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을 등지고 장부를 펼쳤다.
괴물의 육신이 흔들렸다.
채무가 정산되기 시작했다.
붉은 실이 허공을 갈랐다.
괴물의 가슴을 관통했다.
검은 피가 실을 타고 역류했다.
가죽 장부가 피를 흡수했다.
붉은 글씨가 연달아 새겨졌다.
[지분 십오 퍼센트 압류.]
[권능: 아귀의 후각을 획득함.]
머릿속이 쪼개지듯 아팠다.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딸의 목소리가 흐려졌다.
마지막 통화의 음성이 지워졌다.
태식은 입술을 깨물었다.
비명 대신 피가 흘러나왔다.
기억을 바친 대가였다.
눈앞이 붉게 물들었다.
쿠우우웅.
터널 깊은 곳이 요동쳤다.
거대한 쇳소리가 몰려왔다.
검은 철마의 전조등이 빛났다.
푸른 불꽃이 어둠을 찢었다.
바닥의 선로가 휘어졌다.
태식은 몸을 던졌다.
분기선 벽면의 틈새로 굴렀다.
간발의 차였다.
폭풍 같은 쇳바람이 스쳤다.
등 뒤의 벽이 깎여 나갔다.
돌가루가 사방으로 튀었다.
태식은 흙바닥을 기었다.
더 깊은 틈새로 몸을 구겼다.
철마는 멈추지 않았다.
굉음이 멀어져 갔다.
사방이 다시 고요해졌다.
태식은 거친 숨을 뱉었다.
온몸의 뼈가 삐걱거렸다.
가슴의 상처에서 피가 솟았다.
장부를 쓴 부작용이었다.
통증이 열 배로 증폭되었다.
살을 찢는 감각이 생생했다.
태식은 윗옷을 찢었다.
상처 부위를 강하게 묶었다.
이빨을 악물어 신음을 막았다.
손끝이 차갑게 식어갔다.
여기는 궤도 외곽지대다.
빛이 닿지 않는 심연이다.
태식은 쇠지렛대를 쥐었다.
녹슨 쇠 냄새가 코를 찔렀다.
새로운 권능이 요동쳤다.
바람을 타고 냄새가 섞였다.
썩은 비린내였다.
그리고 다른 냄새가 났다.
화약 냄새였다.
그리고 미약한 샴푸 향기였다.
인간의 냄새였다.
태식은 벽에 몸을 붙였다.
숨소리마저 죽였다.
터널 저편에서 불빛이 흔들렸다.
희미한 손전등 불빛이었다.
누군가 걸어오고 있었다.
발소리가 가벼웠다.
체중이 적게 나가는 인간이다.
태식은 어둠 속에 녹아들었다.
불빛이 태식의 발밑을 지나쳤다.
작업복을 입은 여자였다.
머리를 질끈 묶은 모습이었다.
그녀의 손에 스패너가 들려 있었다.
묵직한 강철 스패너였다.
여자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거기 누구 있어?"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하지만 눈빛은 단단했다.
태식은 소리 없이 움직였다.
여자의 등 뒤로 다가갔다.
그녀는 눈치채지 못했다.
태식은 쇠지렛대를 세웠다.
끝부분을 그녀의 목에 겨누었다.
"움직이지 마."
여자의 몸이 굳었다.
그녀는 천천히 손을 올렸다.
"인간이야? 괴물이야?"
"질문은 내가 한다."
태식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여자는 침을 삼켰다.
"난 서아린이야."
"여기서 뭐 하지."
"사람을 찾고 있어."
"누구."
"우리 오빠."
그때 천장에서 소리가 났다.
스르륵.
무언가 쓸리는 소리였다.
태식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새로 얻은 후각이 먼저 반응했다.
비린내가 짙어졌다.
점액질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툭.
아린의 어깨 바로 옆이었다.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위바닥에 붙은 괴물이었다.
아귀 괴물 한 마리가 숨어 있었다.
놈은 입을 벌리고 있었다.
날카로운 이빨이 드러났다.
아린이 스패너를 치켜들었다.
하지만 손이 사정없이 떨렸다.
태식은 냉정하게 관찰했다.
괴물의 목덜미를 보았다.
그곳에 푸른 주머니가 있었다.
소리를 증폭하는 기관이었다.
아귀의 급소였다.
태식은 바닥을 보았다.
버려진 쇠파이프가 있었다.
길이는 일 미터 남짓했다.
끝이 뾰족하게 깨져 있었다.
태식은 그것을 발로 찼다.
쇠파이프가 공중으로 떴다.
태식이 오른손으로 낚아챘다.
괴물이 아래로 덮쳐왔다.
아린의 머리 위였다.
태식은 한 걸음 내딛었다.
몸을 비틀며 끼어들었다.
쇠파이프를 위로 찔렀다.
서걱.
정확히 푸른 주머니를 관통했다.
검푸른 액체가 뿜어 나왔다.
괴물이 비명을 지르려 했다.
하지만 소리가 나지 않았다.
기관이 파괴된 탓이었다.
괴물은 바닥으로 추락했다.
태식은 괴물의 가슴을 밟았다.
쇠파이프 끝을 눈가에 대었다.
조금만 힘을 주면 뚫릴 터였다.
괴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공포가 서려 있었다.
태식은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소리 내면 죽는다."
괴물은 얌전해졌다.
태식은 쇠파이프를 누르며 말했다.
"이 구역의 지도를 내놔."
괴물이 품틀거렸다.
가슴팍의 가죽 주머니를 가리켰다.
태식은 왼손으로 그것을 뺏었다.
양가죽으로 만든 지도가 나왔다.
폐선로의 구조가 그려져 있었다.
"꺼져."
태식이 발을 치웠다.
괴물은 기어 다니며 도망쳤다.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아린은 멍하니 태식을 보았다.
"너, 진짜 미친놈이구나."
"필요한 걸 얻었을 뿐이다."
태식은 지도를 품에 넣었다.
아린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의 눈에 경외감이 돌았다.
"대단하네. 괴물을 그렇게 다루다니."
"살고 싶으면 따라오지 마."
태식이 걸음을 옮기려 했다.
아린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잠깐만. 나랑 거래하자."
"거래?"
"우리 오빠를 찾아줘."
"이유가 없군."
"이걸 줄게."
아린이 품에서 단말기를 꺼냈다.
두꺼운 액정이 깨진 기기였다.
그녀는 단말기 옆을 눌렀다.
작은 슬롯이 열렸다.
그 안에서 카드가 나왔다.
검은색 마그네틱 카드였다.
표면에 붉은 선이 그어져 있었다.
태식은 카드를 뺏듯이 가져갔다.
손끝에 차가운 전류가 흘렀다.
기이한 마력의 흐름이었다.
보통의 카드가 아니었다.
"이게 뭐지."
"오빠의 유품이야."
아린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오빠는 철도 정비사였어."
"그런데."
"이 카드로 지하의 문을 열었어."
태식은 카드를 뒤집어 보았다.
배후 세력의 표식이 있었다.
지하도맹의 문양이었다.
뱀이 선로를 감싸고 있는 형태.
태식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 카드는 쓸모가 있다.
지하 깊은 곳으로 가는 열쇠다.
"오빠의 이름은."
"서민우."
"언제 사라졌지."
"일주일 전이야."
태식은 카드를 주머니에 넣었다.
"동행은 없다."
"뭐? 카드를 가져갔잖아!"
"정보는 공유하지."
태식은 지도를 펼쳤다.
아린이 그 옆으로 다가왔다.
두 사람은 손전등 불빛 아래 모였다.
지도의 한 곳에 붉은 점이 있었다.
'제9호선 폐기장'
그곳이 목적지였다.
아린이 손가락으로 그곳을 가리켰다.
"오빠의 마지막 신호가 여기서 잡혔어."
"위험한 곳이다."
"상관없어. 나도 갈 거야."
태식은 그녀를 말리지 않았다.
죽는 것은 그녀의 선택이었다.
태식은 장부를 슬쩍 만졌다.
기억의 정리가 필요했다.
딸의 얼굴을 다시 그리려 했다.
하지만 하얀 도화지 같았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태식의 가슴이 서늘해졌다.
감정이 마모된 자리는 차가웠다.
오직 목적만이 남았다.
딸을 구한다.
그리고 이곳을 멸한다.
태식은 발걸음을 뗐다.
아린이 그 뒤를 바짝 따랐다.
터널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습기가 피부를 축축하게 적셨다.
사방에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뚝.
뚝.
그 소리 사이로 다른 소리가 섞였다.
서걱.
서걱.
가죽이 쓸리는 소리였다.
태식은 걸음을 멈추었다.
아린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그녀를 벽 뒤로 밀어 넣었다.
"숨어."
태식은 어둠을 응시했다.
그의 아귀의 후각이 요동쳤다.
피 냄새가 났다.
진하고 비릿한 사람의 피였다.
그리고 철분 냄새가 섞여 있었다.
어둠 속에서 형체들이 나타났다.
세 명이었다.
그들은 검은 가죽 옷을 입고 있었다.
얼굴에는 기괴한 방독면을 썼다.
방독면 정화통이 숨 쉴 때마다 들썩였다.
그들의 손에 들린 것이 빛났다.
쇠파이프가 아니었다.
강철의 질감.
짧은 총신.
기관단총이었다.
지하의 무법자들이었다.
장기 밀매를 일삼는 자들.
그들의 방독면 틈으로 붉은 빛이 새어 나왔다.
사내 하나가 총구를 들어 올렸다.
붉은 레이저 포인터가 켜졌다.
붉은 점이 태식의 이마에 닿았다.
다른 점은 아린의 가슴에 맺혔다.
"침입자다."
방독면 너머로 쇳소리가 울렸다.
"산 채로 잡는다."
그들이 서서히 다가왔다.
구두굽이 선로를 밟는 소리가 정막을 깼다.
태식은 쇠지렛대를 꽉 쥐었다.
그의 손가락뼈가 하얗게 바랬다.
주머니 속의 장부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태식은 움직이지 않았다.
레이저 붉은 점이 흔들렸다.
적들의 손가락이 방아쇠에 걸렸다.
태식은 바닥을 보았다.
썩은 침목과 자갈이 깔려 있었다.
그 옆에는 웅덩이가 있었다.
검은 물이 고인 곳이었다.
태식은 아린의 어깨를 밀쳤다.
"바짝 엎드려."
명령과 동시에 몸을 날렸다.
그가 자갈밭을 굴렀다.
타탕.
총성이 터널을 찢었다.
불꽃이 어둠을 밝혔다.
탄환이 침목을 부쉈다.
나무 파편이 뺨을 스쳤다.
태식은 웅덩이를 걷어찼다.
검은 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적들의 시야가 흐려졌다.
태식은 냄새를 맡았다.
아귀의 후각이 작동했다.
화약 연기 속에서 피어오르는 땀 냄새.
오른쪽 사내의 위치가 잡혔다.
태식은 쇠지렛대를 휘둘렀다.
무거운 쇠가 공기를 갈랐다.
퍽.
사내의 발목에 적중했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사내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태식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사내의 몸을 덮쳤다.
기관단총을 빼앗아 꺾었다.
왼쪽 사내가 총구를 돌렸다.
태식은 쓰러진 사내를 방패로 삼았다.
타타탕.
가죽 옷에 구멍이 뚫렸다.
피가 태식의 얼굴에 튀었다.
태식은 방패를 밀어 던졌다.
사내들이 엉켜 넘어졌다.
태식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쇠지렛대 끝으로 바닥을 찍었다.
선로의 고정 핀이 튕겨 나갔다.
그것이 사내의 이마에 박혔다.
"끄학!"
두 명이 무력화되었다.
남은 것은 대장으로 보이는 자였다.
그는 뒤로 물러서며 조준했다.
태식은 가슴을 움켜쥐었다.
장부의 대가가 찾아왔다.
통각이 한계를 넘어 요동쳤다.
상처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눈앞이 검게 변했다.
손끝의 감각이 사라졌다.
기억이 또 하나 지워졌다.
딸의 이름이 가물거렸다.
예... 로 시작하는 이름이었다.
뒤의 글자가 기억나지 않았다.
태식은 이빨을 세게 물었다.
입술이 터지며 정신이 돌아왔다.
그는 쇠지렛대를 던졌다.
정확히 적의 총신을 때렸다.
총구가 위로 튀었다.
태식은 돌진했다.
사내의 턱을 주먹으로 올렸다.
퍽.
방독면이 깨지며 사내가 나뒹굴었다.
순식간에 상황이 정리되었다.
터널에는 신음만 가득했다.
아린이 벽 뒤에서 나왔다.
그녀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당신 정체가 뭐야?"
태식은 답하지 않았다.
그는 쓰러진 대장의 가슴을 밟았다.
그의 품을 뒤졌다.
가죽 지갑과 무전기가 나왔다.
무전기에서 노이즈가 흘렀다.
치익.
- 3조 상황 보고해라.
- 쥐새끼들은 잡았나.
태식은 무전기를 노려보았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마태환이었다.
그 살인귀의 목소리였다.
태식은 송신 버튼을 눌렀다.
"직접 와라."
건조한 목소리가 흘러갔다.
무전기 저편이 침묵했다.
이윽고 광기 어린 웃음이 터졌다.
- 아 회계사 양반이군.
- 내 영토에서 제멋대로 구는군.
- 곧 만나게 될 거야.
- 네 딸의 뼈로 만든 제단에서.
무전이 끊겼다.
태식은 무전기를 으스러뜨렸다.
손아귀의 힘이 가차 없었다.
아린이 그의 팔을 잡았다.
"방금 그놈이 오빠를 가져간 거야?"
"비슷한 놈들이다."
태식은 대장의 목덜미를 보았다.
기이한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선로를 기어가는 지네 모양이었다.
지하도맹의 하부 조직 표식이다.
태식은 사내의 품에서 주사기를 발견했다.
안에는 푸른 액체가 들어 있었다.
아귀의 정수가 담긴 약물이었다.
그들은 이것을 유통하고 있었다.
인간을 괴물로 만드는 독약.
태식은 그것을 챙겼다.
"가자."
태식이 앞장섰다.
아린은 침묵하며 뒤를 따랐다.
그녀의 손에는 여전히 스패너가 있었다.
두 사람은 분기 선로를 통과했다.
공기가 점점 차가워졌다.
벽면에 서리가 끼기 시작했다.
지하 9호선 폐기장 구역이었다.
이정표가 찌그러진 채 걸려 있었다.
태식은 걸음을 멈췄다.
후각 권능이 강하게 요동쳤다.
단순한 피비린내가 아니었다.
거대한 쇠가 타는 냄새.
그리고 썩은 가죽의 취기.
검은 철마가 남긴 흔적이었다.
바닥의 선로가 끊겨 있었다.
그 아래는 깊은 낭떠러지였다.
어둠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아린이 손전등으로 아래를 비췄다.
빛이 바닥에 닿지 않았다.
그때 어둠 속에서 소리가 났다.
구슬픈 노랫소리였다.
아이의 목소리 같았다.
태식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사라진 딸의 노랫소리였다.
"예린아."
태식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름을 뱉는 순간 가슴이 찢어졌다.
지워진 줄 알았던 기억의 파편.
그것이 고통과 함께 솟구쳤다.
하지만 목소리는 함정이었다.
낭떠러지 벽면에서 무언가 기어 올랐다.
수십 개의 인간 손가락이었다.
그것들이 벽을 타고 솟구쳤다.
손가락 끝에는 날카로운 바늘이 있었다.
그것들이 태식의 발목을 겨냥했다.
아린이 비명을 질렀다.
태식은 장부를 꽉 쥐었다.
붉은 페이지가 피로 물들었다.
새로운 채무자가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