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이 앞을 가로막았다. 더는 갈 곳이 없다. 막다른 골목이었다. 뒤에서는 쇠사슬 소리가 났다. 검은 철마가 쫓아왔다. 벽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태식이 손전등을 비췄다. 거대한 철문이 드러났다. 두꺼운 강철판이었다. 녹슨 표면에 문양이 있었다. 삼각형과 번개 모양이다. 아린이 그것을 보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오빠의 기호예요." 아린이 낮게 속삭였다. 오빠가 남긴 표식이다. 비밀 아지트의 입구였다. 하지만 문은 굳게 닫혔다. 틈새조차 보이지 않았다. 손잡이도 없었다. 오직 벽면에 패널만 있었다. 붉은 등도 꺼진 상태였다. 전원이 차단된 것처럼 보였다. 두식이 머리를 감싸 쥐었다. "막혔잖아." 그가 절망적으로 중얼거렸다. "이제 우린 죽었어." 추격음이 더 가까워졌다. 쇠가 긁히는 비명이었다. 터널 벽이 깎여 나갔다. 바닥의 자갈이 튀었다. 태식은 동요하지 않았다. 그의 눈은 차가웠다. 감정이 마모된 눈빛이었다. 태식이 품을 뒤적였다. 그가 무언가를 꺼냈다. 작은 마그네틱 카드였다. 모퉁이가 깨져 있었다. 오래전 수집했던 물건이다. 서아린의 오빠가 가졌던 카드. 특수 규격의 보안 키였다. 태식이 패널 앞으로 갔다. 먼지를 손으로 쓸어냈다. 기계의 틈새가 보였다. 카드를 꽂는 슬롯이었다. 태식이 카드를 밀어 넣었다. 카드가 걸렸다. 단단히 끼어 움직이지 않았다. 부서진 모퉁이 때문이었다. 뒤쪽에서 폭음이 터졌다. 추격조가 모퉁이를 돌았다. 검은 그림자가 일렁였다. 시간이 없었다. 태식이 주먹을 쥐었다. 그가 카드를 강하게 쳤다. 깡. 쇠가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카드가 안으로 박혔다. 순간 패널에 불이 들어왔다. 지지직. 붉은 빛이 깜빡였다. 기계가 불완전하게 작동했다. 전류가 흐르는 소리가 났다. 철컥. 육중한 잠금장치가 풀렸다. 문틈에서 먼지가 뿜어졌다. 거대한 철문이 움직였다. 위잉. 문이 옆으로 밀려났다. 틈새로 어둠이 보였다. "들어가." 태식이 짧게 명령했다. 두식이 먼저 몸을 던졌다. 아린도 그 뒤를 따랐다. 태식이 마지막으로 들어갔다. 그가 안쪽의 레버를 당겼다. 철문이 다시 닫혔다. 쾅. 굉음과 함께 사방이 막혔다. 바깥의 소리가 차단되었다. 사방이 고요해졌다. 손전등 불빛만 출렁였다. 공기가 퀴퀴했다. 먼지가 코를 찔렀다. 방 안은 넓지 않았다.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싸였다. 중앙에는 철제 책상이 있었다. 그 위에 감시 모니터가 있었다. 모니터는 모두 꺼져 있었다. 벽면에는 가득 지도가 붙었다. 지하철 노선도였다. 붉은 선이 복잡하게 얽혔다. 아린이 책상으로 다가갔다. 그녀의 시선이 바닥을 향했다. 바닥에 가죽 수첩이 있었다. 낡고 때가 탄 수첩이었다. 아린이 수첩을 주워 올렸다. 그녀의 손이 떨렸다. 수첩 첫 장에 이름이 적혔다. 서기태. 그녀의 오빠 이름이었다. 아린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그녀는 수첩을 품에 안았다. 소리 없는 통곡이었다. 그녀의 어깨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태식은 그녀를 보지 않았다. 그는 벽면의 지도를 관찰했다. 붉은 원들이 보였다. 일반 승객이 모르는 장소들. 유령역과 폐선로의 위치였다. 그곳들이 선으로 연결되었다. 선들의 종착지는 하나였다. 제9호선 폐기장. 가장 깊은 어둠의 구역이다. 태식이 책상 서랍을 열었다. 두꺼운 서류 뭉치가 나왔다. 그가 서류를 넘겼다. 먼지가 날렸다. 서류에는 계획서가 적혀 있었다. 지하도맹의 거대한 음모였다. 태식의 눈이 빠르게 움직였다. 지하도맹의 목적이 적혔다. 그들은 괴물을 숭배했다. 단순한 숭배가 아니었다. 그들은 자본을 모으고 있었다. 자본의 본질은 공포였다. 서울 시민의 공포심이었다. 매일 수백만 명이 지하를 걷는다. 그들이 느끼는 미세한 불안. 어둠에 대한 근원적인 공포. 지하도맹은 그것을 수집했다. 일종의 주식 거래 방식이었다. 공포의 지분이 쌓이고 있었다. 그 지분으로 무엇을 하는가. 태식이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그림 하나가 그려져 있었다. 지하철 열차가 선로를 벗어난다. 그것이 심연으로 추락한다. 아니었다. 그것은 추락이 아니었다. 열차가 어둠 속으로 솟구쳤다. 승천이었다. 지하철 노선 전체의 승천. 수많은 승객을 제물로 바친다. 그 공포로 괴물을 깨운다. 그것이 지하도맹의 계획이었다. 그 중심에 검은 철마가 있었다. 그리고 마태환이 있었다. 태식이 서류를 꽉 쥐었다. 종이가 구겨지는 소리가 났다. 그의 눈에 불꽃이 일었다. 감정이 배제된 분노였다. 딸 예린의 흔적도 보였다. 서류 구석에 적힌 메모들. '제물 적합자 발견.' '강예린.' 그 이름 옆에 붉은 낙인이 찍혔다. 이미 심연으로 보내졌다는 표시. 태식의 심장이 차갑게 식었다. 가슴의 장부 상처가 욱신거렸다. 기억의 소실이 느껴졌다. 딸의 목소리가 흐릿해졌다. 하지만 분노는 선명했다. 그는 지하도맹을 파멸시켜야 했다. 그것이 유일한 목적이었다. 두식이 다가와 서류를 보았다.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게 무슨 소리야?" 두식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서울 지하철을 통째로 바친다고?" 그는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미친놈들이야." 그가 뒤로 물러섰다. "우린 도망쳐야 해." 태식이 서류를 덮었다. "도망칠 곳은 없다." 그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이미 시작됐다." 태식이 품에서 매뉴얼을 꺼냈다. 지하철 심야 노선 매뉴얼이었다. 그가 보관하던 유물이다. 매뉴얼의 페이지를 넘겼다. 괴물 기관사의 규칙이 적혔다. 공포의 주식 규칙도 있었다. 파산 조항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들의 신용을 무너뜨려야 한다. 신용이 깨지면 괴물은 죽는다. 그것이 파산 유도 공략법이다. 태식은 방법을 찾아냈다. 9호선 폐기장으로 가야 한다. 그곳에서 규칙을 왜곡한다. 괴물 기관사를 폭사시킨다. 그러면 지하도맹의 계획은 깨진다. 그들의 자본은 휴지조각이 된다. 태식이 고개를 들었다. 아린은 여전히 수첩을 쥐었다. 그녀의 눈빛이 달라졌다. 슬픔은 분노로 변해 있었다. "도와줄게요." 아린이 낮게 말했다. "오빠를 이렇게 만든 놈들."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전부 죽여 버릴 거예요." 태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신뢰가 싹트는 순간이었다. 서로의 목적이 일치했다. 그들은 동료가 되었다. 그때였다. 방 중앙의 바닥이 흔들렸다. 바닥에는 철제 배수구가 있었다. 그 틈새로 검은 물이 솟구쳤다. 지독한 유황 냄새가 풍겼다. 탄내가 방 안을 채웠다. 태식의 후각이 경고했다. 아귀의 후각 저주였다. 위험이 닥쳤음을 알렸다. 콰아아. 배수구 철망이 뜯겨 나갔다. 그 구멍에서 무언가 튀어나왔다. 검고 굵은 덩굴이었다. 표면에 날카로운 가시가 돋았다. 그것은 살아 있는 생물처럼 움직였다. 덩굴이 순식간에 뻗어 나갔다. 그것은 태식의 다리를 감았다. "윽." 태식이 신음했다. 가시가 바지를 뚫고 살을 찔렀다. 검은 피가 배어 나왔다. 덩굴은 멈추지 않았다. 허벅지를 지나 몸통을 감았다. 태식의 몸이 공중으로 들렸다. 그의 두 팔이 묶였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가시가 온몸을 조여 왔다. 뼈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두식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아린이 칼을 빼 들었다. 그녀가 덩굴을 내리쳤다. 챙. 쇠가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덩굴은 베이지 않았다. 오히려 아린의 칼이 튕겨 나갔다. 어둠 속에서 비웃음이 들렸다. 스피커가 아니었다. 배수구 안쪽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낮고 음습한 목소리. 마태환의 목소리였다. "거기서 죽어라."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덩굴이 태식을 아래로 당겼다. 배수구 구멍은 좁았다. 그대로 끌려가면 몸이 찢긴다. 태식의 눈앞이 붉게 물들었다. 극심한 통증이 전신을 덮쳤다. 그는 장부를 떠올렸다. 또다시 대가를 치러야 하는가. 기억의 파편이 흔들렸다. 예린의 마지막 모습이 흐려졌다. 태식의 이가 갈렸다. 그는 덩굴 속에서 몸을 비틀었다. 그의 손끝이 장부로 향했다. 심연의 결산 장부가 반응했다. 가슴의 상처가 찢어졌다. 피가 솟구쳤다. 태식은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그의 눈은 여전히 차가웠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덩굴이 그를 구멍으로 끌어당겼다. 태식의 상체가 구멍에 걸렸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태식은 비명을 참았다. 그가 오른손을 움직였다. 바닥에 떨어진 쇠파이프를 잡았다. 그는 파이프를 구멍에 끼웠다. 지렛대의 원리였다. 어깨의 힘을 쥐어짜 덩굴을 밀어냈다. 가시가 살을 더 깊이 헤집었다. 뜨거운 피가 뿜어져 나왔다. 파이프가 휘어지기 시작했다. 괴물의 힘은 압도적이었다. 파이프가 튕겨 나갔다. 태식의 몸이 더 깊이 빨려 들어갔다. 이제 가슴까지 구멍에 박혔다. 숨이 막혔다. 갈비뼈가 쩍 소리를 내며 금이 갔다. 그는 결국 품속으로 손을 뻗었다. 손끝에 차가운 감촉이 닿았다. 마태환의 채무 거울이었다. 태식이 거울을 꺼내 쥐었다. 그의 손가락이 피로 물들었다. "갚아라." 태식이 낮게 읊조렸다. 거울 표면이 시퍼렇게 빛났다. 가슴의 장부 상처가 크게 터졌다. 검은 피가 뿜어져 나왔다. 머릿속에서 무언가 소실되었다. 딸과 함께했던 놀이공원. 그 소중한 기억이 통째로 날아갔다. 태식의 눈이 한순간 흐려졌다. 하지만 손아귀 힘은 더 강해졌다. 거울이 덩굴을 비췄다. 짙은 안개가 구멍 속으로 흘러갔다. 생명력이 역류하기 시작했다. "아아악!" 배수구 아래에서 비명이 터졌다. 마태환의 고통스러운 목소리다. 덩굴이 빠르게 시들어 갔다. 검은 가시가 먼지로 변했다. 태식의 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가 거칠게 기침했다. 바닥에 검은 피가 흥건했다. 아린이 그에게 달려왔다. "괜찮아요?" 태식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몸이 무거웠다. 통증이 전신을 난도질했다. 하지만 쉴 틈이 없었다. 쿠구구궁. 방 전체가 크게 흔들렸다. 천장에서 콘크리트가 부서졌다. 바닥의 균열이 빠르게 넓어졌다. 배수구 주변이 무너져 내렸다. "함정이다." 태식이 짧게 뱉었다. 마태환의 마지막 발악이었다. 바닥이 완전히 주저앉았다. 그들의 발밑이 푹 꺼졌다. "악!" 두식이 공중에서 허우적댔다. 아린도 중심을 잃고 추락했다. 태식이 그녀의 옷자락을 잡았다. 하지만 바닥은 이미 사라졌다. 그들은 어둠 속으로 떨어졌다. 끝없는 수직 통로였다. 강한 바람이 귓가를 때렸다. 아래에서 거센 물소리가 들렸다. 거대한 폐수 처리장이었다. 콰아앙. 그들은 차가운 물속에 처박혔다. 지독한 유황 냄새가 코를 찔렀다. 태식이 수면 위로 머리를 내밀었다. 주변은 거대한 철문으로 막혔다. 그들이 떨어진 곳은 거대한 철창이었다. 수직 수로에 설치된 우리였다. 위쪽에서 철컥 소리가 났다. 도르래가 돌아갔다. 철창이 아래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수직 수로의 더 깊은 곳이었다. 그곳은 심연의 바닥이었다. 아린이 철창살을 잡고 흔들었다. "문이 안 열려요!" 그녀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철창은 빠르게 내려갔다. 수면이 점점 얼굴까지 차올랐다. 물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일렁였다. 붉은 안광이 어둠 속에서 번뜩였다. 심연의 괴물이 숨을 몰아쉬었다. 그것이 거대한 아가리를 벌렸다. 태식이 권총을 쥐었다. 남은 탄환은 단 세 발이었다. 철창이 물속으로 완전히 잠겼다. 산소가 차단되었다. 괴물이 그들을 향해 돌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