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갑고 무거운 쇠붙이가 목덜미에 닿았을 때,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비릿한 쇠비린내와 지독한 흙먼지의 냄새였다.
광장에 모여든 군중의 함성은 귀를 찢을 듯이 울려 퍼졌고, 단두대의 붉은 나무 바닥은 이미 앞서 처형당한 이들의 피로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태양조차 고개를 돌린 듯한 어두운 하늘 아래, 오직 단 한 사람만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성녀 헬레나 디아스.
그녀는 하얀 샹티이 레이스로 장식된 순백의 드레스를 입고, 가련하게 눈물을 흘리며 신의 자비를 기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단두대 아래로 고개를 숙인 내 눈에만 보인 것이 있었다. 기도하는 손가락 틈새로 살짝 가려진, 그 잔인하고 우아한 조소.
‘가여운 엘리제. 결국 네가 누울 곳은 그 더러운 바닥뿐이야.’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으나 그 오만한 입술의 움직임은 명확히 베어 들었다. 가문을 파멸시키고, 내 오빠를 죽음으로 몰아넣었으며, 나를 이 단두대 위로 끌어올린 장본인의 마지막 비웃음이었다.
서슬 퍼런 작두날이 마찰음을 내며 하강했다. 목덜미를 가르는 소름 끼치는 냉기가 뇌리를 관통하는 그 찰나—
“헉……!”
찢어지는 듯한 비명과 함께 몸이 위로 튀어 올랐다.
숨이 턱 끝까지 막혀왔다. 거칠게 몰아쉬는 숨결이 목구멍을 찢을 듯이 아팠다. 차가운 단두대의 나무 바닥 대신, 손끝에 닿은 것은 지극히 부드럽고 가벼운 최고급 자카드 실크 침구의 감촉이었다.
귓가를 때리던 군중의 성난 야유는 온데간데없고, 방 안은 오직 차분한 은빛 장미 향과 타오르는 벽난로의 장작 타는 소리만이 적막을 채우고 있었다.
엘리제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목을 부여잡았다. 매끄럽고 온전했다. 피 한 방울 흐르지 않는, 살아 있는 인간의 살결이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사방을 둘러보았다. 벨벳 커튼 사이로 스며드는 은은한 달빛 아래, 익숙하다 못해 뼈에 사무치도록 그리운 공간이 드러났다. 로랑 후작가의 사저, ‘은빛 장미의 전당’에 위치한 그녀의 침실이었다.
화장대 위에 놓인 정교한 은제 탁상달력이 눈에 들어왔다. 은판에 새겨진 황력의 숫자는 그녀가 단두대에서 목이 잘리기 정확히 1년 전을 가리키고 있었다.
“돌아왔어…….”
갈라진 목소리가 허공에 흩어졌다. 그것은 단순한 꿈이 아니었다. 살이 잘려 나가고 뼈가 으스러지던 그 생생한 감각, 가문이 몰락해 가던 그 비참한 궤적은 모두 사실이었다. 신이 준 기회인지, 혹은 악마의 장난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살아남았다는 것, 그리고 나를 파멸로 밀어 넣은 자들의 목을 합법적으로 비틀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는 것만이 유일한 진실이었다.
그때였다.
쿵!
머리통을 거대한 납덩이로 내리치는 듯한 극심한 충격이 엘리제의 뇌리를 강타했다.
“아아악……!”
비명이 터져 나오기도 전에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머릿속의 모든 신경이 순식간에 얼어붙는 듯한, 지독한 마법적 빙결 두통이었다. 골막을 송곳으로 후벼 파는 것 같은 고통에 엘리제는 침대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뺨을 댄 채, 그녀는 손톱이 하얗게 질리도록 바닥을 긁어내렸다.
눈앞이 붉고 푸른 안개로 번져갔다. 단순한 환각이 아니었다.
그 안개 너머로,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허공에서 마치 빗물처럼 쏟아지는 수많은 숫자와 글자들. 그것은 붉고 푸른 광채를 띠며 엘리제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로랑 후작가 잔여 채무: 2,400,000 골드] [바론 메이어의 차명 비자금 채권: 450,000 골드 (황실 재정원 3등급 장부 연동)] [헬레나 디아스의 성화(聖畵) 밀수 차익금: 120,000 골드 (익명 계좌 조회 대기 중)]
“이건…….”
엘리제는 신음하며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손끝에서 은은한 마력의 잔재가 흘러나와 허공의 글자들과 공명하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것은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전설 속의 이능, 타인의 영혼에 새겨진 위선과 숨겨진 비자금의 흐름을 실시간으로 수치화하여 보여준다는 ‘아스모데우스의 이면 장부’였다. 역대 그 어떤 가주도 각성하지 못해 한낱 구전으로만 치부되던 악마의 능력이, 죽음의 경계를 넘어온 그녀의 영혼에 완벽히 각인된 것이었다.
그녀가 바론 메이어의 이름을 떠올리자, 붉은색 숫자들이 더욱 사납게 요동치며 그의 숨겨진 약점과 부당 계약의 내역을 줄글로 토해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경이로운 정보를 읽어 내리려는 찰나, 뇌리의 가장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툭, 하고 끊어지는 감각이 들었다.
치직, 하며 머릿속의 필름 한 장이 타 들어가는 듯한 불쾌한 환청.
동시에 마음 한구석이 텅 비어버린 듯한 기묘한 상실감이 찾아왔다.
‘……무엇이지?’
엘리제는 본능적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방금 무언가 아주 소중한 기억 하나가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떠올리려 애썼지만, 머릿속에는 오직 차가운 숫자와 장부의 텍스트만이 가득할 뿐, 그 자리에 있던 온기 어린 기억은 형체도 없이 바스러져 있었다.
이능의 대가였다.
타인의 더러운 위선과 약점을 들여다보는 대가로, 자신의 가장 진실하고 인간적인 기억을 하나씩 악마에게 바쳐야 하는 가혹한 제약.
엘리제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입안 가득 비릿한 피 맛이 퍼졌지만, 그녀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상관없어.”
기억 따위, 가문의 파멸을 막고 나를 단두대로 보낸 자들의 목을 치는 데 방해가 될 뿐이다. 감정은 사치였고, 기억은 부채였다. 오직 차가운 계산과 확실한 정보만이 이 사교계라는 잔혹한 전쟁터에서 나를 구원해 줄 유일한 무기였다.
그때, 굳게 닫혀 있던 침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아가씨! 큰일 났습니다!”
들어온 것은 오빠 줄리앙의 처소를 관리하는 충직한 하녀, 마리였다. 그녀는 머리카락이 헝클어진 채로 허겁지겁 안으로 뛰어 들어와 엘리제의 침대 맡에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야윈 어깨가 눈물로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마리? 이 밤중에 무슨 소란이냐.”
엘리제는 흐트러진 실크 가운을 가다듬으며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고통의 여파로 목소리가 다소 잠겨 있었지만, 그 안에는 감히 거역할 수 없는 귀족의 위엄이 서려 있었다.
마리는 눈물 가득한 눈으로 엘리제를 올려다보았다.
“줄리앙 도련님께서…… 도련님께서 아직 수도로 돌아오지 못하셨는데, 바론 메이어의 고용인들이 지금 저택으로 들이닥쳤습니다! 법원의 압류 집행장을 들고 왔다고 합니다!”
“압류 집행장?”
엘리제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기억이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했다. 1년 전의 오늘 밤. 오빠 줄리앙이 급전을 구하기 위해 영지로 내려간 사이, 교활한 사채업자 바론 메이어가 가짜 채무 증서를 내밀며 이 은빛 장미의 전당을 강탈하기 위해 습격했던 바로 그날이었다.
전생의 엘리제는 갑작스러운 채권자들의 난입에 겁을 먹고 비명을 지르며 방안에 숨어 지켜볼 뿐이었다. 그 결과, 가문의 상징과도 같은 사저의 소유권을 허망하게 빼앗겼고, 그것이 로랑 후작가가 사교계에서 완전히 매장당하는 파멸의 시초가 되었다.
“그들이 지금 어디에 있느냐.”
“응, 응접실과 로비의 문을 부수려 하고 있습니다! 경비병들도 메이어의 사병들에게 밀려 손을 쓰지 못하고 있어요. 아가씨, 어서 뒷문으로 피하셔야 합니다. 그 무뢰한들이 아가씨 몸에 손이라도 대면……!”
마리는 제 옷자락을 꽉 쥐며 흐느꼈다.
피하라고?
엘리제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녀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피하는 것은 사냥감들이나 하는 짓이다. 총을 쥔 사냥꾼이 굳이 굶주린 들개 무리를 피해 도망칠 이유는 없었다.
“피하지 않는다.”
“예? 하지만 아가씨, 그들은 인정사정없는 고리대금업자의 수하들입니다! 황실 재정원의 비호를 받고 있어서 치안관들도 눈을 감아주는 자들이에요!”
“그러니 더더욱 내 발로 걸어 나가 그들을 맞이해야겠지.”
엘리제는 거울 앞으로 걸어가 제 모습을 비추어 보았다. 창백하지만 얼음처럼 투명한 피부, 밤하늘을 녹여낸 듯한 칠흑 같은 머리칼, 그리고 그 안에서 번뜩이는 차갑고 이성적인 청자색 눈동자.
그녀는 화장대 위에 놓인 짙은 청색 벨벳 드레스를 집어 들었다. 금사로 촘촘히 수놓아진 깃과 빳빳하게 풀을 먹인 옷깃이 그녀의 목을 단단히 감싸 안았다. 코르셋을 조이는 손길에는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마리. 내 머리를 단정하게 묶어라. 감히 로랑의 이름을 더럽히는 잡배들 앞에 흐트러진 모습으로 나설 수는 없으니.”
“아, 아가씨…….”
마리는 엘리제의 기백에 압도된 듯,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정돈하기 시작했다. 거울 속 엘리제의 눈앞에서, 다시 한번 붉은 숫자들이 어지럽게 명멸했다.
바론 메이어. 그가 오늘 밤 보낸 자들의 우두머리는 그의 충실한 사냥개이자 사채 장부의 조작을 도맡아 하는 삼류 회계사, 홉스일 것이다.
엘리제는 머릿속에 떠오른 홉스의 이름을 응시했다. 그러자 이면 장부의 페이지가 머릿속에서 요란하게 넘어가며, 홉스가 숨겨둔 차명 계좌의 내역과 그가 바론 메이어의 돈을 뒤로 빼돌려 도박 자금으로 탕진한 횡령 수치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홉스(바론 메이어의 대리인)] - 비밀 횡령액: 45,000 골드 (바론 메이어의 사설 금고에서 유출) - 약점: 메이어의 실소유 차명 토지 문서를 위조하여 도박장 ‘붉은 래빗’에 담보로 제공함.
완벽한 무기였다.
엘리제는 길고 단단한 호흡을 내뱉었다. 가슴 속에서 차가운 분노와 함께, 적들의 목줄을 쥘 생각에 기묘한 희열이 피어올랐다.
“준비는 끝났다.”
엘리제는 드레스 자락을 우아하게 움켜쥐며 침실 문을 열었다. 복도의 촛불들이 그녀의 발걸음을 따라 흔들렸다.
은빛 장미의 전당 지하 접견실과 1층 로비로 이어지는 거대한 대리석 계단 아래에서, 이미 소란스러운 고함과 쇠붙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문을 열어라! 로랑 후작가는 이미 파산했다! 이 저택의 모든 집기와 토지는 이제 메이어 남작가의 소유다!”
거칠고 상스러운 목소리가 저택의 높은 천장을 타고 울려 퍼졌다.
콰앙!
쇠지렛대로 저택의 정문 철문을 강제로 부수어 열어젖히는 거친 파열음이 응접실을 가득 채웠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유리가 깨지는 날카로운 상흔이 어둠 속을 찢었다.
들개들이 마침내 집 안으로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엘리제는 계단 난간을 짚은 채, 어둠 속에서 천천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횃불을 들고 난입한 거친 사내들의 중심에, 기름진 얼굴을 한 홉스가 오만한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계단 위, 마치 얼음 조각처럼 서 있는 엘리제에게 닿았다.
게임은 이제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