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치에 떨어진 양장 문서가 매서운 북풍에 파르르 떨렸다. 가혹한 동토의 바람은 금빛으로 새겨진 황실의 인장을 집요하게 할퀴었으나, 그보다 더 차갑게 에밀리아의 뺨을 스친 것은 줄리안 카펠의 비열한 웃음소리였다.
“공작부인, 아니 에밀리아 에버스. 황실 사법 기구의 대표로서 네게 성내 회담장에서의 독대를 요청한다.”
줄리안의 목소리에는 이 영지 전체를 발아래에 두었다는 오만한 확신이 짙게 배어 있었다. 그는 품속에서 에버스 가문의 극비 인장이 찍힌 붉은 서신을 흔들었다. 그녀의 어머니, 헬레나가 보낸 음모의 증거였다.
에밀리아의 어깨를 감싼 레이너의 손아귀에 스르륵 힘이 들어갔다. 가죽 장갑 너머로 전해지는 그의 단단하고 뜨거운 악력은 당장이라도 눈앞의 사내를 찢어발길 듯 살기로 가득 차 있었다. 전신의 흉터가 겉옷 아래에서 붉게 달아오르는 듯, 그의 숨결에서 희미한 열기가 피어올랐다.
“줄리안 경.”
레이너의 낮은 음성이 대기를 가라앉혔다.
“공작부를 위협하는 자에겐 사찰단의 신분이라 해도 예외는 없다. 내 영지에서 피를 흘리고 싶지 않다면 그 주둥이를 단단히 단속하는 게 좋을 것이다.”
“하! 윈터가드 공작, 겁박은 통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황실의 이름으로 발부된 정식 영장입니다. 거부하신다면 반역으로 간주하겠소.”
줄리안은 레이너의 기세에 짓눌려 힉, 하고 숨을 들이켜면서도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손에 쥔 헬레나의 서신이 그의 가짜 용기가 되어주고 있었다.
에밀리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레이너를 바라보았다. 그의 일그러진 화상 흉터가 분노로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사교계의 괴물이라 불리며 모두가 피하는 그 살기 어린 얼굴이, 지금은 오직 그녀를 지키기 위해 타오르고 있었다. 에밀리아는 그의 커다란 손등 위에 자신의 가늘고 하얀 손을 겹쳐 올렸다.
“괜찮아요, 레이너.”
그녀의 목소리는 서리 내린 호수처럼 맑고 고요했다.
“황실의 사찰단께서 이토록 정중하게 독대를 청하시는데, 호의를 거절할 수는 없지요. 회담장으로 모시겠습니다.”
에밀리아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그녀의 품속, 비단에 감싸인 채 깊이 잠들어 있던 단 하나의 서신이 가볍게 바스락거렸다.
* * *
윈터가드 성의 내빈 회담장은 얼어붙은 침묵의 요새라는 별칭에 걸맞게 음울한 냉기가 감돌고 있었다. 벽면에 늘어선 촛대들은 불을 밝혔지만, 높은 천장과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서 뿜어져 나오는 한기를 지우지 못했다.
문이 닫히고 단둘만 남게 되자, 줄리안은 기다렸다는 듯 본색을 드러냈다. 그는 벽난로 앞의 상석을 턱 차지하고 앉아, 에밀리아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과거 그녀를 가차 없이 버렸던 자 특유의 우월감과 가학적인 탐욕이 뒤섞여 있었다.
“에밀리아, 여전히 가련한 척하는 버릇은 고치지 못했군.”
줄리안이 낮게 빈정거리며 다리를 꼬았다.
“가문이 몰락할 위기에 처하자 괴물의 침실로 기어들어 가더니, 제법 공작부인 행세를 하는 모양이지? 하지만 네가 여기서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지 황실은 이미 다 파악하고 있다.”
그는 테이블 위에 조금 전 던졌던 압수 수색 영장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북부의 황폐한 토지에서 갑자기 쏟아져 나오는 풍요로운 자원들, 그리고 난방 코어의 복구……. 네까짓 영애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네가 가진 그 기괴한 ‘장부’의 정체가 무엇이냐? 에버스 가문의 비자금을 횡령해 황실의 자산을 착복한 것이 틀림없어!”
줄리안의 목소리가 회담장의 차가운 벽에 부딪혀 날카롭게 공명했다. 그의 일그러진 얼굴은 가문의 오명을 뒤집어쓰고 쫓겨났던 에밀리아가 자신보다 더 높은 곳에서 번영하는 것을 참을 수 없다는 열등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에밀리아는 소리 없이 미소 지었다. 그녀의 입가에 감도는 미소는 새벽녘 안개처럼 희미하고 아련했다.
“줄리안 경, 여전히 남의 것을 탐하는 버릇은 여전하시군요.”
“뭐라 마라?”
“제가 가진 자원이 탐나서, 혹은 저를 끌어내려 그 대단하신 황실에 공을 세우고 싶어서 눈이 뒤집히신 모양입니다만…….”
에밀리아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줄리안의 맞은편에 섰다. 그녀의 몸가짐에는 사교계의 가시 왕관 속에서 난도질당하며 배운 차가운 우아함이 깃들어 있었다.
“당신은 예나 지금이나 참 어리석고 얄팍해요.”
“이게 지금 제정신이 아니군! 영장이 보이지 않느냐? 당장 네놈들이 숨겨둔 밀수 장부와 자산 내역을 넘기지 않으면, 공작과 너 둘 다 반역죄로 광장에 목이 걸릴 것이다!”
줄리안이 책상을 쾅 치며 일어섰다. 그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에밀리아의 변함없는 차분함이 그의 불안을 자극하고 있었다.
에밀리아는 품속에서 손을 움직였다. 비단에 감싸여 있던 낡은 종이 한 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밀수와 횡령이라뇨. 참으로 무서운 죄목이군요.”
그녀는 그 종이를 줄리안의 눈앞에 천천히 펼쳐 보였다.
“그렇다면 이 서신은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감찰관 경?”
줄리안의 시선이 종이 위로 향했다. 그 순간, 그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붉게 달아올랐던 그의 얼굴에서 핏기가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그것은 몇 년 전, 줄리안 카펠이 에버스 가문과의 혼약을 미끼로 에밀리아에게 접근했을 당시, 사적으로 황실 사법 기구의 인장을 도용해 보냈던 서신이었다. 윈터가드 가문의 재정을 파탄 내고 그 자산을 사적으로 가로채기 위해 작성된 ‘횡령 유도용 불법 가밀 서신’.
“이, 이것이 왜 네 손에……!”
줄리안의 목소리가 꼴사납게 갈라졌다.
“서재 청소를 하던 중 우연히 발견했답니다. 당신이 그토록 철저히 숨겼다고 믿었던 과거의 흔적이지요.”
에밀리아는 서신에 찍힌 정교하게 위조된 황실 인장을 손가락 끝으로 살포시 쓸었다.
“황실의 감찰관이 사적으로 인장을 조작하여 영지의 재정을 수탈하려 획책했다……. 줄리안 경, 이것이 황실 법전에 따르면 어떤 죄목에 해당하는지 당신이 가장 잘 아시겠지요?”
“그, 그건……!”
“사문서 위조, 황실 모독, 그리고 국가 재산 갈취 음모죄.”
에밀리아의 조근조근한 목소리가 줄리안의 숨통을 조여왔다.
“이 서신이 황제 폐하의 직속 사법부로 넘어간다면, 당신뿐만 아니라 카펠 가문 전체가 반역의 연좌제에 묶여 단두대 아래에서 피를 흘리게 될 텐데요.”
완벽한 역공이었다. 줄리안이 쥐고 흔들던 압수 수색 영장은 즉시 휴지 조각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감찰관 본인이 황실의 인장을 도용해 불법적인 수탈을 모의했다는 증거가 나온 이상, 그가 내민 영장의 정당성 또한 통째로 날아가기 때문이었다.
줄리안은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었다. 그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려 턱끝으로 툭툭 떨어졌다.
“에, 에밀리아……. 이건 오해야. 그땐 내가 가문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너도 알잖아, 내가 널 얼마나 아꼈는지…….”
비굴하게 변명하며 그가 에밀리아의 손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
그 순간, 회담장의 무거운 목조 문이 부서질 듯 열렸다.
쿵!
문틀을 부수며 들어선 것은 거대한 어둠 그 자체와도 같은 레이너였다. 그의 두 눈은 분노로 붉게 이글거리고 있었다. 거친 숨을 내쉴 때마다 그의 전신에 새겨진 화상 흉터가 기괴하게 일렁였다.
“더러운 손 치워라.”
대지를 울리는 듯한 레이너의 포효와 함께, 그의 거대한 손이 줄리안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커흑!”
줄리안은 단 한 줌의 저항도 하지 못한 채 허공으로 들어 올려졌다. 레이너의 손아귀에 목이 졸려 얼굴이 보라색으로 변해갔다. 그의 다리가 허공에서 볼품없이 버둥거렸다.
“공작…… 살려, 살려주……!”
“내 부인에게 그 비열한 입을 놀리고, 감히 손을 대려 해?”
레이너의 목소리에는 그 어떤 자비도 없었다. 그는 참전 시절 마수들을 도륙하던 학살자의 기세를 그대로 뿜어내고 있었다. 줄리안은 죽음의 공포에 질려 눈물을 흘리며 바지에 오줌을 지릴 지경이었다.
스르륵.
그 순간, 에밀리아가 레이너의 단단한 팔뚝 위로 손을 얹었다. 차가운 그녀의 체온이 그의 뜨거운 피부에 닿자, 레이너의 붉게 물들었던 눈동자가 서서히 이성을 되찾았다.
“레이너, 죽이면 안 돼요. 이 자는 아직 쓸모가 있어요.”
그녀의 나직한 만류에, 레이너는 쓰레기를 버리듯 줄리안을 바닥으로 내팽개쳤다.
퍽!
“아아악!”
대리석 바닥에 거칠게 굴러 떨어진 줄리안은 가슴을 쥐어짜며 비명을 질렀다. 그의 고결하던 귀족식 예복은 이미 바닥의 먼지와 그의 비굴한 눈물로 더러워진 지 오래였다.
“이반!”
레이너가 밖을 향해 외쳤다. 기다렸다는 듯 기사단장 이반 카터가 무장한 기사들을 이끌고 회담장 안으로 걸어 들어왔.
“공작 부처를 겁박하고, 황실의 명예를 더럽힌 대역죄인을 체포해라.”
레이너의 명령은 단호했다.
“황실 감찰 규율 위반 및 사문서 위조 혐의다. 요새 감옥 가장 깊은 곳, 철문 뒤 구치소에 격리 감금해라. 쥐새끼 한 마리도 드나들지 못하게.”
“존명!”
이반의 사나운 눈빛이 줄리안을 향했다. 과거 전쟁의 트라우마로 괴로워하던 자신을 구원해 준 에밀리아를 감히 모욕하려 한 자에 대한 분노가 그의 검자루를 쥔 손에 가득 실려 있었다.
기사들이 줄리안의 양팔을 거칠게 꺾어 올렸다. 차가운 쇠사슬이 그의 손목과 발목을 사정없이 옭아맸다.
“이거 놓아라! 나는 황실의 감찰관이다! 너희들이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줄리안은 개처럼 질질 끌려가면서도 최후의 발악을 해댔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의 어둠 속으로 덧없이 묻혀갈 뿐이었다.
* * *
회담장 안에는 다시 고요가 찾아왔다.
긴장이 풀리자마자 에밀리아의 몸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장부의 실마리를 쥐고 있던 줄리안과의 대치 속에서 극도로 소모된 정신력과, 그녀의 영혼을 갉아먹는 고유의 한기가 뼛속 깊은 곳에서부터 차오르기 시작한 탓이었다.
입술이 파랗게 질려가며 오한이 그녀의 전신을 지배하려 할 때, 단단하고 뜨거운 품이 그녀를 뒤에서 안아왔다.
“에밀리아.”
레이너의 거칠고 커다란 손이 그녀의 가녀린 어깨와 등을 단단히 감싸 안았다.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타는 듯한 열기가 에밀리아의 시린 한기를 빠르게 녹여갔다.
“……따뜻해요, 레이너.”
에밀리아는 그의 품에 이마를 기댔다. 그의 가슴팍에 새겨진 거친 흉터의 질감이 옷 너머로 느껴졌다. 세상 사람들은 이 흉터를 괴물의 흔적이라 부르며 두려워했지만, 그녀에게는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구원해 주는 가장 안전한 안식처였다.
“그자가 감히 너를 모욕하게 두지 않겠다. 그 어떤 음모가 닥쳐와도, 이 요새는 너를 지키는 성벽이 될 것이다.”
레이너의 나직한 맹세가 그녀의 귓가를 울렸다. 에밀리아는 그의 품속에서 깊은 안도감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하지만 평화는 그리 길지 않았다.
지하 감옥, 어둡고 습한 요철 뒤쪽 구치소의 차가운 바닥에 처박힌 줄리안 카펠은 피투성이가 된 입술을 깨물며 독을 품고 있었다.
“이대로…… 당할 것 같으냐…….”
그는 기사들이 자신을 구금하며 미처 발견하지 못한, 그의 옷깃 안쪽 깊숙한 곳에 조각된 붉은 마도 통신석을 손가락 끝으로 더듬었다. 그것은 황실 정예 진압군과 직접 연결된 극비의 발신 장치였다.
줄리안의 눈동자가 광기로 번뜩였다. 그는 통신석에 자신의 마력을 쥐어짜 넣으며 비명을 지르듯 읊조렸다.
“포격을…… 개시해라! 윈터가드를 완전히 쓸어버려라!”
지하 감옥의 침묵을 찢고, 붉은 마도석이 불길한 빛을 뿜어내며 요란하게 공명하기 시작했다. 성벽 너머, 멀리 영구동토의 지평선 끝에서 거대한 포성이 대지를 흔들 준비를 마쳤다는 듯 웅장한 울림이 북부의 밤하늘을 물들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