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수평선 너머로 제국의 무시무시한 기마 융단 폭격 마도포 전열이 장엄하도록 붉게 불꽃을 토하며 등장했다.

어둠이 깊게 가라앉은 북부의 하늘은 순식간에 피비린내 나는 선홍빛으로 물들었다. 차가운 대기를 가르고 날아오는 백여 발의 마도 포탄들은 밤하늘을 수놓는 잔혹한 유성우와 같았다. 웅웅거리며 고막을 찢는 마력의 진동이 요새 전체를 뒤흔들었다. 그것은 제국이 자랑하는 압도적인 무력의 시위이자, 윈터가드를 흔적도 없이 지워버리겠다는 무자비한 선언이었다.

성벽 위의 공기는 비명조칠 지를 수 없을 만큼 얼어붙었다.

기사들의 하얀 숨결이 사정없이 흩어졌다. 철갑을 두른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소리가 사방에서 서글프게 울렸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차오르는 죽음의 공포는 차가운 안개가 되어 그들의 시야를 흐려 놓았다. 제국의 거대한 군세 앞에 서서 느껴야 하는 무력감은, 일찍이 그들이 전쟁터에서 마주했던 가장 끔찍한 악몽의 질감과 닮아 있었다.

성루 최상부에 선 에밀리아는 날아오는 포탄들을 바라보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바람에 날리는 은빛 머리카락이 붉은 포격의 빛을 받아 붉게 어른거렸다. 그녀의 가슴속에도 과거의 상흔이 일어났다. 가장 믿었던 가족에게 버림받고, 온 사교계의 비웃음과 가시 돋친 낙인 속에서 홀로 버텨야 했던 날들의 한기가 다시금 온몸을 옥죄는 듯했다.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었다. 이곳은 그녀가 찾아낸 유일한 안식처였고, 곁에 서 있는 사내 역시 그녀가 지켜야 할 온기였다.

에밀리아는 품속에서 한 장의 양필지 서신을 꺼내 들었다.

서재를 청소하던 도중 획득했던, 전 약혼자 줄리안 카펠이 사적으로 인장을 조작해 보낸 횡령 유도용 불법 가밀 서신이었다. 제국 감찰관이라는 자가 황실의 불빛 아래서 얼마나 추악한 음모를 꾸몄는지 보여주는 증거. 그녀는 이 한 장의 종이에 깃든 더러운 마력의 흐름을 짚어내며 차갑게 미소 지었다.

"이 전쟁이 황실의 고결한 뜻이라 믿는 자들에게, 진실을 보여주어야겠지……."

그녀가 마력을 불어넣자, 서신에 조작되어 있던 황실의 인장과 줄리안의 필체가 허공을 향해 거대한 투영 마법으로 펼쳐졌다. 성벽 앞을 가득 메운 제국군 기사단의 눈앞에, 그들의 영웅이자 감찰관이었던 줄리안 카펠의 추악한 배임과 사욕이 담긴 밀약서가 붉은 마력의 빛으로 선명하게 허공에 부유했다.

"저, 저것은……!" "줄리안 경의 인장국이 아닌가? 어떻게 사적인 횡령 음모 서신이 저곳에……."

진격하던 제국군의 선봉 기사단 대열이 일순 거칠게 일렁였다. 정의로운 반역자 토벌이라 믿었던 전쟁이, 한 기회주의자가 사적으로 조작한 더러운 밀약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목도한 순간이었다. 그들의 가슴속에 굳건히 자리 잡고 있던 명분이라는 이름의 방패가 처참하게 균열을 일으켰다. 적들의 눈빛에 서린 망설임과 혼란은 차갑게 얼어붙은 대지 위로 빠르게 전염되어 갔다.

하지만 허공을 가르고 날아오는 백여 발의 마도 포탄은 이미 물리적인 궤적을 그리며 윈터가드의 성벽을 향해 쏟아지고 있었다. 명분이 흔들렸을지언정, 발포된 학살의 불꽃은 멈추지 않았다.

에밀리아는 들고 있던 마도 외장, '상흔의 영지 장부'를 활짝 펼쳤다.

양필지 위로 북부의 시린 바람이 사납게 스쳐 지나갔다. 장부의 가죽 표지는 얼음보다도 차가운 한기를 뿜어냈고, 그 안의 글귀들은 영지민들의 피와 눈물로 쓰인 듯 붉은 빛으로 넘실거렸다. 에밀리아는 두 눈을 감았다. 감각이 극도로 예민하게 곤두서며, 요새를 지키는 전사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도사린 공포와 트라우마가 그녀의 영혼 속으로 소용돌이치며 밀려들었다.

"으윽……!"

신음이 얇고 부서지기 쉬운 얼음장처럼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타인의 상처를 거두어 영지의 자원으로 치환하는 대가는 언제나 가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수백 명의 기사와 영민들이 품은 죽음에 대한 공포, 전쟁의 끔찍한 기억들이 고스란히 에밀리아의 신경망을 타고 흘렀다. 뼛속까지 얼어붙는 지독한 한기가 혈관을 지배했고, 심장은 얼음송곳으로 찔린 듯 지독한 명치 통증을 유발했다. 손끝이 하얗게 질려 마비되었고, 그녀의 몸이 힘없이 뒤로 쓰러지려 했다.

아무도 자신을 구원해 주지 않을 것이라는, 과거의 가혹한 배신감이 다시금 그녀의 방어기제를 자극하며 어둠 속으로 끌어내리려던 그때였다.

등 뒤에서 타오르는 들불 같은 온기가 그녀를 통째로 감싸 안았다.

"에밀리아."

낮고 그을린, 그러나 그 어떤 강철보다 단단하고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레이너의 두터운 팔이 에밀리아의 떨리는 허리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의 전신을 뒤덮은 참혹한 전쟁의 흉터들이 내뿜는, 거의 타들어 갈 듯한 고열이 그녀의 얼어붙은 등줄기를 뜨겁게 녹여 내렸다. 레이너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에밀리아의 어깨에 자신의 이마를 얹었다. 참전 시절의 트라우마로 매일 밤 불면과 악몽 속에서 고통받던 남자가, 오직 그녀의 한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자신의 가장 뜨겁고 연약한 부분을 아낌없이 밀착해 오고 있었다.

에밀리아는 본능적으로 그의 거친 손을 맞잡았다. 그의 손등에 남은 화상의 울퉁불퉁한 질감과 굳은살이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밀려들었다. 마법으로 차마 지우지 못한, 가혹하지만 가장 진실한 고통의 흔적. 그 흉터의 감각이 에밀리아에게는 그 어떤 부드러운 살결보다도 안전한 구원의 이정표였다.

"……나를 믿고, 마음껏 휘둘러라. 나의 부인."

레이너의 심장박동이 그녀의 등을 타고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의 타오르는 체온이 영혼의 통증을 밀어내자, 에밀리아의 눈동자에 투명하고 서늘한 생기가 다시금 돌아왔다. 장부의 침식으로 인한 부작용이 가라앉으며, 흡수된 전사들의 공포 에너지가 가장 순수하고 강력한 마력의 형태로 정제되었다.

에밀리아는 장부를 쥔 손에 힘을 주며 밤하늘을 향해 소리쳤다.

"방류……!"

그녀의 청아한 목소리가 울려 퍼짐과 동시에, 장부에서 뿜어져 나온 푸른 마력이 요새의 성벽을 타고 마치 살아 숨 쉬는 거대한 장막처럼 대공을 향해 솟구쳤다. 그것은 전사들의 공포를 용기로, 상처를 수호의 의지로 완전히 탈바꿈시켜 만든 기적의 결계였다. 푸른 빛의 장벽이 밤하늘의 붉은 노을을 지워버리며 거대한 반구를 완성했다.

하늘을 메우며 떨어지던 백여 발의 붉은 마도 포탄들이, 마침내 푸른 장벽의 표면에 격렬하게 충돌했다.

그러나 예상했던 파괴적인 폭음은 없었다.

샤아아아아-.

대기 중에서 울려 퍼진 것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고요하고 아름다운 종소리 같은 공명이었다. 푸른 장벽에 부딪힌 붉은 포탄들은 그 자리에서 일제히 빙결되기 시작했다. 타오르던 마도의 화염은 흔적도 없이 얼어붙었고, 포탄의 외피가 투명한 얼음으로 변하더니 이내 수만, 수억 개의 은빛 눈송이로 부서져 내렸다.

피비린내 나는 화염과 파편 대신, 요새 위로 흩날리는 것은 눈부시게 반짝이는 은빛 눈꽃의 향연이었다.

"이,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제국군 지휘관의 입에서 경악에 찬 단말마가 터져 나왔다. 제국 최고의 기술력으로 제조된 결전 마도포 세례가, 고작 한 여인의 손끝에서 흔적도 없이 얼어붙어 눈송이로 증발해 버린 것이다.

성벽 위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윈터가드의 기사들과 영민들은, 머리 위로 떨어지는 무해하고 아름다운 눈가루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자신들이 느꼈던 그 처참한 공포가 이토록 경이로운 수호의 기적으로 변한 모습을 목도한 그들의 눈빛에, 이내 광적인 투지와 신뢰가 차올랐다.

"윈터가드가 우리를 수호하신다!" "공작 전하와 부인께 영광을! 북부를 지켜라!"

환호성이 요새를 가득 채우자, 레이너의 눈동자가 차갑게 내려앉았다. 그의 얼굴 오른편을 덮은 일그러진 화상 흉터가 푸른 결계의 빛을 받아 기괴하면서도 범접할 수 없는 군신의 위엄을 뿜어냈다. 그는 이미 적들의 명분이 꺾이고 전열이 완전히 무너진 이 결정적인 찰나를 놓치지 않았다.

"공수 전환."

레이너의 쇠를 긁는 듯한 낮은 목소리가 마력을 타고 전장에 울려 퍼졌다.

"적의 좌익을 무너뜨려라. 저들의 발밑은 이미 얼어붙은 우리의 사냥터다."

성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부단장 이반 카터가 이끄는 정예 기사단이 폭풍처럼 대지를 박차고 나갔다. 제국군은 갑작스러운 결계의 이변과 아군의 명분 상실로 인해 이미 퇴로를 찾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북부의 험준한 지형과 영구동토의 가혹한 바람을 손바닥 보듯 활용하는 윈터가드의 정예병들은, 혼비백산한 제국군의 철갑 기병들을 자비 없이 절벽 협곡 함정 지역으로 몰아넣었다.

우두둑, 콰드득!

얼어붙어 있던 깊은 협곡의 빙판이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깨져 나갔다. 제국군의 기마대들이 수십 미터 아래의 어두운 절벽 속으로 추락하며 비명을 질렀다. 윈터가드의 완벽하고도 무자비한 압승이었다.

그러나 승리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이었다.

제국군 본진의 가장 깊은 후방, 붉은 장막 너머에서 기괴하게 일그러진 흑적색의 마력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패배의 수치심과 광기에 눈이 뒤집힌 제국군 지휘관이 품속에서 검게 물든 마력 증폭기를 꺼내 들었다. 그의 입술이 비틀리며 피비린내 나는 폭소를 흘렸다.

"겨우 이 정도로 우리를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느냐, 북부의 괴물 놈들……."

그가 증폭기를 작동시키자, 대지 밑바닥에서부터 소름 끼치는 진동이 시작되었다. 황실이 극비리에 육성하고 봉인해 두었던, 결계 자체를 무력화하는 금단의 생명체가 어둠 속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크르르르르…….

요새 전체의 기초를 흔드는 불길한 포효가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단순한 마수가 아니었다. 요새의 안전을 지탱하는 가장 근본적인 '안전 기둥 결계'의 마력 자체를 갉아먹고 부수기 위해 특수하게 주조된 무적의 마도 금수(魔導 禽獸) 야수였다.

"가라! 저 가식적인 장벽의 뿌리까지 전부 씹어 삼켜 버려라!"

지휘관의 광기 어린 외침과 함께, 거대한 암흑의 형체가 성벽 아래의 기둥을 향해 붉은 안개를 토해내며 맹렬한 속도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성벽 깊숙한 곳에서부터 결계의 기둥이 흔들리는 둔탁한 파열음이 들려왔고, 에밀리아의 가슴속 깊은 곳에 다시금 끔찍한 파멸의 경고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생명이라 부를 수 없는, 오직 파괴만을 위해 벼려진 증오의 덩어리였다.

칠흑 같은 어둠을 뭉쳐 만든 듯한 마수의 거구는 사방으로 검붉은 안개를 뿜어내며 요새의 기반을 향해 미친 듯이 돌진했다. 놈이 발을 디딜 때마다 얼어붙은 대지가 쩍쩍 갈라지며 비명을 질렀고, 윈터가드 성을 지탱하는 고대 마력 코어의 기둥들이 불길하게 공명하기 시작했다. 그 야수가 내뿜는 것은 단순한 마력이 아니었다. 수많은 영혼의 절규와 부패한 저주가 뒤엉킨, 결계의 근간을 갉아먹는 부식의 독기였다.

"끄악……!"

성루 최상부에서 장부를 쥐고 있던 에밀리아의 입술 사이로 날카로운 비명이 비어져 나왔다.

요새의 결계와 영적으로 동조하고 있던 장부가 마수의 침식을 감지하는 순간, 그녀의 뇌리로 수천 개의 바늘이 동시에 꽂히는 듯한 극심한 두통이 몰려왔다. 머릿속이 하얗게 번뜩이며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장부의 양필지 위로 검은 혈흔 같은 잉크가 사정없이 번져 나갔다. 윈터가드의 굳건한 돌기둥들이 느낄 파괴의 통증이, 에밀리아의 뼈마디 하나하나를 으스러뜨리는 물리적인 고통이 되어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에밀리아!"

레이너의 거친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으나, 그것마저 멀게만 느껴졌다.

그녀의 몸이 통제력을 잃고 차가운 바닥으로 무너지려는 찰나, 레이너가 그녀를 바짝 끌어안았다.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을 태울 듯한 고열이 에밀리아의 차가운 뺨을 감쌌다. 그의 심장이 터질 것처럼 무겁고 빠르게 요동치고 있었다. 그 역시 전장의 트라우마와 마음속 심연이 날뛰는 와중에도, 오직 에밀리아라는 단 하나의 안식을 잃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었다.

"정신 차려라, 에밀리아. 나를 봐라…… 나를 느껴라."

그가 일그러진 화상 흉터로 가득한 뺨을 그녀의 이마에 가져다 대며 속삭였다.

그 가혹하고도 뜨거운 감각이 그녀의 흐려지던 의식을 간신히 붙잡았다. 레이너의 체온은 혹독한 겨울날 유일하게 타오르는 화로와 같아서, 그녀의 영혼을 잠식하던 검은 독기를 조금씩 밀어내 주었다. 하지만 마수의 부식 속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요새의 하부를 받치고 있던 거대한 방어 기둥 하나가 마침내 우지끈 소리를 내며 금 가기 시작했다.

파지직, 파직!

머리 위를 아름답게 수호하던 푸른 장벽에 거미줄 같은 붉은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저 괴물이 요새의 마력맥을 직접 집어삼키고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결계가……!"

이반 카터가 다급하게 소리치며 검을 뽑아 들었으나, 성벽 아래의 거대한 음기가 뿜어내는 기세에 기마들조차 접근하지 못하고 울부짖었다. 그 야수는 물리적인 칼날이 닿지 않는 영적인 저주의 결정체였다. 오직 장부의 구원력만이 놈을 정화할 수 있었지만, 그러기엔 에밀리아의 영혼이 먼저 타들어 갈 위기였다.

그때였다.

장부의 젖은 페이지들이 바람도 불지 않는데 스스로 어지럽게 넘어가기 시작했다. 사락, 사락 하는 종이 소리가 에밀리아의 귓가에 고대 신전의 종소리처럼 아련하게 울렸다. 마침내 멈춰 선 페이지 위로, 거대한 마수의 정체와 그 안에 얽힌 잔혹한 인과가 피어올랐다.

그것은 단순한 황실의 병기가 아니었다.

[ 수많은 북부의 포로들과 에버스 가문이 자행한 인체 비술의 희생자들. 그들이 품은 깊은 원한과 절망을 정제하여 주조한 '상흔의 아귀'. ]

에밀리아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 괴수의 깊은 심연 속에서, 과거 그녀가 에버스 가문의 지하 감옥을 지날 때 들었던 가여운 영혼들의 울음소리가 겹쳐 들려왔다. 가문의 영광을 위해, 그리고 사교계의 가시 왕관을 유지하기 위해 친모 헬레나 에버스가 잔인하게 짓밟고 소모해 버린 무고한 이들의 영혼. 그들의 부서진 삶이, 지금 괴물이 되어 자신들의 유일한 구원자인 에밀리아의 안식처를 무너뜨리려 하고 있었다.

이것은 헬레나가 그녀를 파멸시키기 위해 보낸, 가장 잔인하고도 사악한 덫이었다.

"어머니…… 끝까지 나를 기만하고, 이들의 상처마저 도구로 쓰는군요……."

에밀리아는 피가 배어 나오는 입술을 깨물었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배신감과 슬픔, 그리고 억눌려 있던 분노가 뜨거운 불꽃이 되어 치솟았다. 그녀는 자신을 안고 있는 레이너의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그의 단단한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그녀는 영혼을 갉아먹는 고통 속에서도 결연히 눈을 떴다.

"레이너, 저 괴물의 안에는…… 내가 구해야 할 이들의 비명이 갇혀 있어요."

레이너는 그녀의 젖은 눈동자 너머에 서린 단단한 의지를 읽어냈다. 그는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손을 더욱 단단히 쥐고, 자신의 마력과 생명력을 아낌없이 그녀의 몸속으로 밀어 넣을 뿐이었다. 그의 온기가 에밀리아의 마력 회로를 타고 흐르며 장부의 출력을 극대화했다.

"그렇다면 구해내라. 나는 네가 그 일을 마칠 때까지, 이 세상 그 어떤 시련도 네게 닿지 못하게 막아설 테니."

그의 신뢰는 그 어떤 방어막보다도 견고했다.

에밀리아는 다시 한번 장부를 높이 치켜들었다. 그녀의 은빛 머리카락이 레이너의 붉은 마력과 뒤엉켜 장엄한 빛을 발했다. 장부의 페이지들이 황금색과 은색의 빛으로 찬란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나의 안식을 방해하는 가식의 쇠사슬을 끊어내라……!"

그녀가 장부의 최고 출력을 가동하려는 그 순간이었다.

성벽 아래에서 대지를 집어삼키던 마도 금수가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서서히 고개를 들어, 성루 최상부에 선 에밀리아와 레이너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놈의 텅 빈 안와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붉은 안개가 순식간에 기괴한 형상으로 일그러지며, 에밀리아에게만 들리는 조율된 목소리를 전장에 퍼뜨렸다.

그것은 그녀가 그토록 혐오하던 친모, 헬레나 에버스의 자애롭고도 소름 끼치는 목소리였다.

- 오, 나의 가여운 딸아. 결국 그곳에서도 더러운 마도구를 굴리며 버티고 있었구나.

환청과도 같은 목소리가 에밀리아의 귓가를 잔인하게 파고들었다. 동시에 마수의 가슴팍에 박혀 있던 거대한 붉은 보석이 기괴하게 요동치며, 요새 전체의 결계를 송두리째 뒤흔들 파괴적인 폭발의 전조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한 침략이 아니었다. 에밀리아가 장부를 가동해 자신들을 정화하려 드는 순간만을 기다려 온, 영적 역류를 유도하는 침묵의 자폭 함정이었다.

파멸의 붉은 빛이 요새 전체를 집어삼키기 직전의 찰나가, 차갑게 얼어붙은 시간 속에서 잔인하게 흐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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