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혹한 동토의 바람이 뺨을 후려치는 소리는 마치 굶주린 마수의 울음소리와 닮아 있었다. 성벽 너머로 몰아치는 백색의 폭풍은 모든 온기를 집어삼킬 듯 맹렬했으나, 성문 앞에 도달한 제국 황실 사법 기구의 거대한 마차와 화려한 깃발들은 그 가혹한 자연조차 자신들의 권위 아래 무릎 꿇리겠다는 듯 오만하게 서 있었다.
“오랜만이군, 나의 아름다운 전 약혼녀여.”
마법으로 증폭된 줄리안 카펠의 목소리가 얼어붙은 성벽의 돌 틈새마다 지저분하게 파고들었다. 그 목소리는 에밀리아의 귓가를 스치며 과거의 차가운 기억을 환기시켰다. 가문이 몰락하던 날, 자신을 향해 오물과도 같은 침을 뱉으며 비웃던 그의 비열한 입술. 그 입술이 지금 북부의 장벽 앞에서 다시 한번 오만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 있었다.
성벽 위에서 그를 내려다보는 에밀리아의 보라색 눈동자는 차갑게 침묵했다. 바람에 휘날리는 백은색 머리칼 사이로, 그녀의 시선은 줄리안의 등 뒤에 늘어선 황실 직속 중갑 기사단을 향했다. 번쩍이는 은빛 갑옷과 핏빛 망토. 그들은 북부의 혹한 속에서도 사치스러운 위용을 자랑하며 서 있었다.
“황실의 부름을 무시하고 북부에서 반역의 무리를 키우고 있다는 제보를 받고 조사하러 왔다. 자, 문을 열어라. 공작부인.”
줄리안의 외침이 허공에서 흩어지기도 전에, 성문 안쪽에서는 침묵 속에서 완벽한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었다.
줄리안이 성문에 당도하기 불과 한 시간 전, 윈터가드 성의 내부는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들끓었다. 외부의 적이 영지 경계를 침범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영지민들은 동요하는 대신 일제히 몸을 움직였다. 그들의 손에는 무기 대신 자신들이 수확한 온갖 자원과 식량이 들려 있었다.
“공작부인 마마, 이것들을 어서 창고로 들이십시오!”
한때 전쟁의 공포 속에서 얼어 죽어가던 늙은 영민이 숨을 헐떡이며 수레를 밀고 들어왔다. 수레 위에는 윈터가드의 차가운 대지 아래서 기적적으로 자라난 열매들과 두툼하게 가공된 가죽들이 가득했다. 에밀리아가 [상흔의 영지 장부]를 통해 그들의 마음속 깊은 상처를 어루만지고, 영지의 동결된 코어를 복구한 순간부터 영민들에게 그녀는 단순한 영주 부인이 아니었다. 그들의 목숨을 구원한 유일한 신앙이었다.
“중앙의 탐욕스러운 자들이 우리 영지의 풍요를 눈독 들이게 둘 수 없습니다. 어서 숨겨야 합니다.”
영민들의 눈빛에는 단단한 결의가 서려 있었다.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성내의 비밀 지하 창고로 막대한 식량과 은화, 그리고 마력석 가공품들을 옮겨 담았다. 사교계에서 버림받은 영애와 괴물이라 불리던 공작이 일구어낸 이 작은 낙원을, 중앙의 가식적인 귀족들에게 단 한 톨도 빼앗기지 않겠다는 무언의 약속이었다.
그 과정에서 에밀리아의 손끝이 가볍게 떨렸다. 장부를 펼쳐 들 때마다 스며드는 영적 통증과 뼛속을 파고드는 한기가 그녀의 뼈마디를 시리게 만들었다. 타인의 상처를 치유하고 영지를 번영시킨 대가로 치러야 하는 가혹한 한기. 하지만 그녀는 신음조차 내지 않고 입술을 굳게 깨물었다.
그녀의 시선이 문득 지하 창고 구석에 놓인 작은 상자로 향했다. 그 안에는 일찍이 색출해 낸 첩자의 잔당들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확보한 결정적인 물증이 들어 있었다.
바로, 에밀리아의 자애로운 친모인 헤레나 에버스가 고용한 첩자가 사용하던 북부 우체국의 특수 암호 봉인 도장이었다.
우체국의 깊은 서랍 속에 숨겨져 있던 그 붉은 인장은, 에버스 가문이 북부의 정보를 빼돌리고 황실과 결탁해 이 영지를 무너뜨리려 했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첩자들의 비밀 연락 기지를 소탕하며 얻어낸 이 작은 도장은 이제 에밀리아의 손안에서 언제든 적들의 목을 옥죄어 갈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있었다.
‘어머니, 당신이 보낸 쥐새끼들은 이미 이 땅의 거름이 되었답니다.’
에밀리아는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장부를 덮었다. 완벽한 방어 체계가 안착하는 순간, 영지는 하나의 거대한 요새처럼 단단하게 닫혔다. 준비는 끝났다.
* * *
쿵—!
육중한 철문이 좌우로 열리며 윈터가드 성의 입구가 개방되었다. 거친 눈바람을 뚫고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설원을 울렸다.
줄리안은 승리감에 젖은 미소를 지으며 성 안으로 걸음을 내딛으려 했다. 황실 사법 기구의 권위를 등에 업고, 기가 죽어 있을 옛 약혼녀의 얼굴을 보며 그녀의 비참함을 비웃어 줄 생각에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러나 성문을 열고 나온 이들은 그가 예상했던 나약한 패잔병들이 아니었다.
“이곳은 윈터가드 공작령이다. 허가받지 않은 무장 병력의 진입을 불허한다.”
대지를 가르는 듯한 묵직한 음성과 함께,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줄지어 나타났다. 그 선두에는 사나운 눈매를 지닌 기사, 이반 카터가 서 있었다.
이반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의 기세는 이전과는 차원이 달랐다. 과거 학살의 기억과 공황 발작으로 스스로를 좀먹어가던 나약한 기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에밀리아의 장부를 통해 정신적 구원을 얻고, 윈터가드의 가혹한 훈련을 거치며 단련된 그의 육체는 그 자체로 움직이는 거대한 장벽과 같았다.
스릉—!
이반이 검을 나직하게 뽑아 들었다. 그 검날에 서린 푸른빛의 서리 마력이 허공을 가르며 날카로운 파동을 일으켰다.
그 순간, 황실 기마대의 군마들이 일제히 거품을 물며 뒤로 주춤거렸다. 단단하게 훈련받았다는 황실의 명마들이, 북부의 가혹함 속에서 단련된 이반의 살기에 압도당해 비명을 지르며 제자리를 맴돌았다.
“히히힝—!”
“어, 어서 말들을 진정시켜라!”
황실 기사들이 당황하여 고삐를 잡아당겼지만, 이미 그들의 기세는 윈터가드 호위대의 압도적인 무력 시위 앞에 완전히 꺾여 있었다.
이반은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며 검 끝을 줄리안의 발치에 겨누었다. 검날에서 흘러나온 냉기가 줄리안의 가죽 장화 끝을 순식간에 하얗게 얼려버렸다.
“황실의 사찰단이라 할지라도, 공작가의 영지 내에서 무례하게 행동한다면 반역으로 간주하겠다. 검을 거둬라.”
줄리안의 얼굴이 수치심과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자신이 제국 최고의 정예라 자부하던 기사들이, 북부의 변방 기사단 단 한 명의 기세에 눌려 이토록 처참하게 흔들릴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네, 네 놈이 감히 누구 앞이냐! 나는 황실 사법 기구의 대표이자……!”
“그 대표라는 자의 목숨도, 이 추위 앞에서는 한낱 얼음 조각에 불과하지.”
낮고 서늘한, 그러면서도 타는 듯한 열기를 품은 목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기사들의 조율된 대열 사이로, 마침내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모피 망토를 걸친 거구의 사내, 레이너 윈터가드 공작. 그리고 그의 곁에 나란히 서서 차가운 고결함을 뿜어내는 에밀리아 윈터가드 공작부인.
줄리안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닿았다. 특히 레이너의 얼굴 오른쪽을 가득 뒤덮고 있는 처참한 화상 흉터와 목덜미까지 이어지는 일그러진 피부를 보았을 때, 줄리안의 입가에 찰나의 혐오감과 우월감이 스쳐 지나갔다.
“과연…… 소문대로군. 그런 흉측한 괴물 옆에서 밤을 지새우느라 고생이 많았겠어, 에밀리아. 제국의 고귀한 영애가 어쩌다 이런 처참한 몰골의 사내와 살을 섞는 처지가 되었는지, 내 마음이 다 아프군.”
줄리안은 가식적인 한숨을 쉬며 에밀리아를 자극하려 했다. 옛 연인인 자신이 그의 상처를 건드리면, 에밀리아가 수치심에 고개를 숙이거나 분노를 터뜨릴 것이라 확신했다.
그러나 에밀리아의 반응은 줄리안의 예상을 비웃듯 흘러갔다.
에밀리아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레이너의 곁으로 밀착했다. 그리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아무런 주저함도 없이 부드러운 손길로 레이너의 일그러진 화상 흉터를 어루만졌다.
거칠고 딱딱하게 굳은 흉터의 질감이 그녀의 손끝에 닿았다. 레이너의 몸이 움찔하며 긴장으로 굳어지려 하자, 에밀리아는 오히려 더 깊이 미소 지으며 자신의 하얗고 부드러운 뺨을 그의 흉터투성이 뺨에 자랑스럽게 비벼대었다.
살과 살이 맞닿는 순간, 에밀리아의 체내를 잠식하던 지독한 한기가 사르르 녹아내렸다. 장부의 대가로 찾아오는 영혼의 고통을 씻어내 주는 것은, 오직 이 남자가 가진 뜨거운 온기뿐이었다. 레이너의 붉은 눈동자가 흔들리며 그녀를 부드럽게 내려다보았다. 에밀리아는 그 눈빛 속에서 세상 가장 안전한 울타리를 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줄리안을 응시했다. 그 눈빛은 멸시가 아니라, 마치 길가의 하찮은 벌레를 보듯 무감각하고 한심하다는 감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괴물이라니요, 줄리안 경. 이토록 고귀하고 뜨거운 이가 내 남편입니다.”
에밀리아의 목소리는 맑고 단단하게 울려 퍼졌다.
“당신처럼 겉만 번지르르하고 속은 썩어 문드러진 위선자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겠지요. 제국의 사교계가 얼마나 천박하고 사치스러운 쓰레기장인지, 당신의 그 한심한 눈빛을 보니 다시금 깨닫게 되는군요.”
“너…… 에밀리아!”
줄리안의 얼굴이 붉다 못해 흙빛으로 변해갔다. 그가 기억하던 에밀리아는 가문의 억압 속에서 눈물을 흘리며 자신에게 구원을 갈구하던 나약한 영애였다. 하지만 지금 제 눈앞에 서 있는 여인은, 북부의 지배자로서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을 뿜어내고 있었다.
게다가 성 안쪽에서 풍겨오는 냄새와 기운은 그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버려진 동토, 굶주림과 죽음만이 가득해야 할 윈터가드 성 내부에서는 고소한 빵 냄새와 풍족한 식량의 향기가 풍겨 나오고 있었다. 성벽 곳곳에 설치된 난방 코어에서는 따뜻한 열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고, 영민들의 얼굴에는 굶주림의 흔적 대신 생기와 공작 부부를 향한 깊은 충성심이 가득했다.
이것은 제국 중앙에서도 쉽게 보기 힘든 풍요와 단합이었다.
줄리안은 심장 밑바닥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열등감과 위압감에 손끝을 부르르 떨었다. 자신이 짓밟고 비웃으려 했던 이들이, 자신보다 훨씬 더 찬란하고 단단한 왕국을 건설해 두고 있었던 것이다.
‘말도 안 돼. 이 거지 같은 북부 땅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 분명 무언가 불법적인 짓을 저지른 게 틀림없어!’
그의 눈빛이 광분으로 번뜩이기 시작했다. 악의적인 간섭의 빌미를 찾기 위해, 그는 사냥개처럼 윈터가드 성의 구석구석을 훑어보려 발악했다.
에밀리아는 그런 줄리안의 모습을 차분하게 지켜보며, 품속에 비단으로 감싸 둔 또 하나의 서신을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더듬었다.
줄리안 카펠이 과거 사적으로 인장을 조작해 보냈던, 윈터가드의 재정을 파탄 내기 위한 '횡령 유도용 불법 가밀 서신'.
아직은 이 패를 꺼낼 때가 아니었다. 줄리안이 더 깊은 수렁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올 때, 그의 목을 완벽하게 꺾어버릴 카운터로 남겨두어야 했다. 에밀리아의 입가에 차가운 여운이 감도는 미소가 떠올랐다.
“줄리안 경.”
레이너가 마침내 묵직한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대지를 짓누르는 거인의 발걸음 같았다.
“사찰을 하러 왔다면 절차대로 움직여라. 그렇지 않다면, 이 영지의 법에 따라 그 목을 성벽에 걸어두겠다.”
줄리안은 침을 삼키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그는 품속에서 붉은 황실 인장이 찍힌 양장 문서를 꺼내 들었다.
“좋다. 그렇다면 정식으로 절차를 밟지.”
줄리안의 입가에 비열한 미소가 다시 걸렸다. 그는 에밀리아를 쏘아보며 잔인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공작부인, 아니 에밀리아 에버스. 황실 사법 기구의 대표로서 네게 성내 회담장에서의 독대를 요청한다. 그리고……”
그는 에밀리아에게만 보일 수 있도록, 품속에서 에버스 가문의 극비 문장과 헤레나의 친필이 적힌 비밀 문서를 슬쩍 내비쳤다. 에밀리아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굳어지는 것을 보며, 줄리안은 승리를 확신한 듯 붉은 인장이 찍힌 문서를 그녀의 발치에 거칠게 던졌다.
툭.
차갑게 얼어붙은 대지 위로 떨어진 양장 문서에는 금빛 글씨로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윈터가드 영지 내 불법 무기 및 황실 자산 착복죄에 따른 압수 수색 영장]**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겠지, 에밀리아? 네가 숨기고 있는 그 비열한 장부와 이 영지의 모든 것을 황실의 이름으로 압수하겠다. 자, 나와 단둘이 이야기할 준비가 되었나?”
줄리안의 비웃음 가득한 질문이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으로 흩어졌다.
에밀리아는 발치에 떨어진 영장을 내려다보았고, 레이너의 손이 그녀의 어깨를 굳게 감쌌다. 차가운 겨울 안개 속에서, 거대한 음모의 톱니바퀴가 다시 한번 요란한 소리를 내며 맞물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