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X년 10월 15일 00시 05분. 서안구 폐정수장 산화제 창고 지하 격실.]
멈췄던 액정이 요동쳤다. [00:03]에서 정지했던 녹색 숫자가 붉은색으로 반전했다. 숫자가 역행하기 시작했다. 단순한 카운트다운이 아니었다. 폭발하듯 전력을 빨아들이며 속도를 올렸다. 99, 98, 97. 소수점 아래의 숫자가 육안으로 식별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회전했다. 지이이잉. 고압 변압기가 터지기 직전의 금속성 소음이 격실을 채웠다.
"태오야! 이거 왜 이래!"
차진수의 목소리가 찢어졌다. 바닥에 주저앉았던 그가 급히 몸을 일으켰다. 황산 밸브에서 뿜어져 나온 붉은 액체가 전선을 타고 흘렀다. 치익, 소리와 함께 매캐한 흰 연기가 피어올랐다. 피복이 녹아내리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동시에 천장의 고정 도르래가 강하게 덜컹거렸다. 쇠사슬을 붙잡고 있던 기어가 한 칸 뒤로 밀려났다.
"으, 으아악!"
거꾸로 매달린 신명수가 비명을 질렀다. 그의 머리가 아래쪽으로 10센티미터 가량 뚝 떨어졌다. 바로 밑에는 녹이 슬어 뾰족하게 솟아오른 철근더미가 있었다. 조금만 더 내려가면 정수리가 꿰뚫릴 거리였다.
태오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날뛰는 타이머 화면을 지나 기계 내부의 구리판으로 향했다. 오른쪽 귀에서 이명이 일었다. 삐이이— 하는 고주파음이 뇌막을 찔렀다. 시뮬레이션의 부작용이었다. 청각이 멀어지고 있었다. 손끝은 이미 피가 통하지 않는 것처럼 하얗게 변색되어 있었다. 감각이 무뎌진 손가락으로 주머니를 뒤적였다. 손가락이 굳은 나무토막처럼 삐걱거렸다. 가까스로 손끝에 닿는 차가운 금속의 감촉. 금이 간 태엽식 회중시계였다. 여동생 채영의 유품.
'카론은 규칙의 완벽성에 집착한다.'
태오가 생각했다. 기계식 트랩의 회로는 대칭을 이룬다. 과부하가 걸린 릴레이 스위치는 외부의 아주 작은 진동에도 반응하게 설계되어 있다. 이것은 기계의 약점이자, 카론이 남겨둔 마지막 틈새였다. 태오는 회중시계를 꺼냈다. 유리 덮개에 가로지른 깊은 균열이 격실의 붉은 경고등을 반사했다.
째깍, 째깍, 째깍.
시계 내부의 낡은 기어가 맞물리는 소리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일정한 기계적 톱니 마찰음. 주파수는 4Hz. 태오는 한 걸음 내딛었다. 발소리는 나지 않았다. 그는 황산이 뚝뚝 떨어지는 아크릴 상자 옆면으로 다가갔다. 상자 우측에는 외부 소음을 감지하여 내부 압력을 조절하는 원형 진동판이 붙어 있었다. 황산 방출로 인해 격실 내부의 기압이 변하고 있었다. 진동판이 미세하게 떨리며 타이머의 역행 속도를 가속하는 중이었다.
"뭐 하는 거야! 비켜! 당겨야 해!"
진수가 쇠사슬을 손으로 붙잡으며 소리쳤다. 그의 손바닥이 사슬과의 마찰로 찢어져 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진수의 구두 굽이 시멘트 바닥을 긁으며 찢어지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도르래의 역회전 장력은 인간의 힘으로 버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사슬은 진수의 손을 갉아먹으며 조금씩 아래로 미끄러졌다.
태오는 진수의 외침을 차단했다. 오른쪽 귀의 이명이 점점 커져 진수의 목소리가 수중에서 들리는 것처럼 먹먹했다. 그는 오직 손끝의 진동에 집중했다. 시계를 원형 진동판 중앙에 가져다 댔다. 차가운 금속과 차가운 플라스틱이 맞닿았다.
딱.
시계 케이스의 미세한 돌기가 진동판의 홈에 정확히 맞물렸다. 태오는 시계를 시계 방향으로 15도 돌렸다. 금이 간 유리 덮개가 진동판의 미세한 떨림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시계 내부의 밸런스 휠이 내는 일정한 마찰음이 진동판을 통해 기계 내부로 흘러들어갔다.
째깍. 웅. 째깍. 웅.
두 개의 서로 다른 주파수가 충돌했다. 격실을 채우던 고주파 소음의 파형이 변하기 시작했다. 날뛰던 소음이 억눌리는 느낌이었다. 회중시계 속 특유의 주기적 마찰 주파수가 외부 격실 소음의 압력을 잡아챘다. 기적적으로 내부 릴레이 스위치가 '침묵 상태'로 수렴해 갔다. 서로를 밀어내던 기계적 대칭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지이이잉 하는 소리가 잦아들었다. 붉은색 액정의 역행 속도가 둔화되었다. [82]... [81]... [80]... 그리고 멈췄다. 정확히 [80]에서 숫자가 고정되었다. 도르래를 역회전시키던 모터의 구동음이 뚝 끊겼다. 사슬이 팽팽하게 굳었다.
"막았어..."
진수가 거친 숨을 내쉬며 손을 놓았다. 그의 손바닥에서 흘러내린 피가 바닥의 물웅덩이를 붉게 물들였다. 진수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태오를 바라보았다. 금이 간 낡은 시계 하나가 기계의 미쳐 날뛰던 회로를 잠재웠다. 가장 하찮고 망가진 줄 알았던 유품이, 이 정밀한 살인 기계의 대칭을 깨부수는 단 하나의 주파수 도구로 기능한 것이다.
태오는 시계를 진동판에서 떼어냈다. 손가락의 백색 변조가 더 짙어져 있었다. 손끝을 타고 올라오는 오한이 팔꿈치까지 다다랐다. 머릿속 한구석이 텅 비어버린 느낌이 들었다. 여동생의 얼굴이 희미하게 흐려졌다. 기억의 파편이 통째로 뜯겨 나간 감각이었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비린 맛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미각은 이미 완전히 죽어 있었다.
"멍하니 있지 마라, 차 형사."
태오의 목소리는 낮고 평평했다. 감정이 완전히 배제된, 수사 보고서의 활자 같은 어조였다.
"청색 선이다. 지금 잘라라."
진수가 정신을 차리고 수사 도구 가방에서 절단기를 집어 들었다. 그의 손이 잘게 떨렸다. 황산이 구리선을 완전히 녹이기 전에 끝내야 했다. 진수가 절단기 날을 아크릴 상자 틈새로 밀어 넣었다. 청색 피복이 두꺼운 전선이 날 사이에 물렸다.
"자른다."
진수가 이를 악물고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쩍. 단단한 전선이 끊어지는 금속음이 지하실에 울렸다. 동시에 천장의 고정 장치가 완전히 풀려났다.
턱!
사슬이 풀림과 동시에 신명수의 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진수가 몸을 날렸다. 그의 두 팔이 신명수의 상체를 받아안았다. 두 사람의 몸이 시멘트 바닥 위를 뒹굴었다. 날카로운 철근 끝부분에서 불과 수 센티미터 비껴간 위치였다.
"허억... 허억..."
신명수가 바닥을 짚으며 거칠게 기침을 토해냈다. 안구에 가득 찼던 실핏줄이 터져 눈시울이 붉게 젖어 있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가슴을 감싸 쥐었다. 폭탄이 부착되었던 가죽 벨트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살았다는 안도감이 격실 안의 무거운 공기를 관통했다.
진수가 바닥에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방울이 눈을 찔렀지만, 그는 닦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해냈어... 우리가 해냈다고."
진수의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 있었다. 그는 태오를 올려다보았다. 태오는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바닥에 떨어진 신명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에는 아무런 동요도, 기쁨도 없었다. 그저 관찰자의 눈이었다.
태오는 신명수에게 다가갔다. 그의 상의는 흙먼지와 황산 연기로 얼룩져 있었다. 태오의 시선이 신명수의 상의 안주머니로 향했다. 주머니 입구 틈새로 흰색 종이 모서리가 삐져나와 있었다. 일반적인 소지품의 재질이 아니었다. 빳빳하고 두꺼운 최고급 수입지. 카론이 사용하는 특유의 문서 재질이었다.
태오가 허리를 숙여 그것을 뽑아냈다. 신명수가 움츠러들며 뒤로 물러섰지만, 태오는 개의치 않았다. 종이를 펼쳤다. 붉은색 잉크로 인쇄된 정교한 활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징벌적 초대장]
상단에 적힌 제목이었다. 그 아래로는 정갈한 필체로 적힌 지침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수칙 제1조. 귀하는 자격을 증명하셨습니다. 수칙 제2조. 다음 무대는 준비되어 있습니다. 수칙 제3조. 신성요양원 3층 격리병동. 수칙 제4조. 요양원의 모든 감시 장치는 원장의 눈이며, 원장은 태생적으로 맹인이다.]
태오는 문장들을 눈에 새겼다. 마지막 문장은 기이한 모순을 담고 있었다. 감시 장치가 눈인데, 그 소유자는 맹인이라니. 이것은 카론이 던진 새로운 수수께끼이자 덫이었다.
"이게 뭐지?"
진수가 몸을 일으키며 태오의 손에 든 종이를 바라보았다. 그의 미간이 다시 좁아졌다.
"신성요양원...? 거긴 폐업한 지 오래된 곳이잖아."
"카론의 다음 설계지다."
태오가 종이를 접어 자신의 코트 안주머니에 넣었다. 그의 목소리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는 이미 다음 시뮬레이션을 준비하고 있었다. 머릿속의 방들이 빠르게 재구조화되는 느낌이었다. 지워진 기억의 빈자리로 카론의 규칙들이 채워져 들어갔다. 스스로 괴물이 되어가는 과정이었다.
지하 격실 입구 쪽에서 요란한 발소리가 들렸다. 손전등 불빛들이 어두운 통로를 사방으로 갈랐다. 태스크포스 비틀의 지원팀과 영안실 수색대원들이 들이닥쳤다.
"이쪽이다! 부상자 발생! 구급대원 불러!"
진수가 입구를 향해 소리치며 손을 흔들었다. 대원들이 신명수를 부축하여 들것에 실었다. 격실 안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무전기에서 나오는 노이즈와 대원들의 외침이 얽혔다.
태오는 소란 속을 빠져나와 계단으로 향했다. 오른쪽 귀의 먹먹함이 조금씩 가라앉았지만, 완벽히 회복되지는 않았다. 그는 계단 난간을 잡았다. 하얗게 변한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계단을 오를 때마다 발끝에서부터 무거운 피로감이 차올랐다.
'여동생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태오는 멈춰 섰다. 머릿속을 뒤져보았지만, 채영의 이목구비는 안개 속으로 사라진 것처럼 흐릿했다. 오직 슬픈 눈망울의 잔상만이 무의식의 벽면에 간신히 매달려 있을 뿐이었다. 대가는 확실했고, 잔혹했다. 그는 진실에 다가갈수록 자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터널 밖으로 나오자 차가운 새벽 공기가 폐부를 찔렀다. 서안구의 하늘은 여전히 짙은 황색 안개에 덮여 있었다.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다.
태오는 코트 주머니 속의 초대장을 만지작거렸다. 손가락 끝에 닿는 종이의 질감이 기묘하게 서늘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이 게임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라는 것을. 카론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의 완벽한 피조물이 완성되기를 바라면서.
그때, 저만치서 영안실 지원팀의 무전기 가방을 멘 대원이 다가왔다. 그는 태오에게 무전기를 건넸다.
"한 프로파일러님, 본부에서 연락입니다. 현장 감식 결과가 나왔다고 합니다."
태오는 무전기를 받아 귀에 대었다. 수신 상태가 좋지 않은지 지지직거리는 잡음이 심했다.
- ...태오야. 들리나?
서연희 분석관의 목소리였다. 그녀의 목소리 너머로 다급한 자판 소리가 섞여 들렸다.
- 방금 신성요양원 관련 데이터를 분석했는데, 이상한 점을 발견했어. 그 요양원 원장 말이야... 20년 전 서안구 사건 당시에...
그때였다. 연희의 목소리가 갑작스러운 주파수 간섭으로 뭉개졌다. 치이이익— 하는 날카로운 파열음이 무전기를 찢었다. 태오는 반사적으로 무전기를 귀에서 조금 떼어냈다.
지지직... 지직...
소음의 틈새로 미세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것은 연희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무전기 주파수의 좁은 테두리 안에서, 아주 나직하고 음울한 음이 울렸다.
휘이이— 휘이—
누군가 낮게 부는 휘파람 소리였다. 차갑고, 기계적이며, 소름 끼치도록 일정한 박자. 마치 태오의 귓가에 직접 숨결을 불어넣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선명했다. 태오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커졌다. 그 휘파람 소리는 20년 전, 여동생의 마지막 비명 직전에 들었던 바로 그 멜로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