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수구를 뚫고 덩굴손이 솟구쳤다. 가시 돋친 줄기들이 태식을 덮쳤다. 피할 틈은 없었다. 줄기가 온몸을 단단히 옭아맸다. 날카로운 가시가 가죽을 뚫었다. 살점이 찢겨 나갔다. 통증이 척수를 타고 올랐다. 태식은 이를 악물었다. 비명은 나오지 않았다. 검은 피가 옷을 적셨다. 시야가 빠르게 흐려졌다. 어둠이 눈앞을 가렸다. 태식의 고개가 꺾였다.
차가운 물소리가 들렸다. 뺨에 닿는 감촉이 축축했다. 태식이 눈을 떴다. 사방은 칠흑 같았다. 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지독한 유황 냄새였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사지가 결박되어 있었다. 두꺼운 쇠사슬이 살을 파고들었다. 움직일수록 뼈가 삐걱거렸다. 바닥에 찬물이 고여 있었다. 등 가죽이 물에 젖어 시렸다. 이곳은 침수 제단이었다. 지하도맹의 가장 깊은 심장부다. 태식은 숨을 고르고 주변을 보았다. 아린과 두식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걱정은 사치였다. 감정은 이미 마모되었다. 지금은 생존이 우선이었다. 그때 어둠 속에서 발소리가 났다. 물이 출렁이는 소리였다. 일정한 간격의 걸음걸이였다. 포식자의 발소리였다.
"드디어 눈을 떴군."
목소리가 동굴에 울렸다. 마태환이었다. 그의 눈빛이 광기로 번뜩였다. 마태환이 태식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단도가 들려 있었다. 단도 끝에서 피가 떨어졌다. 마태환이 태식의 턱을 치켜올렸다. 차가운 쇠붙이가 살에 닿았다. 태식은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적을 응시했다. 그 눈빛에 마태환이 미소를 지었다.
"겁이 없는 건가." "아니면 멍청한 건가."
마태환이 단도로 태식의 뺨을 그었다. 붉은 선이 생기며 피가 흘렀다. 태식의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었다. 고통은 이미 익숙했다. 마태환이 낮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기괴하게 꺾였다.
"네 장부를 넘겨라." "그러면 편히 보내주마."
마태환이 태식의 품을 뒤졌다. 그의 손끝에 단단한 것이 걸렸다. 채무 거울이었다. 마태환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가 거울을 꺼내 들었다. 그의 눈에 분노가 서렸다.
"내 물건을 감히 훔쳐?" "이 벌레 같은 놈이."
마태환이 거울을 높이 치켜들었다. 당장이라도 깰 기세였다. 하지만 깨지 못했다. 채무 거울은 그의 생명줄이었다. 태식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그 모습에 마태환의 눈이 뒤집혔다. 단도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태식은 가슴속을 들여다보았다. 심연의 결산 장부가 떨리고 있었다. 태식이 마음속으로 장부를 펼쳤다. 무소음 스캔이 시작되었다. 마태환의 정보가 뇌리에 박혔다. 그의 죄악 지분이 보였다. 지하철 노선에서 저지른 학살들. 수많은 승객의 비명이 적혀 있었다. 채무자의 이름이 끝없이 이어졌다. 지분 가액이 이미 한계를 넘었다. 파산 요건이 완벽히 충족되었다. 장부의 붉은 글씨가 요동쳤다. 태식은 기회를 포착했다. 그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쇠사슬 안쪽에서 손목을 비틀었다. 뼈가 어긋나는 소리가 났다. 통증이 뇌를 찔렀다. 태식은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그는 극단적으로 냉혹했다. 자신의 육체조차 도구에 불과했다.
"네놈은 끝났다."
태식이 건조하게 뱉었다. 마태환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단도를 치켜세웠다.
"죽기 직전에 미쳤군."
마태환이 단도를 내리찍으려 했다. 그 순간 태식이 사슬을 당겼다. 장부의 권능이 기동했다. 가슴의 상처가 크게 터졌다. 검은 피가 뿜어져 나왔다. 머릿속에서 무언가 떨어져 나갔다. 딸과의 마지막 크리스마스. 그 따뜻했던 눈송이의 기억. 그것이 통째로 소실되었다. 태식의 눈빛이 한순간 흐려졌다. 허무함이 영혼을 갉아먹었다. 하지만 손끝의 힘은 더 강해졌다. 콰드득. 쇠사슬이 찢겨 나갔다. 태식의 살점도 함께 뜯겼다. 그가 피투성이 손으로 거울을 낚아챘다. 마태환의 손목을 꺾으며 거울을 뺏었다. 마태환의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
"이, 이게 어떻게!"
태식이 거울을 마태환에게 겨누었다. 그의 손가락이 거울 표면을 눌렀다. 장부의 조항이 발동했다. 가압류 신청이 수리되었다.
"네놈의 목숨 가격은 이미 내가 가압류했다."
태식이 선언했다. 거울이 시퍼런 빛을 뿜었다. 그 빛은 심연의 불꽃이었다. 제단 전체가 파랗게 물들었다. 마태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의 가슴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수만 개의 원혼 낙인이 나타났다. 그것들이 마태환의 심장으로 쇄도했다. 그가 저당 잡았던 영혼들의 복수였다.
"아아아악!"
마태환이 비명을 질렀다. 그의 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심장이 찢겨 나가는 고통이었다. 마태환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가 피를 토해냈다. 검붉은 피가 바닥의 물을 적셨다. 대역전이었다. 강태식은 결박을 완전히 풀었다. 그가 마태환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오직 냉혹함뿐이었다. 동정심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태식이 한 걸음 다가갔다. 마태환이 기어 다니며 물러섰다.
"살려, 살려다오……."
살인귀의 입에서 애원이 나왔다. 태식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묵묵히 거울의 힘을 쥐어짜냈다. 마태환의 생명력이 거울로 흡수되었다. 그의 피부가 급격히 늙어갔다. 주름이 자글자글해졌다. 머리카락이 하얗게 변해 떨어졌다. 채무의 대가는 혹독했다. 마태환은 스스로 판 함정에 빠졌다. 그의 목숨은 이제 태식의 손에 있었다. 그때였다. 바닥의 물이 거세게 요동쳤다. 지하철 선로 방향에서 진동이 왔다. 쿠구구구궁. 침수 제단 전체가 흔들렸다. 벽에 균열이 가며 물이 쏟아졌다. 단순한 붕괴가 아니었다. 거대한 존재의 태동이었다. 쇠사슬 긁히는 소리가 고막을 찢었다. 끼이이이익. 비명과도 같은 마찰음이었다. 마태환이 피를 토하며 웃었다. 그의 이빨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분이…… 오신다."
마태환이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어둠 속에서 거대한 형체가 불쑥 솟았다. 강철과 쇠사슬로 이루어진 괴물이었다. 심연의 본질. 검은 철마였다. 철마가 기괴한 비명을 질렀다. 그 목소리에 쇠사슬 소리가 섞였다. 철마의 몸에서 검은 촉수들이 뻗어 나왔다. 그 촉수들이 마태환의 몸을 감쌌다. 마태환의 살과 철마의 강철이 엉켰다. 융합이 시작되고 있었다. 마태환의 몸이 기괴하게 늘어났다. 그의 비명이 괴물의 포효로 변했다. 태식이 권총을 들어 올렸다. 남은 탄환은 단 세 발이었다. 그의 눈앞에서 거대한 괴수가 완성되어 갔다. 심연이 완전히 뒤집히고 있었다.
쇠사슬이 허공을 갈랐다. 태식은 즉시 옆으로 굴렀다. 차가운 폐수가 사방으로 튀었다. 마태환의 얼굴이 철갑에 박혔다. 괴물이 사슬 채찍을 휘둘렀다. 태식은 부서진 기둥 뒤로 피했다. 콰앙! 콘크리트 기둥이 두 동강 났다. 돌가루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태식이 권총을 겨누었다. 탕! 탄환이 철마의 안광에 박혔다. 불꽃이 튀었으나 멀쩡했다. 괴물이 광분하여 날뛰었다. 남은 탄환은 단 두 발. 태식이 주변 지형을 훑었다. 천장에 거대한 도르래가 보였다. 녹슨 사슬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태식이 진흙탕을 박차고 달렸다. 철마가 무서운 속도로 쫓았다. 태식이 도르래 밑에 멈췄다. 권총을 조준했다. 탕! 타앙! 연속된 총성이 동굴을 흔들었다. 도르래의 고정 핀이 퉁겨 나갔다. 거대한 쇳덩이가 추락했다. 철마의 등에 직격했다. 콰르릉! 괴물이 바닥에 처박혔다. 사슬이 엉켜 비명을 질렀다. 태식이 거칠게 기침했다. 빈 탄창이 바닥에 떨어졌다. 무기는 이제 없었다. 괴물이 도르래를 뜯어내며 일어섰다. 강철 몸체가 기괴하게 팽창했다. 이대로는 죽는다. 태식이 장부를 다시 펼쳤다. 가슴의 상처가 터져 내렸다. 검은 피가 사방으로 뿜어졌다. 머릿속에서 소중한 기억이 뽑혔다. 딸이 뛰어가던 뒷모습. 그 마지막 형태마저 사라졌다. 이제 딸의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가슴속에는 허무만 남았다. 하지만 장부의 조항은 냉정했다. 철마도 연대보증인으로 묶였다. 지분 압류를 선언했다. 붉은 결산 사슬이 철마를 감쌌다. "크아아악!" 철마의 장갑이 찢어졌다. 그 틈새로 무언가 떨어졌다. 낡은 수첩과 붉은 머리핀이었다. 태식의 눈이 번뜩였다. 딸의 머리핀이 확실했다. 그가 몸을 던져 그것들을 낚아챘다. 수첩을 품에 급히 찔러 넣었다. 그 순간 제단 바닥이 완전히 붕괴했다. 엄청난 양의 지하수가 쏟아졌다. 철마의 아가리가 태식을 덮쳤다. 동시에 급류가 그들을 쓸어갔다. 태식은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시야가 암전되었다. 그때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빠?" 그것은 실재인가 환청인가. 태식의 눈이 번쩍 떠졌다.
허파에 차가운 물이 찼다. 태식은 팔을 휘저었다. 수면 위로 머리를 밀었다. 푸하학. 더러운 폐수를 뱉어냈다. 사방은 거대한 원형 수로였다. 급류가 몸을 휩쓸고 갔다. 왼손에는 머리핀이 있었다. 품에는 축축한 수첩이 만져졌다. 태식은 벽면의 배관을 잡았다. 녹슨 철제 파이프였다. 우지끈. 고정 장치가 떨어져 나갔다. 태식은 악착같이 매달렸다. 어깨뼈가 빠질 듯 아팠다. 그는 이빨을 악물었다. 비명은 사치였다. 몸을 위로 끌어올렸다. 콘크리트 턱 위로 엎어졌다. 물이 뚝뚝 떨어졌다. 가슴의 장부 상처가 따가웠다. 검은 피가 물과 섞였다. 정신이 흐릿했다. 딸의 이름조차 가물거렸다. "예…… 린." 입술 사이로 이름이 샜다. 기억은 이미 조각났다. 얼굴도 목소리도 없다. 오직 심연을 부순다는 목적뿐. 그것만이 태식을 움직였다. 태식은 품에서 수첩을 꺼냈다. 가죽 커버가 낡아 있었다. [지하철 노선 관리 수칙] 붉은 글씨가 선명했다. 이것이 지하의 매뉴얼이다. 태식이 첫 페이지를 넘겼다. [제9호선 폐기장 규칙] [열차는 멈추지 않는다.] [승객은 반드시 승차한다.] [하차는 도살을 의미한다.] 기괴한 문장들이었다. 이것이 괴담의 법칙이었다. 태식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이 수칙이 무기였다. 괴담의 규칙을 왜곡한다. 그것이 파산 유도의 핵심이다. 그때 수로의 물이 솟구쳤다. 쿠구구궁. 거대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검은 철마가 기어 올라왔다. 마태환의 상반신이 보였다. 그의 얼굴은 철판과 합쳐졌다. 눈에서 붉은 안광이 뿜어졌다. "강…… 태…… 식……!" 쇠사슬 긁히는 목소리였다. 괴물이 징벌의 사슬을 흔들었다. 태식은 빠르게 주위를 보았다. 이곳은 거대한 폐기장이었다. 녹슨 선로들이 얽혀 있었다. 저 멀리 철창이 보였다. 철창 안에 사람이 있었다. 서아린과 박두식이었다. 그들은 기절해 있었다. 수로의 물이 철창으로 흘렀다. 시간이 없었다. 철마가 선로를 밟고 달렸다. 엄청난 중량감이 대지를 흔들었다. 태식은 수첩을 품에 넣었다. 그는 빈손이었다. 하지만 눈빛은 더 차가웠다. "너는 채무자다." 태식이 나직하게 읊조렸다. 거울이 주머니에서 반응했다. 시퍼런 빛이 흘러나왔다. 마태환의 생명력이 흔들렸다. "크아아악!" 괴물이 머리를 감싸 쥐었다. 영혼의 채무가 영토를 옥죄었다. 철마의 장갑판이 갈라졌다. 태식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선로 위로 뛰어내렸다. 부러진 쇠파이프를 집어 들었다. 끝이 날카롭게 깨진 무기다. 태식이 괴물을 향해 질주했다. 철마가 사슬을 내리쳤다. 태식은 상체를 숙였다. 사슬이 머리 위를 스쳤다. 바람이 뺨을 찢었다. 태식은 괴물의 다리 사이로 미끄러졌다. 쇠파이프를 치켜들었다. 괴물의 관절 틈새를 찔렀다. 푸부북! 검은 기름과 피가 튀었다. 쇠사슬 톱니가 멈췄다. 철마의 거구가 휘청였다. 태식은 뒤로 굴러 일어났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가슴의 갈비뼈가 삐걱거렸다. 장부의 대가가 몸을 갉아먹었다. 시야의 절반이 검게 변했다. 감각이 마비되어 갔다. 하지만 움직여야 했다. 철마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의 가슴에서 붉은 핵이 빛났다. 기관실의 화로 같았다. "모두…… 태운다……!" 괴물이 증기를 뿜어냈다. 뜨거운 열기가 사방을 덮쳤다. 태식은 수첩의 내용을 떠올렸다. [화로는 승객의 피로 움직인다.] [연료가 끊기면 열차는 정지한다.] 법칙을 비틀 차례였다. 태식이 거울을 높이 들었다. "상환을 청구한다." 그가 장부의 권능을 쥐어짜냈다. 가슴의 상처가 깊게 패였다. 뼈가 하얗게 드러났다. 극심한 통각이 전신을 찢었다. 태식은 비명 대신 피를 삼켰다. 머릿속에서 마지막 잔상이 꺼졌다. 딸의 목소리마저 사라졌다. 완벽한 허무였다. 그 대가로 권능이 폭발했다. 거울에서 푸른 사슬이 솟구쳤다. 그 사슬들이 철마의 화로를 감쌌다. 화로의 불꽃이 급격히 식어갔다. 생명력의 강제 압류였다. "아, 안 돼! 신의 불꽃이!" 마태환이 절규했다. 철마의 동력이 급격히 저하되었다. 괴물의 몸이 무거워졌다. 움직임이 눈에 띄게 느려졌다. 태식이 쇠파이프를 굳게 쥐었다. 마지막 일격을 가할 순간이었다. 그때였다. 폐기장 깊은 곳에서 소리가 났다. 쿠우우웅. 진짜 열차의 시동 소리였다. 녹슨 선로가 가늘게 떨렸다. 어둠 속에서 거대한 전조등이 켜졌다. 붉은 불빛 두 개였다. 그것은 철마의 본체였다. 진짜 '검은 철마'의 기관차였다. 마태환은 한낱 부품에 불과했다. 기관차가 선로를 타고 전진했다. 그 속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철마의 본체가 울부짖었다. "채무 불이행자를 처단한다." 비명 섞인 마찰음이 울렸다. 열차가 아린이 있는 철창을 향했다. 선로 끝에 철창이 있었다. 이대로면 철창이 박살 난다. 태식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남은 무기는 없었다. 장부의 대가로 몸은 한계였다. 열차는 무서운 속도로 돌진했다. 선로의 분기점이 태식의 앞에 있었다. 태식은 선택해야 했다. 자신을 던져 선로를 바꿀 것인가. 아니면 이대로 파산할 것인가. 붉은 전조등이 코앞까지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