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그대의 그 눈, 사교계의 뱀보다 더 사악하게 반짝이는군."

귓가를 스치는 카르디안의 묵직한 저음은 다정한 속삭임이라기보다 잘 벼려진 칼날의 울림에 가까웠다. 엘리제는 크리스탈 잔에 담긴 루비 빛 와인을 가볍게 흔들었다. 투명한 유리 벽면을 타고 흘러내리는 붉은 액체가 마치 방금 전 사교계의 독사들이 흘린 피처럼 선연했다.

"과찬이십니다, 대공 전하."

엘리제는 고개를 살짝 비틀어 그의 푸른 눈동자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파팅게일로 넓게 퍼진 검은 실크 드레스 자락이 대리석 바닥에 사각거리는 마찰음을 냈다.

"독이 오른 뱀일수록 쓸모없는 짓에는 이빨을 들이밀지 않는 법이지요. 제 눈빛이 사악해 보였다면, 그것은 전하라는 아주 거대하고 매혹적인 사냥감을 발견했기 때문일 겁니다."

"사냥감이라."

카르디안의 잘생긴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제복의 은빛 사자 단추가 샹들리에의 화려한 불빛을 받아 차갑게 번뜩였다. 주위의 귀족들은 숨소리마저 죽인 채 두 사람의 거리를 주시하고 있었다. 방금 전 샤르트르 부인과 베르제 부인을 단숨에 매장해 버린 로랑가의 악녀와, 제국의 전장을 피로 물들인 전신의 기싸움은 연회장의 공기를 질식할 것처럼 무겁게 짓눌렀다.

"감히 제국에서 나를 사냥하겠다고 나선 이는 그대가 처음이군, 로랑 영애."

"처음이기에 가장 완벽한 결말을 맺을 수 있는 법이지요."

엘리제는 와인 잔을 웨이터의 쟁반에 소리 없이 내려놓았다. 그리고 가볍게 손가락을 까딱여 카르디안에게 눈짓했다.

"이리도 번잡한 곳에서는 뱀의 혀를 놀리기가 곤란합니다. 조금 더 은밀하고, 숫자가 명확하게 오가는 곳으로 자리를 옮기시겠습니까?"

카르디안은 대답 대신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동의의 표시였다.

두 사람은 얼어붙은 귀족들의 시선을 뒤로한 채 연회장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은빛 장미의 전당 후원에 위치한 지하 접견실은 오직 은밀한 거래만을 위해 설계된 장소였다. 두꺼운 붉은 벨벳 양탄자가 깔려 있어 구두굽 소리조차 흡수되었고, 벽면에 장식된 대리석 기둥들은 외부의 소음을 완벽하게 차단해 주었다.

묵직한 오크나무 문이 닫히자마자, 연회장의 소음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오직 벽난로에서 타오르는 장작 소리만이 방 안을 채웠다.

엘리제는 방 한가운데 놓인 마호가니 탁자 앞으로 걸어가 의자에 앉았다. 드레스의 코르셋이 조여오는 압박감 속에서도 그녀의 척추는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곧게 서 있었다.

"본론부터 시작하지요, 전하. 저는 시간 낭비를 극도로 혐오하니까요."

카르디안은 탁자 맞은편에 기대어 서서 팔짱을 꼈다. 그의 거대한 실루엣이 엘리제에게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좋다. 그대가 나를 이곳으로 이끈 대가가 무엇인지 들어보지."

"황실 재정원의 숨통을 끊어놓을 칼자루입니다."

엘리제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카르디안의 푸른 눈동자가 미세하게 좁혀졌다. 엘리제는 탁자 위에 손가락을 얹고 톡, 톡, 규칙적인 소리를 냈다.

"현재 황실 재정원을 장악한 신흥 관료 귀족파, 그리고 그들의 수장인 바론 메이어가 벌이는 장부 조작의 규모를 알고 계십니까? 그들은 단순한 고리대금업자가 아닙니다. 황실의 국고를 사유화하고, 위조된 부채 증서를 통해 황족과 명문 귀족들을 차례로 빚쟁이로 만들어 자신들의 노예로 부리고 있지요."

"황실 재정원의 비리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그것을 증명할 명확한 물증이 없다면 그저 사교계의 영양가 없는 소문에 불과하지."

카르디안이 냉소적인 어조로 대꾸했다. 그의 태도는 지극히 방어적이었으나, 엘리제는 이미 그의 약점을 쥐고 있었다.

"소문이 아니라 확증입니다. 바론 메이어의 비밀 금고에는 헬레나 디아스 성녀의 이름으로 송금된 정체불명의 차명 비자금 내역이 존재합니다. 성녀라는 가면 뒤에 숨어 고아원 후원금을 세탁하고, 그 자금으로 사치품을 밀수하는 구조지요. 그리고..."

엘리제는 상체를 앞으로 조금 기울였다. 그녀의 눈동자에 기괴할 정도로 차가운 지성이 넘실댔다.

"대공 전하, 당신의 영혼 깊은 곳에 새겨진 '붉은 국경 인장' 역시 그 이중 장부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지 않습니까?"

순간, 카르디안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가 접견실의 공기를 순식간에 얼려버렸다. 그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렸고, 눈동자 속 푸른 불꽃이 맹렬하게 타올랐다. 일반적인 귀족 영애라면 그 기세에 눌려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을 터였다.

하지만 엘리제는 오히려 생긋 미소를 지었다.

"군부의 비공식 군자금 세탁 거래. 전장의 사신이라 불리는 대공 전하께서 왜 그런 위험한 자금줄을 만지셔야 했을까요? 부패한 황실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질서를 세우기 위함이겠지요. 저 역시 가문의 파멸을 막고 이 썩어빠진 사교계의 정점에 서야 하니, 우리의 목적지는 결국 같습니다."

"그것을 그대가 어떻게 알았지? 내 군자금의 흐름은 황제조차 파악하지 못한 기밀이다."

카르디안이 낮게 으르렁거리며 엘리제에게 다가왔다. 그의 가죽 장화가 카펫을 짓밟는 소리가 묵직하게 울렸다.

"제게는 전하가 상상하시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장부가 보이니까요."

엘리제는 그를 확실하게 굴복시키고, 동등한 비즈니스 파트너로서의 계약을 체결하기 위해 승부수를 던지기로 했다. 그녀는 눈을 가볍게 감았다가 떴다.

'아스모데우스의 이면 장부, 개방.'

뇌리를 스치는 서늘한 감각과 함께, 카르디안의 머리 위로 붉고 푸른 숫자들이 빗물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의 영혼에 각인된 비밀과 채무, 그리고 약점들이 실시간으로 수치화되어 허공에 부유했다.

그의 군자금 흐름을 보여주는 이중 장부의 세부 내역을 더 깊이 들여다보려는 순간이었다.

콰아아앙-!

머릿속에서 거대한 얼음 빙하가 산산조각 나는 듯한 극심한 충격이 들이닥쳤다. 뇌 해마의 중심부부터 시작된 마법적 빙결 두통(Frostbite)이 신경망을 타고 미친 듯이 뻗어 나갔다.

"아...!"

단말마의 신음이 엘리제의 붉은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머리가 통째로 얼어붙어 깨질 것 같은 고통에 눈앞이 하얗게 번졌다. 시야가 흐려지고 사지가 부들부들 떨렸다.

동시에 머릿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 소중한 기억의 끈이 툭, 하고 끊어지는 감각이 생생하게 전해졌다.

'안 돼...'

본능이 비명을 질렀다. 장부를 무리하게 조회한 대가였다. 사교계의 거물인 대공의 핵심 기밀을 엿본 대가는 너무나 가혹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었다. 따스한 봄볕이 내리쬐던 로랑 저택의 정원. 앳된 얼굴의 오빠 줄리앙이 수줍게 웃으며 작은 상자를 건네고 있었다.

[엘리제, 네가 성년이 되면 이 나비 브로치와 똑같은 진짜 보석을 선물해 주마. 약속할게.]

오빠의 다정한 목소리, 손에 쥐여주던 조악하게 접힌 은박지 나비 브로치의 감촉, 그날의 싱그러운 풀 내음...

그 모든 기억이 마치 뜨거운 연소재가 되어 바람에 흩날리듯, 머릿속에서 순식간에 휘발되어 사라져 버렸다. 기억의 형태는 존재하나, 그 알맹이가 무엇이었는지 절대 떠올릴 수 없는 기괴한 공허함만이 그 자리를 대체했다.

그녀의 자아를 구성하던 소중한 추억 하나가 영구히 소실된 것이다.

"윽...!"

극심한 영혼의 손실과 함께 찾아온 빙결 두통에 엘리제는 중심을 잃고 옆으로 쓰러지듯 휘청였다. 그녀의 작은 손이 탁자 모서리를 붙잡으려 했으나 허공을 갈랐다.

그 순간, 강인하고 드넓은 그림자가 그녀의 시야를 덮쳤다.

덥석.

얼음처럼 서늘하면서도 무서울 정도로 단단한 손길이 엘리제의 가녀린 허리를 단단히 받쳐 안았다. 동시에 다른 한 손이 그녀의 턱끝을 거칠게 치켜올렸다.

카르디안이었다.

"로랑 영애!"

그의 푸른 눈동자 속에 전례 없는 경악과 기묘한 집착이 뒤섞여 요동치고 있었다. 그는 품에 안긴 엘리제의 몸이 이상할 정도로 차갑게 식어가는 것을 느끼며, 그녀의 뺨을 감싸 쥐었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내 살기에 짓눌린 척 연기하는 것치고는 몸이 너무 차갑군."

"하아... 하아..."

엘리제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손길이 닿은 뺨과 허리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머릿속의 동결을 조금씩 녹여주었지만, 영혼의 손실로 인한 상실감은 메워지지 않았다.

그녀는 손가락 끝을 피가 나도록 꽉 쥐며 고통을 참아냈다. 흐려지는 정신을 억지로 붙잡으며, 자신을 내려다보는 대공의 눈빛을 응시했다.

그 눈빛은 단순한 걱정이 아니었다. 사냥감을 향한 포식자의 독점욕, 그리고 자신을 꿰뚫어 본 이 기이한 여인을 절대 놓아주지 않겠다는 집요한 집착이 어려 있었다.

"이 손... 놓으십시오, 전하."

엘리제는 이 맞부딪히는 소리를 내면서도, 차갑게 조소를 지어 보였다.

"대공 전하의 품이 제법 다정하십니다만... 제 몸을 만지는 데에는 꽤 비싼 이자가 붙을 텐데요."

"이 상황에서도 돈과 숫자를 논하는군. 그 독종 같은 태도는 정말이지 기가 막히는군."

카르디안은 헛웃음을 터뜨리면서도, 그녀를 안은 손에 힘을 풀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허리를 제 품으로 더 밀착시키며 속삭였다.

"내 군자금의 비밀을 안 이상, 그대를 살려둘 이유가 없다. 하지만... 그대의 그 사악한 머리가 황실 재정원을 무너뜨리는 데 유용하다면, 기꺼이 내 장기말로 삼아주지."

"장기말이라니요."

엘리제는 남은 힘을 쥐어짜 내어 그의 단단한 가슴을 밀어냈다. 그리고 비틀거리면서도 스스로의 힘으로 온전히 대리석 바닥을 딛고 섰다. 그녀의 은빛 드레스 자락이 우아하게 흘러내렸다.

"장기판을 흔드는 것은 접니다, 전하. 대공 전하께서는 그저 제가 가리키는 곳을 향해 칼을 휘두르는 가장 강력한 '체스의 퀸'이 되어주시면 됩니다."

스스로를 장기말로 삼으려는 대공의 오만을 단숨에 꺾어버리는, 철저하고도 오만한 선언이었다. 로맨스 따위는 한낱 정치적 비즈니스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듯, 엘리제는 황실 권력의 정점 앞에서도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카르디안은 가슴을 밀어낸 그녀의 손길을 가만히 내려다보더니, 이내 낮게 실소를 흘렸다.

"좋다. 그 오만한 거래를 받아들이지. 대신, 내게 실망을 안겨준다면 그 목구멍에 직접 칼날을 들이밀어 주마."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제 사전에는 실패라는 단어가 없으니까요."

엘리제는 흐트러진 소맷자락을 우아하게 정리하며 도도하게 미소 지었다. 잃어버린 기억의 공허함이 가슴 한구석을 시리게 찔러왔지만, 냉혹한 사교계의 정치판에서 감상에 젖어 있을 시간 따위는 없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쾅-!

닫혀 있던 지하 접견실의 묵직한 오크나무 문이 거칠게 열려 젖혀졌다.

"아가씨! 엘리제 아가씨!"

숨을 헐떡이며 방 안으로 뛰어 들어온 것은 로랑가의 충직한 하녀 마리였다. 그녀의 얼굴은 종잇장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고, 손에 쥔 양장본 서류 더미가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무슨 무례냐, 마리. 대공 전하의 앞이다."

엘리제가 차갑게 꾸짖었으나, 마리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소리쳤다.

"그, 그게 아닙니다! 지금 저택 정문에... 황실 재정원의 집행관들이 들이닥쳤습니다! 성녀 헬레나 디아스 님의 사주를 받았다며, 로랑 후작가가 국가 재정을 도복하고 불법 차명 거래를 일삼았다는 고발장을 들고 왔습니다!"

마리의 다급한 절규가 접견실의 차가운 공기를 갈랐다.

"지금 당장 아가씨를 체포하여 황실 재판정으로 압송하겠다고 정원을 가득 메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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