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손끝에서부터 시작된 감각의 마비는 잔인할 정도로 빨랐다.

허파 깊숙한 곳까지 스며든 빙하의 파편들이 숨통을 짓눌렀다. 은빛 서리가 속눈썹 끝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얼어붙는 착각이 들 만큼, 몸속의 피가 한순간에 투명한 얼음 결정으로 화하는 감각. 농부들의 피 맺힌 탄식과 이반 카터의 찢어지는 비명이 뇌리를 헤집을 때마다, 에밀리아의 가슴팍에는 보이지 않는 송곳이 박히는 듯했다.

“아, 윽…….”

목구멍을 긁고 나오는 소리는 비명조차 되지 못했다.

바닥에 닿은 뺨으로 석조 성벽의 날 것 그대로의 냉기가 사정없이 밀려들었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한기는 단순한 물리적인 추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영혼의 밑바닥을 얼려 버리는, 장부가 하사한 가혹한 형벌의 무게였다. 시야가 붉고 검은 얼룩으로 번져 가며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그때였다.

쾅!

두꺼운 참나무 문이 부서질 듯한 굉음을 내며 열린 것은, 에밀리아의 의식이 완전히 암전되기 직전의 찰나였다.

달빛마저 얼어붙은 어둠을 가르고 거친 그림자가 방 안으로 들이닥쳤다. 폭풍처럼 몰아치는 바람과 함께 방 안으로 난입한 사내는 사나운 맹수의 기색을 사방으로 뿌렸다.

“에밀리아!”

벼랑 끝에서 굴러떨어지는 돌멩이처럼 낮고 거칠게 갈라진 목소리.

레이너 윈터가드였다. 그는 침소의 이변을 감지한 듯, 검을 쥔 손을 뻗으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바닥에 쓰러진 채 사지를 바르르 떨고 있는 그녀를 발견한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밤눈이 어두운 방 안에서도 그의 한쪽 눈은 붉은 불꽃처럼 형형하게 번뜩였다.

“이게 무슨…… 몸이 왜 이리 차가운 거지?”

그의 커다란 손이 에밀리아의 어깨를 붙잡았다. 닿는 순간, 레이너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손끝에 닿은 그녀의 살결은 살아 있는 인간의 것이라 믿기 힘들 만큼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마치 영구동토에 방치된 대리석 조각 같았다.

에밀리아는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 필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마비된 손가락이 그의 단단한 손등을 스쳤다.

뜨거웠다.

그의 전신을 덮은 화상의 흉터 아래, 억눌려 있던 맹렬한 체온이 살결을 뚫고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얼어 죽기 직전의 조난자가 발견한 유일한 모닥불과도 같았다. 본능이 이성을 앞섰다. 에밀리아는 그 뜨거운 열기를 향해 제멋대로 떨리는 몸을 밀어 넣었다.

“레이너…… 제발…….”

애원하는 듯한 가냘픈 목소리가 그의 귀가에 닿았다.

레이너의 미간이 좁아졌다. 사태의 원인을 파악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검을 바닥에 던져 버리고, 에밀리아의 가녀린 몸을 가슴팍으로 거칠게 끌어당겨 안았다.

두 사람의 살결이 거칠게 맞물렸다.

레이너의 품은 마치 용암이 끓어오르는 대지처럼 뜨거웠다. 전쟁터의 화염이 여전히 그 살결 아래 살아 숨 쉬는 듯, 일그러지고 굳은살이 박인 짙은 화상의 상흔들 사이로 믿을 수 없을 만큼 맹렬한 열기가 흘러나왔다.

“흐윽……!”

에밀리아는 그의 셔츠 깃을 움켜쥐며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일반적인 영애들이라면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을 흉측한 화상의 질감. 그러나 지금 에밀리아에게 그 가혹한 흉터들은 세상을 구원할 유일한 구원의 밧줄이었다. 그녀는 얼굴을 그의 목덜미에 비벼대며 그가 토해내는 뜨거운 숨결을 들이마셨다.

기적 같은 변화가 일어났다.

그의 거친 피부에서 흘러나오는 체온을 흡수하는 순간, 전신을 난도질하던 극심한 오한이 거짓말처럼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뼛속을 채우고 있던 은빛 서리가 사르르 녹아내리며, 차갑게 식었던 혈관에 다시금 뜨거운 피가 돌기 시작했다.

머릿속에서 붉게 점멸하던 장부의 경고등이 점차 차분한 푸른빛으로 안정을 찾아갔다. 영민들의 피눈물 섞인 비명과 이반 카터의 절규가 안개처럼 흩어지고, 그 자리에 고요한 평온이 찾아왔다.

“……하아, 하아…….”

에밀리아는 그의 품에 안긴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지독한 형벌 끝에 찾아온 안식은 달콤했고, 그녀의 뺨에는 서서히 붉은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레이너는 품 안에 안긴 가녀린 신음 소리를 들으며 몸을 굳혔다.

자신의 추악한 흉터에 이토록 절박하게 매달리는 존재는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모두가 혐오하고 피하던 전신의 화상 자국을, 그녀는 마치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온기라도 되는 양 온몸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그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정체 모를 감정의 소용돌이가 쳐 올라왔다.

“조금 더…… 더 안아 주세요…….”

에밀리아가 웅얼거리며 그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레이너는 대답 대신 그녀의 허리를 더욱 강하게 감싸 안았다. 그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얇은 잠옷 너머로 척추를 따라 쓸어내릴 때마다, 타는 듯한 체온이 그녀의 몸 구석구석으로 스며들었다.

그렇게 한참을 서로의 숨결만을 공유하던 침묵 속에서, 마침내 안정을 찾은 에밀리아의 영혼 너머로 장부의 새로운 페이지가 스스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스스스슬.

뇌리 속에서 투명한 푸른빛의 선들이 어둠을 가르고 뻗어 나갔. 장부는 단순히 인간의 상처만을 기록하는 도구가 아니었다. 영지의 황폐함마저 수치화하는 마도 외장답게, 에밀리아의 뇌리 속에 윈터가드 성 전체의 입체적인 설계도가 선명하게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 시선은 차가운 성벽을 뚫고, 어두운 석조 계단을 지나, 성벽 중앙 지하 깊숙한 곳으로 빠르게 파고들었다.

그곳에는 먼지 쌓인 고대의 잔해가 잠들어 있었다.

[경고: 성벽 중앙 지하 고대 난방 마법석 코어의 미세 균열 감지.] [마력 누수율: 42%] [상태: 영적 한기로 인한 기능 정지 상태. 이대로 방치할 경우, 다가오는 대혹한기에 요새 전체가 빙결되어 영민의 80%가 사망할 위험 존재.]

에밀리아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번뜩였다.

성 전체를 얼어붙게 만드는 침묵의 원인이 바로 저곳에 있었다. 균열이 가 깨지기 직전인 고대의 난방 코어. 그것은 영지의 생명줄이자, 동시에 다가올 파멸의 뇌관이었다.

‘이것줄 알았어…….’

에밀리아는 본능적으로 그 좌표를 장부의 깊은 수첩 속에 등록했다. 뇌리 속에 붉은색 표식과 함께 난방 코어의 정밀한 상태가 각인되었다. 지금 당장은 손을 쓸 수 없지만, 이 정보는 머지않아 이 가혹한 북부에서 자신들의 입지를 다질 가장 완벽한 카드가 될 것이 분명했다.

의식이 현실로 돌아오자, 여전히 자신을 단단하게 감싸 안고 있는 레이너의 뜨거운 가슴바위가 느껴졌다.

에밀리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대비되는 두 사람의 얼굴. 한쪽은 사교계의 비정한 낙인에 상처 입은 창백한 영애였고, 다른 한쪽은 전장의 불길 속에서 살아 돌아온 괴물 공작이었다.

“……이제 좀 살 것 같군요.”

에밀리아가 낮게 속삭이며 그의 굳은살 박인 뺨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화상으로 인해 일그러진 피부의 질감이 손가락 끝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졌다. 보통의 귀족 영애라면 소름 끼쳐 했을 그 감촉이, 그녀에게는 오직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안도의 감각이었다.

레이너는 그녀의 손길에 뺨을 기댔다. 그의 붉은 눈동자에 짙은 갈망과 혼란이 뒤섞여 일렁였다.

“그대의 몸이 왜 그렇게 식어 가는지 물어도 되겠나.”

“이것이 제가 치러야 할 대가예요.”

에밀리아는 숨기지 않았다. 두 사람은 계약을 맺을 때 서로의 연약함을 투명하게 공유하기로 맹세했다. 위장은 황실을 속이기 위한 도구일 뿐, 그들의 내면은 그 어떤 부부보다 굳건한 정신적 공생 관계로 출발했으니까.

“타인의 고통을 읽고, 그들을 구원하는 대가로…… 저는 그들이 앓았던 영혼의 한기를 온몸으로 감내해야 해요. 오직 당신의 뜨거운 체온만이, 그 한기를 잠재울 수 있는 유일한 약이에요.”

레이너의 호흡이 순간 멎었다.

그녀가 자신을 필요로 하는 이유가 단순히 계약의 이행 때문이 아니라는 것. 오직 자신만이 그녀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열쇠라는 사실이 그의 가슴을 세차게 흔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고 혐오스러운 흉터라 여겼던 자신의 육체가, 그녀에게는 목숨을 구하는 유일한 안식처가 된다는 역설.

그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으며, 동시에 맹렬한 살기로 채워졌다.

“그렇다면 그대를 아프게 하는 자들을 내 손으로 직접 찢어 죽이겠다.”

그의 목소리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었다. 황실의 비열한 음모로 낙인찍혀 이곳으로 유배당한 에밀리아. 그녀를 이 지경으로 몰아넣은 제국의 쓰레기들과 에버스 가문의 인간들이 떠오르자, 레이너의 이글거리는 분노가 방 안의 공기를 무겁게 가라앉혔다.

“내 몸의 흉터가 그대를 살릴 수 있다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기꺼이 내어주지. 하지만 그대를 해치려 드는 자들은…… 단 한 명도 살려두지 않겠다.”

그것은 피로 맺은 맹세였다. 에밀리아는 그의 가슴에 이마를 대며 작게 미소 지었다. 비정한 세상 속에서, 마침내 서로만을 위한 가장 완벽하고 안전한 울타리를 찾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평온함도 잠시였다.

쿵, 쿵, 쿵!

성 내부를 울리는 거칠고 무례한 발소리가 복도 저편에서부터 급박하게 다가왔다.

에밀리아의 뇌리 속 장부가 갑작스럽게 붉은 경고등을 켜며 격렬한 경고음을 울려댔다.

[위험: 적대적 인물의 급습.] [침입자의 적의 깊이: 89] [대상: 윈터가드 기사단 총관 및 중앙 황실 감시단 일부.]

“공작 전하! 황실의 칙령에 따라 성 내부의 불법적인 마도 무기 수색을 실시하겠습니다! 문을 여십시오!”

문밖에서 들려오는 사납고 오만한 목소리.

아직 북부의 완벽한 장악이 끝나지 않은 틈을 타, 중앙의 첩자들과 결탁한 기사단 총관이 기습적인 수색을 빌미로 방 안까지 들이닥친 것이었다.

레이너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차가운 살의로 물들었고, 에밀리아의 눈앞에 있는 장부의 붉은 경고음은 더욱 요란하게 고막을 찢을 듯 울려 퍼졌다.

거칠게 덜컹이는 문고리 너머로 쇠붙이가 부딪치는 서늘한 마찰음이 밀려들었다.

방 안의 공기는 순식간에 빙점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레이너의 품에서 겨우 온기를 되찾아가던 에밀리아의 살결에 다시금 잘게 소름이 돋아났다. 그의 가슴팍을 움켜쥔 그녀의 손가락끝에 힘이 들어갔다.

레이너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몸을 타고 흐르는 기류가 조용히 일변했다. 뺨을 타고 흐르는 그의 숨결이 한층 낮고 무거워졌으며, 가슴팍에서 박동하는 심장은 마치 전장의 북소리처럼 묵직하게 울렸다.

스르릉.

바닥에 떨어져 있던 그의 대검이 차가운 석조 바닥을 쓸며 들려 올려졌다. 화상 자국으로 뒤덮인 그의 오른손이 검자루를 거칠게 움켜쥐자, 검신을 따라 검푸른 마력이 불꽃처럼 일렁였다. 당장이라도 문을 부수고 나가 침입자들의 목을 베어 넘길 기세였다.

“레이너.”

에밀리아가 그의 옷깃을 가볍게 잡아당겼다.

그녀의 목소리는 새벽 안개처럼 낮고 차분했다. 레이너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붉게 타오르는 그의 외눈이 의문을 담은 채 흔들리고 있었다. 에밀리아는 그 눈빛을 피하지 않고, 여전히 온기가 남아 있는 그의 손등 위로 자신의 창백한 손을 겹쳐 올렸다.

“칼을 쓰는 것은 가장 마지막이어야 해요. 저들이 바라는 것은 공작 전하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황실의 가솔들에게 검을 휘두르는 명분이니까요.”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푸른빛의 장부가 다시 한번 빠른 속도로 정보를 토해내고 있었다.

[대상: 북부 주둔군 부단장 ‘브론’ 외 황실 감시단 12명] [적의 깊이: 89 (중앙 에버스 가문과의 비밀 연신 교환 흔적 감지)] [약점 및 상흔: 7년 전 ‘차디찬 계곡’ 전투 당시 아군을 버리고 퇴각한 비겁의 낙인. 내부 기사들의 불신도: 72%]

장부의 책장이 머릿속에서 스르륵 넘어가며, 브론이라는 사내가 숨기고 있는 추악한 치부가 에밀리아의 시야에 선명하게 드러났다. 에밀리아의 입꼬리가 가늘게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비정한 가문에서 살아남기 위해 배웠던 것은 가식적인 미소였고, 이제 그녀는 그 미소를 칼날로 바꿀 준비가 되어 있었다.

“제가 나설게요. 당신은 내 뒤에서, 가장 든든한 장벽이 되어 주세요.”

레이너는 그녀의 단호한 눈빛을 가만히 응시했다. 이 가녀린 여인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한기에 질려 쓰러져 가던 약자였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눈빛은 그 어떤 철갑을 두른 기사보다도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대의 뜻대로.”

레이너가 검 끝을 바닥으로 내리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그의 손은 여전히 검자루를 단단히 쥔 채였고, 그의 거대한 그림자는 에밀리아의 등 뒤를 완벽하게 뒤덮어 보호하고 있었다.

쾅!

마침내 버티지 못한 문고리가 부서져 나가며 육중한 참나무 문이 활짝 열렸다.

문밖에는 붉은색 황실 문양이 새겨진 가죽 갑옷을 입은 사내, 브론이 거만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의 뒤로는 횃불을 든 황실 감시단과 험악한 기색의 기사들이 도열해 있었다. 브론은 방 안의 가라앉은 분위기를 살피며, 비열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공작 전하, 그리고 에버스 영애. 깊은 밤에 무례를 범해 송구합니다만, 성 내부에 금지된 중앙 마도 공학 물품이 반입되었다는 제보가 있어서 말입니다. 황실의 안전을 위해 이 방을 수색해야겠습니다.”

그의 시선이 에밀리아의 침대 머리맡에 놓인 낡은 가죽 장부로 향했다. 그 눈빛에는 숨길 수 없는 탐욕과 비장함이 서려 있었다. 에밀리아의 어머니, 헬레나 에버스가 보낸 첩자의 사주를 받은 것이 틀림없었다.

에밀리아는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와 그들 앞으로 걸어 나갔. 얇은 잠옷 차림이었지만, 그녀의 걸음걸이에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뒤에서 받쳐주는 레이너의 뜨거운 온기가 그녀의 척추를 타고 흐르며 영혼을 단단하게 지탱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색이라니요, 브론 부단장.”

에밀리아의 목소리가 텅 빈 복도를 차갑게 울렸다.

“북부의 주인인 윈터가드 공작의 침소에, 일낱 주둔군 부단장이 황실의 허울 좋은 핑계를 대며 무단으로 침입하는 것이 제국의 법도입니까? 아니면…….”

그녀가 브론의 코앞까지 다가서며 목소리를 한층 더 낮추었다.

“7년 전, ‘차디찬 계곡’에서 동료들의 시신을 밟고 혼자 살아 돌아왔던 그 비겁한 행태가 이곳 북부에서는 기사도의 법도인 모양이지요?”

순간, 브론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그의 뒤에 서 있던 주둔군 기사들의 눈빛이 순식간에 흔들렸다. 그 전투는 북부 기사단에게 있어 지울 수 없는 가장 참혹한 비극이자, 브론이 영웅으로 포장되어 고속 승진을 하게 된 계기였기 때문이다. 그것이 비겁한 도망의 결과였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입 밖에 내지 못한 금기였다.

“그, 그것이 무슨……! 미친 소리를!”

브론이 당황하여 검자루를 잡은 손을 부르르 떨었다.

“미친 소리인지 아닌지는, 당시 전사했던 제3분대 기사들의 유가족들에게 물어보면 알겠지요. 그들이 매달 받는 위로금의 절반이 누구의 비밀 금고로 흘러 들어갔는지도 함께 말이에요.”

에밀리아의 붉은 입술이 조용히 속삭였다. 장부가 가리킨 수치와 정보는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브론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흘러내렸다. 뒤에 서 있던 북부 기사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커지기 시작했다.

“이, 이 요사스러운 계집이……!”

이성을 잃은 브론이 에밀리아를 향해 손을 치켜든 그 순간이었다.

파앗!

바람을 가르는 파열음과 함께, 레이너의 대검 끝이 브론의 목덜미 바로 옆 석조 벽면에 깊숙이 박혔다. 콰광! 소리와 함께 석재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고, 브론의 뺨 위로 붉은 피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레이너가 천천히 에밀리아의 옆으로 걸어 나왔다. 그의 거대한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살기가 방 안 전체를 지배했다. 그의 붉은 외눈이 브론의 심장을 꿰뚫을 듯 번뜩였다.

“내 부인에게서 그 더러운 손을 치워라, 브론.”

목소리만으로도 뼈가 저려오는 공포가 사방을 압도했다. 브론은 단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한 채,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었다.

상황은 완전히 에밀리아와 레이너의 페이스로 넘어온 듯했다. 비열한 침입자들을 기선 제압하고 그들의 치부를 드러내어 완벽한 반격을 가하려던 그 찰나.

스스스스스—!

에밀리아의 품속에서 잠자코 있던 영지 장부가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격렬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푸른빛으로 안정되었던 뇌리 속 시야가 순식간에 핏빛으로 물들며, 고막을 찢을 듯한 날카로운 경고음이 울려 퍼졌다.

[!!초긴급 경고!!] [성벽 지하의 고대 난방 마법석 코어, 외부 충격에 의한 강제 폭주 시작.] [붕괴 잔여 시간: 180초.] [원인: 침입자들에 의한 지하 마력로 고의 훼손 및 폭파 장치 가동.]

에밀리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브론의 습격은 단순한 방 수색이 아니었다. 이들의 진짜 목적은 따로 있었던 것이다. 방 안을 수색하는 척 시선을 끄는 사이, 지하에 숨겨진 요새의 심장을 완전히 파괴하려는 황실의 음모.

“이런…… 비겁한 자들이 기어코…….”

이 요새가 무너지면, 북부의 영민들은 물론이고 자신과 레이너 역시 영원한 한기 속에 매몰되어 죽음을 맞이하게 될 터였다. 째깍거리는 파멸의 시계 소리가 에밀리아의 머릿속을 잔인하게 헤집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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