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지금 당장 아가씨를 체포하여 황실 재판정으로 압송하겠다고 정원을 가득 메우고 있습니다!"

마리의 다급한 절규가 접견실의 차가운 대리석 벽에 부딪쳐 날카롭게 흩어졌다.

카르디안의 단단한 가슴을 밀어내고 제 발로 당당히 선 엘리제는, 흐트러진 은빛 드레스 자락을 가볍게 털어냈다. 뺨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이 차가운 공기에 얼어붙는 듯했으나, 그녀의 입가에는 외려 가느다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사냥감이 제 발로 쳐놓은 덫을 향해 발을 들이밀었다는 소식을 들은 포식자의 미소였다.

"드디어 쥐새끼들이 굴에서 기어 나왔군요."

엘리제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카르디안을 바라보았다. 대공의 붉은 눈동자에는 흥미로운 구경거리를 발견한 야수의 잔인한 활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체스의 퀸이 되겠다고 호언장담하더니, 판이 시작되기도 전에 마차에 실려 가 처형대로 향하게 생겼군, 로랑 영애."

"질 나쁜 농담은 거기까지 해 두시지요, 전하."

엘리제는 레이스가 촘촘히 박힌 장갑을 고쳐 끼며 우아하게 대꾸했다.

"사냥개가 짖는다고 해서 주인이 정원을 포기하진 않습니다. 오히려 그 목줄을 누가 쥐고 있는지 보여줄 좋은 기회지요."

그녀는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을 둘러싼 공기는 여전히 팽팽했으나, 엘리제의 발걸음에는 추호의 흔들림도 없었다. 마리가 안절부절못하며 뒤를 따랐고, 카르디안은 거대한 그림자처럼 그녀의 등 뒤를 지켰다.

***

황실 재정원의 전당은 제국의 탐욕과 기만이 가장 화려하게 박제된 장소였다.

높은 천장에는 금박을 입힌 천사들이 밧줄에 묶인 인간들을 내려다보는 벽화가 그려져 있었고, 바닥은 코린트식 대리석 기둥들이 뿜어내는 차가운 냉기로 가득 차 있었다. 평소라면 제국의 예산과 관세를 논하던 이 신성한 전당은, 오늘만큼은 로랑 후작가를 단두대로 보내기 위한 사교계의 공개 재판정으로 탈바꿈해 있었다.

"로랑 후작가는 오랜 세월 제국의 은혜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악덕 고리대금업자 바론 메이어와 결탁하여 황실 국고의 자금을 유용하고 사적으로 은닉했습니다!"

단상 위, 순백의 실크 드레스를 입고 서 있는 여인이 보였다.

성녀 헬레나 디아스.

그녀의 어깨 위로 흘러내리는 금발은 성스러운 후광처럼 빛났고, 눈가에 맺힌 눈물은 영락없이 죄지은 가문을 가여워하면서도 정의를 위해 결단을 내린 성녀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품에서 붉은 왁스 인장이 찍힌 두꺼운 서류 뭉치를 꺼내 들어 올렸다.

"여기 바론 메이어의 양도 증서가 있습니다. 로랑 가문이 진 빚은 이미 황실 재정원의 소유로 넘어왔으며, 이들의 파산은 제국 법령에 의거해 가산 몰수 및 작위 박탈, 그리고 단두대 처형에 처해 마땅한 대죄입니다!"

재정원 내부를 가득 메운 귀족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헬레나의 수하들인 신흥 관료 귀족들이 일제히 마른침을 삼키며 로랑 가문의 파멸을 기정사실로 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였다.

"회색 영장을 집행하라!"

"사교계의 수치인 엘리제 드 로랑을 당장 단두대로 보내라!"

그 소란스러운 광경을 지켜보며 전당의 무거운 청동 문을 열고 들어선 엘리제는, 비웃음이 섞인 한숨을 나직하게 내쉬었다.

그녀의 등장을 알리는 구두 굽 소리가 대리석 바닥에 청아하게 울려 퍼지자, 사방을 메우던 고함성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귀족들의 시선이 일제히 은빛 드레스를 입고 들어서는 엘리제에게 쏠렸다.

그녀는 마치 사교계의 무도회장에 입장하듯,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우아한 걸음걸이로 단상을 향해 걸어갔다.

"어머, 헬레나 님."

엘리제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으나, 넓은 전당 구석구석까지 명료하게 퍼져나갔다.

"신성한 성당의 제단에 계셔야 할 분이, 어찌 이리 비린내 나는 재정원의 돈 가방 위에 올라타 계십니까? 성녀의 고결한 발에 흙이라도 묻을까 염려되는군요."

"엘리제 영애……!"

헬레나가 가슴에 손을 얹으며 슬픈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저는 그저 제국의 정의와, 고통받는 자들을 위해 이 자리에 선 것입니다. 로랑 가문이 저지른 부정부패는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이 증서가 가리키는 숫자들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헬레나가 내민 위조 양도 증서는 언뜻 완벽해 보였다. 바론 메이어의 서명과 황실 재정원의 공인 인장까지 정교하게 찍혀 있었다. 귀족들은 엘리제가 당황하여 변명을 늘어놓거나 울부짖기를 기대하며 그녀의 얼굴을 주시했다.

하지만 엘리제는 단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입을 꾹 다문 채, 얼음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단상 위의 헬레나와 재정원 관료들을 응시할 뿐이었다.

정적이 흘렀다.

1초, 2초, 그리고 10초.

아무런 대꾸도, 분노의 외침도 없는 엘리제의 지독한 침묵은 오히려 전당 안의 공기를 무겁게 가라앉혔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초조해지는 것은 큰소리를 치던 적들이었다. 헬레나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고, 그녀의 뒤에 서 있던 재정원 고위 귀족의 이마에 식은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지금이다.'

엘리제는 마음속으로 속삭였다.

그녀가 눈을 감았다가 뜨는 순간, 시야가 붉고 푸른 숫자의 비로 뒤덮였다.

[아스모데우스의 이면 장부]가 개방되는 순간이었다.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극심한 빙결 두통이 뇌를 난도질했다. 머릿속이 꽁꽁 얼어붙는 듯한 고통에 관자놀이가 파르르 떨렸다. 손가락 끝을 부서져라 꽉 쥐어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힘을 주며, 엘리제는 비명을 지르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동시에 머릿속에서 소중한 기억의 조각 하나가 바스러져 연기처럼 사라지는 감각이 느껴졌다. 오라버니 줄리앙과 함께 보냈던 어느 따스한 봄날의 기억인지, 혹은 어린 시절의 사소한 약속인지 알 수 없었으나 가슴 한구석이 서늘하게 비어 버렸다.

하지만 엘리제는 고통을 겉으로러 드러내지 않았다. 그녀는 오직 눈앞에 떠오른 붉은 글씨들에 집중했다.

[바론 메이어의 비자금 세탁 계좌: 09-442-88] [실제 송금주: 재정원 부부장 론 발렌타인 (성녀 헬레나 디아스의 최측근)] [누적 횡령액: 450,000 골드]

빙결의 고통 속에서 엘리제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나 낮아서, 오히려 듣는 이들의 귀를 바짝 기울이게 만들었다.

"성녀 님께서 들고 계신 그 증서가 참으로 흥미롭군요. 하지만 그 장부에 적힌 숫자들이, 과연 로랑 가문의 빚이 맞습니까?"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를……!"

재정원 부부장 론 발렌타인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엘리제는 그를 향해 차가운 시선을 던졌다.

"론 발렌타인 경. 바론 메이어가 파산하기 직전, 그의 개인 금고로 흘러 들어간 익명의 차명 비자금 계좌 '09-442-88'의 실소유주가 누구인지, 이 자리에서 밝혀드려야 할까요?"

그 순간, 발렌타인의 얼굴에서 핏기가 순식간에 가셨다.

"그, 그것이 무슨……!"

"그 계좌에서 흘러나온 45만 골드의 출처는 황실 재정원의 조세 세탁 자금이더군요. 성녀 님의 고아원 후원금이라는 명목 하에, 매달 교묘하게 분할되어 메이어의 고리대금 자금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자 수익의 절반은 다시 성녀 님의 사적 금고로 들어갔지요."

엘리제는 품에서 미리 준비해 둔 진짜 군부 사법부의 공식 봉인이 찍힌 서류를 꺼내 들었다.

"이것은 군부 사법부가 직접 검증한 바론 메이어의 실제 차명 송금 거래 내역서입니다. 제국의 법률에 따르면, 황실 재정원의 예산을 사적으로 유용하고 이를 고리대금업자에게 흘려보낸 자는…… 단두대가 아니라 거열형에 처해지게 되어 있지요."

"말도 안 되는 음해다! 저건 위조된 서류다!"

발렌타인이 비명을 지르며 사법관들을 향해 손짓했다.

"당장 저 요망한 년을 닥치게 하라! 경비병들은 무얼 하는가!"

그러나 경비병들은 단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했다.

전당의 어둠 속에서, 철갑을 두른 군화 소리가 묵직하게 울려 퍼졌기 때문이다.

사법관들의 등 뒤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 것은, 제국의 대공 카르디안 폰 크로이츠였다. 그의 거대한 체구와 살기 어린 눈빛만으로도 전당 안의 온도는 순식간에 영하로 떨어졌다.

카르디안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허리에 찬 검자루에 손을 얹은 채, 사법관들의 등 뒤를 묵묵히 지키고 섰을 뿐이다. 그것은 움직이지 않는 거대한 산과 같은 압박이었다. 군부 사법관들은 대공의 차가운 시선을 느끼고는 등 뒤로 식은땀을 흘리며 황급히 서류를 받아 들었다.

카르디안의 영혼에 각인된 차가운 푸른 불꽃 장부 구석에서, 여전히 흐릿하게 일렁이던 '붉은 국경 인장'이 엘리제의 뇌리를 스쳤다. 저 사내 역시 거대한 군자금의 비밀을 쥐고 있는 괴물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괴물이 엘리제의 가장 든든한 방패막이가 되어주고 있었다.

사법관들이 서류를 검토하는 동안, 재정원의 전당은 묘지처럼 고요해졌다.

바스락거리는 종이 소리만이 잔인하게 울려 퍼졌다.

그리고 마침내, 수석 사법관의 입이 열렸다.

"……서류의 인장은 진짜가 맞습니다. 또한, 론 발렌타인 경의 개인 인장과 일치하는 차명 계좌의 송금 정황이 명백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 아닙니다! 성녀 님! 살려주십시오, 성녀 님!"

발렌타인이 무릎을 꿇으며 헬레나의 드레스 자락을 붙잡으려 했다. 그러나 헬레나는 차갑게 그의 손을 뿌리치며 한 걸음 물러섰다.

상황은 완전히 뒤집혔다.

로랑 가문을 단두대로 보내려던 덫이, 역으로 재정원 고위 관료들의 목을 죄는 올가미가 되어 돌아간 것이다.

"이럴 수가……."

헬레나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언제나 가련하고 자비로운 미소를 짓던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가식적인 품위 뒤에 숨겨진 추악한 본색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사교계의 영부인들과 귀족들은 헬레나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 아수라장의 한가운데에서, 엘리제는 더할 나위 없이 우우하고 차가운 조소를 지으며 헬레나를 내려다보았다.

"성녀 님. 타인의 목을 치기 위해 단두대를 준비할 때는, 자신의 목 깊이도 미리 재어두었어야지요."

헬레나의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평소의 고결하고 자비로운 성녀의 가면은 이미 산산조각이 나 있었고, 그 틈새로 비어져 나온 것은 사교계의 정점에 선 자 특유의 서늘한 독기였다. 그녀는 레이스가 촘촘히 박힌 손수건으로 눈가를 훔치며, 이내 애처롭게 무릎을 꿇은 발렌타인 경을 내려다보았다.

"어찌 저를 속이실 수가 있습니까, 발렌타인 경. 고아들의 빵을 빼앗아 사리사욕을 채우고, 그것도 모자라 제 이름까지 더럽히시다니요……."

가증스러운 꼬리 자르기였다. 헬레나는 단 한 번의 눈물짓기로 자신을 탐욕스러운 공범에서 가련한 피해자로 둔갑시키려 하고 있었다. 전당을 가득 메운 귀족들 사이에서 동정 어린 수군거림이 다시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엘리제는 그 얄팍한 연극을 가만히 두고 볼 생각이 없었다.

"참으로 눈물겨운 우화로군요, 헬레나 님."

엘리제는 천천히 부채를 펼쳐 들었다. 상아로 뼈대를 깎고 은박을 입힌 부채가 가볍게 흔들릴 때마다, 전당의 공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발렌타인 경의 사택 지하 금고에서 발견된 라피스 라줄리 원석들과, 성녀 님의 기도실에 장식된 성화(聖畵)들의 일련번호가 완벽히 일치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그 성화들은 바론 메이어가 채권의 대가로 압수했던 황실 금수품들이더군요."

"그, 그것은 후원자들의 순수한 기부인 줄로만……."

"기부라 하심은, 세금조차 매겨지지 않는 비공식 차명 계좌를 통한 기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엘리제의 목소리에는 높낮이가 없었으나, 그 안에 담긴 확증은 헬레나의 숨통을 정확히 조여 갔다.

"재정원의 이중 장부와 성녀 님의 자선 단체 회계 장부의 오차율은 정확히 0.3퍼센트. 이 숫자의 일치는 단순한 우연이라 하기엔 지나치게 정교하지 않습니까?"

헬레나의 손끝이 사정없이 떨렸다.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 채, 입술을 깨물며 엘리제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 눈빛은 성녀의 것이 아닌, 단두대 위로 밀려난 패배자의 아집에 불과했다.

"끌고 가라."

사법관들의 수장이 엄숙하게 명령하자, 경비병들이 달려들어 발렌타인 경의 팔을 거칠게 꺾어 잡았다. 한때 황실 재정원의 실권자로 군림하던 사내의 몸뚱이가 대리석 바닥 위로 볼품없이 끌려 나갔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굴욕적인 비명과 얼룩진 땀방울만이 남았다.

완벽한 승리였다.

사교계의 독사들이 쳐놓은 가짜 부채의 덫을 역이용하여, 재정원의 핵심 인물을 단두대 앞으로 밀어 넣은 것이다.

하지만 승리의 단맛을 음미할 여유 따위는 주어지지 않았다.

쿠구궁-.

머릿속 깊은 곳에서 거대한 빙벽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엘리제는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끼며 본능적으로 가슴팍의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었다.

[아스모데우스의 이면 장부]가 강제로 닫히며 요구하는 가혹한 대가였다.

관자놀이를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마법적 빙결 두통이 뇌수를 얼려 버릴 듯 휘몰아쳤다. 눈앞이 하얗게 점멸하며 사방의 소음이 아득한 물속의 소리처럼 먹먹해졌다.

'이번에는…… 무엇을 잃어버린 거지?'

심연 속에서 소중한 무언가가 영구히 소실되는 감각이 소름 끼치도록 차갑게 몸을 훑고 지나갔다. 어린 시절 오라버니 줄리앙이 손에 쥐여 주었던 무언가에 대한 기억인 것 같기도 했고, 가문의 정원에서 가장 좋아했던 꽃의 이름인 것 같기도 했다. 기억해 내려 할수록 머릿속의 공허함은 블랙홀처럼 커져만 갔다.

비틀거리는 엘리제의 몸이 허공으로 쓰러지기 직전, 묵직하고 단단한 손길이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받쳐 들었다.

카르디안이었다.

그의 검은 군복 깃에서 은은하게 풍기는 차가운 침엽수 향과 피비린내가 엘리제의 콧결을 스쳤다. 카르디안은 그녀를 품에 안은 채, 타인에게는 가려진 각도로 고개를 숙여 귓가에 나직하게 속삭였다.

"대가를 치르고 있군, 로랑 영애."

그의 붉은 눈동자가 엘리제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꿰뚫어 보듯 응시했다.

"사교계의 여왕이 되기 위해 영혼이라도 팔아넘긴 모양이지. 그 오만한 눈빛 뒤에 숨겨진 공허함이 내게는 아주 잘 보인다."

"……방해하지 마십시오, 전하."

엘리제는 이가 맞부딪치는 고통을 참아내며, 그의 가슴팍을 밀어내려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카르디안은 오히려 그녀의 손을 단단히 움켜쥐며 놔주지 않았다.

"방해라니. 나는 그대의 훌륭한 장기말이자 동반자로서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이다. 하지만……."

카르디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의 시선이 엘리제의 어깨 너머, 전당의 높은 발코니 쪽으로 향했다.

"우리의 위대한 연극을 방해하려는 불청객이 더 있는 모양이군."

그의 시선을 따라 엘리제가 억지로 초점을 맞추었다.

전당 2층의 황실 전용 발코니, 그곳을 가리고 있던 무거운 벨벳 커튼이 천천히 걷히고 있었다. 커튼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황금색 견장을 찬 황실 친위대의 수장과 그가 조심스럽게 받쳐 들고 있는 칠흑 같은 금속 상자였다.

그 상자의 표면에는 황제 직속의 비밀 재판부만이 사용할 수 있는 '검은 독수리 인장'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황실 재정원의 몰락을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있던 황제가 마침내 움직인 것이다. 친위대장이 싸늘한 목소리로 전당 아래를 향해 선언했다.

"황명이다. 로랑 후작가의 영애 엘리제 드 로랑, 그리고 대공 카르디안 폰 크로이츠. 두 사람은 지금 즉시 황실 밀실로 압송되어, '황실 재정 유출 및 군자금 횡령 혐의'에 대한 친국을 받으라."

그 순간, 카르디안의 영혼에 각인되어 있던 푸른 불꽃 속의 '붉은 국경 인장'이 엘리제의 시야에서 다시 한번 붉고 기괴하게 일렁였다.

황제의 칼날이 향한 곳은 단순한 재정원이 아니었다.

그 칼날은 처음부터 엘리제와 카르디안, 두 사람 모두의 목을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승리의 미소가 채 가시기도 전에 들이닥친 황실의 거대한 압박에, 전당 안의 공기는 다시금 질식할 듯한 긴장감으로 얼어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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