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창이 아래로 끌려갔다. 검은 물이 출렁였다. 수로의 아가리가 열렸다. 아린이 철망을 움켜쥐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떨렸다. 철창 뒤편 어둠이 갈라졌다. 거대한 그림자가 일어섰다. 도살 청지기였다. 거울의 타격을 버텨냈다. 그의 손에는 도끼가 있었다. 피투성이가 된 도맹원들이 누워 있었다. 그 너머로 청지기가 보였다. 죽음을 부르는 형상이었다. 태식은 숨을 죽였다. 가슴의 상처가 욱신거렸다. 딸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았다. 지워진 기억이 통증을 불렀다. 분노조차 일지 않았다. 오직 목적만 남았다. 태식은 앞으로 걸어갔다. 두식이 비명을 질렀다. "태식 씨! 피해!" 청지기가 도끼를 휘둘렀다.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도끼날이 태식의 머리를 겨냥했다. 태식은 피하지 않았다. 그는 품에서 장부를 꺼냈다. 장부의 겉표지가 붉게 물들었다. '결산을 집행한다.' 머릿속에서 글자가 튀었다. 태식은 권능을 기용했다. 일시 통각 차단. 그 대가는 가혹했다. 머릿속의 소중한 기억이 타들어 갔다. 딸과의 생일 파티였다. 그 마지막 온기가 사라졌다. 가슴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지독한 냉소가 태식의 입가에 걸렸다. 퍼억. 도끼날이 태식의 어깨를 찍었다. 살이 터지고 뼈가 깎였다. 보통 인간이라면 비명을 질렀을 터였다. 태식은 침묵했다.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뇌가 고통을 거부했다. 그는 묵묵히 청지기를 응시했다. 청지기의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 "괴물 놈이." 청지기가 중얼거렸다. 태식은 도끼 자루를 붙잡았다. 피 묻은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도끼가 미동도 하지 않았다. 태식은 청지기의 턱을 올려쳤다.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청지기가 뒤로 주춤했다. 철창은 계속해서 하강했다. 아린의 몸이 물에 잠기기 시작했다. 물밑에서 쇠사슬 소리가 났다. 검은 철마의 숨소리였다. 태식은 주머니를 뒤졌다. 오빠의 보안 카드가 만져졌다. 아린이 떨어뜨렸던 카드였다. 이 카드가 열쇠였다. 하지만 지금은 쓸 수 없었다. 리더기가 잠겨 있었다. 태식은 권총을 뽑았다. 구경이 큰 자동권총이었다. 그는 철창의 사슬을 겨냥했다. 탕! 불꽃이 튀었다. 쇠사슬이 요동쳤다. 하지만 끊어지지 않았다. 아린이 차가운 폐수 속에서 외쳤다. "연결부를 쏴요!" 그녀의 눈빛은 살아 있었다. 태식은 총구를 낮췄다. 사슬이 톱니바퀴와 만나는 지점이었다. 탕! 탕! 연속으로 두 발을 쏘았다. 쇠붙이가 파괴되며 튀었다. 끼이익! 철창이 한쪽으로 기울었다. 사슬이 완전히 끊어졌다. 철창이 수로 벽면에 걸렸다. 하강이 멈췄다. 아린은 틈새로 손을 뻗었다. 그녀는 주변의 고압 밸브를 잡았다. "이거나 처먹어!" 아린이 밸브를 힘껏 돌렸다. 배수관에서 썩은 물이 뿜어졌다. 고압의 폐수가 청지기의 얼굴을 때렸다. 청지기가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가렸다. 태식의 전투 반경이 넓어졌다. 장애물이 사라진 셈이었다. 태식은 바닥의 쇠파이프를 집었다. 녹슨 쇠끝이 날카로웠다. 그는 청지기의 허벅지를 찔렀다. 푸욱. 검은 피가 솟구쳤다. 청지기가 도끼를 무작위로 휘둘렀다. 바닥의 콘크리트가 깨졌다. 태식은 그 틈을 파고들었다. 그의 가슴에서 열기가 피어올랐다. 장부가 스스로 페이지를 넘겼다. '죄악의 소급 적용.' 청지기의 이력이 장부에 기록되었다. 수많은 살인 행위였다. 그것은 도맹의 위법 거래였다. 심연의 규칙을 위반한 죄였다. 태식은 장부를 꽉 쥐었다. "네 거래는 파산이다." 태식이 선언했다. 청지기의 몸이 굳어졌다. 그의 육체에 균열이 생겼다. 태식은 자신이 받은 타격을 떠올렸다. 어깨의 깊은 상처였다. 장부의 권능이 작동했다. 압류 타격의 3배수 반격이었다. 쿠웅! 무형의 충격이 청지기를 때렸다. 그의 장기가 내부에서 터졌다. 청지기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그의 눈과 귀에서 붉은 액체가 흘렀다. 태식은 청지기의 도끼를 보았다. 영적인 기운이 감도는 무기였다. 장부의 붉은 선이 도끼를 감쌌다. '압류를 시작합니다.' 도끼가 빛을 잃으며 태식의 손으로 넘어왔다. 묵직한 무게감이 전해졌다. 청지기는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그의 거구가 굳어갔다. 태식은 도끼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어깨의 상처에서 피가 계속 흘렀다. 통증이 서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태식은 신음을 참았다. 그는 철창으로 걸어갔다. 아린이 철창 틈으로 빠져나왔다. 그녀의 옷이 젖어 있었다. "고마워요." 아린이 짧게 말했다. 태식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허공을 향했다. 두식이 허겁지겁 다가왔다. "살았습니다! 우리가 살았어요!" 두식이 태식의 눈치를 보았다. 태식의 눈은 죽어 있었다. 자신의 기억을 바친 대가였다. 딸의 웃음소리마저 흐릿해졌다. 태식은 가슴을 움켜쥐었다. 지옥 같은 통증이 밀려왔다. 그때였다. 지하 터널의 벽면이 울렸다. 위이이잉! 기괴한 경보음이 고막을 찔렀다. 붉은 등이 아니었다. 차가운 은빛 조명이었다. 은빛 경보등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지하도맹 전체에 비상이 걸렸다. "이, 이 소리는..." 두식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살육 추격조입니다! 맹주가 움직였어요!" 어둠 속에서 발자국 소리가 몰려왔다. 수십, 수백 명의 발소리였다. 바닥이 진동했다. 쇠파이프가 긁히는 소리가 가득했다. 아린이 총을 고쳐 잡았다. 태식은 압류한 도끼를 쥐었다. 은빛 불빛이 그들의 얼굴을 비췄다. 사방이 적으로 포위되고 있었다. 태식은 이빨을 악물었다. 그는 도끼날을 세웠다. 전투는 끝나지 않았다. 더 깊은 구렁텅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첫 번째 추격대원이 모퉁이를 돌았다. 그의 손에 든 정글도가 빛났다. 태식은 압류한 도끼를 비켜 잡았다. 도끼의 무게가 어깨를 짓눌렀다. 통각 차단의 약효가 떨어지고 있었다. 찢어진 살점 속에서 불길이 일었다. 태식은 내색하지 않았다. 그는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정글도가 사선으로 날아왔다. 태식은 도끼 자루로 칼날을 쳤다. 깡! 날카로운 금속음이 터널에 퍼졌다. 태식은 그대로 어깨를 밀었다. 체중을 실은 타격이었다. 대원의 흉부가 으스러졌다. 그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갔다. 뒤따르던 자들이 엉켜 도미노처럼 쓰러졌다.
태식은 주변을 훑었다. 폐수 처리장의 철제 난간이 보였다. 녹슬고 낡은 구조물이었다. 태식은 아린에게 눈짓했다. "난간 위로 피하라." 아린이 재빨리 난간을 기어올랐다. 그녀가 권총을 조준했다. 탕! 탕! 추격대의 선두 일원이 쓰러졌다. 두식은 기둥 뒤에 납작 엎드렸다. 그는 이빨을 딱딱 부딪쳤다. 태식은 도끼를 넓게 수평으로 휘둘렀다. 난간을 지탱하던 지지대가 잘려 나갔다. 쿠르릉! 거대한 철제 상판이 무너졌다. 그것이 통로를 완전히 가로막았다. 추격조의 진입로 하나가 차단되었다. 하지만 안심할 수 없었다. 반대편 선로에서도 발소리가 들렸다. 사방이 적의 포위망이었다.
"이쪽 벽면에 제어반이 있어요!" 아린이 소리쳤다. 태식은 벽면의 철함을 보았다. 먼지 쌓인 리더기가 보였다. 일반 카드는 먹히지 않는 기기였다. 태식은 주머니를 뒤졌다. 아린의 오빠가 가졌던 카드였다. 특수 규격의 마그네틱 보안 카드. 태식은 카드를 리더기에 긁었다. 띠릭. '마스터 권한이 확인되었습니다.' 기계음이 고요하게 울렸다. '격리벽을 개방합니다.' 두꺼운 철문이 스르륵 옆으로 열렸다. 도맹의 중앙 통제실로 통하는 길이었다. 안쪽은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가슴에서 다시 열기가 뿜어졌다. 장부가 스스로 페이지를 펼쳤다. 가슴의 상처가 더 크게 찢어졌다. 검붉은 피가 셔츠를 적셨다. 머릿속에서 무언가 뜯겨 나갔다. 딸의 목소리였다. 아빠라고 부르던 맑은 음성이었다. 그 음조가 뭉개지며 소음이 되었다. 태식은 이빨을 악물었다. 눈앞이 붉은 핏빛으로 번졌다. 기억이 사라진 자리에 분노가 찼다. 그는 흔들리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안으로 들어간다." 태식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셋은 격리벽 안으로 발을 들였다. 바닥에 끈적한 점액질이 가득했다. 유황 냄새가 코를 찔렀다. 천장에서 쇠사슬이 길게 내려왔다. 사슬 끝에 무언가 매달려 있었다. 사람의 형상이었다. 하지만 사지가 기괴하게 늘어났다. 피부 위로 쇠판이 박혀 있었다. 그것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붉은 안광이 어둠 속에서 번뜩였다. 아린이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오빠...?" 그녀의 목소리가 찢어지듯 튀었다. 괴물이 된 오빠가 서 있었다. 동시에 등 뒤의 철문이 쾅 닫혔다. 퇴로가 사라졌다.
괴물이 울부짖었다. 쇳소리가 고막을 찢었다. 요동치는 사슬이 사방으로 튀었다. 아린은 제자리에 굳었다. 눈물조차 흘리지 못했다. "오빠 정신 차려." 그녀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괴물에게 자비는 없었다. 늘어난 팔이 허공을 갈랐다. 끝에 박힌 칼날이 빛났다. 태식이 아린의 덜미를 잡았다. 그녀를 옆으로 거칠게 던졌다. 콰앙. 칼날이 벽을 강타했다. 콘크리트 파편이 얼굴을 스쳤다. 태식은 도끼를 치켜들었다. 압류한 청지기의 도끼였다. 묵직한 궤적이 어둠을 갈랐다. 태식은 괴물의 팔을 찍었다. 깡. 불꽃과 함께 반동이 일었다. 괴물의 피부는 철판이었다. 충격이 태식의 손목에 전해졌다. 어깨의 상처가 다시 벌어졌다. 붉은 피가 바닥에 떨어졌다. 고통이 전신을 난도질했다. 태식은 이빨을 악물었다. 그는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 벽면에 전선 뭉치가 보였다. 굵은 고압선이었다. 태식은 도끼로 전선을 내리쳤다. 퍼버벅. 전선이 끊어지며 불꽃이 튀었다. 파란 전류가 날뛰었다. 태식은 피 묻은 장갑으로 전선을 잡았다. 손끝에서 단내가 피어올랐다. 그는 전선을 괴물의 발밑으로 던졌다. 바닥의 점액질이 전류를 전도했다. 콰르릉. 강력한 고전압이 괴물을 덮쳤다. 괴물이 단발마의 비명을 질렀다. 몸에 박힌 철판이 붉게 달아올랐다.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지금이다." 태식이 낮게 외쳤다. 아린이 권총을 고쳐 쥐었다. 그녀의 눈에 독기가 서렸다. 탕. 탕. 탕. 세 발의 총성이 연달아 터졌다. 탄환이 붉게 달아오른 철판을 뚫었다. 괴물의 심장부였다. 검은 피가 뿜어져 나왔다. 괴물이 무릎을 꿇었다. 바닥에 쿵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사슬 소리가 멎었다. 아린이 괴물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괴물의 목을 보았다. 낡은 가죽 주머니가 걸려 있었다. 태식이 다가가 주머니를 뜯어냈다. 가죽을 찢자 내용물이 나왔다. 분홍색 토끼 인형이었다. 예린의 가방에 달려 있던 열쇠고리였다. 태식의 눈동자가 깊게 흔들렸다. 머릿속 기억은 흐릿했다. 하지만 심장이 강하게 반응했다. 딸은 살아 있었다. 이곳에 강제로 끌려온 것이 확실했다. 그때 제어반의 모니터가 켜졌다. 지지직거리는 노이즈가 가득했다. 화면에 마태환의 얼굴이 비쳤다. 그가 기괴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물건은 찾았나 보군." 스피커에서 쇳소리가 새어 나왔다. "하지만 거긴 막다른 길이다." 쿠구구구. 바닥이 급격히 내려앉았다. 두식이 비명을 지르며 넘어졌다. 통제실 전체가 하강하기 시작했다. 거대 엘리베이터였다. 아래는 끝이 보이지 않는 심연이었다. 제9호선 폐기장이었다. 쇠사슬이 감기는 마찰음이 들렸다. 검은 철마의 울음소리였다. 어둠 속에서 수백 개의 붉은 눈이 켜졌다. 방은 멈추지 않고 추락했다. 태식은 도끼 자루를 꽉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