜 너 혼자 치러야 하지?”
레이너가 그녀의 허리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그의 숨결이 에밀리아의 이마에 뜨겁게 닿았다.
“나를 이용해라, 에밀리아. 내 온도는 오직 너를 위해 끓는 것이다. 네가 추위에 떨 때마다, 내가 너를 태워서라도 따뜻하게 만들 테니…….”
그의 절박한 고백에 에밀리아의 심장이 크게 요동쳤다. 가문의 비정한 배신 이후, 그 누구의 호의도 믿지 않으려 마음의 빗장을 걸어 잠갔던 그녀였다. 하지만 눈앞의 괴물 공작은 그녀의 영혼 깊은 곳까지 들어와 온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바보 같은 사람.”
에밀리아는 나직하게 속삭이며 그의 가슴에 얼굴을 더 깊이 묻었다. 지독한 한기가 서서히 걷히고, 두 사람만의 아늑한 침묵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새벽녘 안개처럼 아릿하고 서정적인 온기가 두 사람을 포근히 감싸 안았다.
그렇게 서로의 상처를 맞댄 채 깊은 안식에 빠져들려던 찰나였다.
두우우우우—! 두우우우우—!
요새 전체를 뒤흔드는 거대하고 사나운 뿔나팔 소리가 정적을 잔인하게 찢어발겼다.
단순한 경보가 아니었다. 동토의 비명이라 불리는, 오직 영지가 파멸의 위기에 처했을 때만 울리는 최악의 경보음이었다.
레이너의 눈빛이 순식간에 차갑게 굳어졌다. 그가 침대에서 일어나 황급히 셔츠를 걸치는 순간, 집무실 문이 거칠게 열리며 이반이 들이닥쳤다. 그의 얼굴은 흙빛으로 질려 있었다.
“전하! 큰일났습니다!”
이반의 다급한 외침이 방 안에 무겁게 떨어졌다.
“북부 장벽을 넘어온 사나운 동토 급강하 몬스터들의 물결이…… 장벽 근처를 돌파해 성문 앞까지 밀려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