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지하 통로의 공기는 죽은 자들의 숨결처럼 차고 축축했다. 벽면을 따라 고인 물방울이 바닥으로 떨어질 때마다 지독한 이명이 고막을 찔렀다.

두 사람이 어둠의 입구로 발을 내딛기 직전, 쓰러진 사제의 품속에서 검붉은 빛무리 하나가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그것은 단순한 마력의 잔재가 아니었다. 허공으로 도망치듯 날아오르던 원격 전수 영문 서류가 스스로를 불태우며, 에버스 가문과 황실이 여태껏 숨겨왔던 약탈의 기록을 허공에 투사하기 시작했다.

타닥, 타다닥.

마치 살이 타들어 가는 듯한 소리와 함께 핏빛 글자들이 허공에 새겨졌다. 그것은 에밀리아의 영혼에 깃든 '상흔의 영지 장부'를 강제로 찢어내어 황실의 마도 코어에 안착시키고, 윈터가드가 가진 북부의 모든 영토와 숨겨진 광맥을 통째로 이양한다는 불법적인 비밀 계약서였다. 황실 비선과 가문의 수장인 에드가 에버스의 인장이 나란히 찍힌, 추악하고도 노골적인 강탈의 물증.

"결국…… 처음부터 나를 이곳에 보낸 이유가 이것이었군요."

에밀리아의 입술 사이로 서글픈 실소가 새어 나왔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차오르는 한기가 사지를 얼려왔다. 어머니라는 이름의 괴물, 가문이라는 껍데기를 쓴 약탈자들. 그들은 단 한 순간도 자신을 인간으로 대하지 않았다. 오직 가문의 번영을 위해 껍질째 씹어 삼킬 제물로만 여겼을 뿐이다.

바르르 떨리는 에밀리아의 어깨 위로, 불쑥 커다랗고 굳은살 박인 손이 얹어졌다.

타는 듯한 열기였다. 전신에 가득한 화상 흉터만큼이나 뜨겁고 묵직한 온도. 레이너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녀의 가녀린 어깨를 제 넓은 품으로 거칠게 끌어당겼다. 그의 단단한 가슴팍에 이마가 닿는 순간, 뼛속까지 침투하던 얼음 같은 한기가 거짓말처럼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에밀리아."

그의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거칠게 일그러진 그의 뺨이 그녀의 머리칼에 닿았다.

"그들의 손에 쥐어진 계약서가 무엇이든, 이 요새 아래에서 그것들은 모두 한 줌의 재가 될 거다. 내가 그렇게 만들 테니까."

"레이너……."

그의 품은 투박하고 상처투성이였지만, 그 어떤 화려한 성채보다 온전하고 안전한 울타리였다. 에밀리아는 심장에 박힌 얼음송곳이 녹아내리는 감각을 느끼며 깊은 숨을 내쉬었다. 슬픔은 분노가 되었고, 분노는 이내 차가운 결의로 화했다.

그녀는 허공에서 타오르는 영문 서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눈앞에서 붉게 점멸하는 '상흔의 영지 장부'가 그녀의 의지에 반응해 가파르게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다.

`[경고: 최종 영혼 박리 시도까지 남은 시간 1시간 28분.]` `[요새 심층부와 장부의 강제 동기화 진행율 18%…….]`

시간이 없었다. 지하 심층부에서 역류하는 선대 가주의 검은 안개가 발목을 적셔오고 있었지만, 에밀리아는 도리어 장부의 표지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황실과 에버스 가문이 자신들의 탐욕을 위해 계약을 개방했다면, 그녀 역시 장부가 가진 가장 가혹한 권능을 해방할 뿐이었다.

"에버스 가문이 이 영지를, 그리고 내 삶을 착취해 간 대가가 얼마인지 똑똑히 계산해 주지."

에밀리아의 기억 속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던 오랜 낙인의 상흔들이 장부의 페이지 위로 붉은 잉크가 되어 흘러내렸다.

어린 시절부터 가문의 죄를 대신 뒤집어써야 했던 억울함, 사교계의 비웃음 속에서 홀로 견뎌야 했던 가시 왕관의 무게, 그리고 북부로 쫓겨나듯 오면서 빼앗겼던 모든 권리들. 에밀리아는 에버스 가문이 누대에 걸쳐 북부의 자산과 자신의 영혼을 부당하게 착취해 간 내역 전체를 장부에 기록하기 시작했다.

기록이 더해질 때마다 영혼을 긁어내는 듯한 격통이 에밀리아를 덮쳤다. 이가 맞부딪힐 정도로 가혹한 한기가 온몸을 지배하려 했으나, 레이너는 그녀의 뒤에서 심장을 포개듯 밀착한 채 자신의 마력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그의 타들어 가는 듯한 온기가 에밀리아의 척추를 타고 올라와 장부의 마력과 융합했다.

황금빛과 붉은빛이 뒤섞인 마력이 장부에서 뿜어져 나와 허공의 영문 서류를 집어삼켰다.

`[특수 권능: '부채의 무기화(債務武器化)'를 발동합니다.]` `[대상: 에버스 백작가 및 황실 비선 세력.]` `[누적된 부당 착취 및 영적 상흔의 가치를 제국 법정 이자율 및 마도 계약 위반율로 환산합니다…….]`

에밀리아는 소매 안쪽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장부 위에 얹었다.

그것은 과거 서재 청소 도중 찾아냈던, 전 사찰단원 줄리안 카펠이 사적으로 황실 인장을 조작해 보낸 횡령 유도용 불법 가밀 서신이었다. 황실의 권위를 도용해 북부의 군수 자금을 가로채려 했던 반역의 증거. 여태껏 가장 날카로운 칼날로 쓰기 위해 아껴두었던 그 서신이 마침내 장부의 붉은 불꽃 속에서 타올랐다.

`[서신 분석 완료: 황실 인장 무단 도용 및 군수 자금 사적 횡령 혐의 확정.]` `[연대 보증인 및 배후 선동자: 에버스 백작가 수장 에드가 에버스, 그리고 헤르나 에버스.]` `[총 부채 규모: 산출 불가 수준의 초과 채무 발생.]`

"이것으로 너희의 목줄을 죄어주마."

에밀리아의 목소리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장부의 글자들이 피처럼 붉게 타오르며 허공에 거대한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북부의 한기와 레이너의 불꽃이 융합된 마력의 파동이 시공간을 넘어 제국 중앙을 향해 쏘아 보내졌다.

***

같은 시각, 제국 중앙의 심장부에 위치한 '세무 전당(稅務殿堂)'.

황실과 대귀족들의 온갖 이권과 자금 세탁이 이루어지는 그곳의 중심에서, 에버스 가문의 대리인이자 줄리안 카펠의 정식 약혼녀인 헤르나 에버스는 화려한 실크 드레스를 걸친 채 오만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북부의 그 괴물 놈들과 에밀리아는 이제 끝장이에요. 사제의 의식이 성공하는 순간, 그 계집의 영혼은 물론이고 윈터가드의 막대한 영지 자산까지 전부 우리 에버스 가문의 것이 될 테니까요."

헤르나는 값비싼 루비 와인을 홀짝이며 잔을 흔들었다. 그녀의 주변에 모여든 사교계의 귀족들은 벌써부터 가문이 차지할 막대한 부에 아첨을 떨기에 바빴다. 에밀리아를 북부의 사지로 몰아넣고 얻어낸 전리품으로 누릴 사치는 달콤하기 그지없어 보였다.

콰아아앙-!

갑작스러운 굉음과 함께 세무 전당 중앙에 안치된 거대한 정밀 마도 마석이 붉은 빛을 토해내며 균열을 일으켰다.

"이, 이게 무슨 일이지?!"

세무 전당의 관리관들이 비명을 지르며 제어 장치로 달려갔다. 하지만 그들의 손이 닿기도 전에, 마석 표면에 거대한 붉은 글자들이 낙인처럼 새겨지기 시작했다.

`[긴급 고지: 에버스 백작가 소유의 모든 자산 및 전매권에 대한 즉각적 압류 집행.]` `[사유: 황실 인장 도용을 통한 군수 자금 무단 횡령 및 북부 영지에 대한 누대 부당 착취 채무 상환 불이행.]` `[채권자: 윈터가드 공작 부인 에밀리아 윈터가드.]`

"뭐…… 뭐라고?"

헤르나의 손에 들려 있던 와인잔이 대리석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붉은 액체가 그녀의 화려한 드레스 자락을 더러운 핏빛으로 물들였다.

"말도 안 돼! 에밀리아 그 버려진 계집이 어떻게 세무 전당의 자산을 건드린단 말이야! 어서 이 마도 장치를 멈춰라!"

그녀가 표독스럽게 소리를 질렀지만, 마도 장치의 수치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기하급수적인 속도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에버스 가문 중앙 금고 잔여율: 42%…… 18%…….]` `[경고: 가문 소유의 광산 및 영지 전매권 전체가 채권자에게 영구 이양됩니다.]` `[최종 상태: 에버스 백작가 공식 파산 및 자산 압류 완료.]`

"아, 아아아……!"

헤르나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그녀가 여태껏 누려왔던 모든 사치, 에버스 가문의 이름으로 발행했던 수많은 마도 신용장들이 한순간에 휴지조각으로 변해버렸다. 세무 전당의 경비병들이 자산 압류 절차에 따라 헤르나의 몸을 거칠게 붙잡았다. 그녀의 목에 걸려 있던 값비싼 보석 목걸이와 손가락의 반지들이 무자비하게 뜯겨 나갔다.

"이거 놓아라! 감히 내가 누구인 줄 알고! 줄리안! 아버님! 대답해 보세요!"

하지만 마도 통신구 너머로 들려오는 것은 황실 사찰단에서 파면당해 지하 감옥으로 끌려가는 줄리안의 비명과 가문 본가가 통째로 압류되어 길거리로 나앉게 되었다는 집사의 절망적인 울부짖음뿐이었다.

"커흑……!"

극도의 충격과 절망감에 헤르나의 목구멍에서 검붉은 피가 울컥 솟구쳐 나왔다. 그녀는 대리석 바닥에 쓰러져 피를 토하며 나자빠졌다. 자신이 그토록 멸시하고 짓밟았던 에밀리아의 이름이, 이제는 자신을 영원한 파멸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가시 왕관이 되어 목을 죄어오고 있었다.

***

웅웅거리는 진동과 함께 요새 지하의 공기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장부 표면에 표시된 에버스 가문의 파산 수치를 확인한 에밀리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가슴을 짓누르던 오랜 업보의 사슬 하나가 마침내 끊어지는 순간이었다.

"끝났어요……."

그녀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안심할 새도 없이, 지하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울부짖음은 더욱 거칠어졌다.

쿠구구구구!

선대 가주의 부러진 대검이 안치된 심층부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안개가 사나운 파도처럼 소용돌이쳤다. 가문의 비극적인 역사와 전쟁의 상흔이 깃든 대검의 저주가 황실의 영혼 박리 주술과 융합하여 폭주를 멈추지 않고 있었다.

`[경고: 심층부 폭주로 인한 영지 동결 소멸까지 남은 시간: 1시간 10분.]`

"아직 진짜 싸움은 끝나지 않았군."

레이너가 부러진 대검이 잠긴 어둠을 응시하며 검자루를 꽉 쥐었다. 그의 왼쪽 다리가 팽팽하게 긴장했다. 에밀리아의 장부 분석을 통해 획득한 완벽한 회전축의 궤적이 그의 전신에 뜨거운 마력을 불어넣고 있었지만, 지하 심층부의 폭주는 요새 전체를 통째로 집어삼킬 기세였다.

그때였다.

지하 통로의 입구 쪽에서 성채 전체를 뒤흔드는 거대한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

콰아아앙-! 쿠르릉!

지하의 벽면이 갈라지고 미세한 돌가루들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단순한 지진이 아니었다. 요새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주 성벽 내부에서부터 거대한 불꽃과 마력의 균열이 솟구치는 소리였다.

"이 진동은…… 성벽 내부입니까?"

이반 카터가 검을 뽑아 들며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의 눈동자에 침공 당시의 공포가 본능적으로 스쳤으나, 이내 에밀리아를 지키겠다는 결의로 떨림을 억눌렀다.

마도 통신 장치에서 피비린내 나는 폭소와 함께 제국 정벌대의 최종 책임 기사단장의 광기 어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하하! 에버스 가문이 파산했다고? 세무 전당이 압류당했다고?! 상관없다! 어차피 황실의 명을 받든 우리에게 돌아갈 길 따위는 없다! 윈터가드의 괴물들과 함께 이곳에서 모두 가루가 되어라!"

기사단장은 전세가 완벽하게 뒤집히고 자신들의 숨통이 조여오자, 요새 성벽 내부에 미리 설치해 두었던 고대 마력 자폭 미끼를 작동시킨 것이었다.

"성벽의 지맥 코어가 폭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대로 두면 심층부의 대검 정화는커녕, 요새 전체가 내부에서부터 붕괴하여 영지민들과 함께 매몰될 겁니다!"

이반의 다급한 외침이 어두운 지하 통로를 때렸다.

한쪽에서는 아버지가 남긴 부러진 대검의 폭주가 영혼을 갉아먹고 있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미쳐버린 제국군이 성벽을 무너뜨려 요새를 무덤으로 만들려 하고 있었다.

에밀리아의 눈앞에 떠오른 장부의 경고등이 붉다 못해 검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피할 수 없는 파멸의 양자택일이 그들 앞에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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