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202X. 10. 15. 00:06 / 경기도 서안구 신성요양원 지하 2층 기계실 (37.3452, 126.8214)]

황산이 끓었다. 비명이 뭉개졌다. 수조 안의 황색 액체가 부글거리며 기포를 뿜었다. 강윤성의 손가락이 콘크리트 벽을 긁었다. 살이 녹아내린 자리에 하얀 뼈가 드러났다. 긁힌 자국을 따라 붉은 선혈이 흘러내렸다. "카... 카론... 님..." 윤성이 마지막으로 피를 토했다. 그의 입에서 붉은 선혈과 함께 무언가 튀어나왔다. 툭. 둥글고 작은 금속 구슬이었다. 피로 물든 구슬이 먼지 쌓인 콘크리트 바닥을 굴렀다. 구슬은 한태오의 구둣발 바로 앞에 멈췄다. 수조 속에서 윤성의 손이 힘없이 풀렸다. 그의 몸이 서서히 황색 액체 속으로 가라앉았다. 기포가 몇 번 더 터졌다. 이내 사방이 침묵에 잠겼다. 구석에 방치된 구형 무전기가 치이익 소리를 냈다. - ...태오야. 낮고 온화한 목소리였다. 신부의 고해성사 같았다. 차진수 형사의 몸이 굳었다. - 첫 번째 유산을 손에 넣었구나. 축하한다. 카론의 목소리였다. 차가운 기계음을 타고 흐른 목소리가 기계실의 온도를 떨어뜨렸다. 진수가 무전기를 향해 이를 악물었다. "이 미친 새끼가..." 진수가 무전기를 발로 짓밟으려 했다. 태오가 손을 뻗어 진수의 어깨를 막았다. 태오의 손가락 끝은 하얗게 변색되어 있었다. 감각이 없었다. "기다려." 태오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그때 기계실 천장에서 미세한 금속성 마찰음이 들렸다. 끼익, 띡. 배전반의 붉은 경고등이 빠르게 점멸하기 시작했다. 강윤성이 준비해 둔 마지막 안전장치가 해제된 결과였다. 윤성의 죽음 자체가 또 다른 트리거였다. 탁. 기계실의 전등이 일제히 꺼졌다. 암전이었다. 황산의 매캐한 냄새만이 어둠 속에서 진동했다. 콧등을 찌르는 산성의 악취가 허공을 채웠다. "젠장, 아무것도 안 보여." 진수가 주머니를 뒤적였다. 챙- 가벼운 금속음이 어둠을 찢었다. 진수가 평소 습관처럼 손가락으로 튕기던 은도금 라이터였다. 진수가 부싯돌을 긁었다. 작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불빛은 미약했다. 하지만 라이터 표면의 고순도 크롬 도금이 빛을 반사했다. 은빛 반사광이 어둠 속으로 날카롭게 뻗치며 기계실 내부를 가늘게 갈랐다. 태오의 눈동자가 그 반사광의 궤적을 쫓았다. 은빛이 머문 곳은 공중이었다. 배전반에서 시작해 수조 입구까지 연결된 머리카락보다 가는 은사들이 보였다. 초미세 단선 트랩이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여 은사를 건드리는 순간, 천장에 매달린 고압 배관이 파열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움직이지 마." 태오가 낮게 읊조렸다. "뭐? 왜 그래?" "앞에 은사다. 라이터를 그대로 들고 있어." 진수의 손이 허공에서 굳었다. 라이터 불꽃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은도금 표면에 반사된 빛이 은사의 위치를 기하학적으로 증명하고 있었다. 태오는 주머니에서 다른 물건을 꺼냈다. 금이 간 태엽식 회중시계였다. 여동생 채영의 유품이었다. 시계를 귀에 가져다 댔다. 하지만 태오의 오른쪽 귀는 이미 청각 마비가 진행 중이었다. 웅웅거리는 이명만이 고막을 때렸다. 태오는 시계를 이마와 광대뼈 사이에 밀착시켰다. 골전도를 통해 기계식 톱니바퀴의 마찰음이 뇌로 직접 전달되었다. 째깍. 째깍. 째깍. 일정한 주기의 진동이 뼈를 타고 흘렀다. 배전반 내부에서 흐르는 미세한 전류음이 들렸다. 윤성이 설계한 타이머 회로의 주파수였다. 태오는 회중시계의 째깍거리는 물리적 주기를 기준점으로 삼았다. 시계의 톱니가 세 번 맞물릴 때마다 배전반의 릴레이 스위치가 기계적으로 차단되는 소리가 미세하게 울렸다. 간격은 정확히 1.2초였다. 태오는 시계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손끝의 감각이 소실되어 손가락이 제멋대로 떨렸다. 그는 왼손으로 오른손목을 움켜쥐었다. "진수 형사. 라이터 빛을 배전반 좌측 하단에 고정해." "태오야, 뭘 하려는 거야?" "시간이 없다. 릴레이가 열리는 순간 선을 끊는다." 태오가 은사 사이로 손을 뻗었다. 하얗게 질린 손가락이 허공을 갈랐다. 은사와의 거리는 단 3밀리미터였다. 은도금 라이터의 반사광 덕분에 은사의 궤적이 명확히 보였다. 째깍. 째깍. 세 번째 진동이 뼈를 울렸다. 지금이다. 태오가 배전반 내부의 메인 접지선을 손톱 끝으로 강하게 눌러 뜯어냈다. 툭. 미세한 스파크가 튀었다. 천장의 금속성 마찰음이 멈췄다. 경고등의 점멸도 꺼졌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진수가 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라이터 불을 껐다. "살았군." 태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바닥으로 몸을 숙였다. 손끝의 감각이 없었기에, 바닥을 더듬는 동작이 둔탁했다. 마침내 차가운 금속의 질감이 손가락 마디에 걸렸다. 강윤성이 뱉어낸 구슬 모양의 메모리 칩이었다. 태오는 피 묻은 칩을 셔터 안쪽 옷감에 문질러 닦았다. 표면에 음각된 알파벳 [C]가 어둠 속에서도 선명했다. "나가자." 태오가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걸음걸이가 미세하게 절뚝거렸다. 운동 감각의 붕괴가 시작되고 있었다.

***

[202X. 10. 15. 01:12 / 경기도 서안구 신성요양원 앞 TF 비틀 임시 지휘 차량 (37.3458, 126.8219)]

차량 내부의 열기는 뜨거웠다. 수많은 모니터가 내뿜는 열기가 좁은 공간에 가득 찼다. 서연희 분석관이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가 불규칙하게 울렸다. 그녀의 눈동자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돌아오셨네요." 연희가 고개를 돌렸다. 태오는 말없이 다가갔다. 그의 손에는 피 얼룩이 묻은 금속 구슬이 쥐어져 있었다. 태오가 구슬을 연희의 데스크 위에 놓았다. 탁. "마운트해." 연희가 구슬을 집어 들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구슬의 틈새를 찾아 정밀 핀셋으로 외피를 분리하자, 초소형 마이크로 메모리 칩이 나타났다. 연희가 칩을 판독기에 삽입했다. [시스템 인식 중...] [보안 프로토콜 해제 시도...] 화면에 수많은 소스코드가 폭포처럼 흘러내렸다. 태오는 모니터 옆에 놓인 종이컵을 집어 들었다. 미지근한 물을 입에 머금었다. 아무런 맛도 나지 않았다. 오직 혀 뒤편에서 쇠 냄새가 섞인 비릿한 구리 맛만 맴돌았다. 미각은 이미 완벽하게 소멸했다. 뇌세포의 타격이 가져온 돌이킬 수 없는 대가였다. "해킹 완료됐습니다." 연희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높아졌다. 화면에 거대한 3D 기하 도면이 출력되었다. 초록색 선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입체 격자망이었다. 도면의 상단에 굵은 고딕체 글씨가 나타났다. [서안 화학공장 지하 수조 및 정화조 설계도 (1999)] 진수가 모니터 앞으로 상체를 밀착시켰다. "서안 화학공장? 거긴 이미 15년 전에 폐쇄된 구역이잖아." "단순한 설계도가 아닙니다." 연희가 마우스를 조작했다. 도면의 특정 구역이 붉은색으로 점멸했다. 지하 3층에 위치한 폐수 저장고였다. 그곳을 중심으로 복잡한 동선과 기하학적 수치들이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텍스트 파일 하나가 열렸다. [수사 지침서 원안 - 2004년 서안구 연쇄살인 사건] 태오의 눈동자가 고정되었다. 그것은 단순한 문서가 아니었다. 20년 전, 그의 여동생 한채영이 납치되어 감금되었던 실제 공간의 상세한 기록이었다. '카론의 행동 수칙 제1조: 침입자는 최초 3분간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말 것.' '수칙 제2조: 붉은 선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시선을 돌리지 말 것.' 당시 경찰이 실패했던, 그리고 태오가 기억 속에서 강제로 지워야만 했던 참극의 규칙들이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 태오의 호흡이 가빠졌다. 그는 도면의 중심부를 응시했다. 붉은 점이 찍힌 가상의 의자. 그곳에 묶여 있었을 어린 여동생의 실루엣이 겹쳐 보였다. "채영이..." 태오가 중얼거렸다. 그 순간, 머릿속에서 거대한 폭발음 같은 이명이 울렸다. 쾅- 귀청을 찢는 듯한 소리와 함께 시야가 번쩍였다. 극심한 격통이 전두엽을 관통했다. 태오는 머리를 감싸 쥐며 비틀거렸다. "태오 씨!" 연희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오의 눈앞이 새하얗게 변했다. 도면의 초록색 선들이 제멋대로 뒤엉키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는 필사적으로 머릿속의 기억을 붙잡으려 했다. 여동생의 얼굴. 매일 밤 자신을 보며 웃어주던 채영의 얼굴을 떠올리려 했다. 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코의 선도, 입술의 모양도 기억나지 않았다. 가장 끔찍한 것은 눈동자였다. 슬픈 눈망울로 자신을 바라보던 동생의 눈동자 색이 무엇이었는지, 검은색이었는지 갈색이었는지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기억의 도서관에서 채영의 페이지가 통째로 뜯겨 나간 것 같았다. "안 돼..." 태오의 입에서 거친 신음이 새어 나왔다. 동일시 시뮬레이션의 대가였다. 범인의 광기와 동화될 때마다 그의 자아는 오염되었고, 가장 소중한 기억부터 차례로 지워지고 있었다. 여동생의 이목구비가 완벽하게 탈색되어 사라졌다. 머릿속에는 오직 텅 빈 하얀 가면만이 남아 있었다. 이질적인 패닉이 태오의 온몸을 지배했다. 호흡이 가빠지고 심장이 갈비뼈를 부술 듯이 쿵쾅거렸다. 손끝이 통제력을 잃고 부들부들 떨렸다. "한태오! 정신 차려!" 진수가 태오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하지만 진수의 목소리도 멀게만 느껴졌다. 물속에 잠긴 것처럼 먹먹했다. 그때, 따뜻한 온기가 태오의 손을 감쌌다. 연희였다. 연희는 비틀거리는 태오의 앞으로 다가와 그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작은 체구가 태오의 무너지는 몸을 지탱했다. 그리고 연희는 자신의 손가락을 태오의 하얗게 마비된 손가락 사이로 밀어 넣었다. 깍지를 끼듯, 힘주어 잡았다. "태오 씨, 제 손 느껴지세요?" 연희의 목소리가 태오의 가슴팍에 직접 닿았다. "제 손가락 움직임에 집중하세요. 하나, 둘, 셋. 가지 마세요. 거기 머무세요." 연희는 태오의 지워져 가는 자아의 인계선이 완전히 무너지지 않도록, 자신의 체온과 물리적 자극으로 그를 현실에 고정하려 애썼다. 태오는 연희의 손가락 마디가 전해오는 미세한 압박을 느꼈다. 차가웠던 그의 손끝에 아주 조금씩 피가 도는 느낌이 들었다. 지워진 동생의 얼굴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무겁게 가라앉았던 이성이 서서히 제 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태오가 거친 숨을 몰아서 내쉬었다. 그의 눈동자가 다시 차갑고 기계적인 빛을 되찾았다. "이제... 괜찮아." 태오가 연희의 손을 천천히 풀었다. 그의 목소리는 다시 하드보일드 수사관의 그것으로 돌아와 있었다. 슬픔도, 공포도 배제된 냉혹한 음성이었다. "고맙군." 태오는 제자리로 돌아와 단말기 화면을 바라보았다. 동생의 얼굴은 잃었지만, 복수해야 할 대상의 좌표는 더 명확해졌다. 그는 손가락을 뻗어 화면의 서안 화학공장 지하 3층을 가리켰다. "카론은 이곳에 있다." 진수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지원 병력을 요청하겠어. 이번엔 도망치지 못할 거다." 태오가 다시 서류를 잡았다. 그의 손가락 끝에는 아까 묻은 윤성의 핏자국이 여전히 붉게 남아 있었다. 그 붉은 손가락으로 종이를 넘기려는 순간이었다. 틱. 단말기 화면의 우측 하단에서 작은 팝업창이 떴다. 메모리의 잔여 영역에 숨겨져 있던 코틀러(Kottler) 확장자 파일이 강제로 실행된 것이었다. 지기지직- 스피커에서 거친 노이즈가 발생하더니, 이내 정돈된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방 안의 모든 공기가 얼어붙었다. - 태오야. 나직하고, 온화하며, 소름 끼치도록 세련된 음성. 카론의 목소리가 임시 지휘 차량 내부를 가득 채웠다. - 네가 잃어버린 그 아이의 눈동자는... 아주 아름다운 깊은 밤의 색이었단다. 기억하고 싶다면, 이곳으로 오너라. 네 유산이 너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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