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태식은 허리를 숙였다. 손가락으로 카드를 집었다. 서아린의 온기가 남아 있었다. 그것은 이정표였다. 천장에서 흙먼지가 내렸다.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두식이 기침을 뱉었다. "아린아!" 두식의 비명이 터널을 울렸다. 사슬 소리는 이미 멀어졌다. 천장의 구멍은 깊고 어두웠다. 태식은 카드를 주머니에 넣었다. 감정은 요동치지 않았다. 머릿속은 차갑게 가라앉았다. 딸의 생일 케이크. 그 촛불의 잔상이 지워졌다. 장부의 대가였다. 기억 하나가 또 소실되었다. 태식은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비린 피가 혀끝에 감돌았다. "태식 씨, 이제 어쩌죠?" 두식이 어깨를 떨며 물었다. 손전등 불빛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태식은 대답하지 않았다. 코끝을 찡그렸다. 바람이 불어왔다. 무너진 천장 틈새였다. 그곳에서 냄새가 났다. 그슬린 고기 탄내였다. 독한 유황 냄새도 섞였다. 아귀의 후각이었다. 장부가 새겨준 저주였다. 태식의 눈이 번뜩였다. "냄새가 난다." 태식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예? 무슨 냄새요?" "살 타는 냄새." 태식은 쇠파이프를 쥐었다. 녹슨 쇠 냄새가 손에 감겼다. 그는 망설임 없이 걸었다. 잔해를 딛고 올라섰다. 어두운 구멍 속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두식이 허둥지둥 따라왔다. 터널 상부의 통로는 좁았다. 배관들이 뱀처럼 얽혀 있었다. 침수된 구역이었다. 발을 디딜 때마다 물이 튀었다. 검고 걸쭉한 오수였다. 사방에서 쥐들이 찍찍거렸다. 태식은 전방을 노려보았다. 연기 냄새는 더 짙어졌다. 살인마들의 거처가 가까웠다. 그들의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통로는 아래로 꺾였다. 내리막길 끝에 철문이 있었다. '배수펌프 무전실' 빛바랜 표지판이 보였다. 문틈으로 붉은 불빛이 새어 나왔다. 지지직거리는 잡음도 들렸다. 무전기 소리였다. 태식은 벽에 몸을 밀착했다. 호흡을 가다듬었다. 가슴의 상처가 욱신거렸다. 장부를 펼칠 때의 통증이었다. 그는 고통을 무시했다. 두식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뒤를 지키라는 몸짓이었다. 두식이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태식은 철문 손잡이를 잡았다. 잠겨 있지 않았다. 그는 문을 밀어젖혔다.

끼이익. 쇠 마찰음이 고요를 깼다. 방 안의 공기는 축축했다. 바닥에는 발목까지 물이 찼다. 사방에 모니터들이 깨져 있었다. 방 한가운데에 제단이 있었다. 검은 초가 타오르고 있었다. 그슬린 냄새의 진원지였다. 인간의 뼈가 제단 위에 놓였다. 도맹의 표식이었다. 태식의 등 뒤로 그림자가 비쳤다. "뉘기야?" 걸걸한 목소리였다. 철모를 쓴 사내가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도끼가 쥐여 있었다. 도맹의 순찰 대원이었다. 태식은 대답 대신 움직였다. 오른발로 바닥의 물을 찼다. 물보라가 사내의 얼굴로 튀었다. "윽!" 사내가 눈을 지푸렸다. 찰나의 틈이었다. 태식은 앞으로 도약했다. 쇠파이프가 사선으로 그어졌다. 퍽! 타격음이 둔탁했다. 사내의 턱관절이 으스러졌다. 도끼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첨벙! 물소리가 크게 울렸다. 사내는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태식은 자비가 없었다. 파이프를 다시 휘둘렀다. 이번에는 무릎이었다. 소름 끼치는 파열음이 났다. 뼈가 부러진 사내가 쓰러졌다. 그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태식의 손이 사내의 머리를 짓눌렀다. 차가운 물속으로 얼굴이 박혔다. 포말이 거칠게 일었다. "읍! 읍!" 사내가 허우적거렸다. 태식은 힘을 빼지 않았다. 지독한 냉혹함이었다. 사내의 움직임이 잦아들었다. 그제야 태식은 손을 뗐다. 사내는 숨을 헐떡이며 엎드려 있었다.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었다. 태식은 제단으로 시선을 돌렸다. 제단 중앙에 거울이 있었다. 녹슨 구리 프레임이었다. 기괴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거울 표면은 흐릿했다. 하지만 기이한 기운이 뿜어졌다. 태식의 눈이 가늘어졌다. 장부가 가슴속에서 요동쳤다. 새로운 채무의 냄새였다. 거울 속에서 붉은 실들이 보였다. 그 실들은 허공으로 뻗어 있었다. 실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태식은 직감했다. 이것이 마태환의 비밀이었다. 타인의 원혼을 저당 잡은 거울.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는 매개체였다. 그 더러운 부채가 보였다. 영혼들이 거울 속에서 울부짖었다. 태식은 거울을 향해 손을 뻗었다. 구리 프레임을 강하게 잡았다. 제단에서 거울이 뜯겨 나왔다. 우지끈! 나무 제단이 부서졌다. 거울이 태식의 손에 들어왔다. 장부의 온도가 급격히 떨어졌다. 얼음처럼 차가운 냉기였다. 태식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기억의 파편이 또 흔들렸다. 딸의 목소리가 흐려졌다. "아빠." 그 다정한 부름이 멀어졌다. 태식은 이가 갈렸다. 이를 악물고 거울을 품에 넣었다. 이것은 마태환의 장기였다. 반드시 쓸모가 있을 것이다. 그는 바닥의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사내는 여전히 물을 뱉어냈다. 두식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이, 이 거울은 뭡니까?" 두식의 목소리가 떨렸다. "마태환의 목줄." 태식이 짧게 답했다. 그는 사내에게 다가갔다. 쇠파이프 끝으로 사내의 손가락을 밟았다. 으드득. "아아악!" 사내의 비명이 방을 채웠다. 태식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서아린." 그가 입을 열었다. "어디 있나." "모, 모른다! 나는 그냥..." 퍽! 쇠파이프가 사내의 어깨를 찍었다. 쇄골이 함몰되는 소리가 났다. 사내는 자지러졌다. "질문은 한 번만 한다." 태식의 목소리는 기계 같았다. "어디 있나." 사내는 공포에 질려 눈을 부릅떴다. 태식의 눈동자 때문이었다. 그곳에는 인간의 감정이 없었다. 오직 살의와 허무뿐이었다. 사내는 직감했다. 말하지 않으면 죽는다. 곱게 죽지도 못할 것이다. "수, 수용소!" 사내가 쇳소리를 냈다. "지하 3층... 폐수 처리장..." "경비는?" "도살... 청지기가..." 사내가 침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그놈이 지키고 있다... 제발..." 태식은 파이프를 거두었다. 사내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태식의 발이 움직였다. 사내의 관자놀이를 강하게 걷어찼다. 퍽! 사내의 고개가 꺾였다. 그대로 기절해 물속으로 쓰러졌다. 두식은 그 모습을 보며 침을 삼켰다. 태식의 잔혹함에 소름이 돋았다. 그는 진짜 괴물 같았다. "가자." 태식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 두식은 군말 없이 뒤를 따랐다.

통로는 더 어두워졌다. 물이 흐르는 소리가 커졌다. 폐수 처리장이 가까워진 증거였다. 악취가 코를 찔렀다. 썩은 침전물의 냄새였다. 태식은 계단을 내려갔다. 녹슨 철제 계단이 삐걱거렸다. 아래는 거대한 공동이었다. 콘크리트 기둥들이 숲을 이루었다. 그 사이로 철창들이 보였다. 과거에 쓰이던 격리 구역이었다. 공기 중에 습기가 가득했다. 태식은 발소리를 죽였다. 어둠 속에서 불빛이 보였다. 철창 앞이었다. 누군가 갇혀 있었다. 서아린이었다. 그녀는 철창 안 바닥에 누워 있었다. 옷은 피로 얼룩져 있었다. 사슬에 묶인 흔적이었다. 숨소리가 거칠었다. 아직 살아 있었다. 태식의 눈이 좁아졌다. 그는 철창으로 다가가려 했다.

그때였다. 무거운 발소리가 들렸다. 쿵. 쿵. 바닥의 물이 출렁였다. 기둥 뒤에서 거대한 실루엣이 나타났다. 정상적인 인간의 체구가 아니었다. 키가 2미터는 족히 넘어 보였다. 양어깨는 비정상적으로 넓었다. 그의 손에는 거대한 도끼가 들려 있었다. 날끝에 붉은 피가 눌러붙은 도끼였다. 그의 얼굴은 가죽 가면으로 가려져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가죽이 들썩였다. 푸우우. 푸우우. 마치 도살장의 황소 같았다. 그가 도살 청지기였다. 청지기가 도끼를 바닥에 끌었다. 치이이익. 쇠가 콘크리트를 긁는 소름 끼치는 소리였다. "새로운 가축들이 왔군." 가면 뒤에서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나왔다. 그의 눈구멍으로 붉은 안광이 번뜩였다. 태식은 쇠파이프를 고쳐 잡았다. 그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두식은 이미 기둥 뒤로 숨어 숨을 죽였다. 아린이 간신히 눈을 떴다. "태, 태식 씨..." 그녀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태식은 아린을 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청지기에게 고정되었다. 전투의 지형을 살폈다. 주변에 흩어진 쇠파이프 잔해들. 바닥의 고인 물. 그리고 좁은 기둥 사이의 간격. 거대한 덩치에게는 불리한 지형이었다. 태식의 입꼬리가 가느다랗게 올라갔다. 감정이 배제된 냉정한 계산이었다. 청지기가 도끼를 치켜들었다. 거대한 그림자가 태식을 덮쳤다. 태식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의 몸이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도끼가 바람을 갈랐다. 쿠웅! 바닥의 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태식은 옆으로 굴렀다. 몸이 흙탕물에 젖었다. 그는 개의치 않았다. 콘크리트 기둥 뒤로 숨었다. 도끼가 기둥을 찍었다. 쾅! 돌가루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기둥에 깊은 균열이 생겼다. 청지기의 덩치는 컸다. 좁은 공간은 그에게 독이었다. 도끼가 기둥에 박혀 멈췄다. 찰나의 틈이었다. 태식이 기둥 뒤에서 튀어나왔다. 쇠파이프를 거꾸로 쥐었다. 그대로 청지기의 손목을 찍었다. 깡! 쇠와 가죽이 부딪쳤다. 청지기가 신음했다. 하지만 도끼를 놓지 않았다. 그가 다른 손으로 태식을 후려쳤다. 통나무 같은 팔뚝이었다. 태식은 상체를 숙였다. 바람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그는 바닥의 물을 미끄러졌다. 청지기의 가랑이 사이였다. 쇠파이프 끝이 위를 향했다. 그대로 급소를 올려쳤다. 퍽! 묵직한 타격음이 울렸다. 청지기의 거구가 휘청였다. 그가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태식은 멈추지 않았다. 기둥을 딛고 도약했다. 그의 무릎이 청지기의 안면을 강타했다. 가죽 가면이 찌그러졌다. 붉은 피가 가죽 틈으로 뿜어졌다. "크아악!" 청지기가 광포하게 울부짖었다. 그가 도끼를 마구 휘둘렀다. 지형지물이 박살 났다. 철제 계단이 찌그러졌다. 접근하기 어려웠다. 시간이 없었다. 아린의 호흡이 가빠지고 있었다. 태식은 품속의 거울을 꺼냈다. 마태환의 채무 거울이었다. 장부가 가슴속에서 쿵쾅거렸다. '결산을 시작한다.' 머릿속에 글자가 새겨졌다. 가슴의 상처가 찢어지는 듯했다. 피가 셔츠를 적셨다. 극심한 통증이 전신을 덮쳤다. 태식은 신음을 삼켰다. 그의 기억 하나가 또 바래졌다. 딸의 웃는 얼굴이었다. 이목구비가 안개처럼 흐려졌다. 태식의 눈에 서늘한 광기가 돌았다. 그는 거울을 청지기에게 비췄다. "채무를 이행해라." 태식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거울 표면이 붉게 달아올랐다. 청지기의 몸이 굳었다. 그의 몸에서 검은 연기가 새어 나왔다. 거울 속으로 연기가 빨려 들어갔다. "어, 어떻게..." 청지기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의 거구가 급격히 위축되었다. 근육이 빠지고 가죽이 늘어졌다. 거울이 그의 생명력을 흡수했다. 마태환과 연결된 채무의 고리였다. 청지기는 무릎을 꿇었다. 도끼가 바닥에 쓰러졌다. 쿵. 그는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태식은 거울을 거두었다. 그의 전신이 피로 떨렸다. 눈앞이 잠시 흐려졌다. 그는 이정표를 잃지 않았다. 철창으로 걸어갔다. 두식이 기둥 뒤에서 나왔다. "대, 대단하십니다." 두식의 목소리가 경외로 가득했다. 태식은 대답하지 않았다. 주머니에서 마그네틱 카드를 꺼냈다. 철창 옆의 리더기에 카드를 대려 했다. 그때였다. 리더기의 붉은 등이 깜빡였다. 지리릭. 기계음과 함께 스피커가 켜졌다. "하하하!" 찢어지는 웃음소리가 울렸다. 마태환의 목소리였다. "쥐새끼가 여기까지 왔군." 태식의 손이 멈췄다. "거울을 가져갔더군." 스피커에서 쇳소리가 났다. "하지만 그건 함정이다." 쿠구구구! 바닥이 다시 흔들렸다. 철창이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바닥의 철판이 열렸다. 그 아래는 깊은 수직 수로였다. 검은 물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오빠..." 아린이 신음하며 철창을 잡았다. 철창은 빠르게 하강했다. "태식 씨! 구해줘요!" 두식이 소리쳤다. 태식은 카드를 긁었다. 삑. '권한이 거부되었습니다.' 기계음이 울렸다. 수색대원의 카드가 아니었다. 더 높은 등급의 카드가 필요했다. 철창의 절반이 이미 지하로 내려갔다. 그 깊은 어둠 속에서 소리가 났다. 쇠사슬이 긁히는 기괴한 마찰음. 검은 철마의 울음소리였다. 괴물이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태식은 철창을 내려다보았다. 선택해야 했다. 여기에 남을 것인가. 아니면 저 깊은 심연으로 뛰어들 것인가. 태식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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