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바람 끝에 매달린 서리는 칼날보다 날카로웠다.

마차의 삐걱거리는 바퀴음이 멈춘 곳은 제국의 가장 어두운 변방이자, 영구동토의 가혹한 비명이 끊이지 않는 윈터가드 성의 절벽 끝이었다. 에밀리아 에버스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가죽 장갑을 고쳐 쥐며 마차 문을 열었다. 문틈 사이로 왈칵 밀려드는 공기는 허파를 얼려 버릴 것처럼 차갑고 건조했다. 사방을 둘러싼 침묵은 무덤의 그것과 닮아 있었고, 하늘은 잿빛 물감을 흩뿌려 놓은 듯 잔뜩 흐려 있었다.

이곳이 그녀의 새로운 감옥이자, 마지막 피난처였다.

황실과 중앙 사교계는 이 가혹한 북부의 요새로 그녀를 밀어 넣으며 속죄양이라 불렀다. 가문의 더러운 암투와 전쟁 범죄의 오명을 독박 쓰고 쫓겨나던 날, 어머니 헬레나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조근조근 속삭였었다.

‘가문을 위해 죽어 주렴, 에밀리아. 그것이 네가 태어난 유일한 가치란다.’

핏줄이라는 이름의 잔혹한 쇠사슬은 그녀의 등 뒤에 낙인을 새겼다. 사교계의 우아한 영애들은 그녀를 향해 침을 뱉었고, 한때 미래를 약속했던 약혼자 줄리안은 가장 먼저 등을 돌려 그녀의 몰락을 비웃었다. 가시 왕관을 머리에 얹은 채 맨발로 쫓겨난 그녀가 도달한 곳은 결국 ‘괴물’이라 불리는 사내의 품이었다.

에밀리아는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성벽의 틈새마다 음울한 마수의 손톱자국과 불에 그을린 검은 상흔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마치 웅크린 야수의 뼈대 속에 들어선 것처럼, 성 내부의 공기는 기괴할 정도로 무겁고 식어 있었다.

높고 어두운 대문을 지나 알현실로 들어서는 발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다만 가슴속 깊은 곳에서 정체 모를 떨림이 잔물결처럼 번져 나갈 뿐이었다.

“더 가까이 오지 않는 것이 좋을 텐데.”

어둠이 짙게 가라앉은 방의 안쪽, 거대한 석조 왕좌에 걸터앉은 실루엣이 나직하게 읊조렸다. 쇳소리가 섞인, 그러면서도 기묘하게 낮고 서정적인 목소리였다.

에밀리아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구두 굽 소리를 규칙적으로 울리며 어둠을 향해 걸어갔다. 창문 틈으로 새어 든 희미한 달빛이 남자의 얼굴을 가로질렀을 때, 그녀는 숨을 삼키는 대신 눈을 가만히 가늘게 떴다.

소문은 거짓이 아니었다.

남자의 오른쪽 얼굴과 목덜미, 그리고 옷소매 사이로 언뜻 드러난 손등은 온통 뒤틀리고 일그러진 화상 흉터로 뒤덮여 있었다. 전장에서 마수의 불길에 휩싸여 얻었다는 그 흉터들은 붉고 검은 질감으로 살죽을 파고들어, 마치 살아 있는 저주처럼 꿈틀거리는 듯했다. 사교계의 영애들이라면 비명을 지르며 기절했을 법한 기괴한 외양. 그의 주변에는 지독한 전장의 비린내와 영혼을 얼려 버릴 것 같은 한기가 서려 있었다.

레이너 윈터가드. 윈터가드의 주인이자, 제국이 버린 괴물 공작이 그곳에 있었다.

“내 몰골이 무섭지 않은 모양이군, 에버스 영애.”

레이너가 잔인하게 비틀린 입술을 끌어올리며 비웃었다. 그의 눈동자는 깊고 어두운 심연을 닮아 있었고, 그 안에는 오랜 시간 동안 쌓여 온 트라우마와 불신이 날카로운 유리 파편처럼 번뜩이고 있었다. 그는 에밀리아가 자신을 혐오하며 달아나기를 바라는 것처럼, 일부러 흉측하게 일그러진 손을 뻗어 보였다.

“제국에서 온 나비가 머물기엔 이곳은 너무 춥고 추악하지. 당장이라도 울부짖으며 가문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나?”

그의 음성에는 짙은 경계심과 함께, 스스로를 고립시키려는 처철한 외로움이 묻어났다.

에밀리아는 그가 내뿜는 압도적인 한기 속에서도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그녀의 시선은 그의 얼굴에 머물렀다. 혐오도, 가식적인 동정도 없었다. 오직 거울을 보듯 서로의 깊은 상처를 응시하는 투명한 눈빛뿐이었다.

“돌아갈 곳 따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공작 대인.”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맑았다.

“그리고 저는 겉포장만 화려한 사교계의 위선자들에게 질려 이곳으로 왔습니다. 당신의 그 상흔이 제게는 가식적인 황실의 미소보다 훨씬 정직해 보이는군요.”

“정직하다라…….”

레이너가 헛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 에밀리아는 주저하지 않고 손을 뻗었다. 가죽 장갑을 벗어 던진 그녀의 맨손이, 레이너의 화상으로 일그러진 거칠고 뜨거운 손등 위로 망설임 없이 내려앉았다.

살갗과 살갗이 닿는 순간, 레이너의 신체가 눈에 띄게 굳었다.

그의 손은 전장의 참화 속에서 타들어 간 탓에 가혹할 정도로 거칠었고, 굳은살과 흉터의 질감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에밀리아는 그 불쾌할 수도 있는 감촉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손가락 사이를 옭아매듯 그의 손을 힘주어 맞잡았다.

“이 손으로 북부를 지키셨겠지요. 괴물이라는 낙인은 황실이 제멋대로 붙인 가면에 불과합니다. 제게 찍힌 낙인처럼 말입니다.”

따뜻했다.

그의 전신을 감싼 한기와 달리, 흉터투성이 손에서 흘러나오는 체온은 기묘할 정도로 뜨거웠다. 마치 얼어붙은 대지 아래에서 끓어오르는 용암처럼, 그의 내면은 여전히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레이너는 닿아오는 그녀의 부드럽고 가녀린 손길을 밀쳐내지 못했다. 그의 눈동자에 서려 있던 불신이 경악과 알 수 없는 갈망으로 뒤틀렸다.

“……미쳤군. 나를 보고도 손을 잡다니.”

“미치지 않고서야 이 북부의 끝까지 오겠습니까? 우리는 서로가 필요합니다.”

에밀리아는 맞잡은 손에 더욱 힘을 실었다.

“황실은 우리 두 사람을 한곳에 묶어 감시하고, 결국에는 소리소문없이 말라 죽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당신을 괴물로 고립시키고, 저를 범죄자로 낙인찍어 북부 요새에 파묻으려는 것이 그들의 계산이지요.”

레이너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며 에밀리아의 손을 마주 쥐어 왔다. 거칠고 투박한 손아귀의 힘이 가늘어 부서질 것 같은 그녀의 손뼈를 옥죄었지만, 에밀리아는 신음 한 자락 내지 않았다.

“황실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 줄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에밀리아의 단호한 선언에 레이너의 입가에 묘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계약 결혼…… 황실을 속이기 위한 허울 좋은 위장이 필요하겠지. 하지만 영애, 나와 엮인다면 그 대가는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이다. 나는 언제 폭주할지 모르는 괴물이다.”

“대가는 두렵지 않습니다. 제게 필요한 건 가문도, 황실도 침범할 수 없는 온전한 우리만의 울타리입니다. 공작님의 그 가혹한 온기가 저를 지켜줄 방패가 되어 준다면, 저 또한 당신의 가장 견고한 성벽이 되어 드리지요.”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얽혔다.

불타는 고통 속에서 외롭게 짓눌려 있던 사내와, 비정한 배신 속에서 마음을 닫아걸었던 여인. 그들의 조우는 비록 황량한 북부의 얼어붙은 성실이었으나, 맞잡은 손끝에서 흐르는 온기만큼은 그 어떤 벽난로보다도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좋다.”

레이너가 마침내 나직하게 읊조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이 기묘한 혼약을 받아들이겠다는 묵직한 맹세가 담겨 있었다.

“이 계약은 황실의 눈을 가리기 위한 무기다. 하지만 우리 사이에는 그 어떤 거짓도 없어야 할 것이다. 내 흉터와 내 어둠을 감당하겠다고 한 그 말을, 부디 후회하지 않기를 바라지.”

“후회는 제 사전에 존재하지 않는 단어입니다.”

에밀리아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그의 손을 놓아주었다. 손끝에 남은 그의 뜨거운 열기가 아쉬운 듯 맴돌았으나, 그녀는 품위를 잃지 않고 우아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 * *

결혼 계약을 성사시킨 후, 에밀리아는 시종의 안내를 받아 성의 안쪽에 마련된 개인 침실로 안내받았다.

방 안은 차가웠다. 벽난로가 타오르고 있었지만, 석조 성벽을 뚫고 들어오는 영구동토의 한기를 완전히 몰아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시종이 문을 닫고 나가자, 방 안에는 오직 바람이 창문을 두드리는 음산한 소리만이 가득찼다.

에밀리아는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긴장이 풀리자 뼛속까지 스며드는 피로감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이제 시작이야. 이곳에서 살아남아, 나를 버린 가문과 황실에 반드시…….’

그녀의 생각이 채 정리되기도 전이었다.

웅—.

머릿속을 날카롭게 찌르는 이명이 발생했다. 단순한 두통이 아니었다. 시야가 흐려지며 눈앞의 공간이 왜곡되기 시작했다.

빛바랜 잿빛의 마도 장막이 허공에 서서히 펼쳐졌다. 그것은 책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가죽 표지 위에는 고대어로 ‘상흔의 영지 장부’라는 글자가 붉은 낙인처럼 박혀 있었다.

“이건……?”

에밀리아가 당혹감에 손을 뻗자, 장부가 스스로 스르륵 소리를 내며 펼쳐졌다.

그것은 평범한 기록장이 아니었다. 종이 위에는 숫자로 표시된 기묘한 데이터들이 스스로 살아 움직이듯 기록되고 있었다.

[영지 기초 정보: 윈터가드 성] - 영민 고통 지수: 89/100 (극도의 기아 및 전쟁 트라우마 상태) - 영지 토지 황폐도: 92% (마기 침식 및 마력 코어 균열) - 가동 자원: 없음 (전쟁 생존자들의 영혼 이탈 직전)

[구원 대상 감지] - 대상: 북부 주둔 기사 ‘이반 카터’ 외 84명 - 상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전쟁의 악몽에 의한 영적 잠식 상태 - 슬픔의 깊이: 78 (추출 가능한 구원 자원: 정예병의 충성심 및 투기)

장부의 책장이 거칠게 넘어가며, 북부 영민들의 고통 어린 피눈물이 에밀리아의 뇌리로 직접 흘러들어왔다.

굶주림에 지쳐 얼어 죽어가는 어린아이들의 신음, 전쟁의 참화 속에서 동료의 시신을 보며 울부짖는 기사들의 절규, 황폐해진 땅에서 자라지 않는 곡식을 보며 절망하는 농부들의 피맺힌 탄식이 가슴을 난도질했다.

“아, 윽……!”

에밀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을 움켜쥐었다.

단순히 환영을 보는 것이 아니었다. 타인의 상처와 고통을 수치화하고 인지하는 대가로, 그들이 앓았던 참혹한 영적 통증이 그녀의 영혼으로 고스란히 전이되고 있었다.

뼛속까지 얼어붙는 지독한 한기가 발끝에서부터 타고 올라왔다. 온몸의 피가 순식간에 차갑게 식어 내리는 감각. 심장이 타들어 갈 듯한 극심한 오한이 그녀의 전신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상흔의 영지 장부’를 다루는 자에게 내리는 가혹한 대가이자 제약이었다. 타인의 슬픔을 치유하고 자원화할 때마다, 그들의 고통과 한기를 온몸으로 감내해야 하는 형벌.

“흐윽, 아……!”

사지가 단단하게 굳어 가며 감각이 마비되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허파가 얼어붙어 찢어질 것 같은 통증이 몰려왔다. 에밀리아는 침대 기둥을 붙잡으려 했으나, 제멋대로 마비된 손가락은 힘을 잃고 허공을 저었다.

쿵.

그녀의 몸이 차가운 석조 바닥으로 사정없이 고꾸라졌다.

시야가 급격히 어두워졌다. 바닥에 기대어 누운 뺨으로 전해지는 성의 한기는 몸속에서 소용돌이치는 영적 한기와 결합해 그녀를 죽음의 문턱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머릿속에 떠오른 장부의 숫자들이 붉게 점멸하며 경고음을 울려댔다. 가슴속 심장이 얼어붙어 멈추기 일보 직전의 순간, 에밀리아의 뇌리에 오직 한 사람의 존재가 떠올랐다.

‘레이너…… 윈터가드…….’

그의 뜨거웠던 손등의 감촉. 전신의 흉터 아래에서 이글거리던 괴물 공작의 그 맹렬한 체온만이, 이 죽음의 혹한을 잠재울 수 있는 유일한 열쇠였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홀로 방에 갇힌 채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얼어붙은 시야 너머로 문손잡이가 멀어 보였다. 에밀리아는 점차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차가운 바닥 위로 쓰러진 채 거친 숨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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