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202X년 10월 14일 23:52 | 서울 서안구 특별수사본부 임시 지휘소]

태오가 비틀거렸다. 등받이 없는 벤치에 주저앉았다. 폐부 깊숙이 차가운 공기를 들이쉬었다. 목구멍이 찢어질 듯 아팠다. 양쪽 눈의 흰자위가 붉게 물들었다. 실핏줄이 동시에 터져 나간 결과였다. 시야가 온통 핏빛으로 출렁였다. 태오는 자리에 굳은 채 움직이지 못했다. 동일시 시뮬레이션의 대가였다. 뇌세포가 타들어 가는 감각이 척수를 타고 내렸다. 손끝이 딱딱하게 굳어 들어갔다. 감각의 소멸이 시작되고 있었다.

"한 프로파일러님." 연희가 종이컵을 내밀었다. 컵 위로 뜨거운 김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검고 진한 에스프레소였다. 태오는 말없이 컵을 받아 쥐었다. 손바닥에 닿는 온도가 뜨거웠다. 살가죽이 델 정도의 열기였다. 그는 망설임 없이 액체를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뜨거운 액체가 혀를 적셨다. 식도를 타고 위장으로 흘러내렸다. 온도만 느껴질 뿐이었다. 맛은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차갑고 묵직한 구리 맛만 맴돌았다. 녹슨 철가루를 씹는 기분이었다. 태오는 혀끝을 이빨로 강하게 짓눌렀다. 비릿한 액체가 배어 나왔다. 그것 역시 똑같은 철의 맛이었다. 완벽한 미각 영구 상실이었다. 태오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그는 빈 종이컵을 구겼다. 감정은 솟구치지 않았다. 그저 하나의 사실로 기록될 뿐이었다.

치이이익-. 탁자 위의 무전기가 비명을 질렀다. 잡음 사이로 찢어지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 본부! 여기는 서안 정수장 뒤편 산화제 창고다! 지원 나간 대원의 다급한 호흡이 섞여 들었다. - 지하 격실에서 인질을 발견했다! 반복한다! 인질 발견! 진수가 무전기를 낚아챘다. "신원 확인은!" - 신명수 경사다! 상태가 좋지 않다! 기계 장치가 부착되어 있다! 진수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는 태오를 돌아보았다. 태오는 이미 자리에서 일어난 뒤였다. 그의 주머니 속에서 작은 소리가 울렸다. 금이 간 태엽식 회중시계였다. 째깍, 째깍, 째깍. 일정한 기계적 마찰음이었다. 태오는 시계를 꺼내지 않고 주머니 위로 움켜쥐었다. 손가락 끝으로 미세한 진동이 전해졌다. "가자." 태오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202X년 10월 15일 00:05 | 서안 정수장 뒤편 산화제 창고 지하 격실]

습한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콘크리트 벽면에는 이끼가 가득했다. 천장에서 차가운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공간 중앙에 쇠사슬이 내려와 있었다. 그 끝에 한 사내가 매달려 있었다. 신명수 경사였다. 그는 거꾸로 매달린 상태였다. 머리로 피가 쏠려 얼굴이 검붉게 부풀어 올랐다. 눈동자는 초점을 잃고 흐려져 있었다. 그의 가슴팍에 기폭 장치가 얹혀 있었다. 투명한 아크릴 상자 안의 복잡한 회로였다. 청색과 적색 전선이 엉켜 있었다. 그 중심에서 디지털 타이머가 빛났다. 붉은 숫자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12:14] 시간은 1초씩 깎여 나가고 있었다. 신명수의 거친 호흡에 따라 장치가 흔들렸다.

"명수야!" 진수가 앞으로 뛰어나갔다. 태오가 그의 덜미를 강하게 잡아챘다. "서라." "놔! 당장 내려야 돼! 피가 쏠려서 숨도 못 쉬고 있잖아!" 진수가 몸을 틀어 태오의 손을 뿌리치려 했다. 태오는 아귀에 힘을 주었다. 그의 시선은 신명수의 목덜미를 향해 있었다. 거기에 노란색 아크릴판이 붙어 있었다. 검은색 글씨가 정교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카론의 필체였다.

[행동 지침서 제5조] [시계가 종을 치는 일시적 침묵 상태가 올 때까지 절대 청색 선을 자르지 말라.]

기괴한 수칙이었다. 진수가 이빨을 갈았다. 그의 손이 허리춤의 다용도 가위로 향했다. "개소리 집어치워! 그냥 이 청색 선만 자르면 끝나는 거야! 폭탄 해체 조작은 다 똑같아!" 진수가 가위를 쥐고 전선으로 손을 뻗었다. 날카로운 금속 날이 청색 피복에 닿았다. "자르면 터진다." 태오가 차갑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미동도 없었다. "뭐?" "시간 측정 장치를 봐라." 태오가 아크릴 상자 측면을 가리켰다. 거기에 작은 마이크 형태의 센서가 돌출되어 있었다. 그 센서는 신명수의 가슴팍이 아닌, 외부를 향하고 있었다. "청각식 주파수 공명기다." 태오의 손가락 끝이 전선의 궤적을 쫓았다. "이 장치는 단순한 타이머가 아니다. 내부 동기화 장치와 외부 소음의 대칭 구조를 이루고 있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쉽게 말해!" 진수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너는 감정에 눈이 멀어 회로를 보지 못한다." 태오가 진수의 가위를 쥔 손목을 꺾었다. 강한 압박에 진수가 신음하며 가위를 떨어뜨렸다. 철그렁. 가위가 콘크리트 바닥을 굴렀다. "적색 선과 청색 선은 병렬 회로다." 태오가 주머니에서 손을 꺼냈다. 그의 손바닥 위에 금이 간 회중시계가 놓여 있었다. 째깍, 째깍, 째깍. 일정한 톱니 소리가 지하 격실에 울렸다. "이 기계식 톱니 소리는 1초에 정확히 다섯 번 마찰한다. 이 폭탄의 공명기는 이 주파수를 기준점으로 삼고 있다." 태오의 눈동자가 기하학적으로 빛났다. 동일시 시뮬레이션이 그의 뇌리 속에서 강제로 구동되었다. 범인의 시선이 겹쳐졌다. 카론은 미소를 지으며 이 회로를 납땜질하고 있었다. 그는 완벽한 대칭을 원했다. 소리가 나는 동안에는 전류가 흐른다. 소리가 멈추는 극히 짧은 순간, 즉 침묵 상태에서만 전류의 흐름이 차단된다. "이 시계가 매 정각 종을 칠 때, 내부 태엽은 0.8초 동안 완벽한 정지에 들어간다." 태오의 목소리가 얼음처럼 갈라졌다. "그 짧은 무음 상태. 주파수가 영점이 되는 순간에만 청색 선의 전압이 제로가 된다." 진수가 침을 삼켰다. "그럼 지금 자르면 어떻게 되는데?" "지금 청색 선에 가위를 대는 순간, 미세한 잔류 전압이 회로를 역류한다. 그 즉시 기폭 장치의 마이크로컨트롤러가 작동해 뇌관을 때린다. 0.1초 만에 신명수의 상체는 날아간다." 태오의 분석은 빈틈이 없었다. 회로의 전류 흐름도가 그의 머릿속에서 완벽한 입체도형으로 그려져 있었다. 진수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그는 자신의 무지가 불러올 뻔한 참극을 깨달았다. 태오의 차갑고 정교한 논리가 진수의 감정적 폭주를 완벽하게 제압한 순간이었다.

신명수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며 비명이 새어 나왔다. "으... 으윽..." 거꾸로 매달린 그의 코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바닥의 흙 위로 피 한 방울이 툭 떨어졌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었다. [08:32] [08:31] 붉은 숫자가 무자비하게 깎여 나갔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해?" 진수가 신음하듯 물었다. 그의 거친 숨결이 지하실의 냉기를 녹이지 못했다. "기다린다." 태오가 회중시계를 응시했다. "정각까지 앞으로 8분 남았다." "저 녀석은 8분을 못 버텨! 뇌출혈로 먼저 죽는다고!" 진수가 신명수의 붉게 충혈된 얼굴을 가리켰다. 신명수의 호흡은 이미 얕아져 있었다. 목뼈가 기괴한 각도로 꺾여 가고 있었다. "그건 내 알 바 아니다." 태오가 차갑게 대꾸했다. "뭐라고?" "수칙을 깨는 자는 죽는다. 그것이 카론의 규칙이다." "이 나쁜 새끼가...!" 진수가 태오의 멱살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 그때였다.

삐이이이이이-. 아크릴 상자 안에서 고주파 음이 발생했다. 디지털 표시창의 숫자가 급격하게 흔들렸다. 숫자가 흐려지더니, 기괴한 속도로 역행하기 시작했다. [08:15] [09:42] [12:00] [18:55] 숫자가 무작위로 치솟았다가 떨어졌다. 동시에 기폭 장치 내부의 소형 모터가 윙윙거리며 돌기 시작했다. 규칙 제어 시스템에 심각한 오류가 발생한 것이었다. 장치가 스스로 전력을 강하게 끌어당기며 역폭주를 일으키고 있었다. 지하 격실의 공기가 급격히 팽창하는 기분이 들었다. 시간의 규칙이 파괴되고 있었다.

태오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이것은 카론의 설계에 없던 변수였다. 아니, 혹은 이것마저도 설계의 일부인가. 폭탄의 진동이 신명수의 가슴을 흔들었다. 째깍거리는 시계 소리 위로, 죽음의 모터음이 덮쳐왔다.

기판이 뜨거워졌다. 납땜이 녹는 냄새가 났다. 역류한 전류가 전선을 태웠다. 매캐한 회색 연기가 피어올랐다. "뜨거워...! 가슴이 타들어 가!" 신명수가 거칠게 몸을 비틀었다. 쇠사슬이 요란하게 흔들렸다. 진동이 센서로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모터의 회전음이 더 빨라졌다. "비켜! 명수부터 내릴 거야!" 진수가 도르래로 달려갔다. "멈춰." 태오가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평평했다. "도르래를 만지는 순간 끝난다." "뭐?" "도르래 축에 압력 감지기가 있다." 태오가 벽면의 전선을 가리켰다. 그것은 도르래와 폭탄을 연결했다. 무게 변화를 감지하는 선이었다. "줄을 늦추면 장치가 터진다." "그럼 그냥 두고 보라는 거냐!" 진수의 뺨을 타고 땀이 흘렀다. 바닥에 떨어지는 땀방울이 붉었다. 태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눈을 감았다. 동일시 시뮬레이션을 가동했다.

머릿속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뇌수가 끓는 감각이었다. 시야 너머로 가상의 공간이 열렸다. 어둡고 축축한 지하실이었다. 카론의 모방범이 서 있었다. 그는 기판을 보며 웃고 있었다. '침묵은 금이다.' 범인의 나직한 독백이 들렸다. '하지만 소음을 내는 자에겐 징벌을.' 태오는 범인의 손끝을 보았다. 그는 일부러 오작동 회로를 심었다. 소음이 일정 데시벨을 넘을 때. 혹은 압력이 변할 때. 폭탄은 강제로 과부하 상태가 된다. 전류를 역류시켜 열폭발을 유도한다. 해결책은 단 하나뿐이었다. 역류하는 전류를 다른 곳으로 돌린다. 그것이 범인이 숨겨둔 진짜 규칙이었다.

태오가 눈을 떴다. 그의 왼쪽 콧구멍에서 피가 흘렀다. 검붉은 피가 입술을 적셨다. 미각은 없었다. 오직 쇠 맛의 잔상만 남았다. 귓가에서 이명이 소용돌이쳤다. 삐이이이-. 기폭 장치의 고주파음이 아니었다. 그의 청각이 마비되는 신호였다. 시뮬레이션의 부작용이었다. 태오는 오른쪽 주머니를 뒤적였다. 금이 간 태엽식 회중시계를 꺼냈다. 시계의 초침이 불규칙하게 흔들렸다.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이명이 톱니 소리를 삼켰다. 태오는 시계를 오른쪽 턱뼈에 밀착했다. 뼈를 타고 진동이 뇌로 전달되었다. 딱, 딱, 딱, 딱. 골전도로 느껴지는 기계적 주기였다. 그는 회로의 역류 주기를 계산했다. 과부하 전류가 흐르는 주기는 1.2초. 시계의 무음 정지 주기는 0.8초. 두 주기가 겹치는 순간이 존재한다. 정확히 2.4초마다 한 번씩 온다. 그 찰나의 순간에 전선을 끊어야 한다.

"진수야." 태오가 지시했다. "가위를 집어 들어라." 진수가 바닥의 가위를 주웠다. 그의 손끝이 심하게 떨렸다. "어디를 잘라야 돼? 청색 선이냐?" "아니." 태오가 손가락을 뻗었다. "청색 선 옆의 동선이다." 그것은 피복이 없는 구리선이었다. 전류를 접지시키는 통로였다. "내가 신호를 주면 잘라라." "시간이 없어! 빨리 해!" 진수가 가위 날을 구리선에 댔다. 타이머의 숫자가 미친 듯이 날뛰었다. [01:02] [00:45] [00:12] 폭발이 코앞이었다. 아크릴 상자 표면이 녹아내렸다. 신명수가 거칠게 비명을 질렀다. 태오는 시계의 진동에 집중했다. 턱뼈를 울리는 미세한 박동. 하나. 둘. 셋. 진동이 멈추는 0.8초의 구획. 전류의 흐름이 영점이 되는 순간. "지금이다." 태오가 뱉었다. 서각-. 진수가 이빨을 악물고 가위를 맞물렸다. 구리선이 깔끔하게 잘려 나갔다.

찌지직! 스파크가 튀었다. 타이머의 숫자가 멈췄다. [00:03] 지하실을 채우던 모터음이 가라앉았다. 신명수의 거친 숨소리만 남았다. 진수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살았다..." 그가 가위를 떨어뜨렸다. 그의 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태오는 회중시계를 주머니에 넣었다. 손끝의 감각이 거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끝 부분이 하얗게 변색되어 있었다. 뇌의 손상이 손끝까지 미치고 있었다.

"이봐, 한 프로파일러." 진수가 신명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이제 이 쇠사슬만 풀면 되는 거지?" 태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멈춘 타이머 화면에 고정되어 있었다. 붉은 숫자가 사라진 자리였다. 그곳에 초록색 글자가 새로이 떠올랐다. 액정 화면의 픽셀이 재조합되었다. 그것은 숫자가 아니었다. 한글이었다. [규칙 위반: 외부 도구 사용.] 태오의 미간이 좁아졌다. [회중시계의 주파수 간섭이 감지되었습니다.] 기계적인 문장이었다. [징벌 프로토콜을 개시합니다.] 아크릴 상자 하단에서 툭 소리가 났다. 작은 밸브가 열렸다. 그 안에서 붉은색 액체가 뿜어져 나왔다. 액체는 전선들을 타고 흘러내렸다.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가 격실을 채웠다. 황산이었다. 강산성 액체가 구리선을 녹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천장의 도르래가 삐걱거렸다. 쇠사슬이 고정 장치에서 이탈했다. "어... 어?" 진수가 비명을 질렀다. 신명수의 몸이 바닥을 향해 고꾸라지기 시작했다. 그의 머리 바로 아래에는 날카로운 철근더미가 솟아 있었다. 태오의 눈동자에 붉은 액체가 반사되었다. 그것은 단순한 오작동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예정된 함정이었다. 카론은 태오의 시계까지 계산에 넣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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