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줄기가 멎어가는 소리는 마치 거대한 목숨이 끊어지는 단말마 같았다.
얼음판 아래로 가늘게 흐르던 베저 강의 수류가 자갈바닥을 드러내며 잦아들었다. 진흙 냄새와 민물고기의 비린내가 차가운 겨울 공기 사이로 거칠게 풍겨왔다.
에드리안은 흙투성이가 된 양필지를 쥔 채 굳건히 서 있었다. 그의 왼쪽 눈꺼풀 사이로 붉은 핏방울이 고여 들었다. 하이페리온의 연산 장치가 아벤베르크 댐의 유량 차단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재구성하자, 관자놀이를 찌르는 듯한 이명이 고막을 찢고 들어왔다.
시야 우측 하단에 붉은색 경고선이 명멸했다.
[경고: 베저 강 수계 유입량 1.6%로 급감.] [영지 내 축적 용수량: 4,100리터.] [스팀 가마 열교환기 및 1차 동력망 유지 가능 시간: 41시간 12분.]
"영주님! 저기 보십시오! 강바닥이... 강바닥이 완전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칼이 거친 숨을 내쉬며 벌거벗은 강줄기를 가리켰다. 잿빛 자갈들이 젖은 몸을 드러내며 차갑게 얼어붙고 있었다. 물이 없다면 고온 마그네슘 내화벽돌을 구워내던 가마의 냉각수 순환선이 마비된다. 보일러의 압력이 한계를 초과해 폭발하거나, 고가의 실린더가 열변형으로 일그러져 무용지물이 될 판국이었다.
"발레랑 백작... 이 혹한에 기어이 숨통을 죄어오는군요."
베아트리스가 손끝을 부르르 떨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에는 분노와 정교한 법리적 계산이 동시에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댐의 보수 공사는 영주의 고유 권한입니다. 제국 사법 총칙상, 사유지 내의 치수(治水) 행위는 인접 영지가 간섭할 수 없도록 규정되어 있으니까요. 이를 빌미로 우리를 고사시키려는 겁니다."
"비합리적인 지연 전술이군."
에드리안이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기계의 구동음처럼 건조했다.
"강물이 흐르지 않는다면, 흐르지 않는 대로 해결책을 도출하면 된다. 인간이 만든 댐이 중력과 대기압의 법칙까지 통제할 수는 없다."
"예? 물이 없는데 대체 어떻게 해결한단 말씀이십니까?"
칼이 제 머리를 쥐어뜯으며 물었다.
"지하수다."
에드리안은 대장간 바닥의 마른 흙을 구두 끝으로 짓밟았다.
"이곳 아이젠베르더 영지의 지질은 사암과 석회암이 교차하는 점토질 층이다. 베저 강줄기가 끊겼더라도, 지하 12미터 부근에는 침투수에 의해 형성된 고압의 피압대수층(Artesian aquifer)이 존재한다. 수직 갱도를 뚫고 물을 끌어올린다."
"지하 12미터요? 그 깊은 곳의 물을 무슨 수로 끌어올린단 말입니까? 마법사들이 쓰는 수류 정렬 진(陣)이라도 새겨 넣지 않는 이상, 그 깊이의 물은 지상으로 올라오지 않습니다!"
칼의 반박은 지극히 당대 상식에 부합했다. 중세의 변방에서 우물은 기껏해야 도르래와 두레박을 이용해 사람이 직접 길어 올리는 얕은 구덩이에 불과했다. 10미터가 넘어가는 깊이에서 수톤의 물을 지속적으로 양수하는 것은 오직 고위 마법사의 영역으로만 치부되었다.
에드리안은 대장간 한편에 놓인 석탄 조각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아직 열기가 가시지 않은 제철소 작업대 철판 위에 정교한 도면을 그리기 시작했다.
"마법이 아니라 압력의 차이를 이용한다."
철판 위에 매끄러운 원통과 그 내부를 오르내리는 피스톤 막대가 그려졌다.
"자연은 진공을 허용하지 않는다. 밀폐된 원통형 실린더 내부의 공기를 피스톤으로 밀어내어 진공 상태를 만들면, 대기(大氣)가 지상의 물을 위로 밀어 올린다. 이것이 대기압의 원리다. 이론상 최대 10.3미터까지는 단 한 방울의 마력 없이도 순수한 물리 법칙만으로 물을 길어 올릴 수 있다."
"대기... 압이요? 공기가 물을 누른다고요?"
칼의 눈이 둥그렇게 커졌다. 보이지 않는 공기가 거대한 물을 밀어 올린다는 개념은 그의 조악한 경험칙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영역이었다.
"12미터 깊이라면 대기압의 한계치인 10미터를 초과한다."
에드리안의 손가락이 피스톤 하단에 위치한 두 개의 작은 판막을 가리켰다.
"따라서 단일 흡입식이 아닌, 흡입과 가압을 동시에 수행하는 2단 점진식 가압 펌프(Double-action force pump)를 설계한다. 실린더 내부에 황동으로 주조한 역류 방지 체크 밸브(Check valve)를 상하로 배치한다. 피스톤이 올라갈 때 하부 밸브가 열리며 물을 흡입하고, 내려갈 때는 하부 밸브가 닫히는 동시에 피스톤 자체의 상부 밸브가 열려 물을 위로 밀어 올린다. 이 과정을 반복하면 깊이에 상관없이 원하는 높이까지 용수를 송출할 수 있다."
뇌내의 하이페리온이 황동의 마찰 계수와 가죽 패킹의 기밀성을 계산해 최적의 수치를 화면에 뿌렸다.
[연산 세부 사항: 실린더 내경 120mm, 스트로크 300mm.] [가죽 가스켓 두께: 4.5mm (우지 가공 처리 필수).] [예상 양수량: 분당 80리터 (인력 구동 시).]
"칼, 지금 즉시 창고에 있는 구리 합금을 녹여라. 내경 120밀리미터의 정밀 실린더를 주조해야 한다. 오차 범위는 0.1밀리미터 이내다. 조금이라도 틈이 생겨 공기가 새어 들면 진공은 파괴되고 펌프는 무용지물이 된다."
"0.1밀리미터요? 영주님, 그건 머리카락 한 올 두께보다 얇습니다!"
"할 수 없다면 대장간의 모든 석탄 배급을 중단하겠다. 생존 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해 불필요한 인력은 도태시키는 것이 이 영지의 새로운 규칙이다."
에드리안의 감정 없는 안광이 칼의 목덜미를 찔렀다. 칼은 침을 삼키며 도끼 대신 주조용 거푸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영주의 눈빛은 미신을 믿는 이들이 흔히 말하는 악마의 그것보다 더 서늘하고, 기계처럼 정교했다.
그사이 베아트리스는 대장간 한구석의 간이 책상에 양필지를 펼쳐놓고 깃펜을 들었다. 그녀의 손끝이 매섭게 움직였다.
"에드리안 님, 당신이 기계적인 해결책을 찾는 동안, 저는 발레랑 백작의 목줄을 법적으로 조여 놓겠습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황실 법정을 뒤흔들던 천재 법학자의 예리함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수리 분쟁이 아닙니다. 제국 대관세기 전례집 제47조를 적용하겠습니다."
에드리안이 조용히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이페리온의 데이터베이스가 해당 조항을 즉각 검색해 매칭했다.
"제47조. '황실 성찬식 및 영지 민생에 필수적인 수원은 본래 신의 소유이므로, 인접한 영주 간의 합의 없이 일방적으로 그 흐름을 90% 이상 차단하는 행위는 제국 영지 관리령 위반이자 영지민에 대한 간접적 살상 행위로 규정한다.' 맞습니까?"
베아트리스의 깃펜이 멈췄다. 그녀는 놀란 눈으로 에드리안을 응시했다. 제국의 해묵은 법전 구석에 처박혀 있는 세부 조항을, 이 변방의 영주가 단 한 자의 오차도 없이 읊조렸기 때문이다.
"그... 그렇습니다. 어떻게 그 조항을 알고 계십니까?"
"기억 장치에 저장되어 있을 뿐이다. 계속해라."
베아트리스는 가볍게 마른침을 삼키고 다시 글을 써 내려갔다.
"발레랑 백작은 '동절기 유지 보수'라는 명목을 내세웠지만, 이는 명백한 남용입니다. 제국 수리령 제12조에 따르면, 겨울철 준설 작업은 하류 영주의 서면 동의를 얻거나, 혹은 최소 30일 전에 제국 주 정부에 고지한 후 예비 수로를 확보한 상태에서만 진행할 수 있습니다. 백작은 이 절차를 완전히 무시했습니다."
그녀의 서장 끝에 붉은 인장이 찍혔다.
"이 서장을 제국 사법 재판소와 수자원 관리국 본부에 긴급 전령으로 발송하겠습니다. 그들이 백작의 뒤를 봐주고 있다 하더라도, 명문화된 전례집 제47조의 '영지 공유 수계 독점 금지' 조항을 정면으로 위반한 사실을 묵인할 수는 없습니다. 법적 효력이 발생하면, 주 정부는 즉각 아벤베르크 댐의 수문을 임시로라도 개방하라는 사법 명령을 내려야만 합니다."
"훌륭한 사법적 타격이군."
에드리안이 평가했다.
"하지만 관료제의 특성상 사법 명령이 이곳에 도달하기까지는 최소 5일이 소요된다. 우리의 잔여 용수는 기껏해야 이틀 분량이다. 따라서 베아트리스, 네가 법률로 백작의 손발을 묶는 동안, 나는 이 가압 펌프로 지하수를 확보해 시간적 공백을 완벽하게 메우겠다."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얽혔다. 철저한 통계적 생존률을 계산하는 공학자와 법전의 완벽한 정의를 신봉하는 법학자의 기묘한 공조였다.
그때, 대장간 입구에서 펌프의 압축 실린더용 피스톤 헤드를 깎던 칼이 소리쳤다.
"영주님! 주조는 끝났습니다! 이제 황동 실린더에 가죽 패킹을 조립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이 장치를 가동할 때 발생하는 소음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칼의 우려는 지극히 타당했다.
피스톤이 금속 실린더 내부를 고속으로 왕복하며 대기압을 압축할 때 발생하는 규칙적인 금속성 타격음과 흡기음은 고요한 변방의 겨울 공기를 타고 수 킬로미터 밖까지 울려 퍼질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현재 영지 국경 너머에는 이단심문관 아마데우스가 이끄는 수색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이단심문소의 감지 성물은 마력의 파동뿐만 아니라, 비자연적인 고주파 진동과 소음 역시 감지 대상 표적으로 삼는다."
에드리안의 눈앞에 붉은색 경고 창이 다시 떠올랐다.
[경고: 가압 펌프 구동 시 예상 소음 데시벨: 78dB.] [이단심문소 기지국 센서 수신 감도 범위 초과 확률: 94.2%.]
그들이 불법적인 '마공학 장치'를 가동한다고 판단하는 순간, 교단의 성기사들이 합법적인 체포장을 들고 영지로 들이닥칠 터였다. 마력석을 쓰지 않는 순수한 대기압 펌프라 할지라도, 이단심문소의 독선적인 기준 앞에서는 '사악한 연금술 장치'로 오인받기에 십상이었다.
"하이페리온, 음파 소쇄(Acoustic Dampening) 알고리즘을 구동해라."
에드리안의 뇌 세포들이 급격하게 활성화되며 측두엽에 강한 압박이 가해졌다. 귀에서 삐- 하는 고음의 이명이 울렸고, 왼쪽 눈에서 흐른 핏방울이 턱끝을 타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베아트리스가 깜짝 놀라 그의 어깨를 잡으려 했으나, 에드리안은 가볍게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알고리즘 수립 완료: 다공성 매질을 활용한 흡음 장벽 설계.]
"칼. 대장간 바닥에 구덩이를 파고, 그 내부를 이중 벽으로 설계한다."
에드리안은 피가 섞인 침을 뱉어내며 지시했다.
"바깥벽은 진흙과 모래를 섞은 점토로 쌓고, 그 안쪽에 거친 가죽과 톱밥을 두껍게 채워 넣어라. 펌프 본체는 그 구덩이 깊숙한 곳에 설치한다. 다공성 매질인 톱밥과 가죽이 고주파 진동을 흡수하고, 점토 벽이 저주파 소음을 차단할 것이다. 음파의 회절 경로를 차단하는 ㄷ자형 배기구를 지상으로 빼낸다."
"가... 가죽과 톱밥으로 소리를 가둔다고요?"
"물리적인 소음 역시 파동의 일종이다. 파동이 밀도가 다른 매질을 통과할 때마다 에너지는 감쇄된다. 잔말 말고 즉시 작업해라.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38시간뿐이다."
칼은 이제 에드리안의 기괴한 지식에 토를 달지 않았다. 그는 도끼를 내려놓고 대장간 구석에서 자루째 방치되어 있던 톱밥과 무두질하다 남은 자투리 가죽들을 긁어모으기 시작했다.
사흘간의 기나긴 겨울밤 동안, 대장간의 지하는 거대한 개미굴처럼 파헤쳐졌다.
에드리안의 지휘 아래, 정착민들은 영문도 모른 채 삽을 들고 흙을 팠다. 비효율적인 노동이라며 채찍질을 가하는 대신, 에드리안은 철저하게 분업화된 공정표를 제시했다. 1조는 굴착, 2조는 흡음벽 설치, 3조는 황동 배관 연결.
그 결과, 단 36시간 만에 대장간 지하 4미터 아래에 완벽하게 밀폐된 '지하 가압 양수실'이 완성되었다.
지하실 중앙에는 칼이 밤새 망치질하여 완성한 황동 실린더와 길게 뻗은 피스톤 로드가 우뚝 서 있었다. 윤기가 흐르는 우지(牛脂)를 듬뿍 바른 가죽 패킹이 실린더 내부를 꽉 채우고 있었다.
"피스톤 작동 개시."
에드리안의 명령에 따라, 건장한 정착민 두 명이 거대한 레버를 잡고 아래로 힘껏 눌렀다.
콰아아앙-!
묵직한 금속음이 발생했으나, 이중 흡음벽에 부딪힌 소리는 이내 둔탁한 '툭, 툭' 소리로 필터링되어 지상으로는 거의 새어 나가지 않았다.
슈우우우-!
실린더 내부의 공기가 빠져나가며 기밀성이 유지된 진공 상태가 만들어졌다. 대기압이 지하 12미터 아래의 수면을 짓눌렀고, 갈 곳 잃은 물은 압력 차이에 의해 황동 관을 타고 무서운 속도로 역류하기 시작했다.
투두둑, 투둑!
황동 배관이 격렬하게 떨렸다. 이윽고 역류 방지 체크 밸브가 덜컥거리며 열리는 소리와 함께, 지상으로 연결된 배출구에서 맑고 차가운 지하수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물... 물이다! 진짜로 물이 나옵니다!"
칼이 쏟아지는 지하수에 손을 적시며 어린아이처럼 날뛰었다.
"마법도 없이, 도르래도 없이 땅속 깊은 곳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다니! 이건 기적입니다!"
"기적이 아니라 통계와 유체역학의 결과물이다."
에드리안은 쏟아지는 물을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연산 결과: 양수 압력 안정적. 가마 냉각수 공급 즉시 재개 가능.] [영지 내 생존 안정성 지표: 12% 상승.]
발레랑 백작이 강의 수문을 걸어 잠가 이 영지를 말려 죽이려 했던 계획은, 에드리안의 정교한 기계 공학적 설계 앞에서 완벽하게 분쇄되었다. 그들이 물을 독점하려 했다면, 에드리안은 땅속에서 새로운 수원을 창조해 내며 그들의 독점권을 무력화시킨 것이다.
베아트리스 역시 쏟아지는 물줄기를 보며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이것으로 백작이 법정에서 우리의 생존권을 위협했다는 주장은 더욱 힘을 얻을 것입니다. 우리가 자구책을 마련하는 동안 법적인 처벌은 고스란히 그자의 몫이 될 테니까요."
그러나 승리의 여운은 길지 않았다.
지하실 구석, 에드리안이 이단심문소의 탐지망을 감시하기 위해 설치해 두었던 간이 경보 장치에서 기분 나쁜 기계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지잉- 지잉-
대장간 바깥, 영지 경계선 언덕 위에 우뚝 솟아 있던 이단심문소의 마력 탐지 진동기가 돌연 미친 듯이 떨리고 있었다. 장치 상단에 박힌 성물이 내부의 고온 마그네슘 잔여 열기와 가압 펌프의 미세한 자외선 파장을 감지해 낸 것이었다.
침묵을 지키던 성물이 붉은빛을 뿜어내며 기괴한 경고음을 울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