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서릿발이 몰아치는 성벽 위로 검은 안개가 뱀처럼 기어올랐다. 요새의 지맥을 뒤흔들며 날카로운 파열음을 내뿜는 사제의 주술. 해골 가면 너머로 비치는 광기 어린 눈동자가 윈터가드의 심장부를 겨누고 있었다. 발밑에서부터 레이너의 선대 가주가 남긴 부러진 대검의 봉인이 부서지는 진동이 전해졌다.

"거기까지다."

레이너의 목소리가 얼어붙은 대기를 낮게 긁었다.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온 붉은 투기가 사나운 괴수의 포효처럼 몰아치며 검은 마력을 정면으로 가로막았다.

폭풍의 한가운데 선 사제는 기괴하게 뒤틀린 지팡이를 짚은 채 큭큭대며 웃었다. 그 웃음소리는 낡은 가죽이 쓸리는 듯 쓸쓸하고도 불쾌한 소리였다.

"어리석은 낙인의 공작이여……. 그 일그러진 육신으로 제국의 권능을 직접 마주하려 하는가. 네 발밑에서 썩어가는 선대의 유산이 비명을 지르는 것이 들리지 않는가 보군."

사제의 가느다란 손가락끝에서 뻗어 나온 검은 번개가 성채의 갈라진 틈새를 파고들었다. 지맥의 저류를 타고 흐르는 어둠은 요새 지하 깊은 곳, 윈터가드의 영혼이 깃든 부러진 대검의 봉인을 무자비하게 갉아먹고 있었다. 그 반동으로 레이너의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해묵은 낙인이 요동쳤다. 사막의 밤처럼 뜨겁고, 혹한의 새벽처럼 시린 불길이 전신을 휩쓸었다.

과거의 망령들이 귓가에 속삭였다. 불타는 전장에서 전우들을 잃고 홀로 살아남았던 그 비참한 밤의 기억. 타버린 살가죽의 냄새와 피비린내가 코끝을 찔렀다. 레이너의 거친 손가락이 대검의 손잡이를 쥔 채 미세하게 떨렸다. 다친 왼쪽 다리가 납덩이처럼 무거워지며, 그의 온몸을 바닥으로 끌어내리려 했다.

바로 그때, 시리도록 차가우면서도 한없이 부드러운 손길이 그의 거친 손등 위에 포개어졌다.

"……레이너."

낮은 읊조림과 함께 에밀리아가 한 걸음 다가왔다. 그녀의 눈앞에 떠오른 '상흔의 영지 장부'가 붉은빛을 뿜어내며 밤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장부를 가동하는 대가로 뼛속까지 스며드는 한기가 에밀리아의 하얀 뺨을 창백하게 물들였지만, 그녀의 눈동자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의 손길을 타고 흐르는 지독한 한기는 레이너의 가슴속을 태우던 트라우마의 불길을 차분하게 식혀주었다. 동시에 레이너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뜨거운 열기가 에밀리아의 영혼을 갉아먹던 동결의 고통을 부드럽게 녹여 내렸다.

서로의 결핍이 맞닿아 비로소 온전한 온기가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더는 그 가짜 낙인에 흔들리지 마세요. 당신은 괴물이 아니며, 이곳은 당신이 지켜낸 당신의 영토입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새벽안개를 헤치고 들려오는 등대의 종소리와 같았다. 혼돈으로 가득했던 레이너의 푸른 눈동자가 제 빛깔을 찾았다. 망령들의 비명은 사라지고, 오직 눈앞에 서서 자신을 지탱해 주는 여인의 숨결만이 선명하게 와닿았다.

"……그래, 내게는 돌아갈 안식처가 있지."

레이너의 입술 사이로 나지막한 다짐이 새어 나왔다. 그는 더 이상 흉터투성이인 자신의 과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에밀리아가 어루만져 준 그 상처는 이제 그를 무너뜨릴 약점이 아니라, 지켜야 할 이를 위해 벼려진 가장 단단한 갑옷이었다.

에밀리아는 레이너의 손을 잡은 채, 성벽 아래에서 동요하고 있는 제국군 기사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사제의 사악한 주술과 요새의 공명에 질려 주춤거리던 적들의 눈동자에 의혹이 서려 있었다.

그 타이밍을 에밀리아는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소매 안쪽에서 낡았지만 황실의 인장이 성명히 찍힌 양장 서류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제국의 기사들이여! 너희가 따르는 대업의 실체가 무엇인지 똑똑히 보아라!"

그녀의 맑고 서늘한 목소리가 마력의 파동을 타고 전장에 널리 퍼졌다.

"여기에 있는 서류는, 전 사찰단 줄리안 카펠이 사적으로 황실 인장을 도용해 군수 자금을 횡령하고 이를 감추기 위해 북부 영지에 누명을 씌우려 했던 불법 가밀 서신이다! 너희는 황제의 고결한 뜻이 아니라, 탐욕에 찌든 기회주의자의 사리사욕을 위해 이 추운 북부까지 와서 피를 흘리고 있는 것이다!"

서재를 정리하던 날 찾아내어 가슴속 깊이 품어두었던 완벽한 카운터 자료. 줄리안이 저지른 반역의 증거가 에밀리아의 손끝에서 붉은 마법 광막으로 허공에 거대하게 투사되었다. 서신에 정교하게 조작된 인장과 횡령 경로, 그리고 북부를 제물로 삼으려 했던 악랄한 계획이 기사들의 눈앞에 낱낱이 밝혀졌다.

기사단 내부에서 거대한 동요의 웅성거림이 터져 나왔다.

"이럴 수가…… 우리가 반역자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었다는 말인가?" "황실의 정당한 정벌이 아니었단 말인가!"

기사들의 창끝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사제의 주술로 억지로 고조되었던 군세의 결속력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지는 순간이었다.

사제의 해골 가면 뒤로 이가 갈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잔재주를 부리는구나, 에버스 가문의 버려진 년이……! 기껏해야 낙인찍힌 죄인들의 연대 따위로 신의 섭리를 거스를 수 있을 줄 알았더냐!"

사제가 지팡이를 거칠게 내리찍자, 대지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장벽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공간 자체를 왜곡시키는 듯한 불길한 어둠의 결계였다.

하지만 에밀리아는 흔들림 없이 장부를 넘겼다. 장부의 페이지가 빠르게 넘어가며 황금빛과 붉은빛의 마력이 레이너의 전신으로 흘러들었다.

`[상흔의 영지 장부 가동: 대상 '레이너 윈터가드'의 신체 조건 분석 완료.]` `[좌측 하지의 손상으로 인한 무게중심의 편향율 14%. 해당 각도를 최적의 회전축으로 전환합니다. 가해지는 반동을 마력 버프로 상쇄합니다.]`

에밀리아의 입술이 살포시 열렸다.

"레이너, 당신의 절름발이 걸음은 결코 약점이 아니에요. 그 어긋난 무게중심こそ가 적의 허점을 찌를 가장 예리한 궤적이 될 것입니다."

레이너는 그녀의 말을 이해했다. 그는 더 이상 균형을 잡기 위해 억지로 애쓰지 않았다. 오히려 왼쪽 다리에 실리는 비대칭적인 무게를 그대로 받아들이며 대검을 비스듬히 눕혔다.

"바람을 갈라라."

에밀리아의 속삭임과 동시에 레이너가 대지를 박차고 도약했다.

그의 움직임은 정형화된 기사단의 검술과는 달랐다. 비대칭적이고 거칠며, 오직 실전과 생존만을 위해 다듬어진 괴수의 움직임. 하지만 장부의 정밀한 계산과 결합한 그의 궤적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사제의 방어 결계 가장 취약한 연결부로 빨려 들어갔다.

붉은 투기를 두른 대검이 허공을 크게 호를 그리며 떨어져 내렸다.

*쿠웅—!*

천지를 뒤흔드는 충격음과 함께, 결코 깨지지 않을 것 같던 사제의 검은 결계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거미줄처럼 사방으로 뻗어 나가던 금빛 틈새 속으로 레이너의 붉은 마력이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말도 안 돼……! 이 정도의 정밀함과 위력이 어떻게 저런 몸에서……!"

사제가 경악에 가득 찬 비명을 질렀지만 이미 늦어 있었다.

레이너의 대검은 결계를 두 동강 내며 단숨에 찢어발겼다. 붉은 서릿발을 머금은 검끝이 사제의 가슴팍을 거침없이 관통했다.

"커헉……!"

사제의 구역질 나는 검은 피가 차가운 눈밭 위로 흩뿌려졌다. 레이너는 일말의 자비도 없이 검을 회수하며, 힘을 잃고 쓰러진 사제의 목을 붉은 서리 칼자루로 가차 없이 짓눌렀다.

그 압도적인 위용과 전율적인 무투에, 후방에서 대기하던 제국군의 잔당들은 완전히 얼어붙었다. 자신들이 신뢰하던 최강의 사제가 단 한 격에 무참히 베여 나가는 모습을 본 기사들은 무기를 내려놓고 패닉에 빠져 사방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전장에 고요함이 찾아왔다.

에밀리아는 장부의 가동을 멈추고 비틀거렸다. 전신을 엄습하는 영적인 통증과 차가운 한기가 그녀의 의식을 흐려놓으려 했다. 하지만 넘어지기 직전, 단단하고 뜨거운 품이 그녀의 허리를 안아 올렸다.

"에밀리아."

레이너의 거친 흉터가 닿는 곳마다 기적처럼 뜨거운 온기가 전해지며 한기를 밀어냈다. 에밀리아는 그의 가슴에 이마를 기댄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끝…… 났나요?"

"그래. 우리가 이겼다."

레이너의 목소리에 깊은 안도와 애정이 서려 있었다.

그러나 안도감은 그리 오래지 않았다. 쓰러진 사제의 품속에서 기이한 보랏빛 광채가 흘러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스스스슥—*

사제의 품에서 은색 원통이 굴러 나오더니, 그 안에서 마력으로 짜인 영문 서류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것은 단순한 종이가 아니었다. 원격으로 마력을 전수하고 통신하는 황실 극비의 술식이었다.

서류가 불타오르며 허공에 한 여인의 나직하고 자애로운, 그래서 더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계획대로 사제를 보냈으니, 북부의 봉인이 깨지는 즉시 에밀리아가 가진 장부의 영혼을 강탈하여 황실 코어에 안착시키십시오. 그녀는 어차피 가문을 위해 태어난 도구에 불과하니까요.'

그것은 에밀리아의 친모, 헬레나 에버스의 목소리였다.

동시에 서류의 하단에 붉은 마력으로 새겨진 최종 영혼 강탈 계획의 도식과 날짜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들이 노린 것은 처음부터 요새의 함락뿐만이 아니었다. 에밀리아의 영혼에 깃든 장부 그 자체를 완전히 찢어내어 빼앗으려는 음모였다.

에밀리아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발밑의 지맥에서 흘러나오는 검은 안개가 여전히 불길하게 흔들리는 가운데, 새로운 음모의 서막이 두 사람을 향해 입을 벌리고 있었다.

허공에 흩어지는 헬레나의 목소리는 잔인할 정도로 다정했다. 그 목소리가 남긴 잔향이 얼어붙은 성벽 위를 짓누르자, 에밀리아의 눈동자가 깊게 흔들렸다.

가장 단단하다고 믿었던 모성조차 결국은 자신을 찢어발기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는 사실. 뺨을 타고 흐르는 한기는 이제 살가죽을 얼리는 물리적인 추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영혼의 가장 깊은 밑바닥에서부터 차올라 심장을 마비시키는 지독한 배신의 냉기였다.

"……결국, 처음부터 나 같은 건 없었던 거군."

에밀리아의 입술 사이로 마른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레이너의 품에서 한 걸음 물러서려 했다.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순간, 그 온기가 사라졌을 때 찾아올 절망이 두려웠기에 발동하는 오래된 방어기제였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스스로 고립을 택하는 서글픈 버릇이 다시금 그녀의 발목을 붙잡았다.

하지만 레이너는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의 거칠고 단단한 손이 에밀리아의 가냘픈 손목을 움켜잡았다. 전신의 화상 흉터만큼이나 뜨거운 열기가 그녀의 차가운 살죽을 타고 사정없이 밀려들었다.

"에밀리아."

레이너의 푸른 눈동자 속에는 흔들림 없는 불꽃이 일렁이고 있었다.

"내 눈을 봐라."

"……레이너."

"그들이 무엇을 획책하든, 나는 너를 내어주지 않는다. 네 영혼 한 조각조차 그 누구도 만질 수 없게 하겠다."

그의 목소리는 벼려진 칼날처럼 날카로우면서도, 에밀리아를 감싸 안는 안개처럼 다정했다. 레이너의 손가락이 그녀의 뺨에 맺힌 차가운 성에를 부드럽게 닦아냈다. 일그러진 흉터로 가득한 그의 얼굴이 이토록 아름답고 구원처럼 다가올 줄은, 몰락의 구렁텅이에 빠졌던 그 시절에는 미처 알지 못했다.

에밀리아는 떨리는 숨을 내쉬며 그의 가슴에 이마를 기댔다. 가문의 배신이 남긴 상처가 피를 흘릴 때마다, 이 남자의 화상 흉터가 그 피를 따뜻하게 덮어주는 것만 같았다.

그때였다.

*쿠구구구구—!*

성벽 아래가 아닌, 요새의 가장 깊은 심장부에서 또다시 불길한 고동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제가 남긴 저주의 잔재가 공중에서 소멸하며 뿜어낸 검은 마력이, 지맥을 타고 성채 지하 심층부의 봉인을 완전히 깨부순 것이 분명했다.

"으윽……!"

레이너가 가슴을 움켜쥐며 나지막한 신음을 흘렸다. 그의 전신을 감싸던 붉은 투기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것은 단순한 마력의 역류가 아니었다. 윈터가드 가문의 영혼이 깃든, 그리고 그의 선대 아버지가 남긴 부러진 대검의 유해가 안치된 심층부에서 뿜어져 나오는 거대한 슬픔의 파동이었다. 과거의 전쟁에서 찢겨 나간 영혼들의 비명이 지맥을 타고 흘러나와 레이너의 정신을 가혹하게 채찍질하고 있었다.

웅성거리는 어둠 속에서, 에밀리아의 눈앞에 떠오른 '상흔의 영지 장부'가 미친 듯이 점멸하기 시작했다. 황금빛과 붉은빛으로 빛나던 장부의 페이지들이 가파르게 넘어가며, 칠흑 같은 검은 마력이 글자 위를 덮쳤다.

`[경고: 요새 심층부 '부러진 대검'의 봉인 완전 해제.]` `[지하에 축적된 선대 가주의 영혼 잔재가 황실의 영혼 강탈 주술에 반응하여 폭주하기 시작합니다.]` `[위험: 영지 장부와의 강제 동기화 진행율 12%…… 15%…….]`

"이건……."

에밀리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황실과 헬레나가 준비한 최종 계획은 단순한 협박이 아니었다. 사제가 목숨을 바치며 터뜨린 지맥의 균열은, 지하 심층부에 봉인되어 있던 윈터가드의 힘을 역류시켜 에밀리아의 영혼 장부와 강제로 충돌하게 만드는 잔인한 덫이었다. 두 거대한 마력이 충돌해 영지가 파멸하는 순간, 비어버린 틈새를 타 에밀리아의 영혼을 통째로 인양하려는 수작이었다.

지하 계단 입구에서 검붉은 안개가 폭포수처럼 뿜어져 나와 연무장과 성채 내부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안개 속에서 죽은 자들의 원혼과도 같은 형상들이 소리 없이 울부짖었다.

"레이너…… 지하로 가야 해요."

에밀리아가 이를 악물며 그의 옷자락을 꽉 쥐었다.

"그곳에 있는 당신 아버지의 유해가…… 우리를 부르고 있어요."

레이너는 검은 안개가 차오르는 지하 통로를 응시했다. 그곳은 그가 평생 동안 피해왔던, 자신의 가장 처참한 과거와 트라우마가 봉인된 무덤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의 곁에는 그 어둠을 함께 걸어줄 구원자가 있었다.

"가자."

레이너가 그녀의 손을 더욱 단단히 움켜쥐었다.

두 사람이 검은 심연이 도사리는 지하 복도로 첫발을 내딛는 순간, 점멸하던 장부 위로 핏빛 경고등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최종 영혼 박리 시도까지 남은 시간: 1시간 30분.]` `[심층부의 폭주를 정화하지 못할 경우, 영지 전체가 동결되어 소멸합니다.]`

차가운 지하의 공기가 두 사람의 발끝을 타고 올라와 심장을 겨누었다. 그들의 안식처를 지키기 위한 진짜 싸움은, 이제 막 그 어둡고 축축한 심연 아래에서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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