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흘 전, 핏빛 밀랍으로 단단히 봉인되었던 초대장들은 제국의 가장 은밀하고도 탐욕스러운 응접실들에 정확히 당도했다. 파멸의 벼랑 끝에 선 로랑 후작가가 사교계의 모든 명사들을 은빛 장미의 전당으로 초대했다는 소식은, 굶주린 하이에나들에게 던져진 피비린내 나는 고기 한 덩이와 같았다. 파산과 몰락, 그리고 단두대. 그 비참한 종말을 직관하기 위해 모여든 귀족들의 마차로 후작가의 정원은 이른 저녁부터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사흘 뒤. 은빛 장미의 전당 메인 홀은 기괴할 정도로 화려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천장에 매달린 수십 개의 크리스탈 샹들리에가 내뿜는 인공적인 빛이 대리석 바닥에 반사되어 눈을 찌를 듯 눈부셨다. 귀족들이 내뿜는 독한 사향 향수 냄새와 샴페인의 거품이 공기 중에 뒤섞여 기묘한 열기를 만들어냈다. 소리를 완벽히 흡수하도록 설계된 두터운 에메랄드빛 양탄자 덕분에, 수백 명의 발소리는 기묘할 정도로 억눌린 채 웅성거리는 속삭임으로만 변환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어머, 저것 좀 봐. 로랑 후작가가 아직 불을 밝힐 기름값은 남아 있었나 보네?"
부채 뒤로 입술을 가린 채 킥킥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타프타 실크로 정교하게 주름을 잡은 드레스를 입은 샤르트르 후작 부인이었다. 그녀의 곁에는 성녀 헬레나 디아스의 독실한 추종자이자 사교계의 이름난 독사로 불리는 베르제 백작 부인이 오만한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빚쟁이들에게 목을 죄이고 있으면서도 이런 연회를 열다니, 역시 몰락하는 가문의 허세란 눈물겹군요. 오늘 밤이 지나면 저 화려한 샹들리에마저 차압 딱지가 붙을 텐데 말이에요."
그들의 시선이 연회장 중앙 계단으로 향했다.
그곳에 엘리제 드 로랑이 서 있었다.
그녀는 어깨를 고스란히 드러낸 짙은 검은색 벨벳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코르셋으로 극단적으로 조여진 허리 아래로, 파니에를 넣어 넓게 퍼뜨린 스커트 자락이 밤의 장막처럼 무겁게 내려앉았다. 목덜미에는 눈물이 흘러내리는 듯한 형상의 물방울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차가운 빛을 발하고 있었다. 화려함을 넘어 기괴할 정도로 엄숙하고 압도적인 자태였다.
엘리제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드레스 자락이 사각거리는 소리가 기묘한 긴장감을 자아냈다. 그녀의 시선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정면을 향해 있었다.
"로랑 후작 영애, 오랜만의 외출이시군요."
샤르트르 부인이 기다렸다는 듯 앞을 가로막았다. 그녀의 손에 들린 은 도금 잔 속에서 샴페인이 찰랑거렸다. 부인의 눈동자에는 명백한 조소와 가학적인 흥분이 어려 있었다.
"듣자 하니 가문의 재정이 몹시 위태롭다던데, 이런 호사스러운 연회를 개최할 여력이 있으셨다니 놀랍습니다. 혹시... 오늘 밤이 로랑 가문의 마지막 단명(短命)을 기념하는 고별식인가요?"
베르제 부인이 맞장구를 치며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그녀의 크리놀린 스커트가 엘리제의 검은 드레스 자락을 거칠게 스쳤다. 고의적인 밀쳐냄이었다. 그 여파로 베르제 부인의 잔에 담긴 붉은 와인이 엘리제의 드레스 밑단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앗, 실례했군요. 눈이 침침해서 그만... 워낙 어두운 드레스를 입고 계시니 밤안개인 줄 알았습니다. 아, 어쩌면 좋죠? 이 귀한 와인이 묻었으니, 가뜩이나 가난해진 후작가의 세탁비가 걱정되네요."
주변의 귀족들이 숨을 죽였다. 은밀한 웃음소리가 사방에서 뱀의 혀처럼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그들은 엘리제가 수치심에 얼굴을 붉히거나,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표정을 구기기를 바라고 있었다. 악녀의 몰락만큼 구경하기 좋은 유흥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엘리제는 멈춰 선 채, 그저 와인이 튀어 얼룩진 드레스 자락을 잔잔한 눈빛으로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녀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아주 천천히 올라갔다.
"세탁비 걱정이라니, 베르제 부인의 자애로움은 성녀 헬레나의 후광만큼이나 눈이 부시군요."
엘리제의 목소리는 낮고 청아했다. 연회장의 소음을 뚫고 부인들의 귓가에 송곳처럼 꽂히는 울림이었다.
그녀는 왼손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겉으로는 우아하게 부채를 펼치는 동작이었으나, 그녀의 망막 너머에서는 이미 붉고 푸른 숫자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아스모데우스의 이면 장부.'
대상의 이름과 얼굴을 응시하는 순간, 가식의 가면 뒤에 숨겨진 추악한 거래와 숫자들이 실시간으로 갱신되며 허공에 떠올랐다.
* * * [이름: 마리안 드 베르제] [숨겨진 부채 및 밀수 거래 내역: 동부 국경 관세 면제 특권을 남용한 사치품 밀거래 24회. 누적 미납 관세 및 뇌물: 87,000 골드.] [차명 계좌: 성황청 헬레나 디아스 수하의 익명 비자금 세탁 계좌 '자선 협회 04호'로 매달 5,000 골드 송금.] * * *
장부의 붉은 활자가 엘리제의 시야를 가득 채우는 순간, 머리 뒤편에서 유리창이 깨지는 듯한 날카로운 마법적 통증이 치밀었다. 뇌수가 얼어붙는 듯한 극심한 빙결 두통(Frostbite). 엘리제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손끝이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부채 손잡이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어떤 기억이 사라졌을까. 어린 시절 오라버니 줄리앙과 정원에서 나누었던 어떤 대화일까, 혹은 어머니의 따뜻했던 손길의 감촉일까. 상관없었다. 단두대 위에서 목이 잘려 나가는 고통에 비하면, 이딴 추억의 소실과 두통 따위는 가벼운 먼지에 불과했다.
엘리제는 고통을 완전히 삼켜낸 채, 베르제 부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부인의 자비로운 마음씨에 보답하기 위해, 저도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리고 싶군요."
"이야기라니요? 로랑 영애, 지금 상황 파악이 안 되시는 모양인데..."
"지난달 동부 국경을 통과한 성황청의 '구호 물품' 마차 말입니다."
엘리제가 부채를 가볍게 접으며 베르제 부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지극히 친근하면서도 모욕적인 몸짓이었다. 베르제 부인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 마차에는 가난한 고아들을 위한 모포가 가득 차 있어야 맞겠지요.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 안에는 면세 특권을 악용해 밀수된 '샤를레 가문의 최고급 실크' 백 필과, 황실 재정원의 눈을 피해 밀반입된 '베르디안 루비' 원석 세 상자가 들어 있더군요. 마차의 실제 소유주는 베르제 백작 부인, 바로 당신의 차명 상회였고 말입니다."
베르제 부인의 얼굴에서 핏기가 일순간에 가셨다. 그녀가 들고 있던 부채가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 그게 무슨 당치도 않은 유언비어를...!"
"유언비어일까요?"
엘리제는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사교계의 웅성거림이 거짓말처럼 잦아들었다. 귀족들의 시선이 이제 조롱이 아닌, 본능적인 공포로 변해가고 있었다.
"황실 재정원의 면세 대장에 기록된 장부 번호 409번. 과세율 0%로 기록된 그 구호 물품의 실제 통관 수수료가 성녀 헬레나의 은밀한 비자금 계좌인 '자선 협회 04호'로 흘러 들어갔더군요. 매달 5,000 골드씩, 아주 규칙적으로 말입니다. 베르제 부인, 제국의 법률에 따르면 면세 특권을 이용한 밀수 및 국가 재정 기만죄는 가산 몰수형에 처해진다는 것을 모르지 않으실 텐데요?"
"이, 이익...!"
"아, 샤르트르 부인도 그리 재밌어하실 일은 아닙니다."
엘리제가 고개를 돌려 샤르트르 부인을 바라보았다. 샤르트르 부인은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한 표정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부인의 남편께서 황실 재정원의 바론 메이어 경에게 제공한 '특별 자문료' 3만 골드 역시, 메이어 경의 지하 금고 장부에 아주 상세히 적혀 있더군요. 뇌물 수수와 차명 비자금 세탁. 두 분이 오늘 입으신 그 화려한 드레스는 제국의 국고를 갉아먹은 벌레들의 가죽으로 만든 셈이로군요."
사교계가 완전히 침묵에 잠겼다.
단 몇 줄의 수치와 정확한 장부 번호, 그리고 계좌 명의가 폭로되자 연회장은 얼음물 속으로 가라앉은 듯 차갑게 식어버렸다. 유치하게 드레스를 찢거나 차를 쏟는 식의 기싸움이 아니었다. 국가의 법적 단두대를 목전에 들이미는 고도의 정치적 사형 선고였다.
"아..."
베르제 부인의 손이 격하게 떨렸다. 결국 그녀가 쥐고 있던 샴페인 잔이 미끄러져 내렸다. 쨍그랑! 하는 비명 같은 소리와 함께 유리 조각이 바닥에 사방으로 흩어졌다. 거품이 이는 차가운 액체가 베르제 부인의 화려한 레이스 슈미즈와 드레스 자락을 사정없이 적셨다.
하지만 부인은 드레스가 젖는 것 따위는 인지하지도 못하는 듯, 이가 맞부딪히는 소리를 내며 엘리제를 바라보았다.
엘리제는 얼룩진 자신의 드레스 밑단을 가볍게 털어내며 속삭였다.
"와인이 참으로 곱게 물들었군요, 부인. 제 드레스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조만간 두 분의 가산이 통째로 몰수될 터이니, 그때 제 세탁비 대신 영지 하나쯤으로 대물변제하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샤르트르 부인과 베르제 부인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한 채, 서로의 손을 맞잡고 부르르 떨 뿐이었다. 사교계의 독사들이라 불리던 이들이 단 한 번의 은유와 숫자의 칼날 앞에 완전히 무력화된 순간이었다.
그때, 연회장 뒤편의 거대한 대리석 기둥 뒤에서 나지막한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짝. 짝. 짝.
느리고 규칙적인 박수 소리에 귀족들이 일제히 길을 터주었다. 칠흑 같은 어둠을 그대로 베어 물고 나타난 듯한 사내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카르디안 폰 크로이츠 대공이었다.
그의 제복 단추에 새겨진 은빛 사자 문양이 샹들리에 빛을 받아 번뜩였다. 차가운 푸른 눈동자에는 흥미로운 구경거리를 끝마친 관객의 여유로움과, 동시에 상대를 꿰뚫어 보는 포식자의 잔인함이 공존하고 있었다.
그는 얼어붙은 부인들을 가차 없이 지나쳐 오직 엘리제만을 향해 걸어왔다. 그의 묵직한 가죽 장화 소리가 대리석 바닥을 울릴 때마다 귀족들은 숨을 죽였다.
카르디안은 웨이터의 쟁반에서 붉은 와인이 담긴 잔 두 개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하나를 우아하게 엘리제에게 건넸다.
"훌륭한 연극이군, 로랑 영애."
그의 목소리는 낮고 깊었으며, 연회장의 모든 공기를 지배하는 기묘한 무게감을 지니고 있었다. 엘리제는 잔을 받아들며 그의 푸른 눈동자를 마주했다.
그녀의 이면 장부 구석에 각인된, 카르디안의 영혼에 깃든 정체불명의 '붉은 국경 인장'이 다시금 흐릿하게 명멸하는 것이 보였다. 이것이 군부의 비공식 군자금 세탁 거래라는 것을 증명할 강력한 탄환이 되리라는 직감이 뇌리를 스쳤다.
카르디안은 엘리제에게 한 걸음 더 밀착했다. 그의 긴 그림자가 엘리제의 검은 드레스를 덮었다. 그가 상체를 가볍게 숙여 오직 엘리제에게만 들릴 정도로 은밀하게 속삭였다.
"그대의 그 눈, 사교계의 뱀보다 더 사악하게 반짝이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