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의회의 불법 거래자 도진이여."

한태령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으나, 그 안에 담긴 마나의 질량은 주변의 대기를 물리적으로 압착하고 있었다. 반쯤 뽑힌 대검의 검날에서 흘러나온 청백색 전류가 화강암 바닥을 긁으며 타닥거리는 마찰음을 냈다.

"그 기이한 힘이 정말로 낙오자들을 구하기 위한 수식인가, 아니면 그저 우리 모두를 파멸로 몰고 갈 거대한 사기극인가. 내 방패와 검을 넘어서지 못한다면, 나는 네 그 기계 같은 수식에 나의 동료들과 강동구의 운명을 맡길 수 없다."

도진은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의 눈동자에 비친 한태령의 신체 데이터는 지극히 위협적이었다.

[대상: 한태령 (A급 방패 전사)] [근육 긴장도: 94.2%] [마나 방출 압력: 1,200 kPa] [전투 돌입 확률: 98.7%]

심박수는 분당 62회. 도진의 심장은 여전히 기계적인 평온을 유지하고 있었다. 정서적 효율 증후군은 이 상황에서 공포라는 불필요한 감정 자원의 소모를 차단하는 가장 완벽한 방패였다.

도진은 주머니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손끝에 닿은 것은 차갑고 투박한 금속의 촉감이었다. 2화에서 마포구 던전의 폐기물 구역을 수색하다가 발견했던, 쓸모없는 고철 취급을 받던 물건. 바로 '부러진 고대 기하학 나침반'이었다.

대부분의 헌터들은 이 물건을 단순한 잡템으로 여겼지만, 도진의 고대 분석 렌즈는 이 장치의 내부 나선 구조가 지닌 진정한 가치를 읽어내고 있었다. 이것은 고대인들이 인과율 구조의 미세한 비틀림 공간을 추적하고, 은폐된 위상 기하학적 궤적을 역연산하기 위해 설계한 정밀 도구였다.

도진이 나침반을 꺼내 들자, 한태령의 미간이 좁아졌다.

"고작 부러진 나침반 따위로 내 검을 막겠다는 건가?"

"막는 것이 아닙니다."

도진이 나침반의 태엽을 시계 방향으로 세 칸 돌렸다.

스르륵, 서걱.

녹슨 황동 톱니바퀴들이 맞물리며 이빨이 갈려 나가는 비명이 들렸다. 그 순간, 나침반의 깨진 유리 덮개 너머로 멈춰 있던 바늘이 맹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바늘은 한태령의 대검 끝이 아닌, 그 너머의 허공,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어둠의 한 점을 향해 수직으로 정렬되었다.

삐이이이—!

도진의 시야에 붉은색 경고 도식과 함께 시스템의 수치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인과율 비틀림 감지: 좌표 X-774, Y-102, Z-45] [의회 처형 기사단 잔류 은폐 마법 주파수: 443.2 MHz] [나침반 연산 동기화율: 100%]

"당신은 내가 사기극을 벌이고 있는지 의심하고 있군요, 한태령 부단장님."

도진이 나침반을 쥔 손을 가볍게 비틀었다.

"하지만 정작 당신들의 등 뒤에서 서서히 목을 조여오는 진짜 포식자는 보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무슨 소릴...!"

한태령이 채 말을 끝내기 전에, 도진의 나침반에서 뿜어져 나온 미세한 청색 빛줄기가 공중의 한 점을 정확히 격타했다.

파지직! 일순간 공간이 유리창처럼 금이 가며 깨져 나갔다. 그곳에는 의회 소속 처형 기사단이 은폐 마법을 전개한 채 설치해 둔, 초소형 '마나 붕괴 쐐기'가 숨겨져 있었다. 한태령을 비롯한 강동구 연합 길드가 대치 상태에 집중하는 사이, 의회가 그들의 퇴로를 차단하고 일시에 몰살하기 위해 숨겨둔 비열한 덫이었다.

나침반의 역연산 파동이 은폐 마법의 기하학적 좌표를 흐트러뜨리자, 쐐기는 자가 붕괴를 일으키며 검은 연기로 화해 소멸했다.

공기가 얼어붙었다.

한태령의 대검 끝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가 그토록 신뢰하던 전장의 감각이, 도진의 손에 든 낡은 나침반 하나보다 늦게 위협을 감지했다는 사실이 그의 자존심에 균열을 냈다.

"이건... 의회의 은폐 격벽 수식인가."

"그렇습니다."

도진은 나침반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무감각하게 말했다.

"당신들의 목숨은 이미 의회의 연산표 위에서 소모품으로 분류되어 있었습니다. 내가 방금 그 수식을 강제로 기각하지 않았다면, 당신들은 결투를 시작하기도 전에 등 뒤에서 뿜어지는 마나 붕괴열에 척추가 녹아내렸을 겁니다. 저를 향해 검을 겨누는 행위가 얼마나 비효율적인지, 이제는 이해하셨으리라 믿습니다."

한태령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그의 고결한 눈빛 아래로 지독한 혼란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검을 거두지 않았지만, 검 끝에서 뿜어지던 살인적인 마나 압력은 눈에 띄게 감쇄되어 있었다.

"네 말이 사실이라 해도, 너 역시 이 구역의 에너지를 착취해 독점 상점의 채무를 변제하려는 자다. 의회나 너나, 우리를 체스의 말로 보는 것은 마찬가지 아닌가?"

"체스의 말이라."

도진은 가볍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다면 보여드리죠. 제가 설계한 체스판이 의회의 그것과 어떻게 다른지."

도진이 허공을 향해 오른손을 뻗었다. 손가락 끝이 허공을 가볍게 튕기자, 독점 상점의 라이선스 인터페이스가 공중으로 거대하게 전개되었다. 반투명의 푸른빛 패널들이 대성당의 어두운 석벽을 가득 채우며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그것은 단순한 상점 목록이 아니었다. 도진이 그동안 축적한 데이터와 강동구 제어부 던전의 에너지 흐름을 결합해 정밀하게 렌더링한 '강동구 생존 청사 지도'였다.

"이것이 제 연산의 실체입니다."

도진의 음성이 대성당의 높은 천장에 차갑게 반사되었다.

화면에 떠오른 수식과 수치들은 기하학적으로 완벽했다. 강동구 하위 구역에 격리된 41,209명의 생존자 이름과 그들의 일일 최소 대사량, 필수의약품 소모율, 그리고 던전에서 방출되는 잔류 엔트로피를 정화하기 위한 역순환 주기 공식이 실시간으로 계산되고 있었다.

[피해자 군집 7개 구역 영양 공급망 설계도] [일일 필요 칼로리: 103,022,500 kcal] [던전 잔류 마나 감쇄율: -92.4% (안전 기준치 충족)] [생존 확률 시뮬레이션 결과: 99.98%]

"의회의 기선우는 생존율 90%를 달성하기 위해 하위 10%를 사전 제거하는 공식을 사용합니다. 그것이 그들의 '합리성'이죠."

도진의 시선이 한태령의 흔들리는 눈동자에 고정되었다.

"하지만 제 공식은 다릅니다. 저는 낙오자를 제거하여 분모를 줄이는 방식을 쓰지 않습니다. 분자를 늘려 전체 값을 100%에 수렴시킵니다. 여기 투사된 수식을 보십시오. 강동구 전체의 마나 흐름을 역위상으로 정렬하여, 던전의 유독한 잔류 에너지를 정수 및 난방 에너지로 변환하는 청사진입니다. 단 한 명의 유실자도 발생하지 않는, 완전한 세이프존의 물리적 물리식입니다."

한태령은 넋을 잃은 채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는 평생을 전장에서 구르고 수많은 지략가와 연합 길드의 고위 간부들을 만나왔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토록 방대하고, 지독할 정도로 정교하며, 오차 없는 '구원'의 수식을 제시한 적은 없었다. 도진의 손끝에서 그려진 청사진은 단순한 희망 사항이 아니었다. 당장이라도 실행 가능한, 뼈와 살이 붙은 공학적 실체였다.

"이게... 정말로 가능하다는 말인가? 이 수만 명의 생존자들을... 단 한 명의 희생도 없이?"

"제 상점의 물품들과 이 연산 장치들이 결합한다면, 가능합니다."

도진의 평온한 대답은 그 어떤 웅변보다 강력한 무게감으로 한태령의 가슴을 내리눌렀다.

전설적인 방패 영주, 강동구 하위 구역의 유일한 수호자라 불리던 한태령의 어깨가 서서히 내려앉았다. 그의 손가락에서 힘이 빠지며, 반쯤 뽑혀 있던 대검이 스르릉 소리를 내며 칼집 안으로 완전히 들어갔다.

그것은 굴복이었다. 최강의 구역 영주가, 일개 무명 헌터가 전개한 압도적이고 장엄한 통치 수식표 앞에 자신의 무력과 사상을 완전히 꺾은 순간이었다.

"내가... 어리석었다."

한태령이 짧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 거대한 거목 같던 그의 신형이 도진 앞에서 작아 보였다.

"우리는 그저 하루하루 버티는 것만을 생존이라 불렀다. 하지만 너는... 너는 이미 그 너머의 세상을 기하학적으로 완성해 두고 있었군. 도진, 네 기계적인 냉혹함이 오히려 우리에게는 구원이었을지도 모르겠군."

[시스템 알림: 조연 '한태령'과의 신뢰도 및 계약 동기화율이 85%를 돌파했습니다.] [연합 길드 '강동 방패'의 세이프존 건설 전폭 지원 계약이 체결되었습니다.]

도진은 감정의 동요 없이 알림을 확인했다. 자산의 가치가 극대화되는 순간이었다.

그때, 뒤에서 숨을 죽이고 상황을 지켜보던 백설아가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에는 복잡한 감정의 파도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설아는 공중에 투사된 거대한 수식의 한구석, 아주 작고 미세하게 보정된 변수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도진 씨... 이거..."

그녀의 손가락 끝이 가리킨 곳은 'S-01'이라는 식별 코드가 부여된 변수 영역이었다.

[식별 코드: S-01 (자산 분류: 백설아)] [마나 효율 보정 계수: 1.42] [생존 지속 반경: 세이프존 반경 내 100% 상시 보호 권역 지정] [소모 칼로리 대비 생존 기여도: 수치 환산 불가 (예외적 가치 보존 요인 지정)]

설아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이 수식... 나 같은 무능한 헌터도, 아무 쓸모 없는 낙오자들도... 전부 살 수 있게 설계되어 있네요. 심지어 내 생존 확률을 위해서 소수점 아래 여섯 자리까지 에너지를 배분해 놨어."

그녀는 도진을 바라보았다. 눈가에 맺힌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설아는 도진이 자신을 그저 쓸모 있는 '자산'이나 도구로만 평가한다고 믿었다. 그의 철저한 계산법에 소름이 돋을 때도 많았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펼쳐진 수식은 말하고 있었다. 도진의 기계 같은 뇌 속에서, 그녀의 존재는 단순한 소모품이 아닌, 반드시 끝까지 살려내야 할 '완벽한 화원'의 필수 구성원이라는 것을.

"도진 씨는 정말 지독한 기계주의자예요."

설아가 눈물을 닦으며 피식 웃었다.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기계네요."

그녀의 가치관이 도진의 차가운 합리성 안으로 완전히 스며드는 순간이었다. 도진은 그녀의 눈물을 보며 가슴 한편이 기묘하게 조여드는 것을 느꼈다. 정서적 효율 증후군이라는 필터로도 완전히 걸러내지 못하는 미세한 노이즈. 그것은 감정의 싹이었으나, 도진은 즉시 그 신호를 '정서적 불안정성 경고'로 치부하며 가라앉혔다.

"감상적인 해석은 사양합니다, 백설아 씨. 당신은 제 세이프존의 초기 가동을 위한 중요한 인적 자산입니다. 자산 가치의 손실을 막는 것은 투자자로서 당연한 의무입니다."

"네, 네. 그렇게 믿어 드릴게요."

설아는 여전히 눈가에 눈물을 머금은 채 입꼬리를 올렸다.

그때였다.

대성당의 공기가 기괴하게 비틀리며, 도진의 뇌리에 차갑고 날카로운 조소가 꽂혔다.

—아하하하! 정말 눈물겨운 인간들의 연극이네, 도진?

상위 라이선스 관리자 AI, 엘라의 홀로그램이 도진의 시야 한구석에 미니 가상체로 나타났다. 그녀는 붉은색 마법 결정 공을 이리저리 굴리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너희가 그렇게 아름다운 수식 놀이를 하고 있는 동안, 저기 '진짜 주인'들이 네 꼬리를 밟았거든?

[시스템 경고!] [의회 소속 요새 마법 도시 '앱솔루트 포트리스'로부터 발신되는 고강도 시스템 데이터 전송 경로의 누출이 감지되었습니다.] [우주 시스템 본체의 감시 궤도가 해당 구역으로 급격히 수축 중.] [현재 감시 동기화율: 91.2%]

"감시 궤도가 좁혀지고 있다고?"

도진의 미간이 좁아졌다.

—응! 네가 상점을 이용할 때마다 발생하는 '인과율 채무'의 역전위 마나가 의회의 고성능 오행 연산기에 포착된 거지. 기선우라는 인간, 정말 질척거릴 정도로 철저하다니까?

엘라가 키득거리며 경고창을 눈앞에 띄워 주었다.

[인과율 채무 한도: 99.1% (임계 돌파 직전)] [남은 시간: 11시간 52분]

"채무 한도가 임계치에 도달하면 어떻게 되는지 이미 경고했을 텐데요, 엘라."

도진이 마음속으로 차갑게 물었다.

—물론이지! 채무 한도를 초과하면 말이야, 네 내부의 마나가 물리적 한계를 무시하고 모든 물질을 분자 수준으로 붕괴시키는 '역전위 유령 마나'로 변환돼. 그 유령 마나가 주변의 모든 것을 녹여버릴 거야. 아주 고통스럽고 예쁘게 말이지!

시간이 없었다. 의회의 감시망이 좁혀오고 있고, 채무 변제 기한은 반나절도 남지 않았다. 강동구의 제어부 던전 코어를 파괴하여 에너지를 반환하는 것만이 유일한 생존 공식이었다.

바로 그 순간.

쿠구구구구—!

대성당 전체가 거대한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맹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석조 천장에서 굵은 흙먼지와 돌가루가 비 오듯 쏟아졌고, 바닥에 새겨진 마법 마이크로 수식들이 붉은색으로 오염되며 차례차례 깨져 나갔다.

"이건... 무슨 파동이지?"

한태령이 급히 방패를 전개하며 도진과 설아의 앞을 가로막았다.

도진은 고대 분석 렌즈의 배율을 극대화하여 성당 밖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대성당의 깨진 창문 너머로 보이는 서울 강동구의 하늘이, 핏빛보다 붉은색 격자무늬 장벽으로 완전히 뒤덮이고 있었다.

하늘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붉은 선들은 마치 세상을 가두는 거대한 철창 같았다.

[시스템 광역 알림: 의회 의장 '기선우'에 의해 '앱솔루트 포맷 차폐 선(Absolute Format Barrier)'의 수동 가인격이 발효되었습니다.] [해당 구역의 모든 물리적 탈출 경로가 영구 차단됩니다.] [포맷 대기 시간 카운트다운 시작: 11시간 50분.]

"기선우..."

도진의 이빨 사이로 차가운 음성이 새어 나왔다.

그것은 단순한 격리 장벽이 아니었다. 강동구 하위 구역에 거주하는 낙오자 4만 명을 이 구역에 완전히 가두고, 우주 시스템의 강제 포맷 권한을 이용해 통째로 소멸시키기 위한 죽음의 감옥이었다.

기선우는 도진의 연산과 한태령의 반란 조짐을 눈치채고, 예정보다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붉게 빛나는 하늘의 포맷 차폐 선이 기괴한 공진음을 내며 강동구 전체의 산소를 희박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대기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도진은 주머니 속의 고대 나침반을 꽉 쥐었다. 바늘은 미친 듯이 회전하며 피비린내 나는 파멸의 궤적을 가리키고 있었다.

과연 이 11시간의 데드라인 속에서, 기선우가 쳐놓은 완벽한 죽음의 장막을 찢고 세이프존을 건설할 수 있을 것인가. 도진의 주위에 붉은 포맷의 빛이 서서히 내리앉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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