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붉은색 광자가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를 투과해 들어오는 순간, 먼지 입자들이 핏빛으로 물들며 불타올랐다. 하늘을 가로지르는 격자무늬 장벽은 강동구 전체의 대기를 압착하고 있었다. 기압 급변으로 인해 고막이 찢어질 듯한 이명이 밀려왔다. 한태령이 거대한 방패를 바닥에 내리찍자, 진동파가 퍼지며 낙하하던 석조 파편들이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기선우, 이 미친놈이 결국 일을 저지르는군."

한태령의 턱근육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방패를 쥔 그의 가죽 장갑 위로 굵은 힘줄이 솟아올랐다.

도진은 고대 분석 렌즈의 초점을 우상단 45도 방향으로 고정했다. 붉은 빛줄기가 대기를 가르는 경계선마다 수식의 파형들이 난잡하게 얽혀 있었다. 단순한 물리 장벽이 아니었다. 공간의 엔트로피를 극대화해 내부의 물질을 강제로 동결하고, 종국에는 연산 단위에서 지워버리는 고차원 포맷 시퀀스였다.

[시스템 경고: '앱솔루트 포맷 차폐 선'의 동기화율 12.04% 경과.] [차폐 구역 내 산소 농도 매초 0.02%씩 감소 중.] [포맷 만료까지 남은 시간: 11시간 48분 12초.]

시간이 실시간으로 깎여 나가고 있었다. 도진의 시야 한구석에 붉은색으로 깜빡이는 채무 수치가 보였다. 87.4%. 상한선인 90%까지 남은 여유는 단 2.6%뿐이었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인과율 채무를 더 짊어졌다간, 주변의 모든 물질을 분자 수준으로 분해해 버리는 '역전위 유령 마나'가 폭발하여 자신을 포함한 강동구 전체를 삼켜버릴 터였다.

"도진 씨, 이 장벽... 안에서 깰 방법은 없는 거야?"

백설아가 도진의 옷소매를 움켜쥐며 물었다. 그녀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생존을 갈구하는 맹수처럼 번뜩였다. 나노 바이오 활성 겔로 치료된 그녀의 다리 근육이 기민하게 긴장하고 있었다.

"물리적 타격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도진이 주머니에서 놋쇠 빛깔의 묵직한 물건을 꺼냈다. 표면이 군데군데 이 나가고 바늘이 부러진, 고대 기하학 나침반이었다. 2화에서 던전 쓰레기 더미 속에서 수집했던 이 고대 유물은 단순한 고철이 아니었다. 고차원 시스템이 인과율 구조를 비틀어 놓은 왜곡 공간의 좌표를 역추적하는 유일한 물리적 연산기였다.

도진이 나침반의 깨진 유리 덮개를 엄지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이 장벽의 근본은 우주 시스템의 수확 알고리즘입니다. 기선우의 블랙 연산장치가 발신하는 특정 공진 주파수가 이 장벽을 유지하는 닻 역할을 하고 있죠. 장벽을 깨부수는 게 아니라, 우리 영토의 위상을 격리해 시스템의 감시망에서 이탈시켜야 합니다."

"이탈시킨다고? 이 거대한 구역을 어떻게?"

한태령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벽을 세웁니다. 고차원 수확 알고리즘이 침범하지 못하는 절대적 보존 영역, '엔트로피 감쇄 벽'을 시공해야 합니다."

도진은 머릿속으로 즉각 계산을 시작했다. 상점 인터페이스를 열자, 반투명한 푸른색 홀로그램 창이 그의 망막 위에 투사되었다.

[독점 상점 라이선스 - 개념 장비 탭] - 아이템명: 엔트로피 감쇄 벽 (설계도 및 핵심 제어 소자) - 요구 칼로리: 1,500 kcal (현재 보유 칼로리 연동 앵커 가치 환산 적용 완료) - 인과율 채무 부하율: +2.1% - 대여 조건: 지구 물질계의 강철 프레임 및 구조재 80톤 확보 시 활성화 가능.

[경고: 구매 시 인과율 채무가 89.5%에 도달합니다. 채무 임계값(90%) 돌파 시 '역전위 유령 마나'의 강제 변환이 개시됩니다.]

눈앞에서 조롱하듯 붉은 경고등이 점멸했다. 딜러 엘라의 부드러우면서도 냉소적인 목소리가 도진의 고막을 간지럽혔다.

—어머, 도진아. 진짜 한 걸음만 더 내딛으면 낭떠러지네? 그 감쇄 벽이라는 장벽을 세우려면 네 목줄을 완전히 쥐어짜야 할 텐데. 기선우의 블랙 연산장치 주파수(공진 대역 442Hz)를 7화에서 분석해 뒀다고 해도, 장벽 뼈대 없이는 그냥 빛 좋은 개살구잖아?

엘라의 말은 사실이었다. 개념 설계도만으로는 장벽을 시공할 수 없다. 물리적인 지지대와 전도체가 될 고강도의 금속 프레임이 대량으로 필요했다.

"한태령 씨."

도진이 고개를 돌려 한태령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정서적 효율 증후군은 한태령을 '도덕적 영웅'이 아닌, '고강도 강철 자재 100톤을 즉각 조달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물류 자산'으로 분류하고 있었다.

"당신이 이끄는 방패 기사단의 요새 기지, 그리고 오더스 길드의 창고에 보관된 강철 프레임 장벽 자재가 얼마나 있습니까?"

"강철 장벽 자재라면... 강동구 방어선 구축용으로 비축해 둔 오더스 특제 합금 프레임이 약 90톤가량 있네. 하지만 그건 의회의 허가 없이 움직일 수 없는 군수 물자다. 지금 그걸 반출하면 반역으로—"

"이미 기선우가 당신들을 포맷 대상으로 지정했습니다."

도진이 한태령의 말을 차갑게 자르며 나침반을 내밀었다. 나침반의 부러진 바늘이 붉은 대기를 가리키며 격렬하게 진동했다. 나침반 내부의 톱니바퀴들이 맞물리며 미세한 인과율 왜곡 수치를 숫자로 뱉어냈다.

[공간 비틀림 지수: 8.99 (소멸 한계점 10.0)]

"기선우의 블랙 연산장치는 이미 이 구역 전체의 시공간을 포맷 좌표로 고정했습니다. 반역을 걱정할 시간이 아닙니다. 11시간 뒤면 그 군수 물자들은 먼지도 남지 않고 우주 시스템의 원소 데이터로 회수됩니다. 무상으로 대여해 주십시오. 즉시 강동구 경계선으로 수송해야 합니다."

한태령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의 도덕적 신념과 기사단원들의 생존, 그리고 도진이 제시하는 냉혹하리만치 정확한 수치가 그의 뇌리에서 충돌했다. 그러나 이내 한태령은 주먹을 쥐었다. 그의 눈에 단호한 결의가 깃들었다.

"좋다. 내가 책임을 지지. 기사단의 모든 수송 차량을 동원하겠다."

"설아 씨는 구조된 주민들을 소집하십시오. 장벽 시공을 위한 단순 노동 인력이 최소 200명 필요합니다. 기하학적 정밀 작업은 제가 제어하지만, 프레임을 배치하고 고정하는 물리적 노동력은 그들의 몫입니다. 생존하고 싶다면 스스로의 노동 가치를 증명하라고 전하십시오."

도진의 목소리에는 단 한 줌의 감정도 섞여 있지 않았다. 설아는 그런 도진의 기계적인 지시를 들으며 몸서리를 쳤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도진이 자신들을 버리지 않고 살려내기 위해 가장 효율적인 공식을 작동시키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이해했다.

"알았어. 징징대는 녀석들 멱살이라도 잡고 끌고 올 테니까, 넌 네 일이나 제대로 해."

설아가 대성당 밖으로 거침없이 뛰어 나갔다.

***

강동구 하위 구역과 상위 구역을 가르는 물리적 경계선.

바람이 불 때마다 붉은색 격자 장벽에서 뿜어져 나오는 전자기적 노이즈가 고막을 긁어댔다. 수십 대의 오더스 길드 수송 차량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들이닥쳤다. 차량 뒷문이 열리자, 육중하고 시커먼 오더스 합금 프레임들이 굉음과 함께 바닥에 쏟아졌다.

"서둘러라! 기하학 나침반이 가리키는 위상 분기점에 정확히 정렬해야 합니다!"

도진은 주머니 속에서 끊임없이 진동하는 부러진 고대 기하학 나침반을 한 손에 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독점 상점의 구매 버튼을 눌렀다.

[시스템 메시지: '엔트로피 감쇄 벽'의 설계 부품 및 초고온 정밀 융합 용접 소자가 인벤토리에 지급되었습니다.] [인과율 채무 변동: 87.4% -> 89.5%] [위험: 채무 임계 한계치까지 단 0.5% 남았습니다. 아주 미세한 마나 폭주로도 '역전위 유령 마나'가 개방되어 시공간 붕괴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도진의 목덜미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의 심장 박동수가 분당 140회까지 치솟았다. 전신에서 마나가 역류하는 듯한 찌릿한 고통이 느껴졌다. 3화에서 엘라가 경고했던 그 끔찍한 분해 유령 마나가 혈관 속에서 깨어나기 위해 꿈틀거리는 기분이었다.

"도진 씨! 프레임 배치는 끝났어! 다음은?"

설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뒤편에는 공포에 질린 채 땀을 뻘뻘 흘리는 강동구 주민 백여 명이 서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버린 앱솔루트 오더의 붉은 장벽을 보며 절망하고 있었지만, 도진이 가져온 기묘한 장비들과 한태령의 지휘를 보며 실날같은 희망의 끈을 부여잡고 있었다.

"제가 지정하는 접합부에 이 특수 융합 소자를 부착하십시오. 단 1밀리미터의 오차도 허용되지 않습니다. 오차가 발생하면 장벽의 위상이 어긋나 폭발합니다."

도진이 상점에서 인출한 무채색의 금속 구체들을 주민들에게 배포했다. 주민들의 손이 두려움으로 부들부들 떨렸다.

"못 하겠어... 이거 터지면 우리 다 죽는 거잖아!"

한 중년 남성이 금속 구체를 떨어뜨리려 하자, 설아가 그의 손을 억세게 움켜쥐었다. 그녀의 거친 손아귀 힘에 남성이 비명을 질렀다.

"죽기 싫으면 꽉 잡아. 저기 있는 저 남자는 한 번도 틀린 계산을 한 적이 없으니까. 죽고 싶으면 지금 저 장벽 밖으로 걸어 나가든가!"

설아의 야수 같은 안광에 주민들은 침을 삼키며 다시 구체를 쥐었다. 그들은 서로의 어깨를 짚고, 식량 큐브를 나누어 씹으며 서로를 격려하기 시작했다. 의회가 포기한 도태 지대, 절망만이 가득했던 강동구의 하위 구역 주민들의 눈빛에 생존을 향한 지독한 단합력이 불꽃처럼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도진은 그 모습을 보며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인간들의 감정적 동요는 변수지만, 생존 본능이 만드는 집중력은 연산 속도를 가속화하는 훌륭한 촉매제다.'

도진은 고대 기하학 나침반을 공중에 던졌다. 부러진 나침반 바늘이 공중에서 멈춰 서더니, 특정 허공을 향해 보이지 않는 인과율의 실선을 쏘아 보냈다.

"지금입니다. 전원 융합 소자 가동!"

도진의 명령과 동시에 주민들이 합금 프레임의 접합부에 구체를 밀어 넣었다.

치이이이익—!

눈이 멀 것 같은 초고온의 푸른 불꽃이 뿜어져 나오며 오더스 합금 프레임과 상점의 개념 부품들이 분자 수준에서 융합되기 시작했다. 도진은 고대 분석 렌즈를 통해 실시간으로 변환되는 마나 수치를 계측했다.

[엔트로피 감쇄 벽 구조적 동기화율: 45%... 70%... 95%...]

융합된 장벽의 표면에서 무채색의 기묘한 광선이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빛을 흡수하는 차가운 무채색의 장막이었다.

웅웅웅웅—!

장벽이 완성되자마자, 강동구 하늘을 뒤덮고 있던 붉은 격자무늬 장벽의 일부가 무채색 장벽과 충돌하며 기괴한 비틀림 현상을 일으켰다. 붉은 빛이 무채색의 장막 안으로 물리적으로 빨려 들어가며 소멸하기 시작한 것이다.

[시스템 알림: 최초의 '엔트로피 감쇄 벽' 가동 성공.] [구축 영역: 강동구 제3방어선 반경 500m 확보.] [상위 우주 수확 성간 드론의 광역 감시 연산에 오차율 42% 강제 주입 성공.] [해당 구역의 고차원 포맷 시퀀스가 일시적으로 혼선 및 정지 상태로 전환됩니다.]

"성공... 인가?"

한태령이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붉게 타오르던 하늘의 격자선 중, 감쇄 벽이 들어선 구역만큼은 완벽하게 푸른 원래의 하늘빛을 되찾고 있었다. 산소를 쥐어짜던 기압의 압박감도 그 구역 내부에서는 완전히 사라졌다.

"와아아아아!"

주민들이 서로를 껴안으며 함성을 질렀다. 눈물을 흘리는 이도 있었고, 바닥에 주저앉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이도 있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낸 완벽한 자생 기지의 시공. 의회의 포맷 선언 속에서 완벽한 세이프존의 뼈대가 세상에 그 실체를 드러낸 순간이었다.

그러나 도진의 얼굴은 전혀 펴지지 않았다.

"아직 기뻐하기엔 이릅니다."

도진이 고대 분석 렌즈의 배율을 극대화해 지평선 끝을 바라보았다. 그의 렌즈에 포착된 것은 단순한 먼지구름이 아니었다.

두두두두두—!

지평선 너머에서 대지를 뒤흔드는 육중한 기계음과 함께, 검은색 철갑으로 무장한 장갑 차량들이 거대한 대열을 이루어 몰려오고 있었다. 차량들의 전면에는 앱솔루트 오더의 선명한 은색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대열의 중심에는, 포신 주위에 기하학적인 마법 수식들이 푸르게 공진하고 있는 거대한 공성 장치가 정렬해 있었다.

"저건... 의회 직속의 최고 파괴 정예 부대..."

한태령의 목소리가 급격히 가라앉았다.

"집행 마도병단(Execution Mage Corps)입니다."

도진이 무기질적인 목소리로 덧붙였다.

집행 마도병단의 최전선에 선 공성 마도포들의 포구가 서서히 들어 올려지며, 갓 구축된 엔트로피 감쇄 벽의 중심부를 정조준하기 시작했다. 푸른색 마도 에너지가 포구 끝에서 파지직 소리를 내며 응축되었다. 그들의 목표는 명확했다. 기선우가 보낸 사신들이, 세이프존의 싹을 완전히 짓밟기 위해 포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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