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딸의 목걸이를 움켜쥐었다. 금속의 차가움이 손끝에 전해졌다. 머릿속에서 무언가 빠져나갔다. 예린이와 유원지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태양빛은 바랬다. 예린이의 웃음이 흐려졌다. 이내 연기처럼 완전히 사라졌다. 기억이 지워졌다. 장부의 대가였다. 감정이 무너진 자리에 한기만 남았다. 태식은 눈을 부릅떴다. 흔들림은 없었다. 오직 목적만 남았다. 지하 깊은 곳으로 간다. 예린이를 찾는다. 그것뿐이었다.

천장에 매달린 가죽 괴물이 울부짖었다. 그것의 손에 쥔 무전기가 지직거렸다. 마태환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네 딸의 심장은 아주 뜨겁더군." 태식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분노조차 일지 않았다. 그저 도살해야 할 대상을 인지했을 뿐이다. 태식은 권총을 들어 올렸다. 조준은 찰나였다. 탕. 총성이 지하 광장을 때렸다. 탄피가 바닥의 물 위로 떨어졌다. 팅. 괴물의 미간에 구멍이 뚫렸다. 검은 피가 뿜어져 나왔다. 괴물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철벅. 물보라가 사방으로 튀었다. 무전기가 물속으로 잠겼다. 목소리가 끊겼다.

태식이 발을 움직였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기억이 더 지워지기 전에 가야 했다. "태식 씨!" 아린이 그의 옷자락을 잡았다. 태식은 아린의 손을 뿌리쳤다. 그의 눈빛에는 아무런 온기도 없었다. 아린이 멈칫했다. 그녀의 눈동자에 슬픔이 스쳤다. 태식의 인간성이 죽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느꼈다. 하지만 아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눈물을 삼켰다. 대신 엽총을 굳게 쥐었다. "나도 가요." 아린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그녀는 무너지지 않았다. 태식의 화력 파트너가 되기로 결심했다. 두식이 산탄총을 어깨에 얹었다. "나도 빠질 수 없지." 두식이 침을 뱉었다. "돈 냄새가 나니까." 셋은 폐선로를 향해 달렸다.

바닥의 검은 물이 발목을 잡았다. 태식은 거침없이 나아갔다. 선로의 침목을 밟았다. 눅눅한 공기가 허파를 찔렀다. 터널 안은 칠흑 같았다. 손전등 빛줄기가 어둠을 갈랐다. 벽면에는 이끼가 가득했다. 천장에서 오수가 떨어졌다. 툭. 툭. 소리가 고막을 자극했다. 아린이 달리는 와중에 주머니를 뒤졌다. 그녀가 무언가를 꺼냈다. 작은 카드였다. 특수 규격의 마그네틱 보안 카드였다. 파란색 선이 낡아 있었다. "이거 오빠 방에서 찾은 거예요." 아린이 카드를 태식에게 보여주었다. 태식의 시선이 카드로 향했다. "지하도맹 중앙 통제실 카드키예요." 아린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오빠는 도맹의 핵심부까지 갔었어요." 태식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카드는 중요한 열쇠였다. 목표가 확실해졌다. 마태환의 아지트이자 도맹의 심장부다. 그곳으로 간다.

선로를 따라 백 미터를 달렸다. 공기가 무거워졌다. 피부로 느껴지는 압박감이었다. 경계선이 가까워졌다. 저 멀리 거대한 철문이 보였다. 녹슨 철문이었다. 하지만 보통의 문이 아니었다. 문 표면에 붉은 문양이 일렁였다. 핏빛의 문양이었다. 그것이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지하도맹의 초자연적 방어막이었다. 가까이 가자 심장이 요동쳤다. 피가 역류하는 느낌이었다. 일반인은 접근조차 못 할 저주였다. 철문 위 초소에 불빛이 켜졌다. 도맹의 하수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가죽 옷을 입고 있었다. 손에는 쇠파이프와 석궁을 들었다. "쥐새끼들이 왔군!" 초소 위에서 조롱이 쏟아졌다. "그 방어막을 만지는 순간 온몸의 피가 터질 거다!" 그들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태식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철문 앞으로 걸어갔다.

"태식 씨, 위험해요!" 아린이 소리쳤다. 태식은 듣지 않았다. 그는 품에서 심연의 결산 장부를 꺼냈다. 장부의 가죽 표면이 붉게 빛났다. 가슴에 날카로운 통증이 들이쳤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피가 눈에서 흘러내렸다. 뺨을 타고 붉은 선이 그려졌다. 태식은 개의치 않았다. 장부를 펼쳤다. 글씨들이 요동치며 배열되었다. 방어막의 지분을 분석했다. 이 방어막은 인간의 공포를 기반으로 작동했다. 공포가 클수록 저주는 강해진다. 침입자의 두려움이 방어막의 연료였다. 태식은 장부를 응시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공포가 없었다. 이미 감정이 마모된 상태였다. 공포라는 자산이 존재하지 않았다. 태식은 방어막의 규칙을 역매수했다. 지분 청산을 선언했다. "파산이다." 태식이 손을 뻗었다. 철문에 손바닥을 대었다. 치이익! 살이 타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붉은 문양이 잘게 흔들렸다. 빛이 바랬다. 금빛 균열이 일어났다. 와장창!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터졌다. 붉은 문양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방어막이 소멸했다. 초소 위의 하수인들의 웃음소리가 뚝 끊겼다. 그들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말도 안 돼!" "어떻게 방어막을 깼지?"

태식이 철문을 걷어찬다. 쾅! 거대한 철문이 경첩째 뜯겨 나갔다. 안쪽으로 문이 쓰러졌다. 먼지가 자욱하게 일었다. 태식이 먼저 진입했다. 그의 손에는 쇠파이프가 쥐여 있었다. "죽여라!" 초소 위에서 석궁이 발사되었다. 시위 소리가 날카로웠다. 태식은 몸을 옆으로 틀었다. 화살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태식은 지형을 확인했다. 우측에 부서진 철골이 있었다. 그것을 딛고 도약했다. 단숨에 초소 난간을 붙잡았다. 몸을 위로 끌어올렸다. 순식간에 하수인 중 하나의 눈앞에 나타났다. 하수인의 눈이 커졌다. 태식은 파이프를 휘둘렀다. 퍽! 턱뼈가 산산조각 났다. 그가 난간 밖으로 추락했다. 태식은 멈추지 않고 다음 놈의 목덜미를 잡았다. 그대로 바닥에 메쳤다. 우드득! 척추가 부러지는 소리가 선명했다. 아래쪽에서도 전투가 시작되었다. 아린이 엽총을 발사했다. 타앙! 밀려들던 하수인 하나의 가슴이 뚫렸다. 그녀는 신속하게 재장전했다. 두식도 산탄총을 쏘아댔다. 쾅! 쾅! 터널 안이 화염과 비명으로 가득 찼다. 도맹의 하수인들이 차례로 쓰러졌다. 태식은 초소 위를 완전히 청소했다. 그는 아래로 뛰어내렸다. 바닥의 피웅덩이를 밟았다. 살육은 순식간에 끝났다. 압도적인 결과였다. 하수인들은 적수가 되지 못했다.

"괴물 수준이군." 두식이 연기를 뿜는 산탄총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는 태식의 전투 방식에 소름이 돋았다. 불필요한 동작이 전혀 없었다. 오직 효율적인 살상뿐이었다. 아린은 태식을 바라보았다. 그의 뺨에 묻은 피를 닦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태식의 눈빛은 너무나 멀리 있었다. 그녀는 손을 뻗지 못했다. "계속 간다." 태식의 건조한 목소리가 울렸다. 그들은 더 깊은 통로로 진입했다. 이제 경계선을 넘어섰다. 도맹의 본거지 내부였다. 벽면의 파이프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다. 바닥에는 검은 기름이 흘렀다. 공기가 차가웠다. 입김이 하얗게 퍼졌다.

사방이 다시 어두워졌다. 손전등 불빛에 의지해 걸었다. 그때 기분 나쁜 소리가 들렸다. 발톱이 시멘트 바닥을 긁는 소리였다. 스르륵. 스르륵. 소리는 사방에서 났다. 벽에서도 들렸고 천장에서도 들렸다. "사냥개들이다." 두식이 총을 고쳐 잡았다.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지하도맹이 기르는 사냥개 괴물들이었다. 가죽이 벗겨진 붉은 근육질의 괴수들이었다. 눈이 퇴화했고 청각과 후각이 극도로 발달했다. 어둠 속에서 그들의 이빨이 하얗게 빛났다.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수십 개의 붉은 안광이 어둠 속에서 켜졌다. 그들이 으르렁거렸다. 침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치익. 강한 산성 침이었다. 바닥이 부식되었다. 괴물들이 사방을 포위했다.

태식은 아귀의 후각을 발동했다. 냄새가 시각화되어 뇌리에 박혔다. 괴물들의 위치가 선명하게 그려졌다. 그들의 동선이 보였다. 괴물들은 벽면의 녹슨 가스 파이프 라인을 타고 움직였다. 지형의 약점이었다. 태식은 아린과 두식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대기하라는 뜻이었다. 태식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괴물 하나가 참지 못하고 도약했다. 바람을 가르는 속도였다. 태식은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앞으로 파고들었다. 괴물의 품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쇠파이프를 괴물의 입안으로 쑤셔 넣었다. 콰직! 파이프가 목구멍을 관통했다. 괴물이 비명을 지르며 버둥거렸다. 태식은 괴물의 몸을 방패 삼아 회전했다. 동시에 벽면의 고압 전선관을 향해 발을 뻗었다. 강하게 걷어찼다. 쿠쾅! 전선관이 터지며 고압 전류가 흘러나왔다. 푸른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다. 전류가 바닥의 물과 검은 기름을 타고 흘렀다. 지이이잉! 괴물들이 비명을 지르며 경련했다. 그들의 약점은 전류였다. 몸이 굳어버린 사냥개들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태식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전광석화처럼 움직였다. 바닥에 쓰러진 괴물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우드득. 목뼈가 꺾였다. 다음 놈에게 도약했다. 파이프를 뇌리에 내리꽂았다. 퍽! 머리가 깨진 괴물이 꿈틀거리다 멈췄다. 태식의 손과 옷이 괴물의 피로 젖었다. 그는 기계처럼 움직였다. 감정 없는 도살자였다. 단 삼 분 만에 사냥개 떼가 전멸했다. 바닥에는 괴물들의 시체가 뒹굴었다.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두식이 마른침을 삼켰다. "괴물보다 더한 놈이야." 그의 혼잣말은 진심이었다. 태식은 숨을 고르지 않았다. 그저 앞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의 앞길을 가로막는 것은 모두 부수면 되었다. 아린이 태식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안전벨트에 걸린 마그네틱 카드가 달랑거렸다. 그것이 유일한 이정표였다. "거의 다 왔어요." 아린이 앞을 가리켰다. 통로 끝에 붉은 지시등이 켜져 있었다. 중앙 통제실로 가는 분기점이었다. 그곳만 통과하면 마태환의 아지트였다. 예린이가 있는 곳이었다. 태식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의 머릿속에서 또 하나의 기억이 흐려지려 했다. 예린이의 마지막 생일 케이크였다. 촛불의 온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안 된다. 기억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구해야 한다. 태식은 질주하기 시작했다. 아린과 두식도 그 뒤를 쫓아 달렸다.

그때였다. 지하 터널 전체가 크게 흔들렸다. 쿠구구구! 천장에서 흙먼지가 폭포처럼 쏟아졌다. 균열이 생기며 콘크리트 덩어리가 떨어졌다. "대피해!" 두식이 소리치며 뒤로 물러섰다. 태식은 앞으로 도약했다. 거대한 콘크리트 더미가 그들의 사이를 갈라놓았다. 쾅! 터널이 무너지며 비산하는 먼지로 앞이 보이지 않았다. 기침 소리가 터져 나왔다. 먼지 속에서 기괴한 쇠사슬 소리가 들렸다. 짤랑. 짤랑. 사슬이 바닥을 끄는 소리가 아니었다. 공중을 가르는 소리였다. 슈우욱! 어둠 속에서 시커먼 올가미 사슬이 날아왔다. 그것은 뱀처럼 꿈틀거리며 아린을 향해 뻗어 나갔다. "앗!" 아린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이었다. 사슬이 그녀의 허리와 발목을 단단히 감아쥐었다. 사슬 표면에 날카로운 가시가 돋아나 그녀의 살을 파고들었다. 붉은 피가 옷을 적셨다. "태식 씨!" 아린이 비명을 질렀다. 사슬이 무서운 힘으로 그녀를 잡아당겼다. 무너진 천장의 어두운 구멍 속이었다. 태식이 몸을 돌려 손을 뻗었다. 그의 손가락 끝이 아린의 손끝에 닿았다. 하지만 찰나의 순간이었다. 강한 힘이 그녀를 위로 끌어올렸다. "아린아!" 두식이 소리쳤지만 힘의 궤적을 쫓지 못했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쇠사슬이 부딪치는 마찰음이 통로를 가득 채웠다. "새로운 승객이 탑승했다." 기괴한 기계음 섞인 목소리였다. 검은 철마의 수하들이었다. 아린의 몸이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천장의 구멍에서 흙더미가 다시 쏟아져 내렸다. 그녀가 가지고 있던 마그네틱 보안 카드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팅. 팅. 카드가 태식의 발밑으로 굴러왔다. 태식은 카드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깊은 심연처럼 어두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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