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서리늑대의 사나운 포효가 멎은 영지에는 기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마수들을 소탕하고 얻어낸 승리의 기쁨은 축제처럼 번져나갔지만, 성문 너머의 어스름한 새벽빛은 여전히 차갑고 푸르스름한 안개를 품고 있었다. 그 축제의 열기 뒤편, 차가운 달빛조차 닿지 않는 우체국 뒷마당의 음지에서 은밀한 배신의 징후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에밀리아는 승리의 환호성 속에서도 심장 언저리가 싸늘하게 식어내리는 것을 느꼈다.

두근, 두근.

가슴속에서 공명하는 [상흔의 영지 장부]가 불길한 진동을 보내오고 있었다. 그것은 영지민들의 상처가 치유될 때의 따스한 파동이 아니었다. 뼛속까지 시리게 만드는, 지독히도 비열하고 끈적한 배신의 얼룩이 장부의 페이지를 검게 물들이는 감각이었다.

“에밀리아.”

나직하게 부르는 레이너의 목소리에 에밀리아는 감았던 눈을 떴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는 걱정어린 빛이 담겨 있었고, 흉터 가득한 커다란 손이 그녀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그 온기 덕분에 떨림이 조금은 가라앉았지만, 에밀리아는 시선을 정면의 어둠 속으로 던졌다.

“어머니의 냄새가 나요…….”

그녀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갑게 갈라져 있었다.

“이 영지의 가장 깊은 곳에서, 우리의 피를 흘려 얻어낸 모든 성과를 훔쳐 가려는 쥐새끼가 있어요. 레이너.”

에밀리아의 단호한 눈빛을 마주한 레이너는 더 묻지 않았다. 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곁에 섰다.

에밀리아는 품에서 은빛으로 명멸하는 영지 장부를 꺼내 들었다. 장부의 표면에 손끝을 대자, 푸른 마력의 실핏줄 같은 선들이 허공에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영지 내에서 흐르는 정보와 마력의 궤적이었다. 영민들의 충성심과 치유된 상흔들이 금빛 줄기로 빛나는 와중에, 단 하나의 탁하고 어두운 청색 실선이 북부 우체국 배달원실을 향해 뻗어 나가고 있었다.

“우체국 배달원실…….”

에밀리아의 입술이 가볍게 호선을 그렸다. 하지만 그 비틀린 미소에는 서늘한 살기가 서려 있었다.

“가장 평범하고 일상적인 곳에 숨어 있었군요. 영지의 동태와 생산 성과, 마수 소탕의 결과까지 실시간으로 보고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녀는 품속에 고이 넣어둔 서류 한 장을 매만졌다. 지난번 공작저 서재를 정리하던 도중 발견했던, 줄리안 카펠이 사적으로 인장을 조작해 보낸 횡령 유도용 불법 가밀 서신이었다. 그 가밀 서신에 찍혀 있던 기묘한 마력 흐름이, 지금 장부가 가리키는 우체국 배달원실의 궤적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었다.

중앙의 뱀들이 이미 이 깊은 북부의 모퉁이까지 독니를 들이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반.”

레이너가 어둠 속을 향해 나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불렀다.

그러자 그림자 속에서 은빛 갑옷을 입은 이반 카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눈빛은 참전 시절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에밀리아에게 구원받은 이후,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하고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예, 주군. 대기하고 있습니다.”

“기사단을 이끌고 우체국을 포위하라. 단 한 마리의 쥐새끼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명령을 받듭니다.”

이반의 신형이 바람처럼 사라졌다. 에밀리아는 레이너의 단단한 손을 잡았다. 그의 손에 새겨진 거친 화상의 질감이 그녀의 손바닥을 자극했다. 그 가혹한 흉터가 전해주는 온기야말로, 지금 그녀가 이 자인한 음모의 소용돌이 속에서 버틸 수 있는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 * *

우체국 배달원실의 내부는 깊은 밤의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하지만 그 안쪽, 낡은 등잔불 하나만이 희미하게 켜진 구석진 방에서는 한 사내가 숨을 몰아쉬며 마법 종이 위에 무언가를 급히 적어 내려가고 있었다.

그의 정체는 우체국 배달 책임자이자 영지민들의 신뢰를 받던 늙은 배달원, 토마스였다.

“……공작부인의 마도 장부 능력 확인됨. 서리늑대의 한기를 흡수해 영지 자원으로 변환함…….”

토마스는 마법 펜을 쥔 손을 덜덜 떨며 지령을 완성했다. 그리고 품 안에서 붉은색 마력이 깃든 은밀한 도장을 꺼내 들었다. 그것은 헤르나 에버스가 고용한 첩자들만이 사용하는, 북부 우체국의 특수 암호 봉인 도장이었다. 일반적인 우편물에는 절대 쓰이지 않는, 오직 제국 중앙의 특정 가문으로만 비공개 전송되도록 마법 처리가 된 위험한 물건이었다.

스으으으……!

도장이 종이에 닿으려는 찰나였다.

콰아앙—!

거친 굉음과 함께 배달원실의 튼튼한 나무 문이 종잇장처럼 구겨지며 날아갔다. 매캐한 먼지와 함께 얼어붙을 듯한 한기가 방 안으로 들이닥쳤다.

“악!”

토마스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자빠졌다. 붉은 도장을 쥔 그의 손이 허공에서 보기 흉하게 흔들렸다.

먼지 구름을 헤치고 걸어 들어온 것은, 전신의 흉터를 가리기라도 하듯 검은 망토를 휘날리는 공작 레이너, 그리고 그의 옆에서 얼음조각처럼 차가운 아름다움을 뿜어내는 에밀리아였다. 그들의 뒤로 철갑을 두른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방을 에워쌌다.

“밤이 깊었는데, 누구에게 그리 정성스러운 편지를 쓰시는지요. 토마스 씨.”

에밀리아의 목소리가 고요한 방안에 울려 퍼졌다.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도 맑고 서정적이어서, 오히려 듣는 이의 심장을 얼려버릴 것만 같았다.

“부, 부인 마마……! 이, 이게 무슨…….”

토마스는 황급히 마법 종이를 등 뒤로 숨기려 했다. 하지만 이반이 번개처럼 움직여 그의 손목을 꺾어 쥐었다.

“아악!”

비명과 함께 토마스의 손에서 붉은 도가니가 바닥으로 떨어져 데굴데굴 굴렀다. 에밀리아는 천천히 걸어가 구두 끝으로 그 도장을 밟아 멈추었다. 그리고 그것을 집어 올려 달빛에 비추어 보았다.

도장의 아랫면에는 헤르나 에버스의 개인 문장과, 줄리안 카펠의 위조된 사리사욕의 인장이 정교하게 얽힌 마법 공식이 새겨져 있었다.

“북부 우체국의 특수 암호 봉인 도장…….”

에밀리아는 도장을 손안에서 굴리며 차갑게 중얼거렸다.

“어머니께서 참으로 꼼꼼하게도 준비하셨군요. 이 도장으로 봉인된 서신은 제국의 감시망을 피해 오직 에버스 가문의 밀실로만 전송되도록 설계되어 있죠. 맞나요?”

토마스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그는 사시나무 떨듯 떨며 무릎을 꿇었다.

“마, 마마! 오해이십니다! 저는 그저…… 그저 가문에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중앙에 계신 제 늙은 어머니와 자식들이 인질로 잡혀 있습니다! 제발 자비를……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는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눈물을 흘렸다. 피와 눈물이 뒤섞인 그의 얼굴은 보는 이로 하여금 깊은 연민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기사들 중 몇몇의 눈빛에 흔들림이 스쳤다. 가족을 인질로 잡힌 늙은 배달원의 절규는 확실히 비극적이었으니까.

그러나 에밀리아의 눈동자에는 단 한 줌의 동요도 일지 않았다.

그녀의 눈빛은 마치 만년설이 쌓인 북부의 절벽처럼 단단하고 냉혹했다. 동정심이라는 사치스러운 감정은 이미 오래전, 친가족들에게 배신당해 사교계의 가시 왕관을 쓰고 난도질당하던 그날 밤에 모두 타버렸다.

“가족이 인질로 잡혔다라…….”

에밀리아는 토마스의 앞에 한 걸음 다가섰다. 그녀의 구두 굽 소리가 감옥 같은 방안에 선명하게 박혔다.

“참으로 흔하고 편리한 변명이군요. 하지만 토마스 씨, 당신이 흘린 그 눈물 뒤에서, 이 영지의 수많은 영민들이 굶어 죽어갔다는 사실은 알고 있나요?”

“그, 그것은…….”

“당신이 보낸 생산 성과 데이터와 영지의 약점들 때문에, 제국은 북부의 식량 보급을 끊었고, 서리늑대의 습격 때도 구원병을 보내지 않았어요. 당신의 비겁한 침묵과 배신이, 이 땅의 아이들과 노인들의 목숨바쳐 지킨 삶을 송두리째 흔들고 있었다는 뜻이에요.”

에밀리아의 목소리가 점점 낮아지며 매서워졌다.

“자신의 가족을 구하기 위해 타인의 가족 수백 명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 그것을 우리는 ‘죄악’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나는 내 울타리를 위협하는 자에게 베풀 자비 따위는 키우지 않았어요.”

“마마! 제발……!”

토마스가 그녀의 옷자락을 붙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레이너의 차가운 검날이 그의 목덜미 바로 앞에 멈춰 섰다. 서슬 퍼런 검기만으로도 토마스의 목 가죽에 붉은 핏방울이 맺혔다.

“더러운 손으로 부인에게 손대지 마라.”

레이너의 목소리는 짐승의 으르렁거림과 같았다.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살기에 토마스는 더 이상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바닥에 엎드렸다.

에밀리아는 냉정하게 명령했다.

“이반. 이 배신자를 영지 광장으로 끌고 가라. 그리고 그가 저지른 죄상과 이 특수 도장의 정체를 온 영민들 앞에 명명백백히 밝혀라. 우리가 어떻게 우리 안의 독을 도려내는지 똑똑히 보여줄 것이다.”

“넷, 부인 마마!”

기사들이 토마스를 거칠게 일으켜 세워 끌고 나갔다. 그가 비참하게 울부짖는 소리가 복도 뒤로 멀어져 갔다.

방안에는 이제 에밀리아와 레이너, 단둘만이 남았다.

* * *

“……읏.”

기사들이 완전히 물러가고 정적이 찾아온 순간, 에밀리아는 밀려오는 극심한 통증에 몸을 비틀거렸다.

[상흔의 영지 장부]를 가동해 영지 내의 거대한 정보망을 역추적하고, 첩자의 배신이라는 영적인 상처를 강제로 도려낸 대가였다. 뼛속까지 얼어붙는 듯한 한기가 그녀의 발끝에서부터 타고 올라와 심장을 옥죄기 시작했다.

입술이 파르르 떨리며 하얀 입김이 서렸다. 시야가 흐려지고, 과거 가문에서 버림받았던 그 차가운 감옥의 기억이 한기가 되어 그녀를 집어삼키려 했다.

그때, 등 뒤에서 따뜻하고 묵직한 온기가 그녀를 감싸 안았다.

화상 자국으로 가득한 레이너의 넓은 품이 에밀리아의 작은 몸을 빈틈없이 안아왔다. 그의 타는 듯한 체온이 그녀의 차가운 피부를 타고 스며들었다.

“에밀리아…….”

레이너는 그녀의 귓가에 낮게 속삭이며, 자신의 뜨거운 불꽃 마력을 미세하게 조절해 그녀의 몸속으로 흘려보냈다. 거칠고 일그러진 그의 손이 에밀리아의 차가운 손가락 사이로 깍지를 껴왔다. 그 흉터의 가혹한 질감이 오히려 에밀리아에게는 그 어떤 비단보다도 안전하고 따뜻한 위안이 되었다.

“아…… 레이너…….”

그녀는 그의 품에 완전히 기대어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의 불꽃 마력이 그녀의 체내를 돌며, 에버스 가문의 저주스러운 혈통과 영지 장부의 부작용이 남긴 영적인 한기를 서서히 소진시켜 가기 시작했다. 얼어붙었던 그녀의 심장이 다시금 붉고 따스하게 뛰기 시작했다.

“내가 여기에 있다.”

레이너는 그녀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며 더욱 깊이 안았다. 그의 목소리에는 깊은 애정과 서정적인 아픔이 묻어 있었다.

“그대가 이 영지를 구원하기 위해 고통받을 때마다, 나는 그대의 불꽃이 될 것이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그 어떤 상처도 내게 나누어 주어라.”

“당신의 품은…… 늘 나를 살아가게 하네요.”

에밀리아는 미소를 지으며 그의 거친 뺨을 어루만졌다.

전신에 화상을 입어 제국에서 괴물이라 손가락질받던 사내와, 가문의 누명을 쓰고 사교계에서 외면당했던 영애. 두 사람은 서로의 흉터와 결핍을 가리는 대신, 그것을 서로의 온기로 채워가며 세상에서 가장 단단하고 아름다운 울타리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이 북부는 이제 그들의 온전한 영토이자 안식처였다.

하지만 세상은 그들이 이리도 쉽게 평화를 얻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 * *

다음 날 아침.

가혹한 북부의 눈보라가 잠시 걷히고, 눈부시게 하얀 설원이 펼쳐진 윈터가드 영지의 입구.

영지의 경계를 지키던 초병들의 경보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성벽 위에서 망루를 지키던 기사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두두두두—!

대지를 울리는 묵직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저 멀리 설원 끝에서 화려하기 그지없는 대규모 수행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이 치켜든 깃발에는 제국 황실 사법 기구의 상징인 ‘정의의 천칭’과, 금빛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카펠 가문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 화려한 행렬의 중심에는 마력으로 움직이는 거대한 사륜마차가 서 있었다.

마차가 영지의 바리케이드 앞에 멈춰 서고, 시종이 정중하게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인물이 있었다.

깔끔하게 빗어 넘긴 금발, 오만함이 가득 서린 푸른 눈동자, 그리고 입가에 걸린 가식적인 미소.

그는 제국 황실 사법 기구의 대표이자, 과거 에밀리아가 온 마음을 다해 갈망했으나 가문이 몰락하자 가장 먼저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침을 뱉었던 옛 약혼자, 줄리안 카펠이었다.

줄리안은 북부의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시며,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망토를 가볍게 털어냈다. 그리고 영지 성벽 위에 서 있는 에밀리아와 레이너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의 눈빛에는 탐욕과 질투, 그리고 비열한 승리감이 뒤섞여 번뜩이고 있었다.

“오랜만이군, 나의 아름다운 전 약혼녀여.”

줄리안의 목소리가 마법으로 증폭되어 영지 전체에 오만하게 울려 퍼졌다.

“황실의 부름을 무시하고 북부에서 반역의 무리를 키우고 있다는 제보를 받고 조사하러 왔다. 자, 문을 열어라. 공작부인.”

그의 등 뒤로 황실 직속의 중갑 기사단이 검을 뽑아 들며 위협적인 마력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거대한 폭풍이 북부의 장벽을 향해 몰아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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