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202X년 10월 24일 02:15, 인천 서안구 폐정수장 지하 통로 3구역 (북위 37°31'48", 동경 126°35'12")]

철제 환풍구가 비명을 질렀다. 덜컥. 덜컥덜컥. 녹슨 날개가 회전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무언가 무거운 것이 쇠창살을 누르고 있었다. 스르륵. 스르르륵. 쇠사슬이 시멘트 바닥을 긁는 파열음이 뒤를 이었다. 그것은 머리 바로 위에서 멈췄다. 진수가 가죽 권총 집에서 38구경 권총을 뽑았다. 총구가 어두운 환풍구 틈새를 겨냥했다. 그의 손가락바늘이 방아쇠를 팽팽하게 당겼다. "한태오, 뒤로 물러서." 진수의 목소리는 젖은 흙처럼 무거웠다. 태오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벽면에 고정되어 있었다. 콘크리트 벽체에 박힌 황동 밸브가 보였다. 지하수 배출 장치였다. 밸브 표면에는 붉은 페인트로 글씨가 적혀 있었다. [압력이 차오르면 황동을 돌려라.] 기계적인 규칙이었다. 카론의 모방범이 남긴 지침서의 구절이었다. 하지만 태오의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었다. 가슴통증이 밀려왔다. 주머니 속 회중시계가 마찰음을 냈다. 째깍, 째깍, 째깍. 일정한 기계음이 그의 이성을 가늘게 붙잡았다. 태오는 눈을 감았다.

시뮬레이션을 가동한다. 동일시의 심연이 열렸다. 머릿속의 전두엽이 타들어 가는 감각이 일었다. 기억의 파편이 하나 더 바스러졌다. 여동생 채영이 좋아했던 꽃의 이름이 사라졌다. 그 자리에 다른 이의 의식이 비집고 들어왔다. 차갑고, 비열하며, 오만한 파동이었다. 모방범의 시선이 태오의 뇌리에 겹쳤다. 시야가 뒤틀리며 과거의 시간이 재생되었다. 모방범이 이 통로에 서 있었다. 그는 황동 밸브를 만지고 있었다. 그의 입꼬리가 비정상적으로 찢어졌다. 그는 밸브 뒷면에 얇은 금속 핀을 설치했다. 압력 감지식 기폭 핀이었다. 황동을 시계 방향으로 돌리는 순간이었다. 핀이 눌린다. 동시에 수조 지하에 매설된 고압 가스통이 터진다. 그것이 설계자의 진짜 의도였다. 지침서는 함정이었다. 규칙을 정직하게 따르는 자를 비웃는 기만이었다. 뇌 속의 모방범이 킥킥거리며 웃었다. "돌려라. 기꺼이 돌려라." 그의 악의적인 음성이 귓전을 때렸다. 태오의 이성이 광기로 오염되기 시작했다.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는 충동이 솟구쳤다. 눈앞의 진수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싶었다. 그의 숨통을 끊어놓는 상상이 뇌를 지배했다. 태오는 이빨을 악물었다. 자신의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태오가 눈을 떴다. 시야가 온통 붉은빛으로 번져 있었다. 안구의 미세혈관이 터진 탓이었다. 눈꼬리를 타고 뜨거운 액체가 흘러내렸다. "안 돼." 태오가 갈라진 목소리로 뱉었다. 진수가 총구를 유지한 채 물었다. "뭐가 안 된다는 거야?" "밸브를 돌리면 폭발한다." "지침서에는 돌리라고 되어 있잖아!" 지침서는 거짓이다. 가해자는 규칙의 틈새에 죽음을 심어두었다. 태오는 바닥에 침을 뱉었다. 붉은 타액이 시멘트 바닥을 적셨다. 입안 가득 역겨운 냄새가 진동했다. 구리 냄새였다. 지독한 피 맛이 혀끝을 마비시켰다. 그 외의 다른 감각은 느껴지지 않았다. 신맛도, 단맛도, 짠맛도 없었다. 오직 쇳가루를 씹는 듯한 불쾌한 미각뿐이었다. 이성의 붕괴가 시작된 증거였다. 뇌세포가 파괴되며 감각 계통이 고장 나고 있었다. 태오는 회중시계를 꽉 쥐었다. 톱니바퀴의 진동만이 유일한 현실이었다.

통로 저편에서 급박한 발소리가 들렸다. 랜턴 불빛이 벽면을 사납게 흔들었다. 서연희 분석관이 방독면을 벗으며 뛰어왔다. 뒤편의 가스 수치가 안전 범위로 떨어진 모양이었다. 그녀는 태오의 얼굴을 보고 굳어버렸다. "태오 씨." 연희의 손이 떨렸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멸균 거즈를 꺼냈다. 그리고 태오의 눈가로 손을 뻗었다. 조심스러운 몸짓이었다. 거즈가 그의 눈 밑에 닿았다. 붉은 피가 하얀 천을 빠르게 물들였다. "또 시뮬레이션을 하신 건가요?" 연희의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 있었다. "뇌 압력이 비정상적으로 높아요. 이 이상은 위험해요." 태오는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그러나 단호하게 밀쳐냈다. "시간이 없다." "당신의 자아가 지워지고 있어요! 자신이 누군지도 잊을 셈인가요?" "사건 해결이 먼저다." 태오의 목소리에는 높낮이가 없었다. 기계의 구동음과 같았다. 진수가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설명해, 한태오. 저걸 안 돌리면 가스가 다시 차오를 거다." 진수의 얼굴은 땀과 먼지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의 눈에는 불신과 초조함이 혼재했다. 태오는 제어장치 배전반으로 다가갔다. 그는 낡은 철제 덮개를 뜯어냈다. 끼이익하는 비명이 좁은 통로에 울렸다. 수십 개의 전선이 엉켜 있었다. 규격화된 케이블 사이에 이질적인 선 하나가 보였다. 녹슨 갈색 철사선이었다. 그것은 다른 전선들과 공정이 달랐다. 수조의 유압 밸브를 수동으로 제어하는 보조 와이어였다. 시뮬레이션 속 모방범이 마지막으로 확인했던 선이었다.

태오가 주머니에서 다용도 칼을 꺼냈다. 금속 날이 서늘한 빛을 뿜었다. "그걸 자르겠다고?" 진수가 태오의 손목을 잡았다. 그의 손길은 억셌다. "잘못 자르면 이 지하 전체가 날아간다." "이건 모방범의 백도어다." 태오가 진수의 손을 응시했다. 그의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것처럼 공허했다. "그는 완벽주의자다. 비상시 자신이 탈출할 경로를 만들어두었다." "확신할 수 있어?" "그의 뇌 속에서 직접 확인했다." 태오의 말에 진수의 손에 힘이 풀렸다. 진수는 괴물을 보는 듯한 눈빛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태오는 망설임 없이 갈색 선바늘을 겨냥했다. 칼날이 전선피복을 파고들었다. 서걱. 굵은 철사선이 끊어졌다. 순간,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지하 바닥이 진동했다. 벽면의 파이프라인에서 수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치이이익. 가스 압력계의 바늘이 급격히 제로(0)를 향해 떨어졌다. 환풍구의 덜컥거림이 멈췄다. 쇠사슬 소리도 멀어지더니 완전히 사라졌다. 지하를 지배하던 고압의 공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함정이 무력화되었다. 완벽한 해제였다.

연희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어깨가 아래로 툭 떨어졌다. "살았네요." 진수는 권총을 탄창 집어넣으며 바닥을 침울하게 바라보았다. 경찰의 공조 수사 원칙은 무너졌다. 결국 이 괴물의 비정상적인 능력에 목숨을 구걸한 꼴이었다. 태오는 제어장치 아래쪽을 살폈다. 바닥의 틈새에 무언가 떨어져 있었다. 그는 무릎바늘을 굽히고 손을 뻗었다. 손가락 끝에 차가운 금속의 촉감이 닿았다. 은색 실린더 탄피였다. 길이는 약 5센티미터. 일반적인 총기 탄피가 아니었다. 특수 제작된 고압 가스 실린더의 잔해였다. 태오는 그것을 눈앞으로 가져왔다. 어두운 랜턴 불빛 아래에서 표면의 문양이 드러났다. 그리스 문자 'X'(카이)가 정교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카론의 친필 서명과 다름없는 표식이었다. 모방범이 아닌, 진짜 진범의 흔적이었다. 태오의 손가락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게 왜 여기에 있지?" 진수가 태오의 손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모방범은 도구에 불과했다." 태오가 탄피를 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진짜 카론이 이 장치를 직접 감시하고 있었다." "뭐라고?" 진수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놈이 여기 있었다는 건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우리를 보고 있었다." 태오는 탄피를 다시 꺼내 연희에게 건넸다. "지문과 성분 분석을 의뢰해." 연희가 조심스럽게 탄피를 지퍼백에 담았다. 그녀의 손가락끝이 차가웠다. "태오 씨, 이제 나가야 해요. 안색이 너무 안 좋아요." "난 괜찮다." 태오는 등을 돌려 출구를 향해 걸었다. 그의 걸음걸이는 위태로웠다. 왼쪽 다리가 약간 절뚝였다. 운동 신경계까지 마비 증상이 퍼지는 중이었다.

정수장 외부의 공기는 차가웠다. 새벽 3시의 어둠이 폐공업지구를 덮고 있었다. 태오는 정수장 마당에 놓인 낡은 플라스틱 벤치에 주저앉았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관자놀이의 혈관이 요동쳤다. 그는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냈다. 유리 덮개에 금이 간 시계였다. 째깍, 째깍, 째깍. 소리가 이전보다 느리게 들렸다. 그의 시간 인지 능력이 왜곡되고 있었다. 태오는 침을 한 번 더 뱉었다. 여전히 지독한 구리 맛뿐이었다. 입안에 철근을 물고 있는 느낌이었다. 물 한 모금을 마셨지만, 그것 역시 썩은 우물물 같은 쇠 맛으로 변했다. 영구적인 미각 상실. 시뮬레이션의 대가는 그의 인간성을 하나씩 갉아먹고 있었다. 그는 시계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만약 이 시계의 소리마저 들리지 않게 된다면. 그때는 정말 괴물이 될 것이다.

연희가 무전기를 들고 다가왔다. "본부에 분석 의뢰했습니다. 결과는 날이 밝는 대로..." 그녀의 말이 끝내 맺어지지 못했다. 태오의 상태가 이상했다. 태오는 벤치에 앉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가 허공의 한 점에 고정되어 있었다. "태오 씨?" 연희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태오의 몸이 얼음처럼 차가웠다. 갑자기 태오가 숨을 헉 하고 들이쉬었다. 그의 허리가 활처럼 팽팽하게 꺾였다. 폐부에 산소가 들어가지 않는 듯한 격렬한 천명음이 새어 나왔다. "큭, 으윽..." 그의 두 눈의 흰자위가 순식간에 붉은 피로 물들었다. 모세혈관이 일제히 터져 나가며 눈물이 아닌 피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의 시야가 암전되었다. 어둠 속에서 톱니바퀴 소리가 거대하게 울려 퍼졌다. 그리고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환영한다, 나의 후계자여." 태오의 손에서 회중시계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쨍그랑하는 소리와 함께 유리가 완전히 산산조각 났다. 태오의 의식이 깊은 심연 속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차가운 시멘트 바닥이 뺨에 닿았다. 온도가 느껴지지 않았다. 지독한 무감각만이 전신을 지배했다. "한태오! 정신 차려!" 진수의 고함이 고막을 찢었다. 목소리가 수면 아래에서 들리는 듯 먹먹했다. 태오의 손가락이 바닥을 긁었다. 깨진 시계 유리가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붉은 피가 모래 먼지와 섞여 흘렀다.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직 귓가에 맴도는 기계적 이명뿐이었다. 삐이-. 그 고주파 소리 너머로 환영이 겹쳤다. 어두운 방이었다. 말이 없는 소녀가 서 있었다. 채영이었다. 그녀는 슬픈 눈으로 태오를 응시했다. 그녀의 입술은 굳게 닫혀 있었다. 태오가 손을 뻗었으나 허공을 가를 뿐이었다. 채영의 형상이 안개처럼 바스러졌다. "동공이 축소되고 있어!" 연희의 다급한 비명이 들렸다. 그녀가 태오의 가슴을 강하게 압박했다. 충격이 척추를 타고 뇌로 전달되었다. 태오가 핏물을 토해내며 숨을 들이켰다. "후우... 읍..." 붉은 시야가 천천히 걷혔다. 검은 피가 눈꺼풀 사이에 엉겨 붙었다. 태오는 떨리는 손을 바닥으로 뻗었다. 흩어진 시계의 부속품들이 보였다. 놋쇠 톱니바퀴. 금이 간 태엽 통. 그리고 찌그러진 은빛 프레임. 태오는 그것들을 주저 없이 주워 담았다. 손끝이 마비되어 물건을 잡기 힘들었다. 날카로운 부속들이 살을 찔렀지만 멈추지 않았다. 이것이 없으면 무너진다. 자신을 현실에 묶어둘 마지막 닻이었다. "움직이지 마." 진수가 태오의 어깨를 강하게 눌렀다. 태오는 진수의 손을 거칠게 쳐냈다. 그는 비정상적인 힘으로 몸을 일으켰다. 무릎이 꺾였으나 기어코 벽을 짚고 섰다. "차진수 형사." 태오의 목소리는 얼어붙어 있었다. "탄피는?" 연희가 지퍼백을 들어 보였다. 그녀의 손가락끝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여기 있어요. 하지만 지금은 치료가..." "분석실로 간다." 태오는 절뚝이며 이동 분석 차량으로 향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폐가 찢어지는 듯했다. 입안의 구리 맛은 더욱 진해졌다. 마치 달궈진 철판을 핥은 느낌이었다. 이성 오염이 가속화되는 증거였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범인은 꼬리를 남겼다. 그것을 밟아야만 했다.

분석 차량 내부의 공기는 차가웠다. 기계의 냉각팬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연희가 은색 탄피를 정밀 스캐너에 밀어 넣었다. 파란색 레이저가 탄피 표면을 훑었다. 모니터에 3차원 그래픽이 구현되었다. 그리스 문자 'X'의 단면이 확대되었다. "각인의 깊이가 일정하지 않아요." 연희가 자판을 두드리며 나직하게 말했다. "미세 코딩이다." 태오가 모니터를 응시했다. 그의 눈가에 맺힌 피가 검게 말라붙어 있었다. "카론은 흔적을 그냥 남기지 않는다." 레이저 스캔 수치가 정밀해졌다. 각인의 미세한 홈들이 음파 파형으로 변환되었다. 연희가 주파수 필터를 적용했다. 잡음이 제거된 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지지직거리는 기계음이었다. 그리고 익숙한 음성이 고막을 파고들었다. "첫 번째 복종을 축하한다, 태오야." 진수의 호흡이 순간 멎었다. 차량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목소리는 기묘할 정도로 부드러웠다. 성당의 신부와 같은 나직한 음색이었다. 박민우. 카론의 진짜 목소리였다. "가짜 규칙 속에서 진짜를 찾아냈더군." 음성이 담담하게 이어졌다. "하지만 다음 방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을 거다." 화면의 데이터가 급격히 전환되었다. 새로운 문장들이 모니터에 출력되었다. [행동 지침서 제4조: 요양원의 모든 감시 장치는 원장의 눈이며, 원장은 태생적으로 맹인이다.] 기괴한 모순이었다. 동시에 문장 하단에 지리적 좌표가 찍혔다. [인천 신성요양원 3층 격리병동] "요양원?" 진수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거기에 다음 타깃이 있다는 건가?" "아니." 태오가 차갑게 대꾸했다. "이미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그때였다. 연희의 분석 모니터가 붉은색 경고등으로 뒤덮였다. 스캔 데이터가 역류하기 시작했다. "시스템이 제어되지 않아요!" 연희가 다급하게 자판을 두드렸다. 스피커에서 찢어지는 듯한 고주파 비명이 터져 나왔다. 끼이이이이익-. 동시에 스캐너 내부의 은색 탄피에서 미세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화학적 과열 반응이었다. "대피해!" 진수가 연희의 덜미를 잡아채며 뒤로 물러섰다. 태오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과열되어 붉게 달아오르는 탄피에 고정되어 있었다. 탄피 표면의 'X' 문양이 녹아내리며 새로운 각인이 나타났다. 그것은 소름 끼치는 숫자였다. 47:59:58. 카운트다운이었다. 제2차 트랩의 제한 시간이 이미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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