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X년 10월 15일 01시 12분. 서안구 신성요양원.]
자외선의 보랏빛 광선이 좁은 손바닥 위를 비추었다.
봉투에서 꺼낸 카드는 거칠었다. 표면에 엉겨 붙은 핏자국이 자외선을 받자 검붉은 얼룩으로 변했다. 빛이 닿지 않던 여백에서 서서히 분홍빛 야광 글자가 떠올랐다.
[신성요양원 3층 격리병동 약제실]
글씨는 조잡하게 흔들려 있었다. 주사기 바늘 끝으로 긁어내린 듯한 서체였다.
태오는 자외선 전등을 껐다. 방 안이 다시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입안에서 비린 맛이 맴돌았다. 쇠 비린내였다. 혀 끝을 마비시키는 둔중한 감각이 턱뼈를 타고 올라왔다. 미각은 이미 일주일 전에 완전히 소멸했다. 이제 설탕을 씹어도, 소금을 삼켜도 오직 녹슨 철 파이프를 핥는 것 같은 구리 냄새만 느껴질 뿐이었다.
"출발하지."
태오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옆에 서 있던 진수가 가죽 재킷을 추스르며 권총 손잡이를 확인했다. 그의 손끝이 은도금 라이터의 차가운 금속 표면을 툭툭 건드렸다. 진수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피로가 짙게 깔려 있었다.
"신성요양원은 5년 전에 폐업한 곳이다. 서안구에서도 가장 외진 절벽 끝에 있어. 왜 하필 거긴가?"
"카론의 시작점이니까."
태오가 걸음을 옮겼다.
오른쪽 귀에서 삐이, 하는 고주파 소음이 끊이지 않고 흘러나왔다. 청각 세포가 죽어가고 있었다. 동일시 시뮬레이션을 돌릴 때마다 뇌가 치르는 대가였다. 머릿속의 기억 도서관에서 여동생 채영의 목소리가 담긴 앨범이 통째로 불타 없어지는 기분이었다. 이제 채영이 어떤 목소리로 자신을 불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남은 것은 주머니 속에서 일정한 주기로 진동하는 낡은 회중시계뿐이었다.
* * *
안개는 바다에서부터 밀려와 요양원의 콘크리트 외벽을 삼키고 있었다.
세 사람은 깨진 유리창을 넘어 신성요양원 1층 로비로 진입했다. 연희가 든 손전등 불빛이 먼지 가득한 공기를 찔렀다. 바닥에는 썩은 낙엽과 정체 모를 의료용 폐기물들이 흩어져 있었다.
사방이 고요했다. 바람 소리마저 콘크리트 벽에 가로막혀 들리지 않았다.
"공기가 너무 차가워요."
연희가 옷깃을 여미며 속삭였다. 그녀의 입김이 하얗게 흩어졌다.
구조는 기이할 정도로 정돈되어 있었다. 버려진 지 수년이 지난 폐허였지만, 벽면에 붙은 행정 안내판들은 먼지 한 점 없이 깨끗했다. '정숙', '환자 우선', '정해진 시간 외 면회 금지' 같은 평범한 문구들이 철저하게 정렬된 수납장처럼 늘어서 있었다. 공립 보호소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지만, 그 규칙들의 나열 방식은 인간의 편의가 아닌 가축의 통제를 목적으로 설계된 것처럼 숨을 턱 막히게 했다.
3층 격리병동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이었다.
두꺼운 녹색 페인트가 칠해진 철문이 앞을 가로막았다. 문 옆에는 아크릴로 제작된 게시판이 고정되어 있었다. 그곳에 하얀색 종이 한 장이 코팅된 채 붙어 있었다.
태오가 손전등을 비추었다.
[신성요양원 격리 구역 이용 수칙] [1. 요양원의 모든 감시 장치는 원장의 눈이며, 원장은 태생적으로 맹인이다.]
글씨는 타자기로 정교하게 인쇄되어 있었다.
진수가 눈살을 찌푸렸다.
"맹인인데 감시 장치가 눈이라고? 앞뒤가 안 맞잖아. 장난치는 건가?"
"장난이 아닙니다."
태오가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냈다. 왼손가락 끝이 허옇게 변색되어 감각이 둔했다. 오른손으로 펜을 쥐고 문장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받아 적었다.
[모든 감시 장치는 원장의 눈. 원장은 맹인.]
"모순되는 문장 자체가 규칙입니다. 카론은 논리를 비틀어 상대를 제약하는 것을 즐깁니다. 이 문장 안에 이 구역을 통과할 열쇠가 있습니다."
태오의 어조는 기계처럼 건조했다.
그는 수첩을 넣고 철문을 밀었다. 삐이익 하는 날카로운 마찰음이 복도 깊은 곳으로 퍼져나갔다.
3층 복도는 1층보다 훨씬 좁았다. 양옆으로 쇠창살이 달린 격리실 문들이 촘촘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바닥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황색 실선이 그어져 있었다. 실선 너머에는 붉은색 글씨로 '접근 금지'라는 문구가 반복적으로 적혀 있었다. 행정적인 규격에 집착하는 살인마의 광기가 공간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다.
"태오 씨, 이것 좀 보세요."
연희가 깨진 유리 테이블 위에 흩어진 서류 더미를 가리켰다.
환자 기록 차트였다. 연희가 장갑을 낀 손으로 누렇게 바랜 종이를 넘겼다. 먼지가 피어올랐다.
"이건... 실종된 간호사들의 명단이에요. 20년 전 서안구 연쇄살인 사건 당시에 사라졌던 사람들인데..."
연희의 손가락이 특정 페이지에서 멈췄다.
차트의 환자 소견서란에는 환자의 상태가 아닌, 간호사들의 신체적 특징과 정신적 취약점이 세밀하게 분석되어 있었다.
[피해자 A: 높은 수준의 공감 능력 보유.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인지함. 자아 해체 후 '동정심'의 조각으로 사용 가능.] [피해자 B: 극단적인 도덕적 결벽증. 규칙 위반에 대한 강한 거부감. '규율'의 톱니바퀴로 가공 완료.]
소견서 밑에는 붉은색 도장으로 '폐기'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연희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그녀의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환자를 치료하는 곳이 아니었어요. 이건... 사람의 인격을 해체해서 자기 입맛대로 조각 맞추기를 한 기록이에요. 이 간호사들은 살해당한 게 아니라, 범인의 자아를 완성하기 위한 부품으로 쓰인 거예요."
"카론의 방식이다."
태오가 차트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완벽한 인간을 원치 않는다. 오직 자신의 통제 시스템 안에서 완벽하게 작동하는 부품만을 원할 뿐이다."
"그게 사람 목숨을 가지고 할 짓이야?"
진수가 이빨을 갈았다. 그의 거친 숨소리가 좁은 복도에 울렸다.
그때였다.
위이이잉ㅡ!
복도 끝 천장에 매달린 스피커에서 찢어지는 듯한 기계음이 터져 나왔다. 단순한 경보음이 아니었다. 물을 끓이는 듯한 고주파 음과 쇠사슬이 긁히는 소리가 뒤섞인 기괴한 정수 제어 벨소리였다.
동시에 복도 양끝에 있는 철문들이 일제히 지직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함정이다!"
진수가 권총을 겨누며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우리가 들어온 철문은 물론, 복도 곳곳에 설치된 차단벽들이 거친 소리를 내며 내려앉기 시작했다.
태오는 직감했다.
이 소음은 단순히 경보가 아니다. 복도 벽면에 설치된 미세한 음향 센서들이 가동되는 소리였다. 조금이라도 규격에 맞지 않는 파형이 발생하면 천장에 장치된 고압 가스 밸브가 열리거나 사슬이 풀릴 것이다.
오른쪽 귀의 이명이 극에 달했다. 머리가 쪼개질 듯 아파왔다. 청각이 완전히 차단되기 직전이었다.
태오는 주머니에서 금이 간 태엽식 회중시계를 꺼냈다.
여동생 채영의 유품.
시계의 유리는 사방으로 금이 가 있었지만, 내부의 톱니바퀴는 여전히 정교하게 맞물려 돌아가고 있었다. 태오는 시계를 귀에 가져다 대지 않았다. 이제 귀로는 들을 수 없었다. 대신 시계의 차가운 금속 몸체를 오른쪽 뺨과 턱뼈에 밀착시켰다.
진동이 뼈를 타고 직접 뇌로 전달되었다.
착, 착, 착, 착.
일정한 기계적 톱니 마찰음.
이 시계는 1초에 정확히 5번의 마찰음을 낸다. 1사이클은 4.2초.
태오는 눈을 감았다. 동일시 시뮬레이션을 가동하지 않은 채, 오직 시계의 물리적 주기에만 집중했다.
현재 복도를 채우고 있는 정수 제어 벨소리의 주파수 변화를 피부의 털끝으로 감지했다. 벨소리는 일정한 음역대로 뛰는 것이 아니었다. 3.6초의 간격을 두고 미세하게 꺾이는 고음역대의 균열이 있었다. 그 균열의 순간에는 센서의 감지 능력이 일시적으로 마비된다.
"내 발소리에 맞춰라."
태오가 속삭였다.
"발소리?"
진수가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설명할 시간 없다. 내 발걸음 템포를 정확히 따라와라. 시계의 진동이 멈추는 순간에만 발을 딛는다."
태오는 오른발을 내딛었다.
착.
시계의 톱니가 맞물리는 순간, 벨소리의 고음역대가 꺾였다. 태오의 구두굽이 녹색 바닥 타일을 건드렸다. 소리는 발생했지만, 센서는 이를 인지하지 못했다.
진수와 연희는 침을 삼키며 태오의 뒤꿈치를 주시했다.
태오가 다시 왼발을 움직였다.
착.
두 사람도 동시에 발을 내딛었다. 세 사람의 발소리가 단 하나의 궤적으로 겹쳐졌다. 기하학적인 기계식 수칙의 틈새를 육체의 감각으로 해킹하는 과정이었다.
복도는 길었다. 불과 20미터를 전진하는 데 수분이 소요되었다.
태오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려 뺨을 타고 턱 끝으로 떨어졌다. 손가락 끝은 이제 완전히 허얘져서 시계를 쥐는 힘조차 들어가지 않았다. 오직 이빨을 악물고 뼈로 전해지는 진동만을 버팀목 삼아 나아갔다.
마침내 세 사람은 복도 중앙의 삼거리에 도달했다.
바닥의 황색 실선이 세 갈래로 갈라지는 지점이었다.
그 순간, 머리 위 천장에서 거대한 금속음이 울렸다.
쿠구구구구둥!
정수 제어 벨소리가 멈춤과 동시에, 천장에 매달려 있던 두꺼운 유압식 차단 셔터 세 개가 엄청난 속도로 낙하했다.
"피해!"
진수가 연희의 어깨를 밀쳤다.
쾅! 쾅! 쾅!
먼지 폭풍이 삼거리를 덮쳤다.
두꺼운 철제 셔터가 바닥에 부딪히며 불꽃을 튀겼다. 엄청난 충격음에 귀가 먹먹해졌다.
태오는 뒤로 물러섰다.
사방이 차단되었다.
좌측 통로에는 진수가, 우측 통로에는 연희가, 그리고 중앙 통로에는 태오 홀로 서 있었다.
두께 10센티미터가 넘는 강철 셔터가 세 사람의 공간을 완벽하게 분할해 버렸다. 틈새 하나 보이지 않는 철저한 격리였다.
"차 형사님! 연희 씨!"
태오가 철문을 두드려 보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둔탁한 진동뿐이었다.
그때, 태오가 서 있는 중앙 통로 끝, 약제실의 문이 끼이익 하며 천천히 열렸다.
어둠 속에서 붉은색 비상등 하나가 깜빡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태오의 발밑으로, 새로운 쪽지 한 장이 스르륵 밀려 들어왔다.
태오는 허리를 숙였다.
바닥의 종이를 집어 올렸다. 손가락에 감각이 없었다. 종이는 얇고 축축했다. 붉은 잉크가 조잡하게 번져 있었다.
[보완 수칙 제3조] [맹인은 소리를 보지 못한다. 침묵하는 자만이 문을 통과한다. 소리 내는 부품은 즉시 폐기한다.]
머리 위 스피커가 지직거렸다. 날카로운 하울링이 고막을 찔렀다. 노이즈 너머로 웃음소리가 섞여 나왔다. 비열하고 가벼운 음성이었다. 강윤성이었다.
- 태오야. 내 목소리 들리지?
목소리가 좁은 복도를 흔들었다. 그 안에는 들끓는 시기심이 묻어나고 있었다.
- 스승님은 늘 너만 바라보셨지. - 하지만 넌 고장 난 인형일 뿐이야. - 진짜 후계자가 누구인지 증명해 줄게.
철문 너머에서 쾅쾅거리는 타격음이 들렸다. 진수가 주먹으로 셔터를 치는 소리였다. 진수의 쉰 목소리가 미세하게 흘러나왔다.
"한태오! 연희 데리고 뒤로 빠져!"
그 외침은 오래가지 못했다. 진수가 갇힌 좌측 구역의 천장에서 백색 가스가 뿜어 나오기 시작했다. 쉬이이익ㅡ. 가스는 빠르게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독성 질소 가스였다. 흡입 시 의식을 잃는 데 걸리는 시간은 2분 내외였다.
태오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뇌의 전두엽이 타들어 가는 느낌이 들었다. 시뮬레이션을 작동시켜야 했다. 그는 눈을 감고 이성의 끈을 놓았다.
머릿속의 방들이 하나씩 무너졌다. 동생 채영의 마지막 미소가 재가 되어 흩어졌다. 가장 소중한 기억이 지워진 자리에 살인마의 왜곡된 흥분이 들어찼다. 차가운 광기가 온몸의 혈관을 타고 돌았다.
태오의 코에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피는 바닥의 황색 선을 적셨다.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직 비린 철 냄새만이 뇌를 자극했다.
'강윤성. 그는 카론을 흉내 낸다.' '완벽을 모방하려는 열등감.' '그의 덫에는 반드시 틈새가 존재한다.'
태오는 천장의 카메라를 응시했다. 렌즈가 붉은빛을 내며 그를 쫓았다. 원장은 맹인이다. 그렇다면 저 카메라는 시각을 보지 않는다. 다른 것을 기록하고 있다.
진수의 구역에서 콜록거리는 기침 소리가 커졌다. 산소 농도가 급격히 떨어지고 있었다. 태오는 수첩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왼손톱 끝이 허옇게 으스러지며 핏방울이 맺혔다.
그는 약제실 문고리를 잡고 돌렸다. 문은 힘없이 열렸다.
방 안은 어두웠다. 가운데에는 기계식 저울이 놓여 있었다. 저울의 양쪽 접시 위에는 두 개의 유압 밸브가 연결되어 있었다. 왼쪽은 진수의 가스 방출 밸브. 오른쪽은 연희의 격리실 산소 차단 밸브.
한쪽의 무게를 줄이면, 다른 쪽의 무게가 늘어나는 구조였다. 하나를 살리려면 하나를 죽여야 하는 잔혹한 천칭이었다.
태오의 손이 저울 위에서 멈췄다. 그의 붉게 충혈된 눈에서 한 줄기 핏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