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문이 찢어지는 비명과 함께 로랑 후작가의 자랑이던 은빛 장미 부조가 대리석 바닥 위로 처참하게 굴러떨어졌다.
날카로운 유리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며 어둠이 내려앉은 응접실을 난도질했다. 깨진 샹들리에의 크리스탈 조각들이 횃불 빛을 받아 피처럼 붉게 번뜩였다. 매캐한 화약 냄새와 먼지 구덩이 사이로, 가죽 장화를 신은 사내들의 거친 발소리가 쏟아져 들어왔다. 그 무도한 무리의 선두에 선 자는 사냥개 홉스가 아니었다.
붉은 벨벳 코트 깃에 기름진 턱축을 묻은 사내. 사채업자이자 황실 재정원의 숨은 실세, 바론 메이어가 가죽 채찍을 손가락에 감아쥐며 걸어 나오고 있었다.
"과연 쥐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는군. 명색이 제국의 기둥이라 자부하던 로랑 후작가가 이토록 허망하게 주저앉을 줄이야."
메이어의 상스러운 웃음소리가 높은 대리석 천장을 타고 불쾌하게 공명했다. 그의 뒤를 따르는 채권단 사내들이 낄낄거리며 벽에 걸린 명화와 도자기들을 가차 없이 바닥으로 쓸어내렸다. 쨍그랑, 하는 파열음이 들릴 때마다 하녀 마리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그러나 계단 위, 은빛 난간을 짚고 서 있는 엘리제 드 로랑의 눈동자는 잔잔한 호수처럼 고요했다.
빳빳하게 풀을 먹인 실크 드레스는 단 한 군데의 주름도 허용하지 않은 채 그녀의 몸을 단단히 감싸고 있었다. 목덜미를 엄격하게 감싼 오간자 레이스칼라는 마치 고결한 여왕의 성벽처럼 견고해 보였다. 엘리제는 천천히, 한 계단씩 아래로 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구두굽이 대리석에 부딪히며 내는 규칙적인 소리가 소란스러운 응접실의 소음을 기묘하게 잠식해 들어갔다.
"무례하구나, 메이어 남작."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으나, 응접실 청중의 고막을 송곳처럼 찔렀다.
메이어가 고개를 들어 계단 아래로 내려서는 엘리제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탐욕과 가학적인 흥분이 동시에 서렸다. 가문이 파산하고 오빠가 실종된 상황에서도 저토록 오만한 태도를 유지하는 귀족 영애의 껍질을 찢어발기는 것만큼 그에게 짜릿한 유희는 없었다.
"하! 여전히 분수를 모르는군, 엘리제 영애. 네 아비가 남긴 빚더미가 이 저택의 돌멩이 하나하나까지 전부 내 소유로 만들었다는 걸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지?"
메이어가 성큼성큼 걸어와 엘리제의 바로 앞까지 다가섰다. 비열한 알코올 냄새와 가죽 냄새가 그녀의 코끝을 찔렀다. 메이어는 엘리제의 콧대를 꺾어놓겠다는 듯, 거친 손을 치켜들었다. 그대로 그녀의 뺨을 갈겨 바닥에 꿇리려는 폭력적인 몸짓이었다.
"아가씨!"
마리가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엘리제는 고개를 돌리지도, 눈을 감지도 않았다. 오히려 보랏빛 눈동자를 똑바로 떠 메이어의 손끝을 정면으로 쏘아보았다. 서늘하기 짝이 없는 그 보랏빛 응시 속에는 두려움이나 나약함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사냥감을 해부하려는 냉혹한 관찰자의 시선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 기이할 정도의 태연함에 메이어의 손이 허공에서 멈칫했다. 허공을 가르려던 손바닥이 갈 곳을 잃고 부르르 떨렸다. 메이어는 침을 뱉으며 억지로 비웃음을 지어 보였다.
"눈빛만은 여전히 후작 영애로군. 하지만 그 잘난 면상이 언제까지 유지될지 두고 보지. 당장 이 년의 사지를 묶어 지하 마차로 던져넣어라! 법적으로 이 저택과 그 안의 모든 재산은 이제 내 것이다!"
사내들이 험악한 기세로 다가오려던 그 순간, 엘리제의 머릿속에서 거대한 이면의 장부가 펼쳐졌다.
* * *
시야가 푸르게 얼어붙는가 싶더니, 이내 붉은 숫자들이 빗물처럼 쏟아져 내렸다.
아스모데우스의 이면 장부.
상대의 영혼에 각인된 가장 추악한 비밀과 자금의 흐름을 실시간으로 수치화하는 절대적인 금손가락이 개방된 순간이었다. 붉은 잉크로 쓰인 글자들이 메이어의 머리 위에서 어지럽게 춤을 추며 정렬되기 시작했다.
[바론 메이어] - 공식 부채 회수액: 320,000 골드 - 황실 재정원 제2보좌관 뮬러 경에게 지급된 정기 뇌물: 80,000 골드 (차명 무기명 채권 거래) - 특이 사항: 국경 지대 군자금 세탁 경로 확보 및 성녀 헬레나 디아스의 대리인 '익명 송금인 K'로부터 유입된 50,000 골드 차명 비자금 계좌 보유.
눈앞에 번쩍이는 붉은 계좌 내역 중, 헬레나의 수하가 보낸 정체불명의 차명 비자금 계좌가 유독 붉게 타올랐다. 이 돈의 실체가 사교계의 그 고결한 성녀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엘리제의 뇌리에 선명하게 박혔다.
그와 동시에, 뇌를 송곳으로 관통하는 듯한 극심한 빙결 두통이 찾아왔다.
'으윽……!'
머릿속 깊은 곳에서 차가운 성에가 끼는 듯한 고통이 몰려왔다. 관자놀이가 찢어질 것 같은 마법적 두통과 함께, 자아의 아주 일부분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지는 감각이 들었다.
언젠가 오빠 줄리앙과 함께 저택 뒤뜰에서 은빛 장미의 씨앗을 심으며 나누었던 대화, 그 따스했던 봄바람의 감촉이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져 침묵 속으로 사라졌다. 소중한 인간적 기억 하나를 대가로 지불한 것이다.
엘리제는 입술 안쪽을 이빨로 세게 깨물었다. 비릿한 피 맛이 혀끝을 적시며 고통을 잠재웠다. 그녀는 하얗게 질려가는 손가락 끝을 드레스 자락 속으로 감추며, 메이어를 향해 우아하게 미소 지었다. 고통마저도 그녀의 완벽한 가면을 찢지는 못했다.
"메이어 남작. 귀족의 자산에 손을 대기 전에, 스스로의 목줄이 단단히 묶여 있는지 먼저 확인하는 것이 상식 아니던가요?"
"뭐라? 이 년이 미쳤나……."
"지난달 14일, 황실 재정원의 제2보좌관 뮬러 경의 사택 마차로 흘러 들어간 8만 골드의 무기명 채권. 그 채권의 일련번호가 로랑 후작가의 차명 양도 증서와 완벽히 일치한다는 사실을, 황실 감사원이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메이어의 얼굴이 일순간 굳어졌다. 그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네, 네놈이 그걸 어떻게……!"
"그뿐만이 아니지요."
엘리제는 메이어의 경악을 비웃듯, 흩어진 유리 조각들을 우아하게 밟으며 응접실 한가운데에 놓인 소파로 걸어가 앉았다. 그녀는 마치 티타임을 즐기려는 여왕처럼 자연스럽게 마리에게 눈짓했다.
"마리. 물이 끓었으니 차를 내오거라. 손님이 다소 거칠어 찻잔을 깰지 모르니, 가장 저렴한 흙그릇으로 준비하고."
"아, 예! 예, 아가씨!"
마리는 눈물을 닦으며 황급히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 메이어의 사내들은 엘리제의 기묘한 여유에 압도되어 감히 그녀에게 손을 대지 못하고 주저했다.
메이어의 이마에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뮬러 경과의 뇌물 거래는 오직 자신과 황실 재정원의 극소수만이 아는 일급 기밀이었다. 사교계에서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후작 영애가 이 숫자를 정확히 꿰뚫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공포였다.
"허장성세다! 어디서 쥐어들은 헛소문으로 나를 협박하려 드는군! 당장 저 년의 주둥이를……!"
"당신의 외아들, 율리우스 메이어."
엘리제가 찻잔이 오기도 전에 나지막하게 이름을 읊조렸다. 그 이름이 나오자 메이어는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었다.
"그 철없는 도련님이 도박장 '붉은 래빗'에서 가문의 인장이 찍힌 위조 토지 문서를 담보로 잡히고 날린 금액이 정확히 12만 골드더군요. 게다가 그 담보로 잡힌 토지는…… 황실령인 '크로이츠 대공가의 남부 목초지'더군요? 황실 자산을 사칭해 도박 계약 사기를 친 죄는 제국법상 참수형에 해당할 텐데요."
응접실 안은 얼음물을 끼얹은 듯 차갑게 식어내렸다.
사채업자들을 이끌고 기세등등하게 난입했던 메이어의 기백은 이미 찾아볼 수 없었다. 엘리제의 입에서 나오는 숫자는 너무나도 구체적이었고, 그 치명도는 가문을 통째로 멸문지화로 이끌 수 있는 폭탄과도 같았다.
황실 군대의 비호를 받으며 귀족들의 고혈을 빨아먹던 고리대금업자가, 단 세 마디의 정교한 비밀 폭로 앞에 완전히 무장 해제당한 것이다.
"당신이 오늘 밤 내 저택의 가구 하나라도 들고 나가는 순간, 이 모든 장부의 복사본이 황실 사법부와 크로이츠 대공가의 집무실로 송부될 것입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메이어 남작? 나와 함께 단두대 단상 위에서 나란히 목이 잘리는 사교계의 동반자가 되어 보시겠습니까?"
엘리제는 손가락으로 턱을 괴며 생긋 웃었다. 그 미소는 아름다웠으나, 메이어의 눈에는 지옥의 악마보다 더 잔혹하게 비쳤다.
"이, 이…… 괴물 같은 년……."
메이어는 마침내 다리에 힘이 풀린 듯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의 육중한 몸이 대리석 바닥에 부딪히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오만하게 쥐고 있던 채찍은 이미 바닥으로 떨어져 뒹굴고 있었다.
"내가…… 내가 잘못했다, 엘리제 영애. 아니, 로랑 후작 대리님. 제발, 그 장부만은…… 내 아들 율리우스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제발……!"
사채업자의 굴욕적인 비명이 응접실을 가득 채웠다. 엘리제는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차가운 희열을 느꼈다. 사교계의 정치적 지배자가 되기 위한 첫 걸음이자, 가문의 파멸을 막아내기 위한 첫 번째 사이다 같은 승리였다.
그녀가 메이어를 완전히 짓밟고 일어서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쿠구구궁!
저택의 깊숙한 후문 쪽에서 천지를 뒤흔드는 듯한 굉음이 일었다. 단순한 충격음이 아니었다. 공기 자체가 찢겨 나가는 듯한 살기 어린 파형이 응접실까지 밀려왔다.
콰아아앙!
강철로 주조된 저택의 거대한 후문이 야수 같은 검기에 의해 단번에 수십 조각으로 쪼개지며 맹렬히 열려젖혀졌다. 폭풍처럼 밀려드는 검은 먼지 너머로, 푸른 불꽃 같은 마력을 온몸에 두른 사내의 거대한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메이어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납작 엎드렸고, 엘리제 역시 찻잔을 쥐려던 손을 멈춘 채 먼지 구덩이 속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회색 광풍과 부서진 대리석 가루 너머로, 검은 군화를 신은 무거운 발소리가 응접실의 침묵을 짓밟았다.
칠흑처럼 어두운 남색 군복 위로 제국 황실의 상징인 은빛 수리 훈장이 횃불 빛을 받아 시리게 빛났다. 어깨에 걸친 반망토는 밤의 장막을 찢어 발겨 만든 것처럼 거칠게 펄럭였고, 그 아래로 드러난 사내의 얼굴은 신이 얼음을 깎아 만든 것처럼 수려하면서도 잔혹했다.
제국 군부의 장악자이자 정적들의 심장을 도려내는 사신, 카르디안 폰 크로이츠 대공이었다.
그가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검날에서 흘러나온 서슬 퍼런 푸른 마력이 바닥의 카펫을 검게 그을려 가며 사방으로 뻗어 나갔. 메이어의 사냥개들은 감히 검을 뽑을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그 위압감에 짓눌려 무릎을 꿇고 바닥에 머리를 처박았다.
"대, 대공 전하……! 어찌 이곳에……."
바닥에 납작 엎드린 바론 메이어의 목소리가 사시나무 떨리듯 흔들렸다. 방금 전까지 엘리제를 짓밟으려던 남작의 오만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오직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힌 짐승의 비명만이 응접실을 맴돌았다.
카르디안은 메이어의 비굴한 부르짖음을 철저히 무시했다. 그의 얼음장 같은 시선은 오직 한 곳, 부서진 잔해와 먼지 구덩이 속에서도 털끝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 소파에 군림하듯 앉아 있는 엘리제 드 로랑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저 여자가 로랑의 악녀인가.’
카르디안의 차가운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가문이 파산하고 사채업자들에게 사지가 찢길 위기 속에서도, 그녀는 마치 황실 무도회의 상석에 앉아 있는 것처럼 우아했다. 빳빳하게 풀을 먹인 브로케이드 실크 드레스와 가느다란 목덜미를 휘감은 기퓌르 레이스는 먼지 한 톨 묻지 않은 채 빛나고 있었다. 사지의 근육이 긴장으로 굳어가는 와중에도, 엘리제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대공을 마주 보았다.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가 카르디안의 푸른 눈과 허공에서 격렬하게 충돌했다.
그 찰나의 순간, 엘리제의 뇌리에 다시 한번 붉은 불꽃이 일었다. 이면 장부가 기어이 제멋대로 페이지를 넘기며 새로운 사냥감의 영혼을 잠식해 들어간 것이다.
* * *
[카르디안 폰 크로이츠] - 비밀 군사 자금 세탁 규모: 1,200,000 골드 - 약점: 황실 재정원의 감시를 피해 남부 국경 지대의 철광 채굴권을 독점, 비공식 사설 군대를 육성 중.
장부의 가장 깊숙한 구석, 푸른 마력의 잔상 뒤로 정체불명의 '붉은 국경 인장'이 흐릿하게 떠올랐다. 그것은 단순한 횡령이나 비자금의 수준이 아니었다. 제국 황실의 목을 겨누는 거대한 반역의 불씨이자, 군부의 비공식 군자금 세탁 거래의 명확한 증거였다.
‘이것마저 보인단 말인가.’
정보의 가치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거대했던 탓일까. 이전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극심한 빙결 두통이 엘리제의 전신을 강타했다.
"윽……!"
머릿속이 송곳으로 헤집어지는 것을 넘어, 뇌수가 통째로 얼어붙어 깨지는 듯한 고통이었다. 관자놀이의 혈관이 터질 것처럼 박동했고, 눈앞이 일순간 암전되었다.
동시에 그녀의 자아 깊은 곳에서 아주 소중하고 따뜻했던 기억의 파편이 거칠게 뜯겨 나갔다. 어린 시절, 열병을 앓던 자신을 밤새 간호해 주며 다정하게 이마를 짚어주던 어머니의 부드러운 손길. 그 따스했던 온기와 어머니의 목소리가 흔적도 없이 지워져 어둠 속으로 소멸했다.
엘리제는 이가 부러질 정도로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입술 틈새로 붉은 피 한 방울이 흘러내려 하얀 턱 끝을 타고 흘렀다. 손가락 끝이 피가 나도록 손바닥을 파고들었지만, 그녀는 단 한 마디의 비명도 흘리지 않았다.
이 고통을 들키는 순간, 눈앞의 포식자는 자신을 단숨에 물어뜯을 것이기에. 엘리제는 피 맛이 도는 입술을 밀어 올려 완벽하고도 싸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황실의 사신께서 제국의 가장 초라한 폐허까지 발걸음을 해주셨군요, 크로이츠 대공 전하."
그녀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렸으나, 격조 높은 우아함을 잃지 않았다.
카르디안은 천천히 검을 거두며 엘리제에게 다가왔다. 그의 군화가 바닥에 흩어진 유리 조각들을 가차 없이 짓밟아 가루로 만들었다. 그의 몸에서 풍기는 지독한 혈향과 서늘한 마력이 엘리제의 숨통을 조여 왔다.
"로랑 후작 영애. 파산한 영지의 영애가 이 야밤에 채권자들과 아주 흥미로운 대화를 나누고 있더군."
카르디안의 낮고 가라앉은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재정원의 뇌물 수치와 내 가문의 남부 목초지 이름까지 나오다니. 감히 황실의 자산을 입에 올린 죄가 얼마나 무거운지 모르는 모양이지?"
그가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두 사람의 거리가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워졌다. 카르디안의 매혹적이면서도 위험한 눈동자가 엘리제의 보랏빛 눈을 집요하게 꿰뚫었다. 그녀의 흐트러짐 없는 태도와, 입술 끝에 맺힌 붉은 피 한 방울이 그의 가학적인 소유욕과 강렬한 호기심을 동시에 자극했다.
보통의 영애들이라면 이 기백에 질려 눈물을 흘리며 목숨을 구걸했을 터였다. 하지만 엘리제는 오히려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눈꼬리를 휘어 미소 지었다.
"죄가 무거운지 가벼운지는, 그 죄를 저지른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달라지는 법이지요. 남부 목초지의 '붉은 국경 인장'이 찍힌 양도 증서가…… 과연 단순한 사기꾼의 소행일까요, 아니면 대공 전하의 위대한 대업을 위한 밑거름일까요?"
그 순간, 카르디안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응접실의 온도가 순식간에 영하로 떨어지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살기가 폭발했다.
그가 손을 뻗어 엘리제의 하얀 턱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가죽 장갑의 차가운 감촉이 그녀의 살결을 짓눌렀다. 턱을 치켜 올리며 고정된 시선 속에서, 두 사람의 숨결이 엉켰다.
"영애. 그 잘난 주둥이가 네 목숨을 단두대로 이끄는 지름길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나?"
"오히려 반대지요."
엘리제는 턱이 아려오는 고통 속에서도 눈동자를 부드럽게 휘었다.
"이 손에 쥔 장부는 대공 전하의 가장 안전한 방패이자, 황실을 무너뜨릴 가장 날카로운 창이 될 테니까요. 저를 단두대로 보내시겠습니까, 아니면 당신의 가장 유능한 장기말로 삼으시겠습니까?"
침묵이 지독하게 응접실을 짓눌렀다. 메이어는 숨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두 괴물의 대화를 들으며 공포에 떨었다.
카르디안은 엘리제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턱을 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지만, 그녀는 신음조차 흘리지 않은 채 오직 계산적인 눈빛으로 자신을 시험하고 있었다. 이토록 오만하고, 이토록 철저하게 자신을 이용하려는 여자는 처음이었다. 분노보다 먼저, 그녀를 완전히 굴복시키고 그 가면 뒤의 진짜 얼굴을 보고 싶다는 기묘한 집착이 그의 가슴 깊은 곳에서 고개를 들었다.
"흥미롭군."
카르디안이 나직하게 읊조리며 천천히 손을 떼어냈다. 가죽 장갑에 엘리제의 입술에서 묻어난 붉은 피가 엷게 번져 있었다. 그가 그 피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이내 잔혹한 미소를 지었다.
"그 장부의 가치를 증명해 봐라. 만약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로랑의 이름은 오늘 밤 제국에서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기꺼이."
엘리제가 우아하게 고개를 숙이며 답하려던 바로 그 찰나였다.
쾅! 쾅! 쾅!
이번에는 부서진 후문이 아닌, 잠겨 있던 응접실의 거대한 정문 쪽에서 다급하고 거친 두드림이 울려 퍼졌다.
"아가씨! 엘리제 아가씨! 큰일 났습니다!"
저택 외곽을 지키던 늙은 집사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었다. 카르디안의 호위 기사들이 검자루를 쥔 채 경계 태세를 취했고, 엘리제의 눈동자가 빠르게 수축했다.
"성황청의 사절단과 황실 재정원의 감사관들이 지금 저택 정문을 포위했습니다! '회색 영장'을 들고 왔습니다! 아가씨를 황실 모독 및 가산 은닉 죄로 즉시 체포하겠다고 합니다!"
정문을 포위한 성황청 사절단. 그리고 그 뒤에 도사리고 있을 성녀 헬레나 디아스의 그림자.
메이어를 무릎 꿇리고 대공과의 거래를 시작하려던 찰나, 사교계의 거대한 음모가 한 발 먼저 그녀의 목덜미를 낚아채기 위해 들이닥친 것이다.
엘리제는 서서히 다가오는 파멸의 그림자를 느끼며, 입술의 피를 우아하게 훔쳐냈다. 대공 카르디안의 푸른 눈동자가 그녀의 다음 선택을 시험하듯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