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경보등이 마법 통신 기구의 활석 표면 위에서 심장박동처럼 번쩍였다. 은빛 장미의 전당, 그 깊고 어두운 지하 금고의 결계가 찢겼음을 알리는 적색의 파동이었다.
엘리제 드 로랑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통신 기구를 손바닥 안으로 쥐어 감추었다. 짙은 에메랄드빛 실크 타프타 드레스의 긴 소매 자락이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그녀의 손목을 덮었다. 방금 전까지 대공 카르디안과 나누었던 격정적인 왈츠의 여열이 뺨에 남아 있었으나, 그녀의 눈동자는 이미 북부의 만년설처럼 차갑게 식어 있었다.
"무슨 일이지, 엘리제?"
카르디안이 나직한 목소리로 물으며 그녀의 곁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그의 검은 벨벳 코트 단추에 새겨진 크로이츠 가문의 문양이 연회장의 샹들리에 불빛을 받아 날카롭게 빛났다. 영혼의 이면 장부를 통해 이미 그의 '붉은 국경 인장'—군부의 비공식 군자금 세탁 거래라는 치명적인 약점을 쥐고 흔들었던 엘리제였다. 카르디안은 그녀를 경계하면서도, 동시에 그 기품 있는 대담함에 완전히 매료된 눈빛을 숨기지 않았다.
"쥐새끼 한 마리가 제 정원에 발을 들여놓은 모양입니다, 전하."
엘리제는 입꼬리를 부드럽게 끌어올리며 우아하게 고개를 숙였다.
"사교계의 여왕이 되기 위해서는 가끔 정원의 잡초를 직접 뽑아내야 하는 법이지요. 먼저 퇴장하는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동행을 허락한다면, 기꺼이 그 잡초를 벨 칼이 되어 주지."
카르디안의 은빛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안광을 발했다. 엘리제는 그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황실 재정원의 숨통을 끊어놓기 위해, 이 강력한 대공이라는 장기말은 언제나 제자리에 배치되어 있어야 했다.
두 사람은 소란스러운 연회장을 빠져나와 준비된 마차에 올랐다. 밤공기를 가르며 질주하는 마차 안에서 엘리제는 조용히 숨을 골랐다. 가슴을 조여 오는 코르셋의 압박감보다, 머릿속을 짓누르는 은근한 편두통이 그녀를 자극했다. 이면 장부를 가동할 때마다 지불해야 하는 자아의 파편들. 그러나 그녀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마차가 은빛 장미의 전당에 도착했을 때, 대리석 기둥 사이로 차가운 마법적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소리를 완벽히 흡수하는 카펫을 밟으며, 엘리제와 카르디안은 지하 접견실을 지나 철저히 은닉된 지하 금고로 향했다.
철문의 육중한 빗장이 풀리자, 눅눅한 공기와 함께 비린내가 코끝을 찔렀다.
"오라버니."
엘리제가 부르자, 어둠 속에서 칼을 쥐고 있던 줄리앙 드 로랑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고, 가문을 수호하겠다는 일념으로 가득 찬 눈동자는 충혈되어 있었다. 그들의 발치에는 온몸이 사슬로 묶인 채 피를 흘리고 있는 사내가 쓰러져 있었다.
"엘리제! 네 말대로였다. 이 자가 네가 흘려둔 가짜 회계 장부 상자를 열려던 순간 결계가 작동했어."
줄리앙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바닥의 사내를 가리켰다. 사내는 헬레나 디아스가 가장 신뢰하는 수하이자, 사교계의 온갖 더러운 공작을 도맡아 하던 자객이었다.
엘리제는 천천히 사내에게 다가갔다. 에메랄드빛 드레스 자락이 피로 물든 대리석 바닥을 스쳤으나,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오만한 자세로 사내를 내려다보며 차갑게 조소했다.
"성녀의 고결한 손길이 미치는 곳에는 언제나 이런 구역질 나는 시체 썩는 냄새가 나는군요. 헬레나가 그대에게 어떤 구원을 약속했기에 로랑 후작가의 심장부에 발을 들였나?"
사내는 이빨 사이로 피를 뱉어내며 악에 받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가짜…… 가짜 장부였어. 나를 낚기 위한 덫이었군. 하지만 이미 늦었다, 악녀여. 재정원 대판사께서 곧 너희 가문의 모든 재산을 압류하고 단두대로 보낼 회색 영장을 발부하실 테니까!"
"과연 그럴까."
엘리제가 손가락을 가볍게 퉁겼다. 대기 중의 마나가 미세하게 진동하며 사내의 가슴팍에 고정된 구속용 마법 사슬을 조였다. 사내의 구강 구조를 으스러뜨릴 듯한 무형의 압력이 가해지자, 뼈가 맞춰지는 기괴한 소리와 함께 신음이 터져 나왔다.
"비명을 지르지 마십시오. 이 방의 차음 결계는 외부로 단 하나의 소리도 내보내지 않으니까요."
엘리제는 우아한 손짓으로 사내의 품을 수색하게 했다. 기사들이 그의 안주머니에서 찾아낸 것은 다름 아닌 황실 재정원의 비밀 인장이 찍힌 서신들이었다.
"바론 메이어의 파산 과정에서 발견된 익명 송금인의 실체……."
엘리제는 서신을 펼쳐 들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그 정체불명의 차명 비자금 계좌가 가리키는 종착지가 결국 황실 재정원의 부부장 발렌타인, 그리고 성녀 헬레나 당신들이었군."
2화에서 바론 메이어의 이면 장부를 들여다보았을 때 번쩍였던 정체불명의 비자금 흐름. 그 실타래의 끝이 마침내 드러난 순간이었다. 헬레나는 자선 단체의 기부금을 세탁하여 재정원의 고위 관료들에게 뇌물로 바치고, 재정원은 그 대가로 로랑 가문을 조직적으로 파산시키려 했던 것이다.
"이것만으로는 부족해."
엘리제의 눈동자가 붉게 타올랐다.
"재정원 전체를 단번에 매장하고, 황실의 법정에서 그들의 위선을 낱낱이 도려내기 위해서는 더 확실한 '진짜' 이중 장부의 명세가 필요하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허공을 응시했다. 심연의 문을 열 시간이었다.
"엘리제, 설마 또 그 힘을 쓰려는 건가? 안 돼! 네 몸이 버티지 못해!"
줄리앙이 그녀의 어깨를 붙잡으며 만류했다. 그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갈수록 냉혹해지고, 자신과의 추억을 잃어가는 동생의 뒷모습을 보며 느꼈던 불안감이 극에 달한 표정이었다.
"비켜서세요, 오라버니. 이 가문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저는 제 영혼조차 지옥의 군주에게 팔아넘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엘리제는 줄리앙의 손을 냉정하게 뿌리쳤다.
그녀가 눈을 감았다가 뜨는 순간, 지하 금고의 어둠 속에서 붉고 푸른 숫자들이 빗물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스모데우스의 이면 장부'가 개방된 것이다.
[경고: 대상 '황실 재정원 및 헬레나 디아스'의 국가적 이권과 차명 비자금 네트워크 전체를 동시 조회합니다.] [조회 강도: 극상(極上)] [대가가 청구됩니다. 사용자의 자아를 구성하는 가장 소중하고 진실한 인간적 기억이 소실됩니다.]
머릿속이 순식간에 얼어붙는 듯한 마법적 빙결 두통이 그녀의 뇌를 난도질했다. 머리가 깨질 듯한 통증에 엘리제는 입술을 깨물었다. 비명조차 나오지 않는 고통이었다. 관자놀이의 혈관이 터질 것처럼 박동했고,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첫 번째 기억의 파편이 바스러졌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차가운 병상에서 그녀의 손을 잡고 남겼던 마지막 임종 유언. '엘리제, 부디 네 자신을 잃지 말아라. 네 고귀함을 지키고…….' 그 따뜻했던 목소리, 어머니의 마른 손의 감촉, 눈물의 온도까지 모든 것이 안개처럼 하얗게 지워져 기억의 우주 저편으로 사라졌다. 이제 머릿속에 남은 것은 '어머니가 죽었다'는 건조한 사실뿐, 그 슬픔과 사랑의 감정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두 번째 기억이 뜯겨 나갔다. '엘리제, 네가 성인이 되면 이 나비 브로치를 줄게. 우리 가문의 영광을 함께 되찾겠다는 약속이야.' 오빠 줄리앙이 어린 시절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건넸던 다정한 약속. 그 약속의 순간과 나비 브로치에 얽힌 소중한 대화가 흔적도 없이 소멸했다.
"아아아윽……!"
참지 못한 비명이 엘리제의 입술 사이로 터져 나왔다. 그녀는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가슴을 쥐어짜듯 움켜쥐었다. 입안에서 비릿한 피 냄새가 확 퍼지더니, 이내 붉은 선혈이 대리석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각혈이었다.
"엘리제! 엘리제!"
줄리앙이 비명을 지르며 그녀를 부둥켜안았다. 그의 전신이 공포로 떨리고 있었다.
"제발 그만해! 가문 따위 망해도 좋아! 네가 죽으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이냐!"
그러나 엘리제는 피 묻은 입술을 올리며 잔혹하게 웃었다. 그녀의 눈앞에는 마침내 황실 재정원의 이중 장부, 그들이 숨겨둔 이권 거래의 모든 수치와 차명 계좌의 실시간 흐름이 완벽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그녀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품 안에서 줄리앙이 다급하게 꺼내 든 물건을 바라보았다.
줄리앙은 그녀를 달래기 위해, 품속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정교한 은빛 나비 브로치를 꺼내 그녀의 손에 쥐여주려 했다. 가문의 문양이 정교하게 새겨진, 그들의 약속이 깃든 보물이었다.
"엘리제, 이거 기억나지? 우리가 약속했잖아. 이 브로치를 걸고 같이……."
엘리제는 손바닥에 닿는 차가운 금속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아름다운 나비 모양의 브로치. 은빛으로 세공된 날개가 샹들리에 불빛에 반짝였다. 그러나 그것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에는 아무런 감흥도, 추억의 잔영도 없었다. 마치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보는 듯한 무감각함만이 서려 있었다.
"이게…… 무엇이지요, 오라버니?"
엘리제의 목소리는 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왜 이런 쓸데없는 장신구를 저에게 보여주시는 겁니까?"
"엘리제……? 네가 어떻게 그걸…… 어떻게 잊을 수가 있어? 우리 약속이었잖아!"
줄리앙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동생이 치르고 있는 대가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으나, 그녀의 영혼 속에서 무언가 가장 소중한 것이 영원히 소멸해 버렸음을 직감하고 절망했다.
그 처절한 광경을 묵묵히 지켜보던 카르디안 대공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는 엘리제의 앞으로 걸어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전장의 사신이라 불리며 황제조차 두려워하지 않던 사내였다. 그런 그가, 오직 자신의 이익과 계산을 위해 영혼의 기억마저 제물로 바치는 이 잔혹하고 고귀한 여인에게 압도당하고 있었다.
"미친 영애로군."
카르디안이 나직하게 읊조렸다. 그의 손이 엘리제의 피 묻은 턱끝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그의 손가락을 타고 차가운 마력이 흘러들어와 그녀의 빙결 두통을 미약하게나마 진정시키기 시작했다.
"가문을 위해, 그리고 그 위선자들을 파멸시키기 위해 스스로를 지옥으로 밀어 넣다니. 그 집념과 결기…… 참으로 경이롭다."
그의 은빛 눈동자에 서린 것은 단순한 동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거대한 심연을 마주한 자가 느끼는 전율이자, 기꺼이 그녀의 장기말이 되겠다는 절대적인 복종의 맹세였다.
"엘리제 드 로랑. 그대가 나를 황실의 정점에 세우겠다고 했지."
카르디안은 그녀의 차가운 손등에 깊게 입을 맞추었다.
"기꺼이 그대의 가장 날카로운 칼이 되어 주지. 그대가 이 제국의 유일무이한 사교계의 여왕이 되는 그날까지."
엘리제는 피를 닦아내며 카르디안을 바라보았다. 머릿속의 소중한 추억들은 사라졌지만, 그 자리를 채운 것은 세상을 삼킬 듯한 냉혹한 권력의 의지였다.
그녀는 카르디안의 부축을 받으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메랄드빛 드레스는 피로 얼룩져 기괴하면서도 매혹적인 형상을 하고 있었다.
"고맙군요, 전하. 사냥개는 사냥을 잘할 때 가장 아름다운 법이지요."
엘리제는 우아하게 미소 지었다. 자아의 상실이라는 가혹한 대가를 치르고 얻어낸 황실 재정원의 이중 장부. 이제 그녀의 손에는 제국 사교계의 가짜 성녀와 부패한 관료들을 단숨에 단두대로 보낼 무기가 쥐어져 있었다.
그때, 지하 금고의 무거운 철문 너머로 충직한 하녀 마리가 급박하게 뛰어들어왔다. 그녀의 손에는 황실 재정원의 공식 인장이 찍힌 양장 문서가 들려 있었다.
"아가씨! 방금 황실 대판사부로부터 긴급 통보가 도착했습니다!"
마리는 숨을 헐떡이며 엘리제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성녀 헬레나 디아스와 재정원 부부장 발렌타인의 제소로, 로랑 가문의 파산 및 황실 모독죄에 대한 특별 재판 기일이 결정되었습니다. 그 기일은……."
엘리제는 마리의 말을 가로채며,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 속에는 그 어떤 인간적인 온기도 남아 있지 않은, 오직 승리만을 갈구하는 사교계의 철혈 여왕의 빙결 같은 안광이 서려 있었다.
"바로 내일 아침이겠지요."
그녀의 입술이 냉혹한 호선을 그렸다.
가면을 쓴 성녀와 위선적인 관료들이 파놓은 함정. 그러나 그들이 파놓은 무덤의 진짜 주인이 누가 될 것인지, 이제 증명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