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팔이 움직이지 않았다.
손끝 하나 까딱할 수 없는 감각의 단절. 캐비닛 문짝에 비친 백승우의 오른팔은 마치 타인의 육체를 아무렇게나 기워 붙여 놓은 것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손가락 끝을 쥐어보려 힘을 줄 때마다 정수리부터 척추를 타고 내려오는 건 오직 차가운 한기뿐이었다.
진통 패치를 쥔 왼손이 허공에서 갈 길을 잃고 잘게 떨렸다.
1화에서 코트의 지배자 시스템을 처음 각성했을 때 띄워졌던 그 붉은 경고음이 귓가를 찢을 것처럼 울려 대는 착각이 들었다.
[위험: 보호 장비 미착용 상태에서의 과부하 누적으로 어깨 마모율이 급격히 상승했습니다.] [현재 누적 마모율: 78.4%] [경고: 어깨 보호 장치 부재로 인해 마모율 가속이 3배로 유지됩니다.]
당장이라도 뼈마디가 바스러질 것 같은 심장부의 압박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회귀 후, 오직 승리만을 위해 보호대 하나 없이 맨몸으로 시스템을 켜고 코트를 뒹굴었던 대가였다.
"움직여. 움직이라고, 제발."
승우는 이빨을 악물었다. 왼손으로 자신의 오른팔을 움켜잡아 거칠게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대로 캐비닛의 두꺼운 철틀을 향해 내리쳤다.
*쾅!*
쇳소리가 라커룸의 무거운 공기를 찢었다. 하지만 어깨 관절은 여전히 죽은 고깃덩이처럼 묵묵부답이었다. 감각이 느껴지지 않으니 부딪히는 고통조차 없었다. 승우는 광기에 젖은 눈으로 다시 한번 팔을 치켜들었다. 철틀의 모서리를 향해 어깨 뼈째로 짓이겨버릴 기세로 내리치려던 순간이었다.
*쾅!*
라커룸의 낡은 나무문이 부서질 듯 열렸다.
"미친 새끼가 뭐 하는 거야!"
이지한이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들이닥친 지한의 시선이 승우의 일그러진 얼굴과 힘없이 덜렁거리는 오른팔, 그리고 찌그러진 캐비닛 철틀에 차례로 닿았다. 지한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는 들고 있던 커다란 아이스박스를 바닥에 팽개치듯 내려놓고 승우에게 달려들었다.
"이럴 줄 알았다. 네놈 그 어깨, 예선 내내 삐걱거릴 때부터 알아봤어!"
지한은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승우의 멱살을 잡아 캐비닛에 밀쳐 고정했다. 그리고 가방에서 끓는 물에 적셔온 듯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특수 수축 붕대와 가위, 그리고 정체불명의 갈색 약물 수류 팩을 꺼내 들었다.
"이거 놔. 내 몸은 내가 알아."
승우의 쉰 목소리가 튀어나왔지만 지한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시끄러워. 네 몸이 네 장난감인 줄 알아? 넌 지금 우리 팀의 세터야. 내 공을 받아야 할 독재자라고. 여기서 네가 무너지면 내 노력은 전부 쓰레기통에 처박히는 거야!"
지한은 가위로 승우의 상의 오른쪽 소매를 가차 없이 찢어발겼다. 허옇게 드러난 승우의 오른쪽 어깨는 관절 주위가 시퍼렇게 죽어 있었고, 미세하게 경련하고 있었다.
지한이 갈색의 전용 약물 수류 팩을 뜯었다. 한약 냄새와 지독한 멘톨 향이 뒤섞인 진한 액체가 승우의 어깨 관절막 주위에 아낌없이 도포되었다. 피부가 타들어 갈 듯한 뜨거운 열감이 순식간에 신경망을 자극했다.
"윽……!"
"참아. 전생이든 현생이든, 네가 아무리 혼자 다 짊어진 척 오만을 떨어도 내 눈은 못 속여."
지한의 손길은 거칠었지만 정확했다. 그는 뜨겁게 달궈진 특수 수축 붕대를 가위로 툭 툭 끊어내며, 승우의 회전근개 라인을 따라 십자 모양으로 정교하게 얽어맸다. 관절의 가동 범위를 강제로 제한하는 대신, 탈골과 마비를 막기 위해 뼈와 근육을 통째로 묶어버리는 극단적인 고정 테이핑이었다.
*스스슥! 팍!*
가위질 소리가 가쁘게 이어졌다. 지한은 이중으로 테이프를 당겨 승우의 견갑골 뒤쪽까지 단단히 밀착시켰다.
"이 테이핑은 딱 1시간만 버틴다. 그 뒤엔 압박 때문에 혈류가 막혀서 진짜로 팔을 못 쓰게 될 수도 있어. 그러니까……."
지한이 승우의 눈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그전에 끝내, 백승우."
승우는 천천히 오른손 손가락을 굽혀보았다. 붕대의 강력한 탄성이 어깨를 억지로 잡아끌며, 멈춰 있던 신경에 기묘한 박동을 불어넣고 있었다. 비록 납덩이를 매단 것처럼 무거웠지만,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기동은 가능했다.
"끝내는 건 당연한 거다."
승우가 차갑게 읊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울공고 놈들이 내 어깨를 노리고 들어오겠지. 특히 강희제, 그 새끼는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처럼 굴었으니까."
실제로 그랬다. 예선 내내 관객석 구석에서 원거리 비디오 카메라를 삼각대에 고정해 두고, 승우의 스파이크 견착 타점과 셋업 순간의 미세한 턱 각도까지 클로즈업하며 전술 데이터를 수집하던 강희제의 음습한 시선이 머릿속에 선명했다. 강희제는 승우가 던진 역정보마저 꿰뚫어 보고 오른쪽 어깨의 파열 상태를 정확히 짚어냈다.
하지만 승우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어디 분석할 테면 해보라고 해. 그 데이터가 진짜 내 한계인지, 아니면 놈들을 파멸로 이끌 덫인지 확인시켜 줄 테니까."
* * *
*콰아아아-!*
체육관을 가득 메운 함성은 마치 거대한 파도 같았다.
전국 종합체전 결승전이 열리는 메인 스타디움. 사방에서 터지는 중계 카메라의 플래시가 코트의 백색 라인을 어지럽게 비추고 있었다. 관중석의 열기는 뜨거웠지만, 코트 위에 서 있는 두 팀 사이의 공기는 살얼음판보다 차가웠다.
태성고등학교 대 한울공고.
네트 너머에 서 있는 한울공고의 세터 강희제는 평온한 얼굴로 승우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얇은 안경테 너머로 번뜩이는 지성적인 눈빛에는 강한 확신이 서려 있었다.
"어깨는 좀 어때, 백승우?"
서브권을 결정하는 토스 업 직전, 강희제가 네트 너머로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첫 세트부터 무너지면 재미없잖아. 난 네가 완벽한 상태일 때 짓밟아 주는 걸 선호하거든."
승우는 대꾸 대신 오른손으로 가볍게 공을 튕겼다. 무거운 가죽의 촉감이 단단하게 고정된 어깨 전반을 타고 둔탁하게 전해졌다.
[위험: 현재 어깨 마모율 81.2%] [경고: 시스템 가동 시 마비 도달 시간까지 남은 예상 시간: 35분]
시야의 가장자리를 가득 채운 붉은색 경고창 레이어가 거슬렸다. 승우는 신경질적으로 눈을 깜빡여 경고창을 화면 구석으로 밀어내 버렸다.
'시간이 없다. 질질 끄는 세트 플레이는 내 어깨가 먼저 박살 난다. 무조건 속전속결로 놈들의 숨통을 끊는다.'
*삑-!*
주심의 휘슬 소리와 함께 결승전의 서막이 올랐다.
첫 서브는 한울공고의 몫이었다. 강희제가 서브 라인 뒤에 섰다. 그는 공을 가볍게 두어 번 두드리더니, 승우의 오른쪽 어깨 방향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쾅!*
강희제의 손바닥을 떠난 공이 날카로운 궤적을 그리며 태성고의 코트 우측 깊숙한 사각지대로 빨려 들어왔다. 플로터 서브. 공중에서 불규칙하게 흔들리는 구질이었다. 평소라면 라이트 공격수가 받아내야 할 위치였지만, 강희제는 일부러 세터인 승우가 리시브에 가담하도록 유도하여 오른쪽 어깨에 충격을 주려는 수작이었다.
"어림없다!"
리베로 이지한이 번개처럼 몸을 날렸다. 낮게 슬라이딩하며 양팔을 모아 공을 걷어 올렸다.
*퍽!*
"라이트 뒤쪽! 승우야, 이단!"
지한이 걷어 올린 공은 정확히 세터 에어리어로 향하지 못하고 백 어택 라인 부근으로 다소 높게 치솟았다. 불안정한 연결. 공격수들은 아직 템포를 맞추지 못한 상태였다.
바로 그 순간, 승우의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코트의 지배자 가동.'
*위이잉-*
세상이 순간적으로 멈추며 흑백으로 변했다. 오직 허공에 떠 있는 배구공과 아군, 적군의 움직임만이 찬란한 빛의 궤적으로 매핑되기 시작했다.
[공의 낙하 지점: 백 어택 라인 뒤 30cm] [상대 블로커 강희제 이동 속도: 4.2m/s, 예측 블로킹 위치: 중앙 타이트] [아군 천다원 도약 최고점 예측: 320cm, 진입 각도 45도]
승우는 도리어 사물에 직접 선을 잇기 시작했다. 보통의 세터라면 언더핸드로 안전하게 띄웠을 공이었다. 하지만 승우는 억지로 오른팔을 뻗어 오버핸드 토스 자세를 취했다. 테이핑의 압박으로 인해 어깨가 비명을 질렀지만, 시스템이 그려내는 0.1초 단위의 볼 패스 속도를 극대화로 주조했다.
"다원아! 들어가!"
승우의 손끝에서 튕겨 나간 공이 기하학적인 직선을 그리며 네트 왼쪽 구석으로 빠르게 꽂혔다. C퀵 속공. 그것도 일반적인 속공보다 한 템포 더 빠른, 이른바 '옥죄는 배급'이었다.
"이 미친 세터 새끼가 첫 공부터!"
천다원은 투덜거리면서도 몸을 날렸다. 승우가 완벽하게 계산해 낸 타점 322cm의 공간에 다원의 손바닥이 정확히 맞물렸다.
*콰앙-!*
한울공고의 블로커들이 손을 채 뻗기도 전에 공이 코트 바닥에 내리꽂혔다.
1-0. 태성고의 선취점이었다.
"와아아아-!"
관중석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강희제의 얼굴에는 여전히 여유로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가 코트 바닥을 닦으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역시 초반에는 억지로 어깨를 쓰는군. 하지만 방금 토스할 때 오른발 축이 0.2초 정도 늦게 떨어졌어. 어깨 통증 때문에 체중 이동을 제대로 못 하고 있다는 증거지."
한울공고의 수비수들이 강희제의 지시에 따라 포메이션을 미세하게 조정했다. 승우가 오른쪽 어깨의 부담 때문에 백 토스(라이트 방향)를 극도로 자제할 것이라는 예측 하에, 수비 라인을 전부 레프트와 중앙 속공 쪽으로 전진 배치한 것이다.
"철저하게 왼쪽과 중앙만 막는다. 백승우는 지금 오른쪽으로 공을 보낼 각도가 안 나와."
강희제의 목소리가 한울공고 팀원들에게 전달되었다.
두 번째 랠리가 시작되었다. 한울공고의 강력한 스파이크를 이지한이 디그로 받아냈다. 공이 네트 위로 높게 떴다.
강희제를 필두로 한 한울공고의 블로커 세 명이 일제히 왼쪽의 천다원과 중앙 속공수 방향으로 스텝을 밟았다. 승우의 어깨 상태를 고려했을 때, 오른쪽으로 꺾는 백 토스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계산이 그들의 뇌리에 완벽히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걸려들었군.'
승우의 눈이 번뜩였다.
강희제가 설계한 '완벽한 예측 수비 위치'. 승우는 그것을 역이용하기로 했다.
[시스템 강제 출력 가동: 뇌 과부하율 85% 돌파] [경고: 우측 관절막 극심한 손상 위험 발생]
승우의 망막에 붉은 불꽃이 튀었다. 오른쪽 어깨에서 불에 달군 송곳으로 쑤시는 듯한 환상통이 휘몰아쳤다. 하지만 승우는 이빨이 깨질 정도로 악물며 고통을 억눌렀다.
공이 손끝에 닿는 0.1초의 찰나. 승우는 몸을 오른쪽으로 틀지 않았다. 대신 왼손 끝의 미세한 스냅과 이지한과의 약속된 이중 전술을 가동했다.
"지한아!"
승우가 백 토스를 올리는 척하다가 손가락 끝으로 공을 살짝 뒤로 흘려보냈다. 페인트가 아니었다. 세터가 직접 공을 처리하는 척하며 뒤쪽 공간으로 연결하는 변칙 '원터치 딥 패스'였다.
어느새 백 어택 라인까지 전진해 있던 리베로 이지한이 그 공을 받아 그대로 라이트 빈 공간으로 뛰어들던 라이트 공격수에게 완벽한 이단 연결을 배달했다.
*스파악-!*
한울공고의 수비진은 완벽하게 붕괴했다. 승우가 백 토스를 하지 못할 것이라 확신하고 왼쪽으로 치우쳐 있던 블로커 세 명은 허공에 손만 뻗은 채 바닥으로 떨어졌다. 공은 텅 빈 한울공고의 우측 코트에 그대로 꽂혔다.
"점수, 태성고!"
"말도 안 돼……!"
강희제의 미소가 처음으로 굳어졌다. 안경 너머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승우가 어깨 부상이라는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의 데이터 분석을 비웃듯 리베로와의 원터치 변칙 연결로 수비 포메이션을 완전히 유린해 버린 것이다.
"분석 데이터라는 건 말이야."
승우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강희제를 내려다보았다. 테이핑 아래로 땀이 비 오듯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걸 맹신하는 멍청이들을 낚기 가장 좋은 미끼지. 안 그래, 강희제?"
오해는 겉잡을 수 없이 커졌다. 한울공고의 벤치와 강희제는 혼란에 빠졌다. 백승우의 어깨가 정말 부상인지, 아니면 자신들을 낚기 위한 정교한 '연기'였는지 분간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강희제의 머릿속 연산 장치가 노이즈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하지만 승우의 상태는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경고: 어깨 마모율 85.3% 돌파.] [경고: 우측 상지 신경 마비 징후 감지. 즉시 기동을 중단하십시오.]
오른팔 끝이 서서히 감각을 잃어가고 있었다. 억지로 버티고 있는 테이프의 압박감이 뼈를 파고드는 것 같았다.
'다음 랠리에서 무조건 승기를 굳혀야 한다.'
*삑-!*
다시 서브가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한울공고의 반격이었다.
강희제는 혼란에 빠진 와중에도 무서운 평정심을 되찾았다. 그의 눈이 승우의 오른쪽 어깨 테이핑의 무거운 유기적 제한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아니야. 연기가 아니야. 저 새끼, 지금 어깨를 제대로 들어 올리지 못하고 있어. 몸을 비틀어 정면을 보는 리시브는 불가능해!'
강희제가 서브 토스를 올렸다. 그리고 극단적인 스핀을 먹인 서브를 날렸다. 공은 승우의 오른쪽 어깨 뒤편, 즉 승우가 몸을 기형적으로 비틀어 꺾지 않으면 절대로 오버핸드로 잡을 수 없는 잔인한 궤적으로 날아왔다.
사선 유도 딥 패스 서브.
"백승우! 뒤야!"
이지한의 비명이 체육관에 울려 퍼졌다.
공이 승우의 오른쪽 사각지대로 빠르게 낙하하는 순간, 승우는 몸을 돌려야만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선 마비 직전의 오른쪽 어깨 관절을 강제로 비틀어 꺾어야만 하는 극단의 선택만이 남아 있었다.
죽어가는 어깨로 이 공을 받아낼 것인가, 아니면 이대로 실점할 것인가.
승우의 망막 위에 붉은색 경고등이 미친 듯이 점멸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