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포격을…… 개시해라! 윈터가드를 완전히 쓸어버려라!”

지하 감옥의 습한 공기를 찢은 줄리안의 비명이 붉은 마도 통신석을 타고 북부의 매서운 밤하늘로 치솟았다. 핏발 선 그의 눈동자에는 광기와 패배감, 그리고 자신을 버린 에밀리아를 향한 뒤틀린 집착이 뒤섞여 있었다. 붉은 마도석이 윙윙거리며 공명하자, 머지않은 장벽 너머 영구동토의 끝자락이 미세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 불길한 파동은 대지를 타고 성주의 방에 머물던 에밀리아의 발끝에 가장 먼저 닿았다.

“……!”

에밀리아는 레이너의 품 안에서 몸을 굳혔다. 뼛속 깊이 스며들던 영혼의 오한이 레이너의 뜨거운 온기 덕분에 겨우 사그라지던 찰나였다. 그녀는 창밖의 어둠을 응시했다. 멀리서 들려오는 대지의 미세한 떨림은 단순한 지진이 아니었다. 그것은 거대한 쇳덩이들이 눈밭을 쓸며 다가오는 불길한 금속음이었다.

집무실의 무거운 목조 문이 거칠게 열리며, 숨을 헐떡이는 이반 카터가 들어섰다. 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고, 손은 검자루를 꽉 쥔 채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부인, 공작 전하. 수도 방면 요새의 경계 초소에서 긴급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이반의 목소리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황실 친위 연합 기사단입니다. 수천 명에 달하는 대병력이…… 북부 국경을 넘어 요새 전면으로 밀고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요새 바로 앞 구릉지에 거대한 마도 제성포들을 고정하는 동태가 포착되었습니다.”

“황실 기사단이 이 가혹한 계절에 움직였다라.”

레이너의 낮은 목소리가 방 안의 공기를 무겁게 가라앉혔다. 그의 거칠고 커다란 손이 에밀리아의 어깨를 감싸 안은 채 천천히 밑으로 내려갔다.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는 여전히 에밀리아의 시린 감각을 달래주고 있었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얼어붙은 호수처럼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감찰관이라는 자를 앞세워 명분을 만들고, 뒤에서는 이미 군대를 움직이고 있었군. 처음부터 우리를 살려 둘 생각이 없었던 거다.”

에밀리아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가슴속에서 차가운 영지 장부의 마력이 불길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중앙 귀족들의 비열한 미소와, 자신에게 온갖 오명을 뒤집어씌우며 사교계의 가시 왕관을 씌웠던 어머니 헬레나의 조근조근한 목소리가 환청처럼 귓가를 스쳤다. 하지만 이제녀는 더 이상 그들의 손아귀에서 떨기만 하던 무력한 영애가 아니었다.

그녀는 소맷자락 서랍 깊은 곳에서 빳빳하게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서재를 정리하던 도중 발견했던, 줄리안 카펠이 사적으로 황실 인장을 조작해 보낸 횡령 유도용 불법 가밀 서신이었다. 사교계의 뱀들이 남긴 추악한 흔적이 에밀리아의 가냘픈 손가락 사이에서 바스락 소리를 냈다.

“이반.”

에밀리아의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이 서신을 당장 요새 전령들에게 복사해 돌리세요. 줄리안 카펠은 황실의 정식 대리인 자격이 아니라, 사적으로 인장을 도용해 북부의 자원을 횡령하려 한 범죄자입니다. 황실 기사단이 그를 구출하겠다는 명분으로 움직인다면, 그것은 황제의 뜻이 아닌 사사로운 반역 세력의 사병 집단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영지민들과 기사들에게 똑똑히 알리세요.”

이반의 눈이 크게 떠졌다. 서신을 받아 든 그의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이것이 있으면…… 저들의 침공은 정당한 공무가 아니라 불법 점거이자 영지 침탈이 됩니다. 우리가 저들을 베어 넘겨도 황실은 공식적으로 우리를 반역자로 몰 명분이 약해집니다!”

“맞아요. 줄리안 카펠은 우리가 구금한 범죄자일 뿐이에요. 감찰관 살해 누명 따위는 두렵지 않아요. 이미 그자는 제 발로 제 무덤을 팠으니까요.”

에밀리아의 차분한 선언에 이반은 깊이 고개를 숙였다. 영주민들을 구원하며 쌓아 올린 그녀의 지략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이반이 서둘러 집무실을 빠져나가자, 방 안에는 다시 두 사람만의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레이너가 에밀리아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일그러진 전신의 흉터들이 창밖의 푸르스름한 눈빛을 받아 기괴하면서도 처연한 질감을 드러냈다.

“에밀리아. 내게 보여줄 것이 있다.”

그의 목소리에는 깊은 피로와 함께, 오랫동안 가슴속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해묵은 통증이 묻어 있었다.

* * *

성은 고요했다. 바람조차 숨을 죽인 지하 깊은 곳, 먼지 가득한 낡은 무기고의 철문이 무거운 비명을 지르며 열렸다.

퀴퀴한 쇠 냄새와 차가운 흙먼지가 코끝을 찔렀다. 레이너는 에밀리아의 손을 잡고 무기고 가장 깊숙한 심층부로 걸어 들어갔다. 그곳에는 붉은 천으로 겹겹이 싸인 채 낡은 석대 위에 올려진 검 한 자루가 있었다.

레이너가 천을 걷어내자, 부러진 대검의 잔해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것은…….”

에밀리아가 나지막이 숨을 들이켰다. 대검의 칼날은 중간에서 무참히 부러져 있었고, 표면에는 시커먼 그을음과 함께 기괴한 마수의 손톱자국 같은 흔적이 깊게 파여 있었다.

그 순간, 검의 주위로 아지랑이 같은 검은 환영이 피어올랐다. 그것은 실체 없는 어둠의 형상이었으나, 보는 것만으로도 영혼을 짓누르는 사악한 기운을 뿜어냈다. 과거 레이너의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 갔던 마수의 잔해이자, 레이너의 영혼을 평생 갈가리 찢어놓았던 트라우마의 고착 장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 내가 쥐고 있던 검이다.”

레이너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의 숨소리가 거칠어지며, 전신의 화상 흉터가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불타는 전장의 환영, 비명 소리, 그리고 마수의 이빨이 살점을 파고들던 그날의 기억이 그를 덮친 것이 분명했다.

“이 검을 볼 때마다…… 내 안의 불길이 다시 타오른다. 아버지를 구하지 못했다는 자책이, 나를 괴물로 만들었던 그 어둠이…….”

그의 거대한 몸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단단해 보이던 철혈 공작의 이면에 숨겨진 외롭고 손상된 소년의 모습이 에밀리아의 눈에 들어왔다. 가슴이 저릿하게 아파왔다. 그녀는 주저 없이 레이너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레이너, 저를 보세요.”

그녀는 그의 뺨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거칠고 일그러진 화상의 질감이 손바닥을 타고 고스란히 전해졌다. 세상 사람들은 이 흉터를 혐오하며 고개를 돌렸지만, 에밀리아에게는 이 상처야말로 그가 살아남아 자신을 구원해 준 고귀한 흔적이었다.

“당신은 괴물이 아니에요. 그 가혹한 지옥 속에서도 살아남아 나를 안아준 유일한 사람이에요.”

에밀리아의 눈동자가 깊고 투명하게 빛났다. 그녀는 마음속에서 속삭이는 [상흔의 영지 장부]의 부름을 느꼈다. 장부의 낡은 양장 표지가 뇌리에서 황금빛으로 물들며 새로운 경로를 제시하고 있었다.

[시스템 메시지: 대상 '레이너 윈터가드'의 심층 트라우마 감지.] [고착 장치: '부러진 대검의 사악한 환영'.] [구원 방안: 최고 영적 전환 기능 활성화. 타인의 상처를 치유하고 자원화하는 대가로 극심한 영적 통증과 영구동토의 한기가 시전자에게 전이됩니다.]

‘괜찮아. 내게는 이 사람의 온기가 있으니까.’

에밀리아는 눈을 감으며 장부를 전면 개방했다. 그녀의 영혼이 장부의 마력과 완전히 동조하는 순간, 뼛속까지 얼어붙는 듯한 살인적인 한기가 그녀의 전신을 강타했다. 온몸의 피가 얼음물로 변하는 듯한 극심한 고통에 에밀리아의 입술이 순식간에 파랗게 질렸다.

“아……!”

그녀의 가냘픈 어깨가 덜덜 떨렸다. 하지만 그녀는 레이너의 손을 더욱 세차게 꽉 쥐었다.

동시에, 부러진 대검 주위를 맴돌던 사악한 검은 환영이 에밀리아의 몸을 타고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마수의 저주와 해묵은 슬픔이 그녀의 영혼을 갉아먹으려 들었다.

“에밀리아! 안 돼, 멈춰라!”

레이너가 경악하며 그녀를 거칠게 끌어안았다.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터질 듯한 열기가 차갑게 식어가던 에밀리아의 몸에 사정없이 주입되었다. 타오르는 불꽃 같은 그의 체온이 그녀의 내면에서 날뛰던 얼음의 폭풍을 잠재우기 시작했다.

서로의 체온과 영혼이 가혹하게 뒤엉키는 기묘한 공생 동맹.

에밀리아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가늘게 숨을 몰아쉬었다. 뜨거운 온기가 전해질 때마다, 검을 뒤덮고 있던 검은 그을음이 눈 녹듯 사라지며 영롱한 은빛 광채로 탈바꿈해 갔다. 사악한 저주가 가장 순수한 영적 마력 자원으로 정화되는 순간이었다.

[상흔의 영지 장부 경고: 최고 영적 전환 성공.] [영지 자원 '순수한 기사도의 정수' 획득.] [부러진 대검의 저주가 정화되었습니다.]

레이너는 자신의 가슴을 짓누르던 수십 년 묵은 무거운 공황과 공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을 느꼈다. 매일 밤 자신을 괴롭히던 불타는 전장의 악몽이, 에밀리아의 가냘픈 손길 아래에서 하얀 새벽안개처럼 흩어져 가고 있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정화된 검과 에밀리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너는 대체…… 나를 어디까지 구원할 셈인가.”

“말했잖아요.”

에밀리아가 파랗게 질린 입술로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그의 흉터투성이 뺨을 어루만졌다.

“우리는 서로의 상처를 채워주기 위해 만난 거라고요.”

그녀의 눈동자에는 더 이상 사교계의 낙인에 흔들리던 나약함은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자신의 유일한 안식처를 지키겠다는 강인한 의지만이 서려 있었다.

* * *

“모두 제자리를 지켜라!”

성벽 위, 매서운 눈보라 속에서 이반 카터가 검을 치켜들며 소리쳤다.

성문 밖 저 멀리, 황실 친위 연합 기사단의 붉은 깃발들이 눈보라 사이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이끄는 거대한 마도포들이 어둠 속에서 불길한 쇳소리를 내며 요새를 겨누고 있었다. 수천 명의 군세가 뿜어내는 압도적인 위압감에 영지 기사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때, 성벽 위로 에밀리아와 레이너가 모습을 드러냈다.

에밀리아는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성벽 아래의 적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곁에는 정화된 검의 기운을 받아 한층 더 강인한 마력을 뿜어내는 레이너가 버티고 서 있었다.

“부인, 저들이 포격을 개시하면 이 성벽도 오래 버티지 못합니다.”

한 기사가 우려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에밀리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녀는 장부를 펼쳤다. 방금 정화한 ‘순수한 기사도의 정수’와 영지민들의 단합된 신뢰도가 가득 차 있었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에밀리아의 맑고 청아한 목소리가 성벽 전체에 울려 퍼졌다.

“이곳은 윈터가드입니다. 제국의 그 어떤 가식적인 철퇴도 우리를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그녀는 장부의 마력을 작동시켰다.

“요새 자체 장갑 보루, 가동.”

그녀의 명령과 동시에, 윈터가드 성 전체가 거대한 진동과 함께 요동치기 시작했다. 성벽 곳곳에 새겨져 있던 오래된 마법 문양들이 푸른빛을 발하며 깨어났다. 성벽 바닥에서부터 거대한 마도 장갑판들이 슬라이드식으로 치솟아 오르며, 요새 전체를 감싸 안는 거대한 반구형의 방어막을 형성해 갔다.

철컥! 철컥!

육중한 강철과 마력이 결합하는 웅장한 소리가 대지를 흔들었다. 난공불락의 요새가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적들이 아무리 거대한 마도포를 준비했다 한들, 이 장갑 보루를 뚫어내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기사들과 영지민들은 눈앞에서 펼쳐지는 기적 같은 광경에 환호성을 질렀다. 불안과 공포로 가득했던 성벽 위는 순식간에 결의와 신명 나는 투지로 가득 차올랐다.

“우리에겐 공작 전하와 부인이 계신다!”

“북부를 수호하라!”

레이너는 에밀리아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바람에 흩날리는 그녀의 은빛 머리카락과, 적들을 압도하는 당당한 기세가 그의 심장을 세차게 뛰게 만들었다.

그는 결심했다. 이 여인이 만들어 준 이 견고한 장벽을, 결코 그 누구도 허물게 두지 않겠다고.

그때였다.

쿵-!

천지를 뒤흔드는 거대한 폭음이 대기를 찢었다.

차갑게 얼어붙은 수평선 너머, 제국의 무시무시한 기마 융단 폭격 마도포 전열이 장엄하도록 붉게 불꽃을 토하며 일제히 등장했다. 밤하늘을 피비린내 나는 붉은색으로 물들이며 날아오르는 수십 발의 마도 포탄들이, 장갑 보루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낙하하기 시작했다.

다음 화 계속 보기 →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