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피로 물든 선로 끝이었다. 지하 암시장의 거물 박두식이 섰다. 그는 총대를 든 부하들을 거느렸다. 그들이 태식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어둠 속에서 쇠붙이가 번뜩였다. 진동은 멈추지 않았다. 바닥의 자갈이 부르르 떨렸다. 터널 깊은 곳의 바람이 매서웠다. 피 냄새가 섞인 바람이었다. 탄화된 철의 향이 코를 찔렀다. 두식이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형사 양반." "여기서 끝이다." 두식의 부하들이 총구를 겨눴다. 빨개진 서치라이트가 태식을 비췄다. 붉은 빛이 얼굴에 닿았다. 태식은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 그의 가슴이 욱신거렸다. 장부의 제약이 몸을 옥죄었다. 심장이 터질 듯이 아팠다. 피가 식도까지 역류했다. 태식은 입안의 피를 삼켰다. 머릿속이 다시 텅 비어갔다. 딸의 웃음소리가 사라졌다. 지워지는 기억의 고통이 상당했다. 하지만 태식의 안색은 평온했다. 그는 고통을 완전히 무시했다. 공감도 공포도 거세된 몸이었다. 두식이 한 걸음 다가왔다. 그의 손에 들린 권총이 흔들렸다. "약물을 넘겨라." "그러면 고통 없이 보내주지." 두식의 목소리에 탐욕이 묻어났다. 태식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왼손을 주머니로 넣었다. 부하들이 총을 다잡았다. 철컥하는 마찰음이 터널을 채웠다. 태식은 가죽 장부를 꺼냈다. 낡고 해진 검은 가죽이었다. 그것이 심연의 결산 장부였다. 두식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건 뭐지?" "새로운 약물인가?" 태식은 장부를 천천히 펼쳤다. 종이가 사락거리며 넘어갔다. 어둠 속에서 장부가 빛을 냈다. 푸르스름한 안개가 장부에서 피어났다. 태식은 두식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네 놈들이 밀수하려던 것." "그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 아나." 태식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바람보다 더 차가웠다. 두식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미친 소리를 하는군." "당장 쏴라." 두식이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하지만 아무도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다. 장부에서 뿜어지는 기운 때문이었다. 사내들의 온몸이 굳어갔다. 공기가 돌처럼 무거워졌다. 태식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스스로 두식의 총구에 이마를 댔다. 차가운 총구가 이마를 눌렀다. 쇠의 비린내가 가까웠다. 태식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것은 미소가 아니었다. 가죽이 찢어지는 듯한 형상이었다. "쏴라." 태식이 나직하게 읊조렸다. "당장 당겨라." 두식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태식의 눈에는 광기조차 없었다. 오직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이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눈빛. 자포자기한 자의 극단적인 대범함. 그것이 두식을 압도했다. "이 장부에는 계약이 적혀 있다." 태식이 장부의 한 페이지를 가리켰다. 거기에는 붉은 글씨가 박혀 있었다. 글씨가 살아 있는 듯 꿈틀거렸다. "너희가 거래한 아귀의 지분이다." "이 장부가 파산하면 어떻게 될까." 태식의 손가락이 글씨를 쓸었다. "너희의 영혼도 함께 압류된다." "심연의 법정이 네 놈들을 청산한다." 두식의 이마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땀방울이 볼을 타고 턱으로 갔다. 그는 장부의 글씨를 보았다. 글씨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듯했다. 기괴한 환청이 귓가를 때렸다. 두식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눈앞의 사내는 진짜 괴물이다. 총알로 죽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무슨 짓을 한 거냐." 두식의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렸다. "나는 회계사다." 태식이 답했다. "너희의 죄악을 결산하러 왔다." 태식은 총구를 이마로 더 밀었다. "방아쇠를 당겨라." "너와 네 부하들은 즉시 파멸한다." "지옥의 밑바닥으로 떨어질 것이다." 터널 안이 침묵으로 가득 찼다. 부하들의 거친 숨소리만 들렸다. 아무도 움직이지 못했다. 그들의 손가락이 마비된 듯했다. 두식은 침을 깊게 삼켰다. 그의 자존심이 완전히 무너졌다. 총을 든 것은 자신들이었다. 하지만 사냥감은 자신들이었다. 주객이 완전히 전도되었다. 두식이 천천히 권총을 내렸다.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원하는 게 뭐냐." 두식이 패배를 인정했다. 태식은 장부를 덮지 않았다. 푸른 안개가 여전히 일렁였다. "거래를 하지." 태식의 목소리가 울렸다. "나는 정보와 장비가 필요하다." 두식은 이를 악물었다. "우리는 암시장 상인이다." "공짜는 없다." 태식은 가볍게 코방귀를 꼈다. "목숨 값이다." "이보다 더 비싼 대가는 없다." 두식은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태식의 기세는 태산 같았다. 과거 전설적인 형사의 위압감이었다. 지하의 범죄자들을 도살하던 기개. 그것이 고스란히 살아 있었다. 두식이 무겁게 한숨을 쉬었다. "장비를 가져와라." 두식이 부하들에게 지시했다. 부하들이 허둥지둥 뒤로 물러섰다. 그들은 거대한 배낭을 메고 왔다. 배낭이 바닥에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태식은 눈으로 내용물을 훑었다. 두식이 배낭을 열어 보였다. "지하에서만 유통되는 물건들이다." 두식이 설명했다. "지상의 무기는 괴물에게 안 통한다." 태식은 배낭 속을 직접 뒤적였다. 차가운 금속들이 손에 닿았다. 가장 먼저 잡힌 것은 특수 탄환이었다. 탄두에 은이 도금된 9mm 탄이었다. "은도금 탄환이다." 두식이 말했다. "괴물들의 가죽을 찢을 수 있지." 태식은 탄창을 꺼내 탄환을 채웠다. 손가락의 움직임이 기계적이었다. 그다음으로 잡힌 것은 조끼였다. 검고 질긴 가죽으로 만들어졌다. "아귀의 가죽으로 만든 방탄조끼다." "이빨도 뚫지 못해." 태식은 조끼를 받아 입었다. 몸에 딱 맞게 감겼다. 상처 부위가 압박되어 통증이 덜했다. 그는 고농축 회복 앰플도 챙겼다. 푸른빛이 도는 액체였다. 장부의 제약을 버티려면 필수였다. 태식은 물건들을 신속하게 정리했다. 그의 손길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두식은 그 모습을 초조하게 지켜봤다. 태식이 배낭 가장 깊은 곳을 만졌다. 손끝에 거친 종이 질감이 걸렸다. 태식은 그것을 밖으로 끄집어냈다. 낡고 누런 책자였다. 겉표지에는 핏자국이 가득했다. 글씨는 대부분 지워져 있었다. 하지만 제목은 겨우 알아볼 수 있었다. '서울 지하철 심야 노선 매뉴얼.' 그것이 책자의 이름이었다. 두식의 얼굴색이 급변했다. 그가 급히 손을 뻗었다. "그건 안 된다." "그건 거래 품목이 아니야." 태식은 가볍게 몸을 돌렸다. 두식의 손이 허공을 갈랐다. 태식은 책장을 빠르게 넘겼다. 종이들이 부스러지며 넘어갔다. 안쪽 페이지에는 글씨가 가득했다. 일반적인 노선도가 아니었다. 검은 잉크로 갈겨쓴 글씨들이었다. '제9호선 폐기장 제례 규칙.' '검은 철마의 통제 조항.' '피의 궤도를 멈추는 방법.' 태식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것은 단순한 매뉴얼이 아니었다. 지하도맹의 비밀이 담긴 문서였다. 그들의 제례 규칙이 상세히 적혀 있었다. "돌려줘." 두식이 으르렁거렸다. "그건 지하도맹의 기밀이다." "가지고 있으면 너도 죽는다." 태식은 책자를 품에 깊숙이 넣었다. 그의 시선이 두식에게 고정되었다. "이미 죽음 속을 걷고 있다." "기밀 따위는 상관없다." 두식은 주먹을 꽉 쥐었다. 하지만 태식의 장부가 다시 빛났다. 장부의 계약 조항이 붉게 타올랐다. 두식은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강자를 알아보는 기회주의자였다. 태식은 지상의 인간이 아니었다. 이미 심연에 발을 들인 괴물이었다. 두식이 침을 뱉었다. "마음대로 해라." "어차피 너는 오래 못 버틴다." "그들이 너를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태식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장부를 품에 넣었다. 장부가 사라지자 공기가 가벼워졌다. 부하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태식은 몸을 돌려 선로를 보았다. 어둠이 길게 뻗어 있었다. 그 너머에서 진동이 다시 시작되었다. 아까보다 훨씬 강한 진동이었다. 선로의 철골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천장에서 흙먼지가 비처럼 쏟아졌다. 두식의 얼굴이 다시 하얗게 질렸다. 그의 눈에 극도의 공포가 서렸다. "온다." 두식이 비명을 지르듯 말했다. "그놈이 오고 있어." "피해야 한다." 두식과 그의 부하들이 뒤로 달렸다. 그들은 어둠 속으로 도망쳤다. 태식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선로 한가운데에 우뚝 섰다. 새로 얻은 은도금 탄환을 장전했다. 슬라이드가 거칠게 후퇴했다가 전진했다. 철컥. 차가운 금속음이 터널에 퍼졌다. 저 멀리 어둠 속이었다. 붉은 안개가 터널을 채우며 밀려왔다. 바람이 칼날처럼 살을 넜다. 피 비린내가 사방을 뒤덮었다. 그리고 보였다. 붉은 눈 두 개가 어둠을 찢었다. 거대한 쇳덩어리가 돌진해 왔다. 인간의 살점과 유골로 뒤덮인 괴물. 비명 지르는 철마가 선로를 달렸다. 바퀴가 굴러갈 때마다 비명이 터졌다. 그것은 영혼들의 울부짖음이었다. 쿠구구구구. 터널 벽면이 균열을 일으켰다. 압도적인 질량감이 태식을 덮쳤다. 태식은 권총을 들어 올렸다. 그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 순간이었다. 선로 저편에서 기적이 울렸다. 뿌우우우우웅. 그것은 기적 소리가 아니었다. 수천 명의 인간이 동시에 지르는 비명. 공기를 찢는 괴이한 고음이었다. 귀가 떨어져 나갈 듯한 고통이 덮쳤다. 태식의 고막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는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다. 검은 철마가 코앞까지 들이닥쳤다.

태식은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 대신 선로 옆 전환기를 보았다. 녹슨 철제 레버가 굳어 있었다. 그는 몸을 날렸다. 철마가 코앞까지 육박했다. 열기가 살을 태울 듯했다. 태식은 레버의 자물쇠를 조준했다. 탕. 은도금 탄환이 자물쇠를 부쉈다. 쇠사슬이 끊어지며 레버가 풀렸다. 그는 오른발로 레버를 힘껏 찼다. 콰르릉. 선로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철마의 앞바퀴가 궤도를 벗어났다. 괴물이 기괴한 비명을 질렀다. 철마는 옆 터널로 미끄러졌다. 벽면을 긁으며 불꽃을 뿜었다. 콘크리트 파편이 폭풍처럼 날렸다. 태식은 벽면 홈으로 몸을 숨겼다. 대피소의 좁은 공간이었다. 그의 등 뒤로 거대한 질량이 스쳤다. 뜨거운 증기가 옷을 적셨다. 그때 창백한 손들이 뻗어 나왔다. 철마의 창틀에 엉겨 붙은 손들이었다. 수십 개의 손이 태식을 움켜잡았다. 방탄조끼가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태식은 권총을 난사했다. 탕. 탕. 탕. 은빛 탄환이 손가락을 관통했다. 검은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손들이 비명을 지르며 녹아내렸다. 철마는 터널 깊은 곳으로 사라졌다. 굉음이 서서히 멀어졌다. 사방이 다시 고요해졌다. 태식은 대피소에서 걸어 나왔다. 입안에서 비린 맛이 났다. 그가 바닥에 붉은 피를 토했다. 가슴의 상처가 다시 벌어졌다. 장부가 품 안에서 뜨겁게 달아올랐다. 대가가 찾아왔다. 머릿속의 안개가 더 짙어졌다. 딸의 얼굴이 흐려졌다. 눈동자 색이 기억나지 않았다. 태식은 이가 부러질 듯 악물었다. 감정이 메말라 분노조차 일지 않았다. 그는 품에서 매뉴얼을 꺼냈다. 피 묻은 페이지를 넘겼다. 철마의 운행 정보가 적혀 있었다. 태식의 눈이 한 구절에 멈췄다. '철마는 산 제물을 싣고 달린다.' '종착지는 제9호선 폐기장.' 그 밑에 갈겨쓴 낙서가 있었다. '오늘 들어온 아이는 특별하다.' 태식의 손가락이 떨렸다. 예린의 머리끈이 떠올랐다. 딸이 저 열차 안에 타고 있다. 그때 멀리서 쇠사슬 소리가 들렸다. 찰그랑. 찰그랑. 철마가 사라진 방향이 아니었다. 태식의 등 뒤쪽이었다. 어둠 속에서 푸른 불꽃이 일었다. 거대한 그림자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의 손에 거대한 낫이 들려 있었다. 지하도맹의 도살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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