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랍 틈새로 흘러나온 붉은 빛은 어두운 방 안에서 마치 갓 뿜어져 나온 선혈처럼 선명했다.
줄리앙이 충격 어린 눈짓으로 물러난 직후였다. 닫힌 서랍 속, 헬레나가 그토록 감추고 싶어 했던 위선적인 성화 자선 단체의 세금 포탈 장부의 붉은 수치들이 극독처럼 짙게 번쩍이고 있었다.
지독한 냉기가 손끝에서부터 시작해 척추를 타고 목덜미까지 기어올랐다. 머릿속이 날카로운 얼음 송곳으로 헤집어지는 듯한 마법적 빙결 두통이 관자놀이를 강타했다. 엘리제는 신음조차 흘리지 못한 채, 책상 모서리를 손끝이 하얗게 질리도록 움켜쥐었다.
방금 전 오라버니가 건넸던 나비 브로치에 얽힌 기억의 파편이 머릿속에서 얼어붙어 바스라지는 감각이 실시간으로 느껴졌다. 한 번 사라진 기억은 결코 돌아오지 않는다. 따스했던 가문의 온기, 오라버니와 나누었던 소박한 약속의 감정은 이제 차가운 회색 잿더미로 변해 허공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엘리제는 입술을 깨물며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았다.
기억을 잃을 때마다 그녀의 머리는 오히려 더 차갑고 정교한 기계처럼 작동했다. 가문의 파멸을 막고 단두대 처형대 위에서 목이 잘려 나가지 않기 위해서라면, 이 정도 대가는 기꺼이 지불할 수 있었다. 아니, 지불해야만 했다.
"가엾은 줄리앙."
엘리제는 핏기가 가신 입술로 나직하게 읊조렸다.
"하지만 내게 필요한 건 다정한 오라버니가 아니라, 무너지지 않는 로랑 후작가의 성벽이야."
서랍을 열어 붉게 요동치는 장부를 꺼내 손에 쥐었다. 종이의 감촉은 얼음장처럼 차가웠으나, 그 안에 담긴 정보는 제국 전체를 불태워 버릴 만큼 뜨거운 화약이었다.
***
사흘 뒤, 황실 재정원이 후원하는 성녀 헬레나 디아스의 자선 바자의회가 열린 대공작가의 유리 온실 연회장은 그야말로 위선의 극치였다.
천장 높이 솟아오른 유리 돔 아래로 인공적으로 개화시킨 이국적인 백합 향기가 진동했다. 귀족들은 빅토리아풍의 화려하게 부풀린 크리놀린 드레스와 정교한 브뤼셀 레이스로 몸을 감싼 채, 샴페인 잔을 부딪치며 고아들의 비참한 삶을 동정하고 있었다.
"아아, 가엾은 어린 영혼들을 생각하면 밤에 잠이 오지 않아요." "성녀 헬레나 님께서 이토록 헌신적이시니, 여신께서도 반드시 이 나라에 축복을 내리실 겁니다."
깃털 부채 뒤로 숨겨진 미소들은 하나같이 탐욕스러웠다. 그들에게 기부란 자선이 아니라, 사교계에서 자신의 도덕적 우위를 뽐내기 위한 가장 저렴한 입장권에 불과했다.
연단 위, 순백의 실크 드레스를 입고 가슴팍에 정교한 은빛 십자가를 늘어뜨린 헬레나 디아스가 눈물을 글썽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은 마치 성당 벽화에서 걸어 나온 성녀 그 자체였다.
"여러분께서 보내주신 따뜻한 성의는 제국 변방의 굶주리는 아이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될 것입니다. 단 한 닢의 동전이라도 그들에게는 생명의 빛이 됩니다."
헬레나의 목소리가 온실 안에 청아하게 울려 퍼지자, 귀족들이 감동 어린 탄성을 지르며 앞다투어 후원금 상자에 수표를 던져 넣었다. 백 골드, 오백 골드, 천 골드. 액수가 발표될 때마다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그 위선적인 연극의 한가운데로, 엘리제 드 로랑이 걸어 들어왔다.
짙은 암청색 카두라 실크로 지어진, 대담하면서도 극도로 절제된 드레스는 온실의 화려하고 난잡한 색조들 사이에서 단숨에 시선을 사로잡았다. 목을 단단히 죄는 높은 칼라에는 진주가 촘촘히 박혀 있어, 그녀의 차가운 턱선을 더욱 날카롭게 돋보이게 했다.
"어머, 로랑 후작 영애가 아닌가?" "가문이 파산 직전이라더니, 이런 고결한 자리에 무슨 낯으로……."
수군거림이 장내를 채웠다. 헬레나 역시 엘리제를 발견하고는 눈꼬리를 미세하게 굳혔으나, 이내 특유의 가련한 성녀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엘리제 영애, 오랜만이에요. 로랑 가문이 어려운 시기를 겪고 계신다고 들었는데, 이 자리에 참석해 주시다니 정말 기뻐요. 비록 기부금을 내지 못하시더라도, 아이들을 위한 기도만으로도 충분하답니다."
동정과 은근한 멸시가 섞인 헬레나의 말에 귀족들이 킥킥거리며 웃었다. 엘리제를 사교계의 가난뱅이로 낙인찍어 완전히 매장하려는 얄팍한 수작이었다.
엘리제는 대답 대신 천천히 연단 앞으로 다가갔다. 그녀의 구두 굽이 대리석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기묘할 정도로 정적을 만들어냈다.
"기도라니요, 성녀 님."
엘리제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우아하지만 뼛속까지 시려오는 조소였다.
"로랑 가문은 말뿐인 자선으로 생색을 내는 천박한 짓은 하지 않습니다. 자선이란 모름지기 가장 확실하고 가시적인 숫자로 증명되어야 하는 법이지요."
엘리제는 품 안에서 빳빳한 종이 한 장을 꺼내 들었다.
그것은 제국 중앙은행의 정식 직인이 찍힌 차명 수표였다.
"익명으로 기부하려 했으나, 성녀 님께서 이토록 제 걱정을 해주시니 직접 전달해 드려야겠군요."
그녀가 수표를 후원금 상자 위로 가볍게 내던졌다. 수표가 허공을 가르며 흰 나비처럼 떨어져 상자 안으로 부드럽게 안착했다.
수표를 수거하던 황실 재정원의 서기가 액수를 확인하는 순간, 그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온실의 정적을 깨뜨렸다.
"이, 이것은……!" "액수를 소리 내어 읽으세요. 서기 장."
엘리제가 나직하게 명령했다. 서기는 바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수표의 숫자를 읊조렸다.
"오, 오만 골드……! 익명의 기부자는 오만 골드입니다!"
순간, 온실 안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오만 골드. 웬만한 자작 가문의 일 년 총수입에 맞먹는 거액이었다. 방금 전 귀족들이 생색을 내며 던져 넣은 수백 골드의 수표들이 순식간에 초라한 종이 부스러기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헬레나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그녀는 경악과 분노로 떨리는 눈빛으로 엘리제를 바라보았다. 파산 위기라던 로랑 가문이 어떻게 이런 거액을 아무렇지도 않게 던질 수 있단 말인가.
"엘리제 영애…… 어떻게 이런 큰돈을……."
"아이들을 위한 제 '따뜻한 성의'입니다, 헬레나 님."
엘리제는 한 걸음 더 다가가 헬레나의 귓가에 속삭였다. 오직 헬레나만이 들을 수 있는 차가운 목소리였다.
"돈에는 돈으로, 명예에는 명예로 응답해 드리는 것이 로랑의 예법이지요. 마음에 드십니까?"
헬레나는 이를 악물었다. 장내의 모든 시선이 이제 성녀 헬레나가 아닌, 오만 골드를 기부한 사교계의 진정한 지배자, 엘리제 드 로랑에게 쏠려 있었다. 돈으로 사들인 도덕적 권위가 엘리제의 압도적인 자금력 앞에 무참히 짓밟힌 것이다.
그러나 엘리제의 진짜 목적은 단순한 기부금 자랑이 아니었다.
그녀는 헬레나의 일그러진 얼굴을 응시하며, 마음속으로 깊은 심연의 문을 열었다.
'아스모데우스의 이면 장부, 개방.'
*쿠구구궁!*
뇌리가 쪼개지는 듯한 극심한 빙결 두통이 다시금 엄습했다. 머릿속 깊은 곳에서 어린 시절 오라버니와 함께 정원을 뛰놀던 기억의 한 조각이 순식간에 얼어붙어 영원히 소멸하는 고통이 뒤따랐다. 코끝에서 피비린내가 감돌았으나, 엘리제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고통을 집어삼켰다.
그 대가로, 그녀의 차가운 개안(開眼) 너머로 세상이 뒤바뀌었다.
헬레나의 성스러운 순백의 드레스 위로, 시커먼 타르 같은 마력이 소용돌이치며 푸르고 붉은 숫자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것은 헬레나의 영혼에 각인된 위선과 비자금의 실시간 흐름이었다.
**[대상: 헬레나 디아스]** **[누적 자선 기금 횡령액: 342,000 골드]** **[자금 세탁 경로: 황실 재정원 차명 계좌 '바론 메이어 - 유령 04호']** **[현재 은닉처: 베일의 사교회 소유 '루아르가 12번지 지하 석실']**
복선이 마침내 완벽하게 연결되었다.
과거 고리대금업자 바론 메이어를 파멸시킬 때 그의 장부 구석에서 기묘하게 번쩍이던 정체불명의 차명 비자금 계좌. 그것은 바로 성녀 헬레나가 자선 단체의 기부금을 세탁해 은닉하던 통로였다. 바론 메이어가 파산하면서 끊긴 줄 알았던 자금의 꼬리가, 바로 이 바자의회를 통해 다시금 실시간으로 연결되고 있었던 것이다.
엘리제는 마음속으로 그 정확한 주소와 금융 가치의 좌표를 자신의 장부에 기재했다. 헬레나의 목을 죌 완벽한 덫이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그때, 엘리제의 시야 가장자리에 또 하나의 거대한 존재가 들어왔다.
카르디안 폰 크로이츠 대공.
그는 연회장의 어두운 기둥 뒤에 서서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전장의 사신이라 불리는 그의 붉은 눈동자가 이채를 띠며 엘리제를 향해 있었다.
엘리제는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그의 영혼에 각인된 차가운 푸른 불꽃의 장부를 다시 한번 들여다보았다.
과거 그의 장부 구석에서 흐릿하게 떠올랐던 정체불명의 '붉은 국경 인장'.
새롭게 각성한 정보와 대조하는 순간, 인장의 정체가 명확한 텍스트로 시각화되었다.
**[붉은 국경 인장: 제국 제4기사단 비공식 군자금 세탁 인장]** **[거래 대상: 황실 재정원 및 베일의 사교회 연계 자선망]**
엘리제의 입꼬리가 매혹적으로 올라갔다.
'그랬군, 카르디안. 당신 역시 이 부패한 재정원의 자금 세탁 고리에 묶여 있었어. 군부를 유지하기 위해 성녀의 더러운 돈을 묵인하고 있었던 건가?'
그것은 카르디안을 단순한 정략적 방패막이가 아니라, 자신에게 절대 복종할 수밖에 없는 완벽한 정치적 협력자로 길들일 수 있는 치명적인 약점이자 열쇠였다.
두통이 극에 달해 시야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장부의 과도한 사용으로 사지가 얼어붙는 듯한 마법적 한기가 그녀의 전신을 지배하려 하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누군가의 강인하고 따뜻한 손길이 엘리제의 가녀린 허리를 단단히 낚아챘다.
"과도한 자선은 몸에 해로운 법입니다, 로랑 영애."
낮고 매혹적인 목소리. 카르디안 대공이었다.
그는 엘리제의 안색이 비정상적으로 창백하며, 그녀의 영혼이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그녀가 벌이는 이 아름답고도 파괴적인 정보 전쟁의 편린을 눈치챈 그의 눈빛에는 기묘한 공포와 경외심, 그리고 강렬한 소유욕이 서려 있었다.
카르디안은 주위 귀족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엘리제를 품에 안아 올리듯 이끌며 연회장 중앙의 무대로 걸어 나갔다.
마침 악단이 느리고 우아한 왈츠 곡을 연주하기 시작한 참이었다.
"대공 전하……?"
헬레나가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그들을 불렀으나, 카르디안은 가차 없이 그녀를 외면했다. 그의 세계에는 오직 품 안의 차가운 인형 같은 여자, 엘리제뿐이었다.
"나를 장기말로 쓰겠다고 장담하더니, 정작 본인이 먼저 부서질 것처럼 구는군."
카르디안이 엘리제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왈츠의 스텝을 밟았다. 그의 커다란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엘리제의 얼어붙은 몸을 조금씩 녹여갔다.
"부서지다니요. 전하, 저는 그 어느 때보다 온전합니다."
엘리제는 그의 가슴팍에 가볍게 손을 올린 채, 흐트러짐 없는 박자로 춤을 추었다. 두 사람의 드레스와 제복이 허공에서 아름다운 궤적을 그리며 얽혔다. 명화의 한 장면처럼 격조 높고 화려한 움직임이었으나,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대화는 날카로운 검날의 교차와 같았다.
"당신의 그 오만 골드 출처가 바론 메이어의 숨겨진 차명 계좌라는 걸 모를 줄 알았나? 대담한 도둑이군."
카르디안이 그녀의 귀가에 대고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집착으로 번뜩였다.
"도둑이라니요. 주인 없는 돈을 유용하게 썼을 뿐입니다."
엘리제는 조용히 눈을 빛내며 반격했다.
"그보다 전하, 국경 지대의 '붉은 인장'이 찍힌 군자금이 성녀의 가짜 자선망을 통해 세탁되고 있더군요. 전장의 사신께서 성녀의 치맛자락 뒤에서 군비를 조달하고 계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카르디안의 스텝이 순간적으로 미세하게 굳어졌다. 그의 눈동자에 거대한 폭풍이 몰아쳤다. 그러나 이내 그는 낮게 실소하며 엘리제의 허리를 더욱 강하게 끌어당겼다. 두 사람의 숨결이 닿을 듯 가까워졌다.
"……내 약점까지 쥐고 흔들겠다는 건가."
"약점이 아닙니다. 동맹의 자격이지요."
엘리제는 그의 가슴을 가볍게 밀어내며, 왈츠의 마지막 턴을 돌았다.
"저는 당신을 이 부패한 황실의 정점에 세울 겁니다. 그러니 전하께서는 그저 제 완벽한 칼이 되어 주시면 됩니다."
음악이 서서히 잦아들며 왈츠가 끝났다.
두 사람은 완벽한 예법으로 서로에게 고개를 숙였다. 사교계의 귀족들은 숨을 죽인 채, 제국에서 가장 위험한 두 남녀가 빚어낸 치명적인 왈츠의 여운에 압도되어 있었다. 헬레나 디아스는 저 멀리서 손톱이 살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쥐고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완벽한 승리였다. 헬레나의 위선을 자금력으로 압도했고, 그녀의 비자금 은닉처를 확보했으며, 대공 카르디안을 완벽한 아군으로 옭아맸다.
"훌륭한 춤이었습니다, 엘리제."
카르디안이 그녀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의 눈빛은 이미 그녀라는 거대한 심연에 완전히 매혹되어 있었다.
엘리제는 품위 있게 미소를 지으며 에스코트를 받아 무대 밖으로 물러섰다.
하지만 승리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연회장 구석, 로랑 후작가의 충직한 시종이 군중 틈을 헤치고 극도로 상기된 얼굴로 엘리제에게 다가왔다. 그는 엘리제의 귀가에 대고 바르르 떨리는 목목소리로 속삭였다.
"영애 님…… 지금 즉시 저택으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무슨 일이지?"
시종이 품 안에서 작은 마법 통신 기구를 꺼내 보였다.
그것은 은빛 장미의 전당 지하 금고에 설치해 둔, 외부 침입자를 감지하는 신호 무용 기구였다.
지금, 그 기구의 중심부에서 치명적인 붉은 빛이 미친 듯이 깜빡이고 있었다.
누군가가 로랑 후작가의 심장부이자, 엘리제가 수집한 모든 비밀 장부와 채권이 보관된 지하 금고에 침입했다. 헬레나가 보낸 자객이 마침내 그녀의 덫에 걸려든 것이었다.
엘리제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진짜 전쟁은 이제부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