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면에 박힌 대검의 칼날이 미세하게 떨리며 자아내는 금속음이 정적을 찢었다.
차갑게 식어버린 공기 사이로 브론의 뺨을 타고 흐르는 핏방울이 바닥에 툭, 하고 떨어졌다. 붉은 선혈이 얼어붙은 석판 바닥에 닿는 순간, 에밀리아의 시야는 온통 핏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눈앞의 현실이 아니라, 오직 그녀의 영혼에만 각인된 마도 외장, ‘상흔의 영지 장부’가 보내오는 비명 같은 경고 때문이었다.
[!!초긴급 경고!!] [성벽 지하의 고대 난방 마법석 코어, 외부 충격에 의한 강제 폭주 시작.] [붕괴 잔여 시간: 172초.]
머릿속을 헤집는 이명과 함께 관자놀이가 터질 듯이 지끈거렸다. 에밀리아는 입술 안쪽을 깊게 깨물었다. 비릿한 혈향이 입안에 퍼지며 흐려지려던 정신을 억지로 붙잡아 주었다. 눈앞의 브론은 제 뺨에 흐르는 피를 손등으로 닦아내며, 공포에 질린 눈으로 벽에 박힌 대검과 레이너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브론의 비겁한 습격과 성 내부 수색 소동은 한낱 미끼에 불과했다. 진짜 목적은 이 요새의 심장이자, 영민들을 혹한으로부터 지켜주던 고대 난방 코어를 파괴하는 것. 황실이 보낸 쥐새끼들이 어둠을 틈타 지하 마력로에 손을 뻗친 것이 분명했다.
170초.
심장이 갈비뼈를 두드리는 소리가 이명처럼 귓가를 맴돌았다. 이 요새가 무너지면, 북부의 영민들은 물론이고 자신과 레이너 역시 대지에 몰아치는 영구동토의 한기 속에 매몰되어 죽음을 맞이하게 될 터였다. 찰나의 순간, 에밀리아의 보랏빛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떨리는 손가락을 옷자락 속으로 감추며, 오히려 브론을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
“부단장 브론.”
그녀의 목소리는 새벽녘 서리처럼 맑고도 시렸다.
“당신들이 무엇을 목적으로 이곳에 기어들어 왔는지, 내가 모를 거라 생각했습니까?”
“이, 이 무슨……! 감히 공작부인의 신분으로 제국 기사단을 모함하려 드는가! 우리는 그저 정당한 수색 권한을……”
“정당한 수색?”
에밀리아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비웃음이 섞인 나직한 웃음소리가 사방을 메웠다. 그녀의 뇌리 속에서 장부의 페이지가 거칠게 넘어가며, 브론의 이름 옆으로 붉은 글씨들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의 추악한 비밀들과, 그 몸을 갉아먹고 있는 은밀한 고통의 수치들이.
“성 내부의 겨울철 보급품을 몰래 빼돌려 남부의 상단에 팔아넘긴 대가로 얻은 금화 오백 닢. 그 대가로 영지의 아이들과 노인들은 굶주림과 추위 속에서 피를 토하며 죽어갔지요. 당신이 꽁쳐둔 보급품 창고의 비밀 열쇠가 지금 당신의 심장 바로 옆 안주머니에 들어있다는 사실을, 내가 증명해 보일까요?”
브론의 안색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그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리며 본능적으로 품바람을 막으려는 듯 가슴께로 손을 가져갔다. 주위에 서 있던 제국 기사단원들의 시선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에밀리아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쐐기를 박았다.
“그리고 어디 그뿐인가요?”
그녀는 브론의 오른팔을 차갑게 응시했다. 은빛 갑옷으로 단단히 무장된 팔이었지만, 미세한 떨림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전쟁터에서 얻은 저주. 밤마다 뼈마디가 얼어붙어 부서지는 듯한 만성 불치 신경통. 매일 밤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불면의 밤을 지새우고, 독한 진통제와 술 없이는 단 한 시간도 버티지 못하는 그 끔찍한 형벌을…… 당신은 지금 이 순간에도 억지로 내색하지 않으려 이 악물고 버티고 있지요.”
“네, 네놈이…… 그걸 어떻게……!”
브론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이 비밀은 오직 그 자신과 가문의 전담 의사만이 아는 치부였다. 전쟁 당시 입은 신경 손상으로 인해 오른팔 전체가 칼로 난도질당하는 듯한 만성 고통은, 그가 기사로서의 수명을 다했음을 보여주는 사형선고와 같았기에 철저히 숨겨온 비밀이었다.
[코어 폭주 붕괴 잔여 시간: 110초.]
장부의 붉은 경고음이 뇌리를 사정없이 때렸다. 에밀리아는 마른침을 삼켰다. 코어를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막대한 상흔의 치유력, 즉 장부의 정화 에너지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 에너지를 얻기 위해서는 눈앞에 있는 이 부패한 자의 고통을 강제로 추출해 장부의 자원으로 치환해야만 했다.
하지만 장부를 대대적으로 가동하는 순간 덮쳐올 영혼의 한기를, 과연 자신이 버텨낼 수 있을까.
두려움에 에밀리아의 호흡이 거칠어지던 그때, 등 뒤에서 타오르는 듯한 열기가 느껴졌다.
스윽.
레이너의 거대하고 단단한 손이 에밀리아의 떨리는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뜨거운 열기가 그녀의 차가운 뺨을 스쳤다. 레이너는 말없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반쪽 얼굴을 뒤덮은 참혹한 화상의 무자비한 흉터들.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괴물의 흔적이라 부르며 고개를 돌렸고, 사교계의 가식적인 이들은 침을 뱉었다.
하지만 에밀리아에게 이 흉터는, 이 얼어붙은 북부에서 자신을 유일하게 지켜주는 세상에서 가장 뜨겁고 고귀한 안식처였다.
에밀리아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그녀는 입술을 깨무는 대신, 가만히 까치발을 들어 레이너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의 얼굴에 새겨진 가장 거칠고 깊은 화상 흉터 자국 위에 천천히 자신의 입술을 맞추었다.
쪽.
짦은 마찰음과 함께 델 듯한 열기가 그녀의 입술을 타고 심장으로 흘러들었다. 레이너의 붉은 외눈이 경악으로 크게 확장되었다. 늘 무감각하고 이성적이었던 그의 숨결이 단숨에 흐트러지는 것이 느껴졌다. 에밀리아는 그의 일그러진 뺨에 입술을 댄 채, 나직하게 속삭였다.
“당신의 상처가…… 저를 살려요, 레이너.”
그것은 계약의 맹세이자, 서로의 연약함을 온전히 공유하는 그들만의 구원 의식이었다.
그 순간, 레이너의 가슴 속에서 타오르던 불꽃 같은 마력이 에밀리아의 전신으로 폭발하듯 흘러들어왔다. 장부의 제약인 한기를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가공할 수준의 열량이었다. 에밀리아의 보랏빛 눈동자가 신비로운 푸른빛의 마력으로 번뜩였다.
[상흔의 영지 장부, 강제 치환 모드 가동.] [대상: 브론의 만성 신경통.] [고통의 수치: 87. 정화 자원으로 변환을 시작합니다.]
에밀리아가 손을 뻗어 브론의 오른팔을 향해 허공을 움켜쥐었다.
“그 끔찍한 고통, 내가 가져가 주지요.”
“으, 으아아악!”
브론이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오른팔을 부여잡았다. 그의 갑옷 틈새로 푸른빛의 마도 불꽃이 스며 나오며, 뼈마디 깊숙이 박혀 있던 검붉은 독소와 고통의 응어리들이 허공으로 추출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평생 그를 괴롭히던 만성 불치의 신경통이 실체화된 마력의 덩어리였다.
“하지만 공짜는 아닙니다.”
에밀리아의 목소리에 서늘한 마력이 실렸다. 장부의 해독력이 브론의 전신을 관통하는 순간, 고통이 빠져나간 자리에 가공할 수준의 마력적 압박이 휘몰아쳤다.
빠드득! 빠득!
뼈마디가 어긋나고 으스러지는 듯한 불길한 파열음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브론의 골반과 치골 부위가 장부의 거대한 중력에 짓눌리며 바닥을 향해 꺾였다. 그의 우람한 체구가 무참하게 꺾이며, 석조 바닥에 무릎을 깊숙이 박았다.
쿵!
“끄아아아악! 내, 내 뼈가……!”
브론은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한 채, 마치 보이지 않는 거인의 발에 짓밟힌 것처럼 처참하게 바닥을 기었다. 기사단 부단장으로서의 오만한 기세는 흔적도 없이 조각나 있었다.
에밀리아는 브론에게서 추출한 순수한 고통의 마력을 장부의 페이지 속으로 흡수했다. 그리고 지체 없이 그 에너지를 성벽 지하의 고대 난방 마법석 코어로 쏘아 보냈다.
[정화 에너지 주입 완료.] [고대 난방 마법석 코어, 급격한 안정화 진행.] [폭주 정지. 잔여 시간 12초를 남겨두고 정상 복구되었습니다.]
머릿속을 찢어발기던 핏빛 경고등이 마침내 온화한 푸른빛으로 바뀌며 사라졌다. 성채 전체를 미세하게 흔들던 불길한 진동이 거짓말처럼 멈추었다. 요새의 심장이 다시금 정상적으로 고동치기 시작한 것이다.
“하아…… 하아……”
미션을 완료한 순간, 장부의 치명적인 대가가 에밀리아의 전신을 덮쳐왔다. 브론의 지독한 신경통을 흡수하고 코어를 정화한 대가로, 영혼이 얼어붙는 듯한 지독한 한기와 뼛속을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혈관을 타고 휘몰아쳤다.
입술이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렸고, 시야가 하얗게 바래갔다. 무릎의 힘이 풀리며 바닥으로 쓰러지려는 찰나.
덥석.
레이너의 넓고 단단한 가슴이 에밀리아의 몸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는 망설임 없이 그녀를 자신의 품 깊숙이 밀착시켰다. 에밀리아는 본능적으로 그의 단단한 어깨와 가슴팍에 매달렸다. 흉터가 가득한 그의 살결에서 전해지는 델 듯한 온기가, 그녀의 얼어붙은 심장을 서서히 녹여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거친 숨결이 얽히며 안개처럼 하얗게 피어올랐다. 레이너의 거친 손길이 에밀리아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체온을 나누어 주었다. 그의 심장이 터질 듯이 빠르게 뛰는 것이 에밀리아의 뺨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졌다.
방 안의 기사들은 그 압도적인 광경 앞에 완전히 압도당해 단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했다. 평생 낫지 않던 불치병의 고통에서 벗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영문 모를 마력의 압박에 짓눌려 바닥에 처참하게 무릎을 꿇고 있는 부단장 브론. 그리고 그 괴물 같던 공작이 한 여인을 품에 안고 세상에서 가장 서정적이고 절박한 눈빛으로 온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
바로 그 순간이었다.
쾅!
굳게 닫혀 있던 집무실의 목조 문이 거칠게 열리며, 한 남자가 안으로 들이닥쳤다.
“공작 전하! 성 내부의 마력 흐름이……!”
그는 윈터가드 성을 오랫동안 지켜왔으며, 에밀리아를 사교계의 첩자라 의심하여 격렬하게 적대시했던 호위 기사, 이반 카터였다.
이반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집무실 안을 바라보다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언제나 오만방자하게 굴던 제국 기사단 부단장 브론이 뼈가 꺾인 채 바닥에 무릎을 꿇고 덜덜 떨고 있었고, 그 중심에서 공작 부부가 서로를 구원하듯 뜨겁게 밀착한 채 기적 같은 마력의 여운을 뿜어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반의 거친 눈동자가 믿을 수 없다는 듯 경악과 혼란으로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반의 시선이 바닥에 처참하게 구겨진 채 신음하는 브론에게로 향했다. 제국 기사단에서도 악명 높은 강골이던 자가, 단 한 자루의 검도 맞부딪치지 않은 채 오직 숨결만으로 제압당해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이반의 목소리가 잘게 흔들렸다. 그의 오른손이 본능적으로 검자루를 꽉 쥐었으나, 차마 검을 뽑아 들지는 못했다. 집무실 안을 가득 채운 기이한 마력의 잔향과, 공작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흉포한 열기가 그의 이성을 짓누르고 있었다.
에밀리아는 레이너의 단단한 가슴에 뺨을 기댄 채,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뼛속까지 시려오는 한기가 폐부를 찌를 때마다 허연 입김이 잘게 흩어졌다. 레이너는 그녀의 가녀린 몸을 부서질 듯 품에 안은 채, 붉은 외눈으로 이반을 쏘아보았다. 그의 뜨거운 체온이 가죽 옷을 투과해 에밀리아의 얼어붙은 살결로 스며들지 않았다면, 그녀는 이미 영혼마저 동결되어 쓰러졌을 터였다.
“이반 경.”
에밀리아가 떨리는 입술을 열어 나직하게 불렀다. 서리 내린 풀잎처럼 가냘프지만, 결코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였다.
“그 검을 거두세요. 적은 내부가 아니라, 바로 당신들의 발밑에 있었습니다.”
“발밑…… 이라니요?”
“브론 부단장의 안주머니를 확인해 보십시오. 그가 감추려던 요새 보급품 창고의 비밀 열쇠와, 황실의 밀지가 그곳에 있을 것입니다.”
이반의 눈동자가 크게 팽창했다. 그는 망설이듯 무릎을 꿇은 채 신음하는 브론을 내려다보았다. 브론은 이미 만성적인 통증이 한순간에 뜯겨 나간 충격과, 뼈가 뒤틀린 극심한 고통에 절어 침을 흘리며 헐떡이고 있었다.
이반이 천천히 다가가 브론의 안주머니로 손을 뻗었다. 브론이 본능적으로 저항하려 했으나, 레이너가 대검의 손잡이를 가볍게 툭 치자 묵직한 마력이 대지를 울리며 그의 기세를 완전히 꺾어 놓았다.
바스락.
이반의 손끝에 걸려 나온 것은 차가운 쇳덩이 열쇠와, 두껍게 접힌 양장 서신이었다. 서신의 겉면에는 붉은 밀랍이 단단히 봉인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봉인을 바라보던 에밀리아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장부가 그녀의 뇌리 속에서 차가운 밤안개처럼 푸른빛을 뿌리며 정보를 갱신했다.
[!!이상 징후 감지!!] [서신에 날인된 인장은 제국 황실의 공식 문양이 아닙니다.] [특수 암호화된 위장 봉인 도장. 출처: 북부 변방 우체국.]
‘북부 우체국……?’
중앙의 황실이 보낸 밀사인 줄 알았건만, 그 배후의 끈은 이미 북부의 가장 깊숙한 생활 밀착 공간까지 뻗어 있었다. 에밀리아는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가문의 어머니, 헬레나 에버스의 자애롭고도 잔혹한 미소가 안개 너머로 겹쳐 보이는 듯했다. 어머니는 이미 북부의 눈과 귀를 장악하고 그녀의 목을 조를 준비를 마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이반이 서신의 봉인을 확인하고는 얼굴을 굳혔다. 그 역시 북부의 베테랑 기사였기에, 황실 기사단의 부단장이 북부 사설 우체국의 비밀 인장이 찍힌 서신을 품고 있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배신자 놈들이 기어코 성채의 심장에 손을 댔더군.”
레이너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방 안의 공기를 얼려버렸다. 그의 거친 손가락이 에밀리아의 젖은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쓸어 넘겼다. 그의 손길은 투박했으나, 그 안에는 행여나 그녀가 깨질까 두려워하는 섬세한 온기가 깃들어 있었다.
“그들이 지하 마력로를 폭주시키려 했다. 내 부인이 온 힘을 다해 막지 않았다면, 지금쯤 이 성채는 빙하 밑으로 영원히 매몰되었을 것이다.”
이반의 시선이 에밀리아에게로 향했다. 사교계의 가시 왕관을 쓰고 쫓겨온 가냘픈 영애. 가문의 배신으로 낙인찍힌 가짜 공작부인이라 생각했던 그녀의 전신에서, 방금 전 요새를 구원한 거대한 마도의 잔향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거짓이나 음모 따위로 흉내 낼 수 있는 종류의 힘이 아니었다.
그 순간, 이반의 거친 호흡이 턱 하고 막혔다.
전쟁터의 불길 속에서 동료들이 비명을 지르며 타 죽어가던 환영이, 그의 뇌리를 잔인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찢어지는 듯한 이명과 함께 그의 손끝이 눈에 띄게 떨리기 시작했다. 전쟁 트라우마로 인한 공황 발작의 전조였다. 그는 가슴을 움켜쥐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에밀리아는 레이너의 품에 안긴 채, 이반의 일그러진 얼굴을 바라보았다. 장부의 페이지가 그의 시선 끝에서 조용히 넘어가며, 이반의 영혼에 아로새겨진 참혹한 상흔의 깊이가 붉은 수치로 명확하게 계량되어 나타났다.
[대상: 이반 카터.] [상흔: 심연의 전장 트라우마(환청 및 공황 발작).] [고통 수치: 94. 구원을 향한 잠재적 신뢰도: 35%...]
그 역시 영혼이 찢겨 나간 아픈 짐승에 불과했다. 자신을 향해 칼날을 겨누던 그 날카로운 불신은, 상처받지 않기 위해 온몸의 가시를 세운 방어기제였으리라. 에밀리아는 가만히 레이너의 가슴팍을 밀어내며 자립하려 했다. 하지만 레이너는 그녀의 허리를 더 단단히 감싸 안으며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무리하지 마라. 아직 네 몸이 얼음처럼 차갑다.”
“괜찮아요, 레이너. 당신이 곁에 있으니까…….”
에밀리아는 그의 품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대신, 그의 한쪽 팔에 몸을 기댄 채 이반을 향해 시선을 맞추었다. 그녀의 깊고 고요한 보랏빛 눈동자가 이반의 흔들리는 갈색 눈동자를 꿰뚫었다.
“이반 경. 밤마다 귓가를 맴도는 그 비명소리를, 나는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지키지 못했던 그 눈밭의 영혼들이 당신의 발목을 붙잡고 부르고 있겠지요.”
“당신이…… 당신이 그걸 어떻게……!”
이반의 이가 딱딱 맞부딪쳤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영주인 레이너에게조차 숨겨왔던 영혼의 치부였다.
“상처를 숨기는 것은 구원이 되지 못합니다. 내가 기회를 주지요. 이 요새를 지키고, 당신의 잃어버린 영혼을 되찾을 기회를.”
그녀의 목소리는 차가운 밤공기 속에서 피어오르는 모닥불처럼 아늑하고도 아릿한 여운을 남겼다. 이반은 짓눌린 가슴을 움켜쥔 채, 그녀의 눈빛 속에서 기이한 안식처를 발견한 듯 멍하니 멈춰 섰다. 불신으로 가득 찼던 그의 눈동자에 균열이 가며, 깊은 경외감이 싹트기 시작했다.
바로 그 찰나였다.
쿠구구구궁—!
요새 지하 깊은 곳에서가 아닌, 성문 너머 먼 지평선에서부터 대지를 뒤흔드는 불길한 진동이 다시금 시작되었다. 방금 전의 마력 폭주와는 다른, 거대하고 조직적인 철갑의 군세가 몰고 오는 무거운 파동이었다.
집무실의 창문 틈새로 들이치는 바람이 별안간 흉포하게 울부짖었다. 밤하늘을 가득 메운 먹구름 사이로, 은색 서리가 요새의 창문을 순식간에 하얗게 뒤덮어 가기 시작했다.
이반이 황급히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들어갔다.
“전하…… 제국 감찰관의 깃발입니다. 예정보다 사흘이나 빠릅니다.”
어둠을 뚫고 다가오는 무수한 횃불의 행렬. 그 선두에는 에밀리아를 잔인하게 버리고 도망쳤던 전 약혼자이자, 탐욕스러운 황실의 사냥개인 줄리안 카펠의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진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동시에 에밀리아의 품속에서 장부가 이전과는 다른, 기괴할 정도로 차가운 암흑의 빛을 뿜어내며 경고를 울렸다.
[위기 경보.] [제국의 낙인 집행관이 요새의 경계를 침범했습니다.] [숨겨진 배신자의 덫이 성문 내부에서 작동하기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