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어가 기겁하며 엘리제의 발치에 엎드려 목숨을 구걸하려는 찰나, 저택의 거대한 후문이 야수 같은 검기에 맹렬히 쪼개지며 열렸다.
쿠구궁!
굉음과 함께 정교하게 세공된 흑철 문짝이 종잇장처럼 구겨져 대리석 바닥으로 처박혔다. 자욱한 먼지와 불꽃의 잔해가 응접실 내부로 휘몰아쳤다. 카르디안의 호위 기사들이 반사적으로 검을 뽑아 들었고, 바론 메이어는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자욱한 매연을 찢고 걸어 나오는 형상이 있었다.
칠흑처럼 어두운 군청색 망토는 군데군데 찢겨 나가 피로 얼룩져 있었고, 그 아래로 드러난 은빛 흉갑에는 전장의 가혹한 세월이 고스란히 긁혀 있었다. 투구를 벗어 던진 사내의 얼굴은 차갑게 얼어붙은 대지 같았다. 흩날리는 흑발 사이로 드러난 형형한 안광이 응접실 내부를 날카롭게 훑었다.
줄리앙 드 로랑. 사지를 뚫고 살아 돌아온 로랑 후작가의 장남이자, 제국 최전방을 수호하던 기사단장이었다.
"내 누이의 터전에 감히 발을 들인 버러지들이 누구냐."
줄리앙의 목소리는 낮고 무거웠으며, 대지 전체를 울리는 듯한 마력을 머금고 있었다. 그가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강철 군화가 빚어내는 둔탁한 파열음이 응접실을 지배했다.
메이어의 수하들이 본능적인 공포에 질려 검을 치켜세웠다. 그러나 줄리앙의 움직임은 폭풍과도 같았다. 사내의 손에 쥐어진 대검이 반원을 그리며 허공을 가르자, 청색의 검기가 사납게 휘몰아쳤다.
스윽, 콰직!
"아아악!"
단 한 번의 휘두름이었다. 메이어의 사병 셋이 무릎을 꿇기도 전에 대리석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그들의 무기가 산산조각 나며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줄리앙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쓰러진 사병의 가슴팍을 강철 군화로 짓밟았다.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응접실의 정적을 깨뜨렸다.
"황실 재정원의 개들이 가문의 은혜를 잊고 이토록 날뛰는구나."
줄리앙의 시선이 바닥에서 부르르 떨고 있는 바론 메이어에게 닿았다. 사내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위압감에 메이어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때였다. 쓰러진 사병들 틈바구니에 숨어 있던 메이어의 최측근 호위가 소리 없이 단검을 뽑아 들었다. 사내의 시선은 무방비하게 노출된 줄리앙의 등 뒤를 향하고 있었다. 비열한 살기가 허공을 가르려는 찰나였다.
탁자 옆에 고요히 서 있던 엘리제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주저하지 않았다. 우아하게 뻗은 손이 탁자 위에 놓인, 오르몰루 장식으로 도금된 무거운 세브르(Sèvres) 도자기 찻잔을 낚아챘다. 정교한 장미 문양이 그려진 도자기가 공중에서 아름다운 궤적을 그렸다.
퍽!
둔탁한 파열음이 응접실을 울렸다. 엘리제가 휘두른 찻잔이 단검을 쥐려던 호위의 관자놀이를 정확하게 강타했다. 사내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눈을 뒤집으며 대리석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도자기 파편이 흩날리며 엘리제의 크놀러 드레스 자락 위로 하얀 가루가 되어 떨어졌다.
줄리앙이 흠칫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엘리제는 손에 묻은 먼지를 가볍게 털어내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입술을 휘어 올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오라버니, 사냥터의 먼지를 응접실까지 묻혀 오셨군요. 하지만 청소는 제 몫이니 그리 마음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엘리제……!"
줄리앙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가 기억하는 여동생은 언제나 사치스럽고 유약하며, 작은 자극에도 히스테리를 부리던 철부지였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서 있는 여인은 피비린내 나는 아수라장 속에서도 깃털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 오직 냉혹한 이성으로 상황을 지배하고 있었다.
"늦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가장 완벽한 타이밍에 도착하셨지요."
엘리제는 오빠를 안심시키듯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러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방관자처럼 서 있는 대공 카르디안을 바라보았다.
카르디안의 푸른 눈동자에는 흥미로운 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는 엘리제의 거침없는 행동력과, 갑작스러운 기사의 등장에도 추호의 흔들림 없는 태도에 깊은 인상을 받은 듯했다.
"재미있군. 로랑 후작가의 기사단장이 살아서 돌아올 줄은 몰랐는데."
카르디안이 나직하게 읊조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황실의 권위와 전장의 잔혹함이 동시에 묻어났다.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줄리앙이 검을 거두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군인으로서의 예법이었으나, 그의 눈빛은 여전히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었다. 카르디안은 가볍게 손을 흔들어 경례를 물렸다.
"예의는 접어두지. 지금 정문에는 성황청의 사절단과 재정원의 감사관들이 들이닥쳤다. 너희 남매가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 나갈지 아주 기대되는군."
엘리제는 대공의 도발적인 언사에 대꾸하는 대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아스모데우스의 이면 장부.'
그녀가 마음속으로 주문을 외우자, 시야가 붉고 푸른 숫자의 비로 물들기 시작했다. 머릿속을 사정없이 파고드는 빙결 두통에 관자놀이가 찌르르 울렸다. 손가락 끝을 피가 나도록 꽉 쥐며 고통을 억눌렀다.
뇌리가 얼어붙는 듯한 감각과 함께, 머릿속에서 오빠 줄리앙과 함께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 하나가 모래성처럼 허물어지며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어떤 기억인지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잔인한 상실. 하지만 엘리제는 개의치 않았다. 지금은 살아남는 것이 먼저였다.
눈앞에 바론 메이어의 영혼에 각인된 장부가 펼쳐졌다.
[바론 메이어 - 황실 재정원 관료 겸 고리대금업자] - 숨겨진 차명 비자금: 3,400,000 골드 (황실 국고 횡령 및 세금 포탈) - 약점: 성녀 헬레나 디아스와의 불법 면죄부 거래 장부 소지. - 채권 위조 내역: 로랑 후작가에 청구한 부채 800,000 골드 중 600,000 골드는 조작된 허위 채권.
엘리제의 입꼬리가 차갑게 올라갔다. 그녀는 바닥에 엎드려 부르르 떨고 있는 메이어에게 다가갔다. 드레스 자락이 사각거리는 소리가 메이어에게는 사신의 발소리처럼 들렸으리라.
"메이어 경."
엘리제는 메이어의 앞에 한쪽 무릎을 살짝 굽히며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속삭이듯 다정했으나, 그 내용은 비수와 같았다.
"당신이 우리 가문에 청구한 80만 골드의 채무 증서. 그중 60만 골드가 황실 재정원의 장부 조작을 통해 은밀히 부풀려진 가짜라는 사실을, 정문에 대기 중인 감사관들이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메이어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그, 그것이 무슨……!"
"뿐만 아니지요. 성녀 헬레나 디아스에게 매달 송금되던 '고아원 후원금' 명목의 차명 비자금 계좌. 그 계좌의 종착지가 성녀의 개인 보석 수집고라는 사실을 성황청 사절단이 알게 된다면, 과연 그들이 당신의 목숨을 보존해 줄까요?"
"당신이…… 그걸 어떻게……!"
메이어는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질렀다. 엘리제의 눈동자는 그 어떤 감정도 담기지 않은 채, 오직 차가운 숫자의 나열만을 비추고 있었다. 그녀는 메이어의 영혼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선택하세요, 메이어 경. 이 자리에서 가짜 채권 증서를 모두 불태우고 로랑 가문의 모든 채무가 완전히 변제되었음을 증명하는 서류에 서명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제가 직접 정문으로 나가 감사관과 사절단에게 이 흥미로운 영수증들을 제출할까요?"
메이어는 이마를 대리석 바닥에 짓찧으며 흐느꼈다.
"서, 서명하겠습니다! 서명하고말고요! 제발, 제발 목숨만은……!"
줄리앙은 동생의 믿을 수 없는 정보력과 냉혹한 협상 기술에 압도된 채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칼을 쥐고 전장을 누비던 자신보다, 펜과 정보를 쥐고 상대를 난도질하는 엘리제의 모습이 더 위협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엘리제는 메이어가 품속에서 서둘러 꺼낸 채권 서류와 양필묵을 받아 들었다. 그녀는 서류의 내용을 꼼꼼히 확인한 뒤, 줄리앙에게 눈짓했다. 줄리앙은 묵묵히 다가와 메이어의 서명이 담긴 완전 면책 서류를 수거했다.
이로써 로랑 가문을 옥죄던 사치의 오명과 파산의 위기는 완전히 종식되었다. 메이어라는 거대한 적의 이빨을 뽑아버린 것이다.
하지만 엘리제의 시선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대공 카르디안을 바라보았다. 이면 장부의 붉은 실선들이 카르디안의 전신을 감싸고 있었다. 그의 영혼에 각인된 차가운 푸른 불꽃의 장부 구석, 그곳에 정체불명의 '붉은 국경 인장'이 흐릿하게 떠올라 번쩍이고 있었다.
'저 인장은…….'
엘리제의 두뇌가 빠르게 회전했다. 그것은 단순한 문양이 아니었다. 제국 군부의 비공식 군자금 세탁 거래에 사용되는 극비 인장이었다. 황실을 혐오하는 전장의 사신 대공 카르디안이, 뒤로는 군부의 거대한 자금줄을 주무르고 있다는 결정적 증거.
'카르디안, 당신 역시 황실을 무너뜨리기 위해 어둠 속에서 거대한 덫을 놓고 있었군.'
엘리제는 속으로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이 정보는 카르디안을 단순한 정략적 방패막이가 아닌, 완벽한 정치적 동반자이자 자신을 위해 움직일 장기말로 길들이는 데 있어서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터였다.
그녀의 관자놀이에 다시 한번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빙결 두통이 찾아왔다. 엘리제는 눈살 하나 찌푸리지 않고 그 고통을 삼켜냈다. 기억의 일부가 다시 소실되었으나, 그녀가 얻은 권력과 정보의 가치에 비하면 사소한 대가에 불과했다.
"정리가 끝난 모양이군."
카르디안이 천천히 시선을 돌려 부서진 후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정문 쪽에서 들려오는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성황청의 똥개들이 짖는 소리가 아주 시끄럽군. 엘리제,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지?"
엘리제는 드레스 자락을 우아하게 고쳐 잡으며 뒤를 돌아섰다. 그녀의 눈빛은 이미 다음 전쟁터를 향하고 있었다.
"오라버니, 사병들의 시체를 정리해 주세요. 메이어 경은 지하 접견실에 안전하게 모셔두고요."
"알겠다, 엘리제."
줄리앙은 이제 동생의 명령에 한 치의 의문도 품지 않았다. 그의 대검이 다시 한번 묵직한 마력을 뿜어내며 메이어의 수하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엘리제는 카르디안을 향해 우아하게 고개를 숙였다.
"대공 전하, 정문의 손님들은 제 가문이 맞이할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아주 흥미로운 연극이 펼쳐질 테니까요."
"기꺼이 감상하지."
카르디안은 입꼬리를 올리며 응접실 안쪽의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의 푸른 눈동자는 여전히 엘리제의 일거수일투족을 쫓고 있었다.
엘리제는 저택의 중앙 복도를 지나 지하 접견실로 향했다. 그곳은 로랑 후작가의 사저이자, 사교계의 진정한 지배자가 될 그녀의 요새인 '은빛 장미의 전당'의 심장부였다. 대리석 기둥과 소리를 흡수하는 두터운 양탄자가 깔린 그곳에서, 엘리제는 책상 위에 놓인 고급지 초대장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깃펜을 들어 부드럽고도 날카로운 필체로 글을 적 내려갔다. 수신인은 황실 재정원의 고위 귀족들과 성황청의 추기경들, 그리고 사교계의 성녀를 연기하는 헬레나 디아스였다.
"나를 단두대로 보내려 했던 자들에게, 가장 화려한 퇴장식을 선물해 주지."
글씨가 완성되자, 엘리제는 붉은 밀랍을 촛불에 녹였다. 걸쭉하게 흘러내리는 핏빛 밀랍이 초대장의 봉투 위로 떨어졌다. 그녀는 로랑 가문의 인장을 들어, 마치 단두대의 칼날을 내리치듯 붉은 밀랍 위를 강하게 내리눌렀다.
쩍, 하는 소리와 함께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졌다.
황실 사교계를 피바람으로 물들일 '은빛 장미의 전당' 연회. 그 지옥의 문을 열 초대장이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엘리제의 입술에 매혹적이면서도 잔혹한 미소가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